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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사명과 지상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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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3.14 09:18 조회수 7,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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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사명과 지상명령
3월 22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6분)

도입)
예수 그리스도는 선교의 모범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교의 행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이시다. 그의 성육신은 인간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최초의 선교사의 모범이시다. 그는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종의 형체를 입고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었고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몸을 속죄물로 바친 선교사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육신의 선교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종의 자세로 하나님의 선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기억절: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눅 24:46).

연구범위: 마 25:31-46, 막 16:14-20, 눅 24:36-53, 요 3:14-19, 롬 5:6-10, 고전 5:7, 15:3-4, 갈 1:4, 벧전 2:22-25.

학습 포인트: 제자들의 삶에서 선행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음에 관해 설명하시면서 성경의 역할을 어떻게 강조하셨는가?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에서 복음은 얼마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

안식일 오후
우리 재림교인들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을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이해한다. 세 천사의 기별의 중심에는 영원한 복음이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위대한 진리를 세상에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곧 세 천사의 기별인가 하고 어떤 이들이 나에게 물어왔을 때, ‘그것은 참으로 세 천사의 기별이다’라고 나는 대답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4월 1일자). 따라서 엘렌 G. 화잇 여사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위대한 소식,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선포가 우리 기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지상명령이라는 문맥 안에서 복음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3월 16일)
마지막 때의 드라마와 제자도

도입)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외적인 조건에 따라서 대한다. ‘부자냐 가난하냐’, ‘사장이냐 말단 사원이냐’등과 같이 경제력이나 사회직급에 따라서 대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또 이런 식으로 해야 사회가 돌아간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하면 안되는 곳이 있는데 교회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는 주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외모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면 안된다. ‘외모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육체적으로 연약한 자,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자, 영적으로 낙담한 자들을 일컫는다. 다윗은 이러한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언급한다. 자신이 병든 동안 소외의 고통을 맛 본 다윗은 가난한 자들이 조롱이나 수탈의 대상이 아닌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대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대한다.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 자들 중 으뜸은 우리의 가난함을 인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돌보시며 그의 은혜를 항상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마태복음 25:31-46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유대 지역 봉사의 마지막 주간에 하신 감람산 담화의 한 부분이며, 그분께서 수난당하시기 전에 나누신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1. 마태복음 25:31-46에 나오는 이 말씀을 우리는 특히 제자도와 증거(證據)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
이 구절은 제자들의 사명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사역에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과 옥에 갇힌 자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자들을 위한 봉사가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제자의 삶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보살피느냐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큰 심판의 날의 광경을 묘사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판결이 한 가지 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족들이 그분 앞에 모일 때에 두 부류로만 나누어질 것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도와주었느냐 또는 도와주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그 큰일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이 당신을 위하여 행한 충성스러운 일을 나타내신다”(시대의 소망, 637).

교훈: 최후의 심판을 앞둔 마지막 때의 참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옥에 갇힌 자들 등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겨야 할 것이다.

부가적용)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섬기고는 있지만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지는 않는다. 참으로 교회다운 교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교회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의 이름으로 섬기는 교회야말로 교회다운 교회이다. 우리는 흔히 "섬긴다"고 하면 지위가 높은 사람, 나보다 잘나고 영향력이 있는 상대를 섬기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영향력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사람이라고 했다. 한번은 비누 공장 주인이 종교의 가치에 대해서 목사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비누 공장 주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정과 부패, 모든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종교가 이런 것들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바로 그때 한 어린애가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놀다가 얼굴과 옷에 진흙이 묻은 그대로 이들 앞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이 어린애를 보고 있던 목사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아직도 저렇게 세상에 더러운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비누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지요? 그러자 비누 공장 주인이 대답하기를 모르시는 말씀, 비누란 것은 그것이 사용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했다. 이때 목사가 물론이죠, 종교가 그와 꼭 마찬가지랍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의식만의 종교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도다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 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 : 14 - 17)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 : 26)

월요일(3월 17일)
마가복음에 기록된 지상명령

도입)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다른 복음이다. "새들백교회 이야기"라는 책에는 "위대한 계명(the Great Commandment)과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대한 위대한 헌신(a Great Commitment)이 위대한 교회(a Great Church)를 만든다." 는 모토가 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분부였다. 이 땅에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전도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교회를 누가 채워야 하는가? 바로 내가 채워야 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명령을 실행하며 전도해야 한다. 하늘의 상급이 클 것이다. 전도는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사명이다.

