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그분의 경이로운 사역(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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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4분)
기억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연구범위: 마 4:23-25, 8:25-27, 11:2-6, 12:22-23, 3:19-21.
안식일 오후
사복음서를 대충 읽어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기이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그분의 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백기 동안에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엘렌 G. 화잇이 시대의 소망(제7장 ‘유년시대’)에 기록한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성년기, 그 중에서도 특히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기간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던가!
세상에 그와 같은 생애를 산 사람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남을 위해 살았던 그분의 사역은 새로운 날의 시작 곧 하나님의 왕국의 탄생을 증언해 주었다. 산 위에서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장면은 갑자기 바뀌어, 예수께서 부지런히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모습으로 전환된다(마 8-9장 참조). 예수님은 말로써 사역을 대신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보다 행동을 많이 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도래했으며, 예수께서는 그 시작을 주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핵심본문: 마 3:2
학습 목표
깨닫기: 하늘 왕국이 어떻게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체가 될 수 있는지 토의한다.
느끼기: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행하기: 하나님의 왕국의 기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스도
A. 예수께서는 위안의 말씀만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봉사하셨음
B.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많은 사역은 그분께서 왜 지상에 오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으며, 그분께서 인간의 육체적 및 영적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음
C. 예수께서는 인류에 관한 모든 일에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심
II. 메시야
A.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생애를 사셨으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주셨음
B. 침례자 요한과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참된 메시야이심을 처음에는 확실히 몰랐음
C.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이적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보여줌
III. 하나님의 왕국: 지금과 영원히
A.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와 미래의 실체를 보여줌
요점: 예수님의 사역은 그분이 참으로 메시야이셨음을 입증하였다. 그분은 단지 미래의 희망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왕국이 죄와 고통이 없고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하며, 성도에게 현재의 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일요일(4월 27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마 8:25-27)
1. 마태복음 8:1-4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어떤 중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마8:1-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대한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었는데, 그분께서 축복의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고치신 나병환자는 죄의 빠진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였다.
마태의 말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분께서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즉시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달려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처음 만난 사람은,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는 나병환자였다. 예수께서 그 나병환자를 만지시자 나병이 사라졌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케 하심(마 8:23-27)으로 천연계를 주관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28-33절)으로 마귀를 제어하시며, 중풍병자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9:1-9, 20-22)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심(18, 23-25절)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이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생애의 폭풍과 우리 삶의 귀신과 장애를 다스릴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2. 마태복음 8:23-27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8:23-27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답: 제자들이 기이히 여기며 부르짖었듯이 바람과 바다도 창조주 앞에서 순종하였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끝까지 반역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고대 신화에서는 물을 하나님이 정복하시는 원수로 간주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사납고 성난 물결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대되는 세력의 상징이었다”(해설자의 성경 사전, 애빙던 출판사, 1962년, vol R-Z, 809).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반응해야 한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반역하는 당신의 백성에 대해 이사야서 1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그분의 백성만이 반역하였다. 우리는 만물 가운데 예수님께 반역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지 자문해 보자. 바람과 물결도 그분께 순종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죄(罪)의 상징으로 간주된 나병(癩病)
“동방에 알려진 모든 질병 중에 나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조차도 공포로 가득 차게 했다. 유대인들 간에 이 질병은 죄 때문에 받는 심판으로 여겨졌으므로 ‘하나님의 치심’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려졌다. 그 병은 뿌리를 깊이 박고 근절할 수가 없으며 치명적이어서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시대의 소망, 262).
<부가설명> 예수님은 12세 때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율법의 아들이 되는 일을 위하여 성전에 가셨다. 거기서 선생들과 토론을 벌리셨다. 부모는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 생각하고 하룻길을 와서야 소년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흘을 허비한 후에 성전에서 만났다. 소녕 예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성경은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1,52)고 기록하였다. 이 말씀 안에 12세 이후 공중봉사에 임하실 때까지 어떻게 지내셨는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공중봉사에 나갈 때까지 가정에서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면서 지혜와 신체와 영성을 발전시키신 것이다. 이 18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기록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 기록 외에 없기 때문에 많은 위경들이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 가서 불교를 배웠다고 우긴다. 그러나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중봉사를 위한 준비로서 18년을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며 지혜와 키와 영성이 성숙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준비의 기간이 끝나고 공중봉사에 임하실 때에 마태는 그분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왕의 권위와 능력을 우선적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의 통치를 이루실 왕의 권능으로 죄를 처리하시며, 천연계를 주장하시며, 마귀를 정복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회복시키시고,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묘사한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치시자마자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백성까지도 섬기신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겠는가?
