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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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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3.26 10:50 조회수 7,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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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예수님은 누구이셨는가?

4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8분)

도입)
예수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허무하고 무가치한 삶은 없다. 인간이 예수를 하나님과 인자로 믿는 것은 생애 최고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기독교만의 비밀이고 신비이다.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가 그리스도인인지를 결정한다. 예수님이 나의 주시며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신앙고백은 제자들의 신앙고백 중 최고라고 카슨(D A Carson) 교수는 지적했다. 도마는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곧바로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거리에 있는 일반인들은 그리스도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예언자적 성격에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메시아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수천 만 이슬람  교도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지 않는다. 아마 가장 널리 퍼진 관점은 예수님이 매우 선한 사람이며 위대한 도덕선생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셨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분이라는 의미의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윗 때부터 기다려온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억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연구 범위: 마 16:13-16, 요 20:26-28, 고전 1:18-27, 15:3-7.

안식일 오후
예수님의 사역 초기로부터 그분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있어 왔다. 이러한 논쟁이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논쟁은 그 당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가 아니냐?”(마 13:54-55)하고 그들은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악평’이었다. 메시야는 결코 우리가 잘 아는 곳에서는 올 수 없고 다른 어떤 곳에서 와야 하며,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가족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 그분의 신원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논쟁의 틀을 형성했으며, 그로부터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그분의 신원에 대한 호기심은 고조되어 왔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사람들은 왜 그분을 다른 유명한 인물들과 혼동하였는가? 신약 시대로부터 수세기 동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어떤 도전들이 있었는가? 성경을 기록한 이들은 그분의 신원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이번 첫 과에서 이러한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해 탐구해 볼 것이다.

일요일(3월 30일)
침례자 요한이 아님(마 16:14)

도입)
침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요한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그를 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차라리 이 사람이 그리스도이기를 원하였다. 요한은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성경에는 그가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증거는 그의 전 삶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의 삶은 경건 그 자체였다. 당시 제사장들과 성전 제사제도에는 부패와 타락이 극심했다. 제사장들은 돈을 주고 제사장직을 샀다. 그리고 성전에서 엄청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말라기에 주님이 홀연히 성전에 임하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침례 요한의 경건한 삶을 보고 지금이 그러한 때인가 하고 기대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침례 요한이 놀라운 능력으로 회개를 선포하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회개하고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기대했다. 혹시 이분이 메시야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물었다. “네가 메시아냐”(1:19) 요한은 그러한 기대에 분명히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유대인들의 기대를 단 한마디 말로 일축해 버렸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의문은 그분의 공생애 동안 계속적으로 대두되었으며,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다양한 형태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마치시기 약 6개월 전에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통과하시면서 그 당시에 떠돌고 있던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그들의 입으로 답하게 하실 필요를 느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1. 마태복음 16:14에서 제자들이 한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제자들의 대답은 이들이 그 당시의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해 얼마나 친숙하게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까? 예수께서는 특별히 왜 이 시점에 이 문제를 끌어내셨다고 생각합니까?
답: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한 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형편에서 어떻게 그분의 사역을 경험했는지를 알 수 있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동시대의 사람인 침례자 요한과 혼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어떤 면이 요한의 사역과 흡사했습니까? 다음 구절들을 참조하여 가능한 대답을 정리해 보십시오(마 3:1-3, 4:12-13, 17, 14:1-2, 막 1:1-5).
답:
오늘날 우리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중 매체가 없고 간접적인 정보나 소문에 의존했을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왜 혼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구절들에서 보듯이 결국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확실히 예수님을 소개하였다(마 3:11-12, 막 1:6-8).

교훈: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분을 침례자 요한과 혼동한 것은 단지 소문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부가적용)
침례요한의 사명은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으로 오신 이를 소개하는 것이다. 침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이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해서 제사를 드리며 이것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간다는 뜻이다. 왕은 누군가?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인도하는 자”가 왕이다. 왕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이다. 그 하나님의 권세를 사람 속에 통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는 사람이 왕이고 사람을 이끌고 하나님께로 가는 사람이 제사장이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끌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왕은 하나님을 대표해서 백성 앞에 서는 것이다. 예수는 왕으로 오셨고 침례요한은 제사장으로 오신 격이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왕이 오기 전의 구약 시대의 모든 사역은 제사장적인 사역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사람을 이끌고 가는 그런 모습이 구약적인 사역이다. 사무엘과 다윗이 대표적인 사람인데 사무엘은 제사장으로서 다윗 왕을 소개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다윗 왕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모든 일을 준비했던 사람이고 다윗인 왕은 이스라엘 여호와의 통치를 이스라엘 온 백성 가운데 임하게 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무엘과 다윗의 관계와 침례요한과 예수의 관계가 일치한다. 사무엘은 다윗을 자기 백성에게 인도해서 이 사람이 너희의 왕이다 이렇게 해서 백성 앞에서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다. 소개받은 다윗은 왕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침례요한은 사무엘과 같은 사역으로 예수 앞에 서 있고 예수는 다윗과 같은 사역으로 백성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월요일(3월 31일)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가 아님

