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함: 침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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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함: 침례자 요한
7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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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요한은 완벽한 조연자였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영웅중의 영웅이신 예수님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고 주님은 칭찬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배경으로 부르심에 감사했고 그 소명을 이루었고 그 소명을 이룬 후 그 사명 완수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요한의 부모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 어머니 엘리사벳은 경건한 여인이었으며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서 분향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이며 무슨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인지를...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5-17) 여기에서 관심 있는 표현은 “주 앞에 큰 자”이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라는 뜻이다. 요한은 태어날 부터 큰 자가 아니라 점점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 했다. 참된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왜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했을까?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신 인물들은 왜 한결 같이 광야의 사람들이었을까? 모세도 광야에서 40년. 다윗도 광야에서. 사도바울도 아라비야 광야에서 3년을.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마귀의 시험을 승리하셨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을 광야 학교에 보내실까? 그곳은 고독한곳. 조용한 곳. 사람이 없고 군중이 없다. 홀로 머무는 곳. 왜 이토록 고요한 광야가 필요할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야(히:말씀)과 어원이 같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말씀하신다.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2) 빈들에서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곳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자기를 찾았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발견한다. 무대 뒤에 선 영웅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무대 뒤에서 자신이 세우기를 원하는 인물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철거하게 만나야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아는 삶만이 무대 위에서서 섬길 수 있다. 우리는 무대 뒤에 선 영웅으로 살았던 요한을 살펴보므로 어떻게 그가 큰 자로 만들어 져갔는지 살펴보자.
기억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연구범위: 마 14:1-12, 눅 1장, 골 2:8, 계 14:6-12.
중심 사상: 침례자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요한의 생애를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만다이(Mandaean)교는 매우 오래된 종교이다. 만다이교의 신도들은 침례자 요한을 가장 위대한 최후의 선지자로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만다이교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주로 이라크와 이란에 살고 있다. 당혹스런 사실은 그들이 요한을 숭배하면서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모든 기별의 목적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요단강 기슭에서 요한은 회개와 용서와 공의의 기별을 전파했다. 요한의 기별은 메시야의 강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주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본래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칭찬하신 침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해 좀 더 깊이 탐구해 볼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우리 재림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것 사이에는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일요일(7월 13일)
특별한 부르심(사 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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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2세기 정도쯤에 만디아 교도들이라는 한 종교의 파가 있었다. 이 종파의 문서에 의하면 침례 요한을 "그 선지자"로 보고 있는데 반해서 예수님을 한 협잡꾼 즉 한"거짓 메시아"로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침례 요한과 예수님을 놓고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는 침례 요한이 최소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침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네가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냐...? 그러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1.20-22)라고 사람들이 묻는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말라기 3장에 의해서 종말에 올 엘리야, 선지자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유대 기독교인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논쟁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대립도 있었다. 마가복음 2장 18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묻는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을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 출생 전에 선택하신 몇 안 되는 성경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사무엘과 삼손, 그리고 예수님도 여기에 속한다.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사 40:3-5, 참조 눅 3:4-6)라고 예언하였다. 또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그의 아들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예언하였다(눅 1:76).
1. 누가복음 1장에는 침례자 요한의 사명과 부르심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행해야 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적어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침례자 요한에 관한 예언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 예언들은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답:
2. 요한이 행한 일들과 그의 슬픈 죽음을 비교해 보십시오(마 14:1-12). 그처럼 영광스러운 사역을 감당했던 그가 이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답:
침례자 요한의 특별한 부르심과 사역은 그를 힘들고 어려운 여정으로 이끌었다. 요한의 최후는 거의 그의 사촌 예수님의 최후만큼이나 슬픈 것이었다. 모든 시련들과 고통과 오해를 통과하면서도 요한은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관해 주어진 예언들을 성취시켰다. 요한은 우리 중 누구라도 하나님과 그분께서 행하라고 부르신 일에 충실하고자 할 때 만날 수 있는 고통의 증인으로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교훈: 침례자 요한은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출생 전에 예언된 생애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모든 고난 중에서도 신실함을 유지한 모본이 되었다.
