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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그분의 신비로운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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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03 09:58 조회수 6,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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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그분의 신비로운 신성

4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분)

도입)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기독론쟁(Christology)의 핵심 주제였다. 성경의 명백한 진술을 이성(理性)을 가진 인간들이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일어난 논쟁이었다. 즉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의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이 있다. 참 하나님이요 동시에 참 사람이란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기독론의 참 주제였다. 인간 이성(理性)의 형식논리(形式論理)로서 극복할 수 없는 주제였기에 에비온파, 도게데파, 아리안파, 아폴리나리안파, 네스토리안파, 유티키안파 등의 이단(異端)이 발생했고, 칼케돈 회의에서 정통교리가 성립된 후에도 현대 신학자들의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론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에 기초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채택된 이성일인인격(二性一人人格)의 교리(敎理)로 정립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본성은 예수님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교회사적인 성찰의 결과인 칼케돈 신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 즉 그의 칭호(稱號), 속성(屬性), 생애(生涯), 사역(使役)에서 그의 신적(神的)인 속성(屬性)을 드러내신다. 이는 성경(聖經)이 증거하고 있다.

기억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연구범위: 사 9:6, 미 5:2, 마 16:13-17, 요 1:1, 14, 18, 8:58, 17:5, 20:28, 고전 1:3, 고후 13:14.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역사적 개관을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성경 자체를 탐구해 보자. 수세기 동안 그렇게도 많은 관심을 끌어 왔던 예수님의 생애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살펴보자.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중요한 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고백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16:13-17, 마 11:25-27). “혈육”(마 16:17), 즉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만세(萬歲)의 지고한 신비를 풀 수 없다.
예수님을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기원(起源)이 마리아의 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것이 된다. 또한 그분이 여러 면에서 우리와 같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나머지 인류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된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분은 선재(先在)하신 분이시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5-16).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17절).

일요일(4월 6일)
그분의 선재성과 그 의미

도입)
기원 1세기에 살았던 유명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때쯤 해서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경이로운 일들을 하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진리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부터 선생님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였다.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군중 가운데 있던 주동 인물의 제의로 그를 십자가에 사형키로 선언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예수는 죽은지 3일 만에 다시 사시고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따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지어진 족속들은 오늘날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다”(유대 고대사 제 2권 , 제 18편 3장. 3p). 나폴레옹 황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다... 예수는 그의 사업을 사랑의 기초 위에 두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무조건 수락되었다. 그는 최고의 행복으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들이는 승리자였다”고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구속사 전체 드라마의 일부이며,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기독론의 구조에 하나의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계사에 때때로 등장하는 위대한 종교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지 않게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선재성은, 그가 하나님이며, 자신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들이나, 어떤 시대나, 어떤 문화적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그분의 선재성은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다음 구절들에서 그 대답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히 1:1-4, 골 1:15-20).
답: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혹은 잉태되었을 때)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달랐다. 그분은 마리아의 태에서 처음 존재하시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이미 계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분의 선재성이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2.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어떤 힌트를 줍니까?
사 9: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 5:2 (비교 마 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 5:2에 나오는 모사아(mosa'ah)라는 단어는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구절의 다른 부분은 장차 다스릴 자의 선재성을 분명히 언급할 뿐 아니라 상고(上古)로부터 존재해온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을 말해 준다(참조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8권, 757)..
이사야 9:6은 세상에 오셨던 이 특별한 분의 영원한 선재성에 대해 가르쳐 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명백히 유일신을 섬기는 백성에게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 아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언급한 사실은 놀라움을 줄 뿐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친숙하게 생각해 오던 관념을 깨뜨리는 거룩한 계시였던 것이다. 이 아들이 아버지요,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말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교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분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란 예수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기 전에 이미 그는 하나님과 같이 기원전부터 함께 있었으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성육신이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뒷받침해 줄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 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고 있으며, 일부에선 잘못 이해하고 곡해하여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신성은 민감하고 어려운 부분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까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또 요한복음 8장 58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치 않으면 그의 신성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2세기 동안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을 강조하거나, 줄기차게 부인해 왔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공격은 기독교의 기반에 대한 공격이다. SDA의 정통 신앙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인 대속(代贖)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있다. 만약 예수님이 일개 인간에 불과하시다면, 그의 죽으심이 결코 세상을 구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류 죄인의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월요일(4월 7일)
신약의 증언