월요일(4월 28일) 사람들이 심히 놀람
현대의 번역 성경들 중에 문단별로 제목을 붙여 놓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새 국제역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마태복음 9장에 ‘죽은 소녀와 병든 여인’이라는 소제목을 붙임으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자비와 능력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였다. 이 말은 구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동안 끊임없이 직면하셨던 도전이 그저 눈속임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그런 도전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날, 죽은 소녀는 살아났고 12년 동안 피 흘리던 가련한 여인은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아무 문장도 Tm지 말고, 우리의 구주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경탄을 나타내 보십시오(마 9:27-34, 12:22-23, 14:25-31, 34-36, 15:29-31, 20:29-34, 막 2:1-12, 눅 6:19).
마9:27-34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32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12:22,23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14:25-31, 34-36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15:29-31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20:29-34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답: 우리 주님께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으로 말하게 하시며,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고,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시며 빠져 갈 때 건져 주시고,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며,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는 등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적들을 많이 행하셨다.
이 구절들에 담긴 충만한 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배경을 떠올리며 천천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22-23에는 사람들이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잠시 동안만 눈을 감고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이 불쌍한 영혼의 형편을 상상해 보자.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물어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렸고 트인 혀로 찬양하면서 거룩하신 분 앞을 떠나갔다!
마태복음 15:30-31은 어떤가?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개역 개정판). 마태복음 14:34-36과 누가복음 6:19에서 사람들이 구주를 만지기 위해 밀고 당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거절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심
“이 세상은 거대한 나환자 수용소와 같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사단의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 그분은 당신의 치유의 능력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자들이 그러한 질병을 스스로 끌어들인 것을 아셨으나 그들의 병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온 치유의 능력이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달았으며 많은 사람이 저희 육체적 질병과 함께 영적인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823).
<부가설명> 우리는 예수님의 봉사에 대한 기록들을 읽으면서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과에서 제안한대로 눈을 감고 그때 그곳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나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봉사를 마음을 눈으로 한 번 보라.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것은 실제적 사건이었다. 소설도 아니고 신화도 아니다. 우리 시대에도 소위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봉사는 근본적인 치유의 봉사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내가 네 죄를 사했다.”는 말씀이다. 인간 신유은사 자들은 이 말을 못한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과 오늘날 소위 신유은사 행하는 사람들에게 소위 고침을 받았다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도 역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치료봉사는 속죄해 주시는 봉사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난치병에 걸려 치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죄 사함을 얻는 경험이 되면 참으로 치유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치유이며, 영원한 치유인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에 대해 얼마나 놀랐을지 우리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화요일(4월 29일)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마 4:23-25)
1980년대에 미국의 몇 수사관들이 텔레비전 방송 설교자들에 대해 비밀 수사를 착수했다. 수사관들은 이 설교자들이 방송 중에 사람들에게 개인 기도를 신청하게 하면서 그 프로그램이 계속 방영되도록 ‘소정의 금액’을 동봉하도록 긴급하게 호소하는 것을 주목하고 그 기부금과 기도 요청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조사하고자 했다. 마침내 충격적인 사실이 발견되었다. 방송 설교자의 직원들이 우체국으로 가서 보내온 편지를 모은 다음 그 자리에서 개봉하여 기부금만 꺼내고 기도 요청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실 때 여러 지방에서 온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태는 9장에서 앞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예수님이 방송 사기꾼들과는 얼마나 확연히 다른 동기를 가지고 일하셨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특징을 첨가하였다.
마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1. 마태복음 9:35-3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마9:35,36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답: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셨음을 말한다.
‘연민’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감성의 자리, 즉 ‘마음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헬라어(스플랑크논)에서 왔다. 연민은 단지 지성적인 면만을 가리키는 동정심 그 이상을 의미한다. 연민은 내면 즉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이다. 사람들의 돈을 꺼내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 요청을 우체국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일을 예수님은 상상조차도 하실 수 없으셨다. 사복음서는 거듭거듭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연민의 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20:29-34, 막 10:46-52).