도입)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허상이나 상상이나 비현실이 아니라 확실한 실제이고 바로 실체로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어리석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말을 흐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누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누구는 침례요한 누구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메시야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그들의 관념 속에만 있는 비현실적 존재로 밖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예수가 엘리야인가? 왜 예수가 예레미야인? 예수는 바로 생명 되신 그 분이시다. 실체이시다. 그 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념 속에만 살아 있는 비현실적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자꾸 엘리야라 하고 왜 예레미야라고도 하고 침례 요한이라고도 할까? 이것이 다 비현실적인 예수님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제자들은 사람들의 말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말을 옮긴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말 속에는 확신이 없었다. 힘이 없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예수님을 비현실적인 존재로써 인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지 않은가? 우리는 천국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정작 보면 내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현실적으로는 부인하고 그 분의 비현실성을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 마태복음 16:14을 다시 읽으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구약의 다른 선지자로 오해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답:
엘리야는 두려움을 모르는 갈멜산의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고집 센 왕과 비열한 왕비를 대면했던 담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합의 부패한 정권과 결탁한 종교 체제를 홀로 대항하여 싸웠던 사람이었다(참조 왕상 18장).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격렬한 국가적 소요와 위기의 때에 등장하여 특정한 민족적 상황에서 동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였다(렘 20:1-2, 7-8).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은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31)라고 지적하심으로 이 경건한 체하는 자들을 강하게 견책하셨다.

1.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분을 구약의 몇 인물들과 동일시한 사실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마태복음 16:14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그분을 어떤 인물들로 오해했다는 것은 그분께 대한 높은 존경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적인 거인들로서 유대 사회에 깊은 공감을 일으킨 믿을 만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한다 해도 진실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가령 만약에 예레미야가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했다면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만일 갈멜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에 이세벨의 위협에 겁을 냈던 엘리야처럼 행동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 예수님을 고대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실체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부가적용)
우리가 가진 교리 우리가 가진 성경적인 규범과 기독교적인 개념과 관념들이 있다. 이것들은 내 심령에 실체적 변화가 없어도 논리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신앙의 규범들 기독교적인 개념들, 관념들 사상들 이런 모든 것들이 내 심령에 실체적 변화가 없어도 그것들은 아주 논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게 위험한 것이다. 생명이 없는데 그 심령에 실제적 변화가 없고 내재의 하나님에 대한 정말 그 주님의 충만하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논리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가상의 논리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을 좀 먹는 우리 신앙을 굳어지게 하는 가장 위험한 것이다. 가상의 논리를 가지고는 겉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한다고 해도 절대로 예수님의 실체는 만날 수가 없다. 예수님이 그런 우리에게 지금 묻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경건한 모양으로 위장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 칼 같은 음성이 그 가치를 꿰뚫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무리 우리의 모습이 경건한 모양으로 위장이 되어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하는 예수님의 칼 같은 음성은 우리의 가치를 꿰뚫고 있다.

화요일(4월 1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1

도입)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법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주인이 있고 종이 있다. 다스리는 사람이 있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다. 우리는 사람이 가지는 이러한 법적인 지위들을 신분(身分)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사람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법적인 위치는 어떠했을까. 종교개혁 시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한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왜냐하면 동일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신분의 여하에 따라서는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추측하지 않고, 그분을 단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존재와 신원에 관한 여러 의문들에 대해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토론과 논쟁에는 기본적으로 성경의 신빙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17~18세기에 일어난 소위 계몽주의 운동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말았다. 성경은 더 이상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의 기초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 대신에 고대의 다른 문서를 연구할 때 적용되었던 방법과 기준이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제 초자연적인 것이나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은 이성적 분석과 비평에 밀려 거절당하고 말았다.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성경의 견해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대체(代替)되었고 인간의 능력과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너무나도 급진적이고 광범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머지않아 그리스도교가 쇠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종교는 진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 때 신학의 시녀였던 이성(理性)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은 구원의 예수님으로부터 역사의 예수님으로 그 초점이 옮겨 갔으며, 그때까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나 그 후의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신학적으로 미화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진짜 예수님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했던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어쨌든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의 구주가 아니시라는 주장이었다.

교훈: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던 17~18세기에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관심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묘사하였다.