앞 과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28:18-20에 제시된 지상명령을 살펴보았다. 그 구절들을 다시 읽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주님의 명령과 약속에 대해 복습해 보라. 읽으면서, “나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라.

1. 마가복음 16:14-20을 읽고 마태복음 28:18-20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 두 기사에서 차이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답:
그 차이점을 적은 다음, 두 기사를 다시 읽어 보라. 이 두 기사는 틀림없이 조화를 이룬다. 기본적인 메시지는 같다.

1. 이 두 기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어떤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제자들 중에는 의심하는 자들(마 28:17)과 마음이 완고해진 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이 두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그들을 나무라셨는데, 헬라어 동사로는 ‘꾸짖다,’ ‘책망하다,’ 혹은 ‘질책하다’라는 더욱 강한 어조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있은 후에도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믿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셔야만 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신 후에야 지상명령을 위임하실 수 있으셨음을 주목해 보라.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공적인 제자가 되기 위해 굳센 믿음이 필요함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하늘로 올리우실” 것이었으므로(막 16:19) 육신적으로 제자들에게서 멀어지실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그분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을 믿음만으로 행해야 할 것이었다.

교훈: 예수께서는 의심하는 자들에게 큰 사명을 위임하실 수 없으셨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오늘날의 제자들에게도 굳센 믿음을 갖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부가적용)
우리가 "위대한 계명"이라 할 때 그 계명은 마태복음 22:37-40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킨다. 그리고 "위대한 명령"은 흔히 지상명령으로 불리는 마태복음 28:18-20절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예수님의 대위임령, 혹은 지상명령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이곳 한 곳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도행전 1:8절에도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보시면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단지 명령만 나오지만 이곳에는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순종해야할 사항이 나온다. 바로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에 더 잘 나타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여러분 이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나가라"는 명령이 있기 전에 "유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유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나가라는 명령에 효과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하라는 명령에 먼저 순종하고 그 다음에 나가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이 순서를 지킬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사도 바울처럼 사역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믿음은 검증이 필요하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믿고 죽는데 까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시험이 왔을 때 그 믿는다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였음이 검증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굳센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경우에서 훈련하시는 과정으로 시험을 하신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약 1:12)고 하신 말씀에서 시험을 통과한 믿음의 결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는 메시지를 듣게 된다.

화요일(3월 18일)
제자도와 복음

도입)
예배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요(사43:7, 21) 전도는 부르심의 목적이기(마4:19) 때문에 예배와 전도 이 두 가지 의무는 어떤 의무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다. 위대한 설교가 스폴죤 목사는 이러한 기도를 했다. “주님 나에게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 열두 사람만 주십시요 그러면 내가 런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뒤 흔들어 놓겠나이다”고 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다. 권력이 아니다. 탁월한 지성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고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은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갖진 불의 종인 능력의 지도자이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지상명령의 또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6:15-16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지상명령의 근간(根幹)에 복음 전파로의 부르심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1. 위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요한계시록 14:6을 읽으십시오. 그냥 제자로서가 아니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 제자로서 우리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이 구절들은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제자도의 핵심인 복음 전파의 사역 즉 제자를 만드는 일과 더불어 복음의 메시지가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가복음의 바로 그 구절들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말씀하셨다. 즉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 거절하면 잃어버린 바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2. 위에 언급한 마가복음의 구절과 요한복음 3:14-19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요한이 기록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마가복음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우리가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복음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는 일은 제자인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하다. 죄 때문에 세상은 정죄를 받았으나, 예수께서는 몸소 그 정죄를 온전히 담당하셨다. 이 놀라운 대비책을 통하여,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더 이상 죄로 인해 이르러 오는 정죄를 받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에 감사할 것은, 우리의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의를 옷 입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기별은 우리가 세상에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교훈: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입었는데, 특히 마지막 시대에 제자인 우리는 이 복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야 한다.