우리의 슬픔을 민망히 여기심
“그분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 슬픈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민망히 여기신다. 우리의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내어 놓으라. 그가 감당하시기에 너무 큰일은 없나니 그분은 세계들을 붙드시고 우주의 모든 사건을 관리하시는 이심이다. 다소라도 우리의 평강에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분이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나 흉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시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분이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그것들을 못본 체 하시거나 거기에 직접으로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정로의 계단, 100).
<부가설명>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동정과 용서의 기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정을 받으려고 스스로를 불쌍한 모습으로 꾸미기도 한다. 그것이 들통 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분노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인간의 심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사망에 매인 지구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자체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사망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모든 고통 질병 위험 환난이 사망의 사환들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의 모든 봉사는 생명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은 봉사한다. 봉사가 기쁨이 된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봉사를 하실 때 모든 질병과 고통과 쓰라림을 다 사라졌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 이름으로 진정한 생명의 봉사를 해야 한다. 신유가 아니다. 방언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그 봉사를 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이 봉사가 타나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가련한 형편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셨다.
수요일(4월 30일) 새 날을 알리는 신호(마 11:2-6)
침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 긴급히 전갈을 보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이 질문은 굉장히 의외의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이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 있게 선포했던 그 사람(요 1:29-36)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왜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마 11:2) 나서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개역 개정판). 요한에게 전하신 암호와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밝아오는 새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며, 참으로 메시야가 왔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여러 선지서들 특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영광스런 예언을 마음에 떠올리셨던 것이다.
1. 이사야 29:18-19, 35:5-6, 61:1-3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요한과 그 외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속히 믿지 못했습니까?
사29:18,19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사35:5,6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을 행하고 계셨다. 침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소식을 듣고서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부가설명> 요한은 유대지방에서 봉사하다가 헤롯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힌 소식을 듣고 유대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감옥에 있는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제자들을 보내어 확인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기봉사, 유다지방 봉사를 하시는 동안에 잡혔고 갇힌 것이다. 유다지방 봉사의 기록은 주로 요한복음에 있는데, 표적이 많지 않다. 요한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예언은 이루어질 것을 순서를 따라 기록해놓은 것이 아니다. 초림 때 하실 일과 재림 때 있을 일들을 혼합해 예언했다. 유대인들은 재림 때 이루어질 일들을 초림 때에 기대했기 때문에 초림 때에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하여 메시야를 맞이 못했다. 그들은 재림 때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그 먼저 있을 십자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태는 사건들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의 성취로 보고 메시야의 시대가 밝아 오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다 넓은 관점 즉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사 53:4 인용).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을 요약하면서 이와 동일한 개념을 피력하였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참조 마 4:23-25).
요한의 놀라운 영적 식별력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요한은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여’(사 61:1-2)라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상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자기가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 당신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지를 보여주셨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20).
교훈: 예수님의 사역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과 일치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당신의 사역을 전하심으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리셨다.
목요일(5월 1일) 최후의 회복에 대한 전조(행 3:19-21)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이며 귀신들렸던 자를 고치신 놀라운 치유의 사건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기는커녕 비난을 퍼부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사건의 의미를 교훈적으로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이 진술이 중요한 까닭은 복음서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모습일 뿐 아니라, 미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참조 마 26:29, 눅 23:42, 요 18:36).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최후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읽으시며 이사야의 핵심적인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짧은 3년 반의 지상 사역 동안 일어날 일 그 이상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이다.
옛날 희년을 상기시켜주는 “주의 은혜의 해”는 메시야의 강림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며, 눌린 자들이 억압에서 벗어남으로 그 기쁨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될 그 최후 성취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최후 회복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막 5:35-42, 눅 7:11-15, 요 11:38-44, 행 3:19-21).
막5:35-42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눅7:11-15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요11:38-44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행 3:19-21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답: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죽음을 영원히 정복하실 최후의 회복의 날을 내다보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죄의 지배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죽음이 없게 될 그 날을 가리켰다. 요한의 계시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살리신 이들은 모두 다시 죽음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최후의 회복,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될 그 날(고전 15:52)을 내다보셨다.