부가적용)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아 올려본다. 계몽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미친 영향은 첫 번째로 역사주의(Historicism)이다. 과학적 역사의 규범(historiography, 사료편집)을 계몽주의 기간 동안에 역사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위한 최고의 표준으로 두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게 했다. 두 번째로 과학(Scientism)을 성경 위에 두었다. 과학이 성경의 사건과 충돌할 때 과학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는 비평주의(Criticism)이다. 데까르트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역사성과 사건들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비판을 가하였다. 후에 고등비평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네 번째로 합리주의였다. 이신론은 신학 안에 선구자로서 이성(Rationalism)이 모든 진리의 시금석이라는 말을 하였다. 다섯 번째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절대 종교라고 주장하지 말며, 종교 문제에 있어서 관용(Tolerationism)의 우선권을 강조한다. 여섯 번째로 낙관주의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정신은 더 이상 원죄의 어두운 교리를 믿지 않는다. 인간이 심리학과 사회학을 더욱더 알게 되고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은 상승적으로 진보한다는 낙관주의 (Optimism)를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류문명에 희망과 낙관적 발전을 믿었지만 세계 1차 대전으로 이런 생각이 환상임을 알려줬고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장미빛 낙관주의 사상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일곱 번째는 칸트주의(Kantianism)이다. 종교를 인간 이성의 한계에 묶어두고, 종교를 윤리화 시켰다. 후에 리츨과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을 윤리에 두었다. 여덟 번째로 신학은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도록, 신학적 진리를 일반적으로 인정된 이성적 원리에 조화되도록 했다. 신학을 인간학으로 전락시켰다. 아홉 번째로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켰다. 예를 들면 레싱(Lessing)은 종교의 참가치는 역사성에 좌우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유무에 달렸다고 말한다. 계몽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아닌 다만 역사적 인물로 폄하하였다.

수요일(4월 2일)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이 계속됨 - 2

도입)
예수님은 흔히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4대 성인(聖人)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편견 혹은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곧 신앙의 대상인 반면, 신자가 아닌, 특히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그럼으로 해서 은근히 예수님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뭐라 해도 인류의 역사와 모든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성인 중의 성인`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완전한 성인이면서 그분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요 경배의 대상이 되신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 대한 종교적 접근과 해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찍이 이 세상에 살다간 사람 중에서 예수님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었다. 아니, 그의 영향력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더욱 확대되어 나왔다. 우리는 유년 시절 이후 위인전과 영상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만화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그러한 매체들이 예수님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매체의 대부분은 성서에 기초하여 그 일부를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그 동안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여러 견해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정답은 당연히 성서 안에 있다.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자기가 한 사업에 대하여 자신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또한 자서전도 쓰지 않았다. 기독교의 변증과 전도를 위해서도 기록이 필요했다. 신약성서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4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 역사적으로 보아 최초의 복음서는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라고 부른다. 4복음서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보여 주며, 역사 이상의 계시적 의미를 시사해 주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려는 신의 계시를 접하게 된다.

소위 ‘역사적 예수’를 주장하는 자들은, 비록 초기 교회가 신학적 주석을 가했다 할지라도(계몽주의자들의 주장임) 여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묘사한 충분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방법을 주창한 자들은 그 방법이 과학적이고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의 풍조는 20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역사적 예수’에 관한 개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이었는지를 입증해 주는 새로운 연구 방법들이 등장하면서 이성주의적 모험심이 얼마나 비참하게 실패했는지를 폭로해 주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는 길고 복잡하며 까다롭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위 예수님 세미나(Jesus Seminar)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는데, 그 당시의 급진적 학자들은 그 이전에 있던 다른 역사적 요구가 실패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복음서를 기록한 돌팔이 의사들에게서 예수님을 구출한다는 것”이었다(로이 후버, 케네스 L. 우드워드의  “예수님의 죽음,” 뉴스위크, 1994년 4월 4일자, 39).

오늘날에는 아무도 예수님 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그분이 죽으신 후에 개에게 먹혔다고 하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튼튼한 역사적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2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비평과 논쟁의 지나갔으나 예수님은 각 시대의 변함없는 주님으로 살아 계신다.

