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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앗수르의 패망

 

기억절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서론

이번 교과는 그 어떤 예화를 들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다이나믹한 앗수르와 유다의 전투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영적인 쟁투 역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세계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적인 전투, 그 배후에 사탄의 음모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그리고 인간적인 간교한 계략과 그것을 이겨내는 신앙의 힘을 우리는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앗수르 왕 산헤립을 물리쳤던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림과도 밀접한 연관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교과를 공부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선악간의 쟁투 역시 주님의 재림과 밀접한 연관이 되어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될지 함께 기도하며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요일 - 믿음에 따른 방책들

불충실한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가야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르게 주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과 상관 없이 시대적 상황은 매우 위태하고 어려웠습니다.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동맹을 막기 위해 잠시 끌어들였던 앗수르 세력이 이제는 오히려 남방 유다를 보호금이라는 명목 아래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 2세가 전장에서 사망하는 틈을 타서 주변 약속국들을 끌어 모아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으나 산헤립이라고 하는 강력한 다음 왕이 등장하면서 그 꿈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히스기야는 반란을 도모한 주동자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히스가야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36:1 히스기야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자신의 왕권 뿐만 아니라 국운이 달려 있는 이 상황, 지금의 백성들을 넘어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희망 마져 꺾어져 버릴 것 만 같은 위기의 상황, 이런 사면초가에 놓인 히스기야가 선택한 방책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역대하 32장은 말합니다. 그는 성벽을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하며, 예루살렘을 위한 안전한 식수 공급 시설을 보강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실로암 연못이 바로 이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샘에서부터 바위를 뚫어서 수로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성 안으로 물이 흘러오게 하여 만들어진 인공 연못입니다. 이를 통해 장기간 성에 갇히는 전투를 할 때에라도 식수공급을 통해 백성들이 연명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가야의 방책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주제성경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대하 32:7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하며 담대히 하고 ...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

 

히스가야는 자신과 백성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책들을 최선을 다해 준비한 후에 군대 장관들과 백성들을 성문 광장에 모이게 하고 이 모든 방책들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한다! 그분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히스기야가 선택한 것은 인간의 어떤 방책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력한 믿음을 기반으로 자신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방책들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과의 제목이 믿음에 따른 방책들인 것입니다.

 

교과에서는 기도가 의무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도 없이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하는 것 역시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이지요. 히스가야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지혜를 힘입어 백성들과 함께 감당해야 할 방책들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움 앞에 서게 될 때에 두 가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찾기 보다는 인간된 방법에 얽매여 허겁지겁 당황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실 것이니 그냥 아무것도 않고 기다리면 된다, 수수방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과는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력한 믿음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책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에 따른 방책들인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는 곧 믿음과 행함이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입니다.

 

월요일 선동

믿고 기도하며 행할 때에 단번에 모든 일들이 해결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결코 닥쳐오는 시험들이 그리 수월하게 해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의 방책들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승승장구하며 남하하는 산헤립은 예루살렘 문턱 앞까지 공격해 옵니다. 라기스라고 하는 성을 포위하고 공성퇴라고 하는 무기를 동원해서 성을 부수고 들어가서는 무참하게 학살하는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잔인하고 철두철미한 앗수르 왕 산헤립은 단순히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재물과 권력에 매우 탐욕적인 자였습니다. 이왕이면 큰 손실 없이 예루살렘을 거저먹고 싶은 욕심을 가진 자였지요. 그래서 그는 랍사게라고 하는 언변이 뛰어난 협상가를 먼저 예루살렘으로 보냅니다. 그는 달변가였으며 특히 히브리 방언에 뛰어난 자였습니다. 보통 협상을 하러 온 사신은 왕을 만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일반인데 랍사게는 전혀 다른 전략을 사용합니다. 바로 백성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며 민심을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변론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애굽이 망해가고 있기 때문에 의지할 우방국이 없다는 국제적 정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히스가야가 우상타파를 명목으로 지방에 산재해 있던 여호와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훼파한 사실 때문에 여호와께서 노하셨으므로 그들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종교적 상황까지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매우 현실적인 문제, 그들의 국내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싸우라고 말을 2천 필을 준다 한들 그것을 감당할 병사조차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반면에 적국인 앗수르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과 동맹국 수리아를 통재로 집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다의 턱밑에까지 당도한 것이지요. 히스기야가 산헤립을 이길 방법은 이 땅에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월요일 교과를 통해 우리가 믿음위에 서려고 할 때 사탄 마귀가 얼마나 악랄하고 집요하고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노력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에는 방법이 없어 보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 땅의 방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지요. 영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강력한 세력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를 화요일 교과를 통해 우리는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화요일 흔들렸지만 외면당하지 않음