부가적용)
침례 요한은 예수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그는 레위자손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태 전부터 구별된 몇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이름도 나기 전부터 천사를 통해 고지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외치는 ‘회개’의 말씀은 뭇사람의 간담을 떨리게 할 정도로 강력했고 또한 진실했다. 그는 뒤에 오시는 분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히 알 만큼 겸손했고, 그 자신이 구약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을 알았다. 구약인 중 누구도 ‘성령’에 대하여 아는 자가 없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을 세상에 소개했고, 그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또 보혜사인 성령이 오실 것까지 증거 했다. 그는 제자들과 신약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했다. 실로 그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장 잘 이해했던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구약인이 할 수 있는 복음의 극점에 있는 고백이었다. 그러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말’보다는 ‘바른말’을 하다가 잡혀 죽게 된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의 죽음치고는 아쉬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하여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과연 오실 ‘그’인지 물어본다. 이는 그 자신이 예수의 신들메 조차 풀 수 없는 자요, 또 예수는 흥하여야하겠고 자신은 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던 찬란한 신앙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수의 말씀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말씀으로 예수를 확인하고 자신과 예수의 관계까지 갈파한 그라면 그는 그래서는 곤란했다. 곧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예수는 교회의 ‘신랑’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요한은 주께서 증거하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 이름’이 있기에 그보다 월등한 자녀의 신분을 가졌다. 또한 그러한 신분을 주신 분을 세상에 전해야 할 직분이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신 주의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목양자가 되어야한다.
월요일(7월 14일)
‘길을 예비하는 자’가 준비됨(눅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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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이사야 40: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라기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5-6) 이와 같이 이사야와 말라기의 구약 성경에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먼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회개시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리며 준비시키게 한다고 예언되어져 있다. 바로 이 예언된 사자가 침례 요한인 것이다.(마 11:10,눅 7:27)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이미 창세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어지고 준비된 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3-6) 이러한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유대 왕 헤롯 때에 주의 사자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나게 될 아들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침례 요한임을 증거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의 생애에 관해 많은 예언을 주셨다. 성경은 심지어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생애 동안 어떤 일을 행할 것인지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접하게 된다. 요한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에 예언하셨기 때문에 그 일들을 행했는가?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일 이외에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는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수세기 동안 성경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도전을 던져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 질문에 대해 당장 답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한은 자신이 행해야 했던 일들을 위해 특별한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1. 우리는 누가복음 1:80에서, 요한이 어떤 훈련을 받았음을 보게 됩니까? 여기서 우리의 영적 생애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누가복음 1:15에는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약속에도 요한은 광야에서의 힘든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성경에서 종종 사막이나 광야는 영적인 훈련과 연단의 장소로 묘사된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던 것이다(눅 3:2). 요한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는 법(눅 11:1)과 금식하는 법(막 2:18)을 가르쳤다. 요한은 자신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능력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능력의 기별 선포자가 되게 하였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헬라어로는 요한이 ‘황소와 같이 부르짖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언급하셨듯이,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 11:7)와 같이 연약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를 보러 가지 않았으나, 그가 위대한 능력으로 진리를 선포하였을 때에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교훈: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나 그에게 맡겨질 사명을 위해 광야의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부가적용)
침례 요한, 그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마지막 선지자로서, 철두철미하게 그의 전 일생에 걸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다.(마 11:13,눅 16:16) 그는 태어나기 전, 모태 속에서조차도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뛰놀며 증거 하였다.(눅 1:41) 또한 그는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며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였던(마 3:2) 침례 요한은 `네가 누구냐'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도, 선지자도 아니며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음을 증거 하여.(요 1:19-23) 오직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증거 하였던 그는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막 1:7)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화요일(7월 15일)
엘리야의 심령(마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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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침례요한보고 그리스도 전에 와야 할 엘리야가 침례요한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 침례요한이라고 주장한다. 침례요한이 엘리야는 물론 아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유명하고 존경하는 선지자이다. 그는 당시 타락한 북이스라엘왕국의 국민들에게 강력하고 권위 있게 하나님을 증거한 사람이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바로 뒤에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에게 대하여 같은 심령으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증거 했고 자기 사명을 다하고 순교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비유하고 설명하고자 성경에서 침례 요한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선지자나 위인들도 메시아를 증거 하는 이런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두고 예수님이 "여자가 난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느니라" 하신 것이다.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말라기의 예언에 암시되어 있는 기별을 요한에게 적용하였다(눅 1:17). 예수님 자신도 이 사실을 지지하시면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 참조 마 17:11-13)고 하셨다.