최후의 회복의 날을 예시하심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재림의 때를 내다보신다. 그때 죽은 의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겠고 살아남은 의인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곧 행하시려는 이적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을 대표한 것이다”(시대의 소망, 530).
<부가설명> 예수님의 모든 봉사는 영원한 회복을 이루시는 능력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병을 고치시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신 것, 천연계를 주장하신 모든 것들이 영원한 회복을 이루실 구주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요한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에 표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의인들을 영생의 생명이 현실이 되도록 살릴 것이다. 모든 질병은 완전히 없는 건강으로 살아날 것이다. 또한 천연계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룰 것이며,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처럼 그 회복된 세계에는 물에 빠질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봉사는 미래에 이루어질 신천지의 상태를 맛보게 하는 봉사였다. 그것이 확실한 것처럼 재림으로 회복될 그 나라도 확실한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치유하신 이들과 죽음에서 살리신 이들은 우리가 마침내 맞이할 최후의 회복의 날을 가리키는 하나의 전조였다.
금요일(5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음 진술을 고찰해 보고 이번 주 교과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가? 혹은 같은 관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적(異蹟)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자칫하면 우리는 잘못된 곳에 강조점을 둘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적들에 강조점을 두지 않으셨고, 대부분 군중을 떠나서, 그리고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조용히 그 이적들을 행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한 말을 잘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보다 더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한번은 베드로가 무리에게 이야기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요약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겸손히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서민들과 어울리시고, 그들을 고치시며 그들에게 권면하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행하셨으나 그분과 함께 했던 자들의 평가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21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대한 복음의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마지막에 가까이 이름에 따라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11-612)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 마귀도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이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만 그에게 예배하는 정신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처럼 분명히 초자연적인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행한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 그가 행하는 이적들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인지 인간의 호기심과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적이 아니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주님의 봉사가 영원한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예수의 생명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기억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연구범위: 마 4:23-25, 8:25-27, 11:2-6, 12:22-23, 3:19-21.
안식일 오후
사복음서를 대충 읽어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기이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그분의 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백기 동안에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엘렌 G. 화잇이 시대의 소망(제7장 ‘유년시대’)에 기록한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성년기, 그 중에서도 특히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기간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던가!
세상에 그와 같은 생애를 산 사람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남을 위해 살았던 그분의 사역은 새로운 날의 시작 곧 하나님의 왕국의 탄생을 증언해 주었다. 산 위에서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장면은 갑자기 바뀌어, 예수께서 부지런히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모습으로 전환된다(마 8-9장 참조). 예수님은 말로써 사역을 대신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보다 행동을 많이 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도래했으며, 예수께서는 그 시작을 주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핵심본문: 마 3:2
학습 목표
깨닫기: 하늘 왕국이 어떻게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체가 될 수 있는지 토의한다.
느끼기: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행하기: 하나님의 왕국의 기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긍휼히 여기시는 그리스도
A. 예수께서는 위안의 말씀만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봉사하셨음
B. 5천명을 먹이신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많은 사역은 그분께서 왜 지상에 오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으며, 그분께서 인간의 육체적 및 영적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었음
C. 예수께서는 인류에 관한 모든 일에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심
II. 메시야
A. 예수께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생애를 사셨으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주셨음
B. 침례자 요한과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예수께서 참된 메시야이심을 처음에는 확실히 몰랐음
C.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이적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보여줌
III. 하나님의 왕국: 지금과 영원히
A. 그리스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와 미래의 실체를 보여줌
요점: 예수님의 사역은 그분이 참으로 메시야이셨음을 입증하였다. 그분은 단지 미래의 희망만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왕국이 죄와 고통이 없고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하며, 성도에게 현재의 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일요일(4월 27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마 8:25-27)
1. 마태복음 8:1-4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어떤 중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마8:1-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대한 이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었는데, 그분께서 축복의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고치신 나병환자는 죄의 빠진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였다.