도입)
스코틀랜드의 산악지대 메마른 절벽 사이에 아늑하고 평화로운 하이랜드란 동리가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밭으로 나가 일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어린이들은 근처에서 놀고 갓난아기들은 바구니 속에서 자고 있었다. 순간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을 몇 바퀴 돌다가 밭을 스치면서 잠자는 아기를 발로 채어 하늘 높이 오르더니 가파른 산꼭대기에 않았다. 독수리는 갓난아기의  눈동자를 노려보고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날개를 퍼득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의 생명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바로 그 때 한 용감한 선원이 바위틈을 올라가 보려고 시도했으나 그 절벽은 너무나도 가파르고 위험해서 포기해 버렸다.  다시 한 건장한 등산가가 나타나 바위산을 올라가 보았으나 조금 오른 후 더 이상 위험해서 오를 수 없었다. 그 때 세 번째로 한 가냘픈 농부의 부인이 그 위험한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부인은 사활을 다하여 돌 뿌리를 붙잡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땀을 흘리며 낭떠러지 바위 사이를 조금씩 조금씩 올라갔다. 마을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며 가냘픈 여인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해하였다. 드디어 그 여인은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아기를 품에 안고 천천히 절벽 사이를 내려왔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부르며 그 부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동리의 구경꾼들도, 힘센 선원도, 용감한 등산가도 아기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실패하였으나, 경험 없는 가냘픈 한 여인이 가파르고 위험한 절벽을 목숨을 걸고 오를 수 있었던 힘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높고 깊은 사랑에 대하여 많은 시와 노래가 쓰여 졌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변질된 어머니 사랑을 예언했고 불변한 하나님 사랑을 증거 하였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사 49 : 15).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위대하여 인간의 제한된 이해를 초월한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차별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죄로 빼앗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늘의 천사들이나, 우주의 거민들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모성애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위험하고 가파른 지구에 오셔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그분은 이미 창조 전에 그가 선재해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신약에서 예수님의 선재성을 나타내주는 다른 증거들을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말씀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신원에 대해 자각하고 계셨다는 직접 또는 간접적인 암시를 발견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의 선재성에 대한 간접적 암시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한국 국회에 용무가 있어 서울에 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계속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명백한 진술은 그분의 수난주간에 드리신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셨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 줍니까?
요 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8: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8:58-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7:8, 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이 구절을 포함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은 영원성 혹은 영원한 선재성을 암시하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엄청난 신성모독으로 보고 돌로 치려고 하였다(59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성을 말씀하시면서 영구한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셨다. 그분은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셨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던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시다”(엘렌 G. 화잇, 영문시조, 1900년, 8월 29일자).

교훈: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당신의 선재성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직접 혹은 간접적인 여러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시어 당신이 언제나 선재하셨음을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땅에서 태어날 때 시작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초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3)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치심을 듣고 격분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6:62) 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만일 내가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고 곧장 하늘로 되돌아간다면 어찌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절들이 인자의 선재성을 자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자로 묘사하신 정황을 포착하고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거나 그리스도께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단순히 2천년 전에 지상에서 살았던 한 인물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셨던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주의 위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삼위 중 2위에 속하는 분, 만물 보다 먼저 계셨던 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바로 그분, 끝까지 존재하셔서 최종적인 심판을 내실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 분이 바로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요구할 만큼 정당하신 분이고 우리로 하여금 섬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요일(4월 8일)
명백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