엘리야는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그는 아합 왕과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견책했으며 그들의 길을 개혁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호소하였다. 갈멜산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이교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어섰다. 이 대결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 중 하나이다.
‘엘리야의 기별’은 재림교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엘렌 G. 화잇은 엘리야와 침례자 요한,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임무를 비교하면서, “엘리야의 기별은 단순히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기별이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84)고 요약하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아합 왕에게 심판의 기별을 선포했으며, 이스라엘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전달하였다.
침례자 요한도 회개의 기별과 천국의 원칙을 선포하였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준비시켰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개혁자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회개하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므로(계 14:7) 주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라는 기별을 전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세상을 향해 특별한 기별을 외칠 세 천사에 관해 기록하였는데(계 14:6-12), 그 기별 속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끝까지 충성하라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경고의 기별은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엘렌 G. 화잇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기별은 참으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4월 1일자)라고 기록하였다.
교훈: 엘리야와 같이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준비하게 하였다. 마지막 때의 엘리야인 우리의 사명도 이와 같다.
부가적용)
요한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칠 때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착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 앞에서 회개하며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탁월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요3:28) 그는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신것이요”(눅3:15-16)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자아발견은 정말 귀한 은총의 사건이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소명을 알고 한계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무엇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발견을 한 사람들의 특징은 겸손이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성품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킨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시작할 때는 겸손했다가 나중에는 그 겸손을 상실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이 시대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수요일(7월 16일)
행동의 변화(눅 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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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요즘 세대는「감성의 세대」라고 한다. 이는 자기가 느끼기에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즉「feel」이 오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나쁜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한번에 feel 이 콱 꽂혀오면 제일 좋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요즘은 단연코「돈」이 모든 것의 판단의 기준이다.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앞으로 돈을 얼마나 잘 벌 수 있는가에 따라 유능, 무능이 판단된다. 진리야 어떻든 여론과 대중 인기도에 따라 대세가 확정되기도 한다. 또한「능력」이 있어야 한다. 요즘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모든 것이 철저히 능력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잘릴지 몰라 순간순간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이제 우리 모두는 프로 야구 선수처럼 스스로 실력을 길러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학원가를 전전하며 자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실력 증진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뭔가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는 이런 말씀 등을 붙들고 살아가면,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고 이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힘들어서 어떨 때는 하나님이 이해해 주시겠지 하고 많이도 말고 아주 조금이라도 타협해 약간의 숨통이라도 트고 싶은 유혹도 받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 마음을 다해 주의 모든 말씀을 흠 없이 지키며 살았으며 증거하고 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것은 그들이「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은 주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었고 결국에 진리가 승리할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개인 문제를 초월해 어두운 세상에 메시야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후 3세기 초의 로마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신앙이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고민과 노력과 고통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결국 세상을 이겨낸다.
침례자 요한의 기별은 회개와 행동의 변화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요한이 사용한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메타노에오)는 ‘변화’를 의미하는 메타(meta)와 ‘생각’을 의미하는 노에오(noeo)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회개란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말했을 때, 그는 도래할 천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켰으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여 그분을 위해 “첩경을 평탄케”(3절)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권고하였다.
1. 누가복음 3:1-15에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2:14-26도 함께 읽으십시오.
답:
회개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마 3:6). 또 다른 한 부분은 천국의 원칙을 따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8절). 이 두 부분은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분이 오실 때에는 그들이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유쾌하게 되는 때가 이를 것이었다.
침례는 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가는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였다(눅 3:3)고 말한다. 물에서 씻음을 받는 것은 인생관이 바뀌고 죄의 용서를 받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상징하였다.
요한의 강력한 설교를 듣고 어떤 이들은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성경은 많은 무리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아왔다고 말한다. “이 때에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다(마 3:5).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왔으나, 그 말씀을 듣고 또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다(6절).
교훈: 요한이 외친 회개의 기별에는 죄를 자복하는 것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수반된다.
