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n라디오교과 2021년 1기 제 10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심(원고는 첨부파일과 본문에 올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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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기 제 10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심
기억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서론>
저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심’ 이라는 제목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 분께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당하신 내용들을 교과에서 살펴볼 수 있다. 도대체 그분은 왜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들을 행하시고 당하셨는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지를 이사야의 눈을 통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일요일 : 시험하는 진리>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교과의 저자는 이사야를 화가로 비유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아들, 여호와의 종에 대한 정보전달만을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별을 단계적으로 알려주고 설득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내용을 기록했는데 마치 화가가 그림을 차례 차례 그리는 것처럼 기록했다고 표현한다.
오늘 살펴볼 이사야의 그림은 50장부터인데, 기억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때리고, 맞고, 수염을 뽑히는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그들을 위해 오셨는데 그들로부터 모욕과 멸시를 받으신다. 구원하러 오셨는데 6절을 보면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는 모습이 나온다. 도와주러 오셨는데, 구원하러 오셨는데 오히려 수모와 멸시를 받으신 것이다.
6절의 ‘수염을 뽑는 자들’이라고 기록돼있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문화에서 굉장히 모욕적인 처사였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지금도 중동 지방이나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위엄을 나타내는 요소중의 하나이다. 현대 사회에서나 서구 문화권에서도 이런 명예를 실추시키는 학대는 나쁘게 인식됐지만 고대 근동 지방에서 명예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생사의 문제였다. 수염을 잘리느니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수염이 중요했었는데, 이런 수염을 뽑거나 자름으로 누군가를 모욕했다면 그 사람은 보복을 반드시 대비해야 했다. 그 희생자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이, 동족들이 함께 보복을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있다. 사무엘하 10장의 다윗의 신하들의 이야기이다. 다윗은 암몬 왕 나하스가 죽자 그 아들인 하눈에게 신하들을 보내 조문을 하도록 했다. 다윗이 이전에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 그에게 친절을 베푼 나하스 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아들인 하눈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사절단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하눈의 방백들이 다윗의 사절단을 보고 하눈 왕에게 이들이 온 것은 위로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정탐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눈 왕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윗의 사신들을 정탐꾼으로 간주하여 옷을 볼기까지 자르고 수염의 절반을 잘라 돌려보낸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신하들로 하여금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오라는 명을 내리고 복수에 들어간다. 암몬 자손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는데 암몬 자손은 전쟁 준비를 위해 아람 사람들까지 불러서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보낸 요압이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수염을 자른다는 것. 수염을 뽑는 것은 굉장한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모욕을 누가 당하신 것이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당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 우주적인 사건이 된 이유는 바로 그 희생자가 왕의 왕이신 분의 특사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위로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오히려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보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시는 사랑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보복할 수 있는 힘이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고 말한다.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마음을 먹고 다가가다가도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이 영 고마워하지 않거나 달갑지 않아 보이면 그런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달가워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모욕을 준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배로 화가 날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수치와 모욕을 견디시고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품에 안으셨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닮아가야 할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갚아주는 것. 그럴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월요일 : 고난받는 종의 시>
이사야 52:13~53:12은 ‘고난받는 종의 시’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이 시는 ‘구약의 복음서’를 기록한 선지자라는 이사야의 명성을 확증한다. ‘고난받는 종의 시’라고 제목이 붙으니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쉽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고난을 받으실 것인지를 적어놓은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고난받는 종의 시’가 뜬금없이 나온 것은 아니다. 이사야는 초반부에서부터 메시아에 대한 주제를 꾸준히 단계적으로 제시하면서 차근차근 독자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그림을 완성시켰다. 교과책 138p에 잘 설명된 것처럼 7장에서는 그분의 수태와 탄생, 9장에서는 다윗 계보의 왕인 그분의 신분을 소개한다. 11장에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그분의 사역, 42장에서는 불의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그분의 조용한 사역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49장에서는 메시아가 높임을 받으시기 전에 겪을 비극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제 ‘고난받는 종의 시’를 통해 얼마나 고난을 받으실 것인가. 그 비극의 깊이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사야 52:13~53:12을 읽어보면 메시아가 고난당하는 모습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묘사해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찔리고 채찍을 맞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는 표현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고난을 받으시는 분께서 사실은 누구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으시는가? 우리 때문에 받으신다. 4~6절을 살펴보면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기록한다.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가 받을 형벌을 짊어 지셨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분명하게 기록한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기록하는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모양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 52,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시’와 비슷한 내용 아닌가.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빌립보서 2장 9~11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높이셨다. 