1. 바울은 당대의 지식이 높은 궤변학자들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변증자 중 하나였는데, 그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기별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까?
답:

교훈: 예수님을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만 생각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있어왔으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가적용)
역사가 H.G 웰스는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람이 발전하게 한 일과 그리고 그가 후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날로 새롭고 활기 있게 생각하게 하였는지의 여부’로 평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웰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면으로 살펴보건대, 예수가 단연 으뜸”임을 인정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생전에도 “대제”라고 불린) 카룰루스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강력한 통치자였다. 그들은 위압감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자신들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아려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으로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 신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명령을 해왔다” 예수께서는 힘찬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과 일치한 생활방식으로 거의 2000년 동안 사람들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왔다. 한 필자는 그 점을 이렇게 적절히 표현하였다. “이제껏 진군했던 모든 군대, 이제껏 건조된 모든 군함, 이제껏 열린 모든 의회 이제껏 군림했던 모든 왕을 전부합해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그만큼 강력한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일부사람들은 예수를 결코 살았던 적이 없는 인물-사실상 일부 제 1세기 사람들의 창작 인물이라고 말한다. 존경받는 역사가 윌 듀런트는 그러한 회의론자의 말에 이러한 논증으로 대답한다. “몇몇 순박한 사람들이 한 세대 내에 그토록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인물, 그토록 고상한 윤리, 인간의 형제관계에 대한 그토록 고무적인 미래상을 고안하였다는 것은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어느 기적보다도 훨씬 더 믿기 어려운 기적일 것이다.” 자문해 보라. “결코 살았던 적이 없는 인물이 인간 역사에 그토록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고 말이다.

목요일(4월 3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 17:3)

도입)
예수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직선적으로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음성을 우리 모두가 지금 들어야 한다. 이 말을 생각해 보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다.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에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살아 계신 주님이어야 된다. 베드로의 이 말이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처럼 내 삶 속에 주님의 실제가 확실히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지금 당장 내 앞에 살아 계신 주님이 있어야 된다. 그게 진짜 신앙이다. 하나님이 오늘도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직도 절망 속에서 아직도 침체 속에서 주님이 나의 승리되시고 구원되시고 위로되시고 도움 되시고 치료되시고 사랑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의심하는가? 또한 반대로 주님이 나를 깨시고 연단하시고 지금 나를 채찍질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는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 하시고 활동하시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확증하시기를 바란다. 베드로처럼 주가 살아 계심을 증거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증명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신학적 명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세상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만약 예수께서 그들이 믿었던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그들 모두는 거짓말과 꾸며낸 말에 속은 것이며, 결국 잃어버린바 되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2천여 년 전에 팔레스틴에 살았던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비난받을 만한 사기극에 가담한 것이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이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마 1:22-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11: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 22:41-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막 14:61-6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 20:26-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자들은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목격하였을 때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부르짖었다. 이 반응은 또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그분께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총독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마 27:11)라는 동일한 대답을 하셨다.
어쨌든 이 두 대답은 특별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예수께서 단지 나사렛의 한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면 빌라도 앞에서 그처럼 담대하게 자신의 왕권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분명히 이 세상을 뛰어넘은 실체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그분께서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복음서와 나머지 신약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육체로 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교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다음과 같은 초청의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부가적용)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지금 내 앞에 주님은 바로 살아 계신 분이시다. 나의 메시야이시다. 나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여러분의 입에서 증거 되고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실제적으로 표출되는 그 주님을 수용하시기 바란다. 그 곳에 만이 진정한 신앙이 있고 승리가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2:6-11은 그리스도의 신분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기에는 그가 본래 어떤 위치에 계셨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낮은 지위로 낮아지셨는지, 또 그 결과 어떻게 높임을 당하셨는지 하는 것들이 밝혀져 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있던 분이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를 비우셨다, 하나님으로서의 높은 지위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어 사람으로 낮아지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시되, 죄인의 구속에 필요한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요구에 온전히 복종을 하셨다. 또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낮아지신 신분, 즉 비하(卑下)의 신분이라고 부른다. 그분이 자신을 비하하여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섬기고 인간을 구원하며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금요일(4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문제를 깨닫기 위해 시대의 소망 제24장,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236-243)에서 읽으라.

“이 예수는 누구인가? 라고 그들은 물어보았다. 메시야의 영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자는 목수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던 자였다. 그들은 그가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수고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은 그의 형제자매들과 잘 아는 사이였으며 그의 생애와 일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자라나는 것을 보았다. 그분의 생애가 비록 흠이 없었지만 그들은 그분을 약속된 자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
그들은 가난과 비천함에서 일어난 그가 보통 인간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237, 239).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님처럼 말했다면 위대한 도덕성을 갖춘 교사는 아닐 것이다. 그는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악마일 것이다. 선택은 당신이 해야 한다.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간주할 수 있고, 그에게 침을 뱉거나 귀신들린 자로 여기고 죽일 수 있다. 혹은 그분을 주님과 하나님으로 부르며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한낱 위대한 인간 교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옹호하려 하지 말자. 그분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각을 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렇게 할 의향도 없으셨다”(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맥밀란-콜리어 출판사, 1960년 5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께서 생애하시던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2천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고 생각합니까,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에 대한 회의적 사상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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