부가적용)
에드 실보소 목사는 자기 자신이 불신자에 대하여 많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누가복음 10장을 자기 이웃들에게 적용하면서부터 자신이 얼마나 호전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이웃에게 그들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이웃의 죄를 고하였다. 하나님께 미혼모에 대해 언짢은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딸들에게 좋은 예가 되지 않으니 이 여인이 이러저러하게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시끄럽게 싸우는 부부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 우울증에 시달려 정원 관리를 하지 않은 이웃 집 때문에 자신의 집값까지 떨어지게 생겼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그리고 이웃의 마약 중독된 청소년이 마을에 얼마나 해로운 존재인가를 하나님께 말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에드야, 나는 네가 이들에게 전도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구나." 놀란 그가 물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이세요?" 주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와 내가 가까운 사이인 것을 이들이 알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상처받을 때 나도 상처를 입는단다. 나는 이들에게 다가가며 은혜를 끊임없이 베푼단다. 나는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비추는 하나님이다. 나는 이들을 사랑한단다. 하지만 너는 아니야. 너는 이들을 꺼리지. 너는 이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기보다는 이들을 벌하는 검사의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증인의 역할을 하지." 그리고 주님이 그를 이렇게 꾸짖으셨다. "에드야, 네가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들을 네게 맡길 수 없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에드 실보소는 그의 책에서 또 이런 말을 썼다. "전도할 때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인 양 취급하는 것이다. 이 태도는 잘못일 뿐 아니라 불신자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불신자와 우리의 사이를 더 멀게 만든다. 게다가 이것은 불신자들과 예수님과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예수님은 항상 죄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을 보이셨다. 삭개오나 간음하다 걸린 여인처럼 큰 죄를 지은 죄인일수록 예수님은 진심으로 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은 불신자라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요일(3월 19일)
누가복음에 기록된 지상명령

도입)
주님의 지상명령은 성경의 다른 네 곳, 즉 마태복음 28:19-20, 마가복음 16:15, 눅 26:46-47, 사도행전 1:8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들을 면밀히 연구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불신자들을 의식적으로 먼저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 가운데 “가라”(마 28:19; 막 16:15; 눅 26:46-47)는 말씀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 보다는 먼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전도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누가복음 24:36-53에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또 하나의 기록이 나온다.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가 들어와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했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1. 누가복음 24:36-53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시기 위해 행하신 처음 두 가지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육체적 증거를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셨음을 주목해 보라. 육체적 증거는 다만 일부에 불과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시선을 성경으로 돌리시고, 당신께 일어난 일이 예언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셨다.

2.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사용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답: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보게 된다. 경험과 육체적 증거와 이적도 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성경은 우리의 모든 믿음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많은 이적들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성경을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께 일어난 모든 일을 확증하시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셨으며, 제자들에게 하셨던 모든 말씀을 보강해 주셨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이 행하신 모든 일을 증명하시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그렇게 해야겠는가?
여기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은, 교회의 활동과 우리 개인의 사역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중대하고 근본적인 역할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강력한 견책이 된다.

교훈: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였음을 성경으로 입증해 주셨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사역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부활한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안다고 하여 그것이 믿음으로 가지는 않는다. 부활의 주님을 단순히 믿는 것이 중요하다.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앙의 안개 속을 헤매다가 주의 말씀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깨닫게 된 두 제자는 감쪽같이 사라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서로 간증을 하였다. 가장 인상적인 자신들의 변화는 자신들의 내면에서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심령에 견딜 수 없었던 뜨거움이다. 언제 마음이 뜨거워졌었는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실 때이다. 단순한 증거가 아니라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실 때이다(누가복음24:27). 이것을 두 제자는 성경을 풀어주셨다 라고 표현한다. '풀다'라는 말은 문을 열어 주사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안에 있는 내용을 보게 하셨다 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육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감각기관인 눈으로 읽고 귀로 들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여 풀어 주신 것은 곧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성경을 보게 하심이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누가복음24:45). 마음이 열리면 심령이 뜨거워진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말씀에 마음이 반응을 한다. 열린 마음엔 주의 은혜가 부어진다. 말씀의 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을 위한 것이다. 떡은 육을 위한 것이요 말씀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다. 말씀을 깨닫게 될 때 마음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마음이 열리고 또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제자의 마음의 뜨거워짐은 그들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말씀으로 심령이 뜨거워졌음을 의미한다.