마태의 말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분께서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즉시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달려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처음 만난 사람은,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는 나병환자였다. 예수께서 그 나병환자를 만지시자 나병이 사라졌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케 하심(마 8:23-27)으로 천연계를 주관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28-33절)으로 마귀를 제어하시며, 중풍병자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9:1-9, 20-22)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심(18, 23-25절)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이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생애의 폭풍과 우리 삶의 귀신과 장애를 다스릴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2. 마태복음 8:23-27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8:23-27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답: 제자들이 기이히 여기며 부르짖었듯이 바람과 바다도 창조주 앞에서 순종하였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끝까지 반역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고대 신화에서는 물을 하나님이 정복하시는 원수로 간주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사납고 성난 물결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대되는 세력의 상징이었다”(해설자의 성경 사전, 애빙던 출판사, 1962년, vol R-Z, 809).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반응해야 한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반역하는 당신의 백성에 대해 이사야서 1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그분의 백성만이 반역하였다. 우리는 만물 가운데 예수님께 반역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지 자문해 보자. 바람과 물결도 그분께 순종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죄(罪)의 상징으로 간주된 나병(癩病)
“동방에 알려진 모든 질병 중에 나병은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그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그 병이 희생자에게 끼치는 끔찍스러운 결과 등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조차도 공포로 가득 차게 했다. 유대인들 간에 이 질병은 죄 때문에 받는 심판으로 여겨졌으므로 ‘하나님의 치심’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라고 불려졌다. 그 병은 뿌리를 깊이 박고 근절할 수가 없으며 치명적이어서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시대의 소망, 262).
<부가설명> 예수님은 12세 때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율법의 아들이 되는 일을 위하여 성전에 가셨다. 거기서 선생들과 토론을 벌리셨다. 부모는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 생각하고 하룻길을 와서야 소년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흘을 허비한 후에 성전에서 만났다. 소녕 예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성경은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1,52)고 기록하였다. 이 말씀 안에 12세 이후 공중봉사에 임하실 때까지 어떻게 지내셨는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공중봉사에 나갈 때까지 가정에서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면서 지혜와 신체와 영성을 발전시키신 것이다. 이 18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기록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이 기록 외에 없기 때문에 많은 위경들이 이 기간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 가서 불교를 배웠다고 우긴다. 그러나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중봉사를 위한 준비로서 18년을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며 지혜와 키와 영성이 성숙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준비의 기간이 끝나고 공중봉사에 임하실 때에 마태는 그분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왕의 권위와 능력을 우선적 순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을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의 통치를 이루실 왕의 권능으로 죄를 처리하시며, 천연계를 주장하시며, 마귀를 정복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회복시키시고,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묘사한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치시자마자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백성까지도 섬기신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겠는가?
월요일(4월 28일) 사람들이 심히 놀람
현대의 번역 성경들 중에 문단별로 제목을 붙여 놓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새 국제역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마태복음 9장에 ‘죽은 소녀와 병든 여인’이라는 소제목을 붙임으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자비와 능력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였다. 이 말은 구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동안 끊임없이 직면하셨던 도전이 그저 눈속임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그런 도전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날, 죽은 소녀는 살아났고 12년 동안 피 흘리던 가련한 여인은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아무 문장도 Tm지 말고, 우리의 구주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경탄을 나타내 보십시오(마 9:27-34, 12:22-23, 14:25-31, 34-36, 15:29-31, 20:29-34, 막 2:1-12, 눅 6:19).
마9:27-34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32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12:22,23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14:25-31, 34-36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4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마15:29-31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20:29-34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눅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답: 우리 주님께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으로 말하게 하시며,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고,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시며 빠져 갈 때 건져 주시고, 각종 질병에 걸린 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시며,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는 등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적들을 많이 행하셨다.
이 구절들에 담긴 충만한 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배경을 떠올리며 천천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22-23에는 사람들이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잠시 동안만 눈을 감고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이 불쌍한 영혼의 형편을 상상해 보자.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물어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렸고 트인 혀로 찬양하면서 거룩하신 분 앞을 떠나갔다!
마태복음 15:30-31은 어떤가?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개역 개정판). 마태복음 14:34-36과 누가복음 6:19에서 사람들이 구주를 만지기 위해 밀고 당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거절하지 않으시고 고쳐주심
“이 세상은 거대한 나환자 수용소와 같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사단의 포로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 그분은 당신의 치유의 능력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한 사람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자들이 그러한 질병을 스스로 끌어들인 것을 아셨으나 그들의 병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온 치유의 능력이 이러한 불쌍한 영혼들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달았으며 많은 사람이 저희 육체적 질병과 함께 영적인 질병도 고침을 받았다”(시대의 소망, 823).