랍사게의 영리한 웅변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히스가야와 그의 신하들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요즘 흔히들 팩폭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는데요,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자체로 큰 충격을 받게 한다는 요즘 젊은이들의 줄임말 중 하나입니다. 랍사게의 팩폭에 히스기야는 맥이 풀리게 됩니다. 교과에서는 뿌리까지 흔들린 히스기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또 다시 한 번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에 힘겨워 옷을 찢고 베를 입고 통탄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성전으로 올라가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토로했습니다.

 

37:14, 15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리고 아버지가 배척했던 주의 종 이사야를 찾아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산헤립의 배후, 사탄 마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이 주님을 향한 믿음임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랍사게를 통해 집요하게 그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현실 앞에서 인간된 모습을 보이며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가장 강력한 방어책인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보입니다.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37:20)

 

화요일 교과를 통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주어진 현실에 답답해하고 한숨 지으며 때로는 고개를 떨구고 낙심하게 됩니다. 옷을 찢고 베를 입으며 탄식하는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흔들림이 우리를 주님의 능력에서 끊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일들이 물론 혈과 육의 문제로 얽혀 있는 것들이긴 하나, 그 싸움은 단순한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당연히 해결 할 수 없는 영적 문제들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연약함과 현실의 열악함을 주님 앞에 그대로 들고 나가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방어수단이요 구원의 방편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천하만국에 주님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입니다.

 

수요일 남은 이야기

아이러니 하게도 세상의 역사에는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 유다의 46개 성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유다 왕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처럼 그의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가두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후에 산헤립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그 현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산헤립의 왕궁 벽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라기스 전투의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그가 결코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믿음으로 나오는 연약한 히스기야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화살 하나도 예루살렘 성을 향해 쏘지 못할 것이요 라기스를 무너트렸던 무시무시한 공성퇴도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신속히 이루셨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능멸하며 그분의 능력을 조롱했던 산헤립의 말로가 비참한 암살로 마무리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헤립 궁의 벽화에 희생 제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예루살렘의 운명은 히스가야의 믿음의 선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단순히 그 당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혈통을 지켜내는 장래를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재림의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역사에 드러날 만한 존재들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장차오실 평강의 왕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장래를 위한 사명인 것입니다.

 

목요일 질병 그리고 번영

이사야 38-39장은 또다른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불과 얼마전 산헤립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맛본 히스기야는 개인적인 병마와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38: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옳은 선택을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주님께서 제시하신 징조를 거절함으로 앗수르에게 괴롭힘을 당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징조를 구하므로 병마에서 구원함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강대국 앗수르와의 외적 전투에서 보였던 담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병마와 싸워야 하는 내적전투 앞에서 힘을 잃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앗수르 전투를 통해 만천하에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 원했던 그의 충심이 이제는 교만하여져서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죽을 병에서 놓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서 찾아온 사신들에게 자신의 자랑만을 늘어놓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강대국 앗수르로부터 히스기야를 보호하실 때에도, 또한 개인의 병마로부터 히스기야를 치유하실 때에도 동일한 하늘의 능력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단체를 위한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시종일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큰 일 앞에서는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나 개인적이고 작은 일에는 안타깝게도 그 믿음의 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성 여리고를 이겼던 이스라엘이 개인의 탐욕으로 작은 성 아이에게 패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교과를 마무리하면서 앗수르의 패망이라는 제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의 앗수르는 과연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앗수르와 산헤립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우위에 놓고 세상적 조건들로 교만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기야의 말로는 산헤립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전적으로 주님을 의짐하며 메어 달려다가도 그 일들이 해결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나의 어떠함으로 일이 해결된양 으시댈 때가 있는 것이지요. 이번 교과의 교훈은 하나입니다. 앗수르는 결국 패망합니다. 주님 없는 인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이 패망의 길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크든 작든 주님만 의지하며 승리의 삶을 사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요약

히스기야는 믿음을 기초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탄 마귀의 계략이 매우 강력하므로 때로는 흔들리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세상 역사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히스기야를 구원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높이 알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믿음을 보였던 히스기야도 인생 말로에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지 교훈하여 주었습니다. 한 번 정한 우리의 믿음이 주님오시는 그 날까지 변하지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의 패망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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