부가적용)
고든 맥도날드의 책 [내면세계의 실서와 영적 성장]에서 내면세계의 질서가 정돈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로 사울 왕을 든다. 반면 잘 정돈된 사람은 침례요한 이라한다. "그는 사울왕을 “쫓겨 다니는 사람(a driven person)"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특징은 소명을 따라 살지 않고 욕망과 야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성취함으로 만족을 얻는다. 존재 자체에서 참된 목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 권력. 물질. 인기. 군중에 집착한다. 이들은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이다. 이것은 탐욕에서 나온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와 같다. 타이타닉호가 파선된 것도 속도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다가 빙산에 부딪힌 것이다. 속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속도 방향을 전환할 수 없는 정도의 속도는 위험하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전인적 인격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희생 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사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수없이 시도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장애물로 여기거나 경쟁상대로 여긴다. 쫓겨다는 사람은 지나치게 바쁘다. 분명 열심히 사는 것과 지나치게 바쁜 것은 차이가 있다. 인생에는 리듬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안식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사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안식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가족 관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안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침례요한은 쫓겨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름 받은 사람(a called person)이다. 이들은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며 충동이나 인기를 따라 살지 않는다. 대중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내면이 정돈 사람이다. 외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내적인 것을 추구한다. 성공보다는 성품에 성취보다는 섬김에 관심이 있다.
목요일(7월 17일)
요한에게서 배울 중요한 교훈(골 2:8)
도입)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묻기 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데서 나오며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잠재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쇼펜하워는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잠재력의 3/4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소명은 vocation이다. voice즉 목소리 음성에서 나온 말이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 내명에 주신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를 가져야 한다. 그곳이 바로 광야다. 광야는 장소보다도 우리 내면의 담아 두신 소릴 들을 수 있는 환경이다. 일평생 장단을 맞추고 춤을 추어야 하는 북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북소리. 군중의 북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르다가 좌절한다. 결국 남의 북소리에 장단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 담아 주신 북소리 즉 자신의 북소리를 따라 살아간다. 그래서 때로 인기를 잃어버리거나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해도 자족한다. 기쁨이 충만하다. 평화가 있는 것이다.
1. 골로새서 2:8은 문화와 전통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특히 무엇에 주의해야 합니까?
답:
성경에는 수많은 유전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별로 없다. 한번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예수께 나아와, 왜 그분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지를 따져 물었다. 그분의 제자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던 것이다(마 15:2). 이러한 유전은 랍비들에 의해 세워진 규례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성경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2. 마태복음 15:3과 마가복음 7:13에서, 예수께서는 유전이 어떻게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중요한 요점을 말씀하셨습니까?
답:
침례자 요한의 사명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유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엇이 침례자 요한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는가? 그는 유대 민족의 교사들이 가르치던 많은 유전들에 대해 마음을 닫았으며,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엘렌 G. 화잇, 투쟁과 용기, 276).
침례자 요한은 유전에 속박되지 않았고 당시에 받아들여진 화술(話術)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간음으로부터 사회적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죄를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기별이 매우 분명하게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회개함으로 반응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요한에게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마 11:18). 물론 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들으셨다(요 7:20).
교훈: 요한이 참으로 담대하고 위대한 기별자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당시의 유전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8; 마 15:2-6; 막 7:9-13; 골 2:8) “진리가 빠진 관습은 역사 깊은 오류이다.”라고 터툴리안이 말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전을 지켰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 진리가 빠진 관습이었을 뿐이다. 윌 듀란트는 “기독교는 이교주의를 파기하지 않고 그것은 도입했다.” 고 말을 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독교에도 특별히 천주교에서는 옛 종교들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하나의 종교가 되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에드윈 햇치는 "본래의 크리스천 신앙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되는 많은 제도들과 제도의 요소들은 알고 보면 중세에 속한 것들이다.“고 말을 했다. 기독교적이 아닌 것들이 들어와 교회의 것인 양 유전처럼 지키고 있다. 일요일이 그렇고 크리스마스가 그렇고 부활절이 그러하며, 수많은 이교의 제도와 잘못된 유전들이 교회의 관습처럼 굳어져 현대에서도 우리 기독교의 계명과 진리가 아닌 유전들이나 제도들이 기독교에 유입되었다. 예수께서 계실 때에도 많은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 왔다. 예수께서 이것들을 지적하셨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최후의 보루는 인간의 유전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다. 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유일한 표준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금요일(7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10장 ‘광야의 외치는 소리’(97-108).