목요일(3월 20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도입)
주님의 지상명령은 성경의 다른 네 곳, 즉 마태복음 28:19-20, 마가복음 16:15, 눅 26:46-47, 사도행전 1:8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들을 면밀히 연구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불신자들을 의식적으로 먼저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 가운데 “가라”(마 28:19; 막 16:15)는 말씀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 보다는 먼저 사람들을 찾아가서 전도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둘 째,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모든 족속과 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마가복음은 “너희는 온천 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령한다. 그리고 마태복음서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고 명령한다. 교회의 우선적인 사역은 바로 모든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있다. 어떤 학자는 ‘족속’이라는 말을 ‘벌 떼’에 비유하며, 역사, 전통, 문화, 언어, 가치관, 철학, 신앙 형태가 다른 모든 집단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는 반드시 교회로 인도하여 가르치고 양육해야 한다(엡 4:12) 모든 신자들은 교회의 양육과정을 통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삶 가운데 성경공부와 교제, 예배, 그리고 기도생활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행 2:42).

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지상명령을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시고 그것으로써 일어난 모든 일을 증명하는 자료로 삼으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을 향한 지상명령을 위임하실 때에도 성경을 사용하셨다.

1.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성경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24:45-48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세 천사의 기별(계 14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룹니까?
답: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모든 부르심의 중심에는 죄의 용서를 위해 주어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음에 관련된 사건들만 가리키지 않으시고, 그 사건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셨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세상에 전파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들의 증언이 그토록 힘이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이 모든 일의 증인”이요(눅 24:48),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2.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롬 5:6-10, 고전 5:7, 15:3-4, 갈 1:4, 엡 1:7, 벧전 2:22-25).
답:
제자들은 분명히 능력 있는 증인들이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역은 50년이 채 못 되어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7장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다에 퍼진 것을, 8-12장은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사마리아와 에디오피아와 시리아와 다른 이방 지역에까지 확산된 것을, 13-28장은 다소 사람 사울이 어떻게 핍박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으며, 그가 어떻게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교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로서 자신들이 직접 본 바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주님의 산 증인이 되자.

부가적용)
개역성경에는 “사명”이라는 단어가 얼마 안 나오는데 그 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 곳이 사도행전 20:24이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란 주 예수께 직접 받은 것인데, 그 구체적인 사명의 내용인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을 디모데에게 말할 때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딤후1:1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명이 얼마나 놀랍고 멋있었으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을까? 이는 사명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임을 표현하였다. 우리에게는 소명과 사명이 함께 필요하다. 소명과 사명은 손바닥의 안팍과 같다. 소명은 안에서 볼 때 강조하는 것이고 사명은 밖에서 볼 때 강조하는 것이다. 즉 안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셨음을 깊이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밖에서 안으로 파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파송했다는 것을 깊이 알아야 한다.

금요일(3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 성경 주석, 한국어판, 9권, 539-647, 681-683, 10권, 464-472, 시대의 소망, 제81장 ‘주께서 살아나시고’(779-787), 제82장 ‘어찌하여 우느냐’(788-794), 제83장 ‘엠마오로 가는 길’(795-801), 제84장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802-808), 제85장 ‘다시 한번 바닷가에서’(809-817), 제86장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818-828), 사도행적 제1장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9-16), 제2장 ‘열두 제자의 훈련’(17-24), 제3장 ‘대사명’(25-34), 제4장 ‘오순절’(35-46), 제5장 ‘성령의 선물’(47-56),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1장, 사도행전 1-2장.

“피조물의 공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일에나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어떤 일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그 주제가 뚜렷하고 분명하게 밝혀주도록 하자. 믿음과 행함으로 어떤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살 수 있다면 창조주는 피조물에 대하여 의무 아래 놓이게 된다. 여기서 거짓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주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하는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카톨릭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구원은 품삯처럼, 일해서 얻을 수 있는 채무의 일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죄인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는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 안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공로로는 자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이 모든 논쟁은 끝이 난다”(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19-2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능력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해 먼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정의(定義)를 한 문장으로 써 보십시오.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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