<부가설명> 우리는 예수님의 봉사에 대한 기록들을 읽으면서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교과에서 제안한대로 눈을 감고 그때 그곳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나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봉사를 마음을 눈으로 한 번 보라.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것은 실제적 사건이었다. 소설도 아니고 신화도 아니다. 우리 시대에도 소위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봉사는 근본적인 치유의 봉사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내가 네 죄를 사했다.”는 말씀이다. 인간 신유은사 자들은 이 말을 못한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과 오늘날 소위 신유은사 행하는 사람들에게 소위 고침을 받았다는 것의 근본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도 역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치료봉사는 속죄해 주시는 봉사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난치병에 걸려 치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죄 사함을 얻는 경험이 되면 참으로 치유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치유이며, 영원한 치유인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에 대해 얼마나 놀랐을지 우리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화요일(4월 29일)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마 4:23-25)
1980년대에 미국의 몇 수사관들이 텔레비전 방송 설교자들에 대해 비밀 수사를 착수했다. 수사관들은 이 설교자들이 방송 중에 사람들에게 개인 기도를 신청하게 하면서 그 프로그램이 계속 방영되도록 ‘소정의 금액’을 동봉하도록 긴급하게 호소하는 것을 주목하고 그 기부금과 기도 요청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조사하고자 했다. 마침내 충격적인 사실이 발견되었다. 방송 설교자의 직원들이 우체국으로 가서 보내온 편지를 모은 다음 그 자리에서 개봉하여 기부금만 꺼내고 기도 요청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실 때 여러 지방에서 온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태는 9장에서 앞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예수님이 방송 사기꾼들과는 얼마나 확연히 다른 동기를 가지고 일하셨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특징을 첨가하였다.
마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1. 마태복음 9:35-3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마9:35,36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답: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셨음을 말한다.
‘연민’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감성의 자리, 즉 ‘마음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헬라어(스플랑크논)에서 왔다. 연민은 단지 지성적인 면만을 가리키는 동정심 그 이상을 의미한다. 연민은 내면 즉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이다. 사람들의 돈을 꺼내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 요청을 우체국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일을 예수님은 상상조차도 하실 수 없으셨다. 사복음서는 거듭거듭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연민의 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20:29-34, 막 10:46-52).
우리의 슬픔을 민망히 여기심
“그분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 슬픈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민망히 여기신다. 우리의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내어 놓으라. 그가 감당하시기에 너무 큰일은 없나니 그분은 세계들을 붙드시고 우주의 모든 사건을 관리하시는 이심이다. 다소라도 우리의 평강에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분이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나 흉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시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분이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그것들을 못본 체 하시거나 거기에 직접으로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정로의 계단, 100).
<부가설명>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동정과 용서의 기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정을 받으려고 스스로를 불쌍한 모습으로 꾸미기도 한다. 그것이 들통 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분노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인간의 심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사망에 매인 지구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자체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사망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모든 고통 질병 위험 환난이 사망의 사환들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의 모든 봉사는 생명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생명은 봉사한다. 봉사가 기쁨이 된다. 생명이신 예수께서 생명의 봉사를 하실 때 모든 질병과 고통과 쓰라림을 다 사라졌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도 예수 이름으로 진정한 생명의 봉사를 해야 한다. 신유가 아니다. 방언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그 봉사를 해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이 봉사가 타나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가련한 형편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셨다.
수요일(4월 30일) 새 날을 알리는 신호(마 11:2-6)
침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 긴급히 전갈을 보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이 질문은 굉장히 의외의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이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 있게 선포했던 그 사람(요 1:29-36)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왜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마 11:2) 나서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개역 개정판). 요한에게 전하신 암호와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밝아오는 새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며, 참으로 메시야가 왔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여러 선지서들 특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영광스런 예언을 마음에 떠올리셨던 것이다.
1. 이사야 29:18-19, 35:5-6, 61:1-3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요한과 그 외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속히 믿지 못했습니까?
사29:18,19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사35:5,6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을 행하고 계셨다. 침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소식을 듣고서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감지할 수 있었다.