“하나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 광야에서 살도록 지시하신 것은 그를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감화로부터 보호하여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려 하심이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고립된 그의 생애는 백성의 모본은 아니었다. 요한 자신도 청중에게 이전 의무들을 버리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회개한 증거를 보이라고 말했다”(시대의 소망, 150).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두 번째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대에도 역시 요한이 하던 바와 같은 일이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큰 날에 설 수 있는 백성을 준비시킬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전하신 기별은 ‘회개하라 세리와 죄인들아, 회개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무리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움을 믿는 백성으로서 우리가 전한 기별은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는 것이다”(복음 교역자, 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영적 생애에 도움을 주는 전통으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2. 당신 자신이 겪은 ‘광야의 경험’은 무엇입니까? 그 경험은 특히 어떤 면에서 큰 유익이 되었습니까?
3.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남은 무리의 사명이 같다는 사실을 배웠는데, 어떻게 하면 이 막중한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러 면에서 그의 사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림을 위해 준비하게 하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사명과 흡사하다.
7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1분)
도입)
침례요한은 완벽한 조연자였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영웅중의 영웅이신 예수님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고 주님은 칭찬하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배경으로 부르심에 감사했고 그 소명을 이루었고 그 소명을 이룬 후 그 사명 완수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요한의 부모는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 어머니 엘리사벳은 경건한 여인이었으며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서 분향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이며 무슨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인지를...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5-17) 여기에서 관심 있는 표현은 “주 앞에 큰 자”이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라는 뜻이다. 요한은 태어날 부터 큰 자가 아니라 점점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 했다. 참된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왜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했을까? 하나님이 귀히 사용하신 인물들은 왜 한결 같이 광야의 사람들이었을까? 모세도 광야에서 40년. 다윗도 광야에서. 사도바울도 아라비야 광야에서 3년을.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마귀의 시험을 승리하셨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을 광야 학교에 보내실까? 그곳은 고독한곳. 조용한 곳. 사람이 없고 군중이 없다. 홀로 머무는 곳. 왜 이토록 고요한 광야가 필요할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야(히:말씀)과 어원이 같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말씀하신다. 요한이 빈들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2) 빈들에서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곳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서 자기를 찾았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발견한다. 무대 뒤에 선 영웅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무대 뒤에서 자신이 세우기를 원하는 인물을 만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철거하게 만나야 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아는 삶만이 무대 위에서서 섬길 수 있다. 우리는 무대 뒤에 선 영웅으로 살았던 요한을 살펴보므로 어떻게 그가 큰 자로 만들어 져갔는지 살펴보자.
기억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연구범위: 마 14:1-12, 눅 1장, 골 2:8, 계 14:6-12.
중심 사상: 침례자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요한의 생애를 통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만다이(Mandaean)교는 매우 오래된 종교이다. 만다이교의 신도들은 침례자 요한을 가장 위대한 최후의 선지자로 숭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만다이교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주로 이라크와 이란에 살고 있다. 당혹스런 사실은 그들이 요한을 숭배하면서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모든 기별의 목적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요단강 기슭에서 요한은 회개와 용서와 공의의 기별을 전파했다. 요한의 기별은 메시야의 강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주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은 본래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누구보다도 칭찬하신 침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해 좀 더 깊이 탐구해 볼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우리 재림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것 사이에는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일요일(7월 13일)
특별한 부르심(사 40:35)
도입)
주후2세기 정도쯤에 만디아 교도들이라는 한 종교의 파가 있었다. 이 종파의 문서에 의하면 침례 요한을 "그 선지자"로 보고 있는데 반해서 예수님을 한 협잡꾼 즉 한"거짓 메시아"로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침례 요한과 예수님을 놓고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는 침례 요한이 최소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침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네가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냐...? 그러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1.20-22)라고 사람들이 묻는다. 사람들은 침례 요한이 말라기 3장에 의해서 종말에 올 엘리야, 선지자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유대 기독교인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논쟁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대립도 있었다. 마가복음 2장 18절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묻는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금식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금식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을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 출생 전에 선택하신 몇 안 되는 성경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사무엘과 삼손, 그리고 예수님도 여기에 속한다.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사 40:3-5, 참조 눅 3:4-6)라고 예언하였다. 또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그의 아들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예언하였다(눅 1:76).