도입)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인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오셨는데 이는 성부가 성자보다 시간적으로 우선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성부가 본질이라는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말씀'으로서 표현하면서 태초부터 만물이 바로 이 말씀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너무 지나친 축약은 말의 한계로 진실을 왜곡시키는 면이 있을까봐 좀 두렵기도 하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비롯된 성자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따라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으로 사람인 분이시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다. 하나의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성령을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호흡으로 말하기도 한다. 성자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비롯된 것이나, 전통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는 성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해되는 반면, 성령은 현재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인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영적인 분으로서 물질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에서 성령을 '~와 같다'라고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아들'이라는 것이지 두 가지가 병립하지 않는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주사위에 비유하기도 한다. 주사위가 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서 1, 2, 3 이렇게 보이는데 모두 주사위인 것처럼 명백한 모순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참된 하나님의 참된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구절들을 접하게 된다. 그 중의 한 예로, 성경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잘 알려진 성경절인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만약 예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독생자(獨生子)로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그분도 누군가가 낳았다는 말인가?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monogenes)라는 하나의 단어인데, 신약에 아홉 번 나오며, 그 중에서 다섯 번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으로 모두 요한의 글에 나온다(요 1:14, 18, 3:16, 18, 요일 4:9). 그런데 이 다섯 번의 언급이 그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려고 애쓴 동일한 기자(記者)인 요한의 글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 분명한 핵심을 말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유대인인 그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간주하는 누군가에게 이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1. 다음 구절들에서 모노게네스(monogenes)가 예수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된 사례들을 살펴보십시오. 헬라어에 익숙지 않다하더라도 이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눅 7:11-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8:41-4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눅 9:3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은 나인 성의 청년을 ‘독자’(그 어머니의 외아들)라고 묘사했다. 여기에 ‘낳았다’라는 개념은 강조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뿐인,’ ‘유일한’의 의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이로의 딸도 ‘외딸’ 즉 모노게네스로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자녀였다. 누가복음 9:38에서도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교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묘사한 것은 그분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확증하려는 요한이 그분을 피조물로 간주했을 리가 없다.

부가적용)
한국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은 아버지가 '유일하게 낳은 아들'이므로 과거의 언젠가 아버지가 물리적으로 아들을 낳은 시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삼위일체가 성립이 되지 않으며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피조물이 된다. 물론 성령님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므로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잠깐 '낳는다'(beget)이라는 단어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어에서 'beget'이라는 단어는 'get'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I got the book." 혹은 "I got the cold."라는 말은 "내가 책상을 손에 넣었다", "감기 들렸다"를 뜻한다. 그런데 누가 무엇을 손에 넣게 되면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get'의 원래 의미는 '소유해서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마1:2) 등에서 모두 'beget'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이 자기 몸으로 직접 임신해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삭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어쩔 수 없이 우리말로는 '낳았다'로 번역한 것이다. 다시 말해 'beget'은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get'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낳는다'(beget)는 결코 사람이 사람을 낳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낳은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beget'에 대해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OED: Applied to the relationship of the Father to the Son in the Trinity; also to the spiritual relationship of God to man in regeneration.
즉 삼위일체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낼 때 'beget'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또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과 다시 태어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날 때도 쓰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켜 '아버지의 독생자' 즉 '유일하게 낳은 아들'이라고 할 때 이것은 곧 아버지와 유일하게 특별한 관계를 맺는 분이라는 뜻임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시편 2편 7절 말씀 즉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I have begotten thee)."라는 말씀을 대할 때에도 아버지께서 어느 날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낳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13장 32-37절에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설명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킨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그분을 부활시킴으로써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서 1장 3,4절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아들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셨으며 인성으로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성령님에 의해 수태되어 마라아의 몸에서 '다윗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요일(4월 9일)
그리스도의 신성

도입)
요한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주제가 무엇보다 우선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종으로 계시하는 것이라 하고 마태는 유대의 왕으로 누가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는 영원하고 이 땅에 오시기 이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시하시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가져오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목적이 그러하므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은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는 14절로부터 말씀이라는 말은 예수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①태초에 ②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다는 것과 ③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선포이다. 사실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 능력, 사랑, 거룩, 정의, 선함 그리고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일신론적적이었던 동 시대의 유대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하나님의 존재는 초월적이고 거룩하고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거하였고 실제로 본 사람도 없었다. 특별한 사람들 즉, 모세나 이사야가 보았던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은 실제 모습이라기보다 그에 대한 하나의 상(像) 또는 반영으로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만으로도 그 모습을 본 자에게는 경외심과 경탄의 마음이 가득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의 모든 저서 또는 전통 가운데에서 살아계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실제 "초상"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숨막힐 것만 같은 광채 가운데 나타난 모습을 예수라고 생각한다. 분명 요한은 구약에 나타난 가장 존귀한 모습의 하나님이 바로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하는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초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은 그를 지극히 크신 분으로 생각하였다. 요한과 같은 사람들 예수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음이 분명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가 하나님이라 믿었는가? 첫째는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고 둘째는 그들이 예수의 생애를 본 결과 다른 설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칭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기자들은 유대인들로서 유일신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칭호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그들의 증언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깊은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마 3: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1: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20: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3: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는 구약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훼’라는 이름을 언급하였다.
원어상으로 요한복음 1:1의 문장 구조는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이 제자는 그분께서 운명하신지 약 65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을 명백하게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다. 사실상 요한복음 1:18의 원어적 의미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20:28은 어떤가? 이 구절은 요즘 사람들이 놀람과 충격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듯이 도마도 자신의 놀라움을 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신약 성경을 현대인의 관습에 맞추어 읽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 거룩한 칭호를 발음하지도 않았었다. 더군다나 도마가 예수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은 “도마가 그분께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놀라움에 대한 감탄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도마의 고백을 만족히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은 인간적인 지혜나 느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었다.