죄인을 위해, 사랑하는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내려가셔서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인으로 하여금 주로 인정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따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형상을 취하사 받지 않아도 될 깊은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아직 빛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몸이 아프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가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혹 그들이 우리를 모욕하고 천대하고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그 길을 먼저 걸어가셨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화요일 : 누가 믿었느냐?> ( 믿음(물건)이 있어야 그 능력이 나의 것이 되는 예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우리는 계속해서 고난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록한 이사야의 글들을 살펴보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채찍에 맞고 가시관도 쓰셨고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몸이 많이 상하셨는데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상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지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는가? 인간을 위해서. 죄지은 인간을 위해 이런 고통을 당하셨다. 한 마디로 무죄한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 내용이 제시되는 가운데 53:1에는 이런 두 질문이 던져진다.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질문들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엄청난 일을 믿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믿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 가운데는 질문 뿐만 아니라 호소 또한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질문들은 여호와의 팔이 우리가 전한 것을 믿은 자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마디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전한 것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다. 이사야 53:6 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키셨다. 다 책임져 주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죄 있는 우리가 이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는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모두 담당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이자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의 능력을 무엇을 통해 느끼고 얻을 수 있냐면 바로 믿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원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밝히 비추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요일 :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은 바로 우리>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수요일 소지는 사실 제목이 다 설명해 주고 있다.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은 바로 우리다. 우리가 여태 살펴본 주님의 고난들은 다 누구로 인한 고난이었냐면 바로 구제할 수 없는 우리로 인한 고난이었다. 연약한 순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보이는 망가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 뭔가 이유가 있겠지. 저런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나님께 고난을 당하네’라고 생각하였는데 알고보니 그가 고난 당하심은 다 누구때문이었냐면 구제할 수 없는 우리 때문이었다.
‘우리 때문에’ 라는 유명한 찬양이 있다.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 무지한 우리 때문에 / (2절 마지막) 나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누구 때문에 아닌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오르셨다.
원수가 누군가 봤더니 우리가 그 원수였다. 교과책 142p 중단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 종이 짊어진 고난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기가 지은 죄의 결과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어떤 개인만을 위해 그것을 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교과 142p 중단)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셨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이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진리이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분께서, 고난 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분께서 고난 당하시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 그 이유는 바로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이 바루 우리였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인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구제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내 옆에 있는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이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내 생각 속에 정말 망나니 같은. 이 사람은 절대로 구원은커녕 사람되기도 글러먹은 사람이 생각 날지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그 사람도 구제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겠는가? 구제불능인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직 구원을 모르는 또다른 구제불능에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우리모두 받은 사랑을 전하는 주의 귀한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목요일 : 우리를 변화시키는 속건제물>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사 53:10).
그 종의 생명이 ‘속건제물’이라고 이사야는 기록한다. 여기에 나오는 속건제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샴’인데 이 속건제는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나 하나님께 배상이 요구되는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 드려졌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속할 제물이 필요한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하기 위한 충분한 제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53장에서는 계속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도 이런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중 로마서 5:8절의 말씀을 살펴보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변화시키기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144p 교훈에 보면 교과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을 유일한 길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쉽게 착각과 유혹에 빠지곤 한다. 갈 2:16절에 나오는 것처럼 마치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들을 정죄하고 마치 율법을 지키는 나는 의롭고 지키지 못하는 너는 의롭지 못하다 라는 식의 견책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친히 속건 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 요약 >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소망이 되지만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공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그 사랑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해 고난 받으셨다. 그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다. 다른 이유 없이 우릴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받은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다. 그리고 우리 곁에 있는 구원을 모르는 이들도 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임을 기억하자. 우리 모두의 죄를 속하시려 친히 고난받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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