<부가설명> 요한은 유대지방에서 봉사하다가 헤롯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힌 소식을 듣고 유대지방을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감옥에 있는 요한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제자들을 보내어 확인하게 했다고 생각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기봉사, 유다지방 봉사를 하시는 동안에 잡혔고 갇힌 것이다. 유다지방 봉사의 기록은 주로 요한복음에 있는데, 표적이 많지 않다. 요한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예언은 이루어질 것을 순서를 따라 기록해놓은 것이 아니다. 초림 때 하실 일과 재림 때 있을 일들을 혼합해 예언했다. 유대인들은 재림 때 이루어질 일들을 초림 때에 기대했기 때문에 초림 때에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하여 메시야를 맞이 못했다. 그들은 재림 때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그 먼저 있을 십자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태는 사건들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의 성취로 보고 메시야의 시대가 밝아 오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다 넓은 관점 즉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사 53:4 인용).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을 요약하면서 이와 동일한 개념을 피력하였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참조 마 4:23-25).
요한의 놀라운 영적 식별력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요한은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여’(사 61:1-2)라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상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자기가 ‘메시야’이심을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 당신의 나라가 세워질 것인지를 보여주셨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20).
교훈: 예수님의 사역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과 일치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당신의 사역을 전하심으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리셨다.
목요일(5월 1일) 최후의 회복에 대한 전조(행 3:19-21)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이며 귀신들렸던 자를 고치신 놀라운 치유의 사건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기는커녕 비난을 퍼부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사건의 의미를 교훈적으로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이 진술이 중요한 까닭은 복음서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모습일 뿐 아니라, 미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참조 마 26:29, 눅 23:42, 요 18:36).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최후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읽으시며 이사야의 핵심적인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짧은 3년 반의 지상 사역 동안 일어날 일 그 이상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이다.
옛날 희년을 상기시켜주는 “주의 은혜의 해”는 메시야의 강림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며, 눌린 자들이 억압에서 벗어남으로 그 기쁨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될 그 최후 성취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최후 회복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막 5:35-42, 눅 7:11-15, 요 11:38-44, 행 3:19-21).
막5:35-42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눅7:11-15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요11:38-44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행 3:19-21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답: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죽음을 영원히 정복하실 최후의 회복의 날을 내다보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죄의 지배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죽음이 없게 될 그 날을 가리켰다. 요한의 계시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살리신 이들은 모두 다시 죽음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최후의 회복,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될 그 날(고전 15:52)을 내다보셨다.
최후의 회복의 날을 예시하심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재림의 때를 내다보신다. 그때 죽은 의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겠고 살아남은 의인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곧 행하시려는 이적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을 대표한 것이다”(시대의 소망, 530).
<부가설명> 예수님의 모든 봉사는 영원한 회복을 이루시는 능력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병을 고치시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신 것, 천연계를 주장하신 모든 것들이 영원한 회복을 이루실 구주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요한은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에 표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의인들을 영생의 생명이 현실이 되도록 살릴 것이다. 모든 질병은 완전히 없는 건강으로 살아날 것이다. 또한 천연계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룰 것이며,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처럼 그 회복된 세계에는 물에 빠질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봉사는 미래에 이루어질 신천지의 상태를 맛보게 하는 봉사였다. 그것이 확실한 것처럼 재림으로 회복될 그 나라도 확실한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치유하신 이들과 죽음에서 살리신 이들은 우리가 마침내 맞이할 최후의 회복의 날을 가리키는 하나의 전조였다.
금요일(5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음 진술을 고찰해 보고 이번 주 교과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가? 혹은 같은 관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적(異蹟)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자칫하면 우리는 잘못된 곳에 강조점을 둘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적들에 강조점을 두지 않으셨고, 대부분 군중을 떠나서, 그리고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조용히 그 이적들을 행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한 말을 잘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보다 더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한번은 베드로가 무리에게 이야기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요약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겸손히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서민들과 어울리시고, 그들을 고치시며 그들에게 권면하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행하셨으나 그분과 함께 했던 자들의 평가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21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대한 복음의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마지막에 가까이 이름에 따라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11-612)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 마귀도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에 이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며,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다만 그에게 예배하는 정신을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처럼 분명히 초자연적인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행한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 그가 행하는 이적들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인지 인간의 호기심과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분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적이 아니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주님의 봉사가 영원한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예수의 생명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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