부가적용)
신약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할 때는 언제나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건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으며 일반 인간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몇몇 특징들을 한결 같이 나타내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신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한다. 그리스도란 용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 주, 인자라는 관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신약의 보편적 교리로서 간주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바꾸어 주셨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름을 바꾸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이름을 바꾸어 주셔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원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요 8:58) 만약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역사상 예수보다 불경스럽게 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대의 율법에 따른다면, 예수야말로 십자가 처형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이 교리를 믿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종교도 이와 유사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통의(성경적, 사도적, 역사적, 신조적) 기독교와 자유주의적 기독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으로 보고자 한다. 이 교리는 다른 모든 기독교 교리의 문을 여는 열쇠로 작용한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많은 교리를 믿는 것은, 신학적 탐구로부터의 추론이나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고 교회가 전수한 바와 같이, 그것을 가르치는 분의 신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성육신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죄로 인해 닫혔던 하늘의 문이 아담의 타락 이래 최초로 우리에게 열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이보다 중요한 사건은 없다.

목요일(4월 10일)
더 많은 증거들

도입)
하나님과 동등이라는 뜻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란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란 참 신 최고의 신이라는 뜻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냐 바알이 하나님이냐 시합을 하게 되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여호와란 신이 참신 곧 하나님이냐? 바알이 참신 곧 하나님이냐? 하는 시합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이름은 어떤 신이든지 최고가 되면 붙여지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란 승리의 면류관과 같고 챔피언의 벨트와 같은 것이다. 즉 최고의 영광의 명칭, 곧 참 신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예수께서 참 하나님과 같지 않다면 동등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오직 최고의 명칭 참 신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신약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로 가득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께 적용된 영원성과 창조주 되심, 그분의 죄 용서하시는 능력,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권능과 같은 몇 가지 속성을 다루었다. 추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이 침례식 선언(마 28:19)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불려짐으로써 동등성을 나타낸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와 같이, 인간의 입으로 발해졌다면 분명히 신성모독에 해당되었을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하신 경우도 볼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고전 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후 13: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20: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 2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그리스도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먼지 나는 팔레스틴의 거리를 거니실 때 하신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선언하신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서 ‘하나’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중성명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밀접한 연합을 암시한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의 신성이시며 개체와 위격은 다르시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이 깊은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주제를 탐구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 아는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예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하늘에 머물러 계셨다고 가정해 보라(우리는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다만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동등성을 의미한다.

교훈: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동등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의 모범을 보이시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 본체(本體)란 헬라어는 ‘몰페’로 결코 변화될 수 없는 본질적 형체(essential form) 를 뜻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말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또한 계속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요, 둘째,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꼭 같은 특성과 영광과 권능과 위엄과 권리를 소유하신 분이라는 뜻이며, 셋째,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꼭 같이 선재(先在)하신 분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여기 "취한다"는 말은 헬라어 "하르파그몬”으로 강탈하여 취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육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영광을 붙잡고 놓지 않으시려고 고집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소유하시며 누리실 수 있는 모든 영광을 우리 위해 양보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었다.

금요일(4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19-26).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계보(마 1:16, 18, 눅 3:23, 비교 눅 1:26-35))를 얼마나 솜씨 있게 다루었는지를 볼 때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성경 기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신성에 관해 가장 강하게 피력한 요한복음(요 1:1-3, 14)과 어떠한 상충되는 요소도 남기지 않았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전체 계획에 있어서 동정녀 탄생의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그분의 선재성과 신성의 확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사복음서에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위험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교리로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하는 교리이다. 이 이론은 성경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 당신의 신격(神格), 당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서는 품을 수 없는 견해이다. 그것은 속죄 사업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런 사상은 극히 위험할 뿐 아니라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을 설복시키는 것 역시 어렵다. … 그런 오류를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사명, 그리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대하여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인용된 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아버지와의 동등성에 관한 교리를 고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구원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초래합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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