1. 누가복음 1장에는 침례자 요한의 사명과 부르심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행해야 했던 일들이 무엇인지 적어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침례자 요한에 관한 예언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 예언들은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답:
2. 요한이 행한 일들과 그의 슬픈 죽음을 비교해 보십시오(마 14:1-12). 그처럼 영광스러운 사역을 감당했던 그가 이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답:
침례자 요한의 특별한 부르심과 사역은 그를 힘들고 어려운 여정으로 이끌었다. 요한의 최후는 거의 그의 사촌 예수님의 최후만큼이나 슬픈 것이었다. 모든 시련들과 고통과 오해를 통과하면서도 요한은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관해 주어진 예언들을 성취시켰다. 요한은 우리 중 누구라도 하나님과 그분께서 행하라고 부르신 일에 충실하고자 할 때 만날 수 있는 고통의 증인으로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교훈: 침례자 요한은 모든 시련과 고난을 통해 자신의 출생 전에 예언된 생애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모든 고난 중에서도 신실함을 유지한 모본이 되었다.
부가적용)
침례 요한은 예수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었다. 그는 레위자손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태 전부터 구별된 몇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이름도 나기 전부터 천사를 통해 고지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외치는 ‘회개’의 말씀은 뭇사람의 간담을 떨리게 할 정도로 강력했고 또한 진실했다. 그는 뒤에 오시는 분과 자신의 차이를 분명히 알 만큼 겸손했고, 그 자신이 구약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을 알았다. 구약인 중 누구도 ‘성령’에 대하여 아는 자가 없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을 세상에 소개했고, 그에게 침례를 주었으며, 또 보혜사인 성령이 오실 것까지 증거 했다. 그는 제자들과 신약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했다. 실로 그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가장 잘 이해했던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구약인이 할 수 있는 복음의 극점에 있는 고백이었다. 그러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말’보다는 ‘바른말’을 하다가 잡혀 죽게 된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이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의 죽음치고는 아쉬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하여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과연 오실 ‘그’인지 물어본다. 이는 그 자신이 예수의 신들메 조차 풀 수 없는 자요, 또 예수는 흥하여야하겠고 자신은 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던 찬란한 신앙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수의 말씀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말씀으로 예수를 확인하고 자신과 예수의 관계까지 갈파한 그라면 그는 그래서는 곤란했다. 곧 자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 예수는 교회의 ‘신랑’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 요한은 주께서 증거하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수 이름’이 있기에 그보다 월등한 자녀의 신분을 가졌다. 또한 그러한 신분을 주신 분을 세상에 전해야 할 직분이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신 주의 말씀에 부끄럽지 않은 목양자가 되어야한다.
월요일(7월 14일)
‘길을 예비하는 자’가 준비됨(눅 1:80)
도입)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이사야 40: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라기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5-6) 이와 같이 이사야와 말라기의 구약 성경에는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먼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회개시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리며 준비시키게 한다고 예언되어져 있다. 바로 이 예언된 사자가 침례 요한인 것이다.(마 11:10,눅 7:27)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이미 창세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어지고 준비된 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3-6) 이러한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유대 왕 헤롯 때에 주의 사자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나게 될 아들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침례 요한임을 증거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침례자 요한의 생애에 관해 많은 예언을 주셨다. 성경은 심지어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생애 동안 어떤 일을 행할 것인지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운 질문을 접하게 된다. 요한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에 예언하셨기 때문에 그 일들을 행했는가? 다시 말하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일 이외에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었는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우리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수세기 동안 성경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도전을 던져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 질문에 대해 당장 답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한은 자신이 행해야 했던 일들을 위해 특별한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1. 우리는 누가복음 1:80에서, 요한이 어떤 훈련을 받았음을 보게 됩니까? 여기서 우리의 영적 생애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누가복음 1:15에는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특별한 약속에도 요한은 광야에서의 힘든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성경에서 종종 사막이나 광야는 영적인 훈련과 연단의 장소로 묘사된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던 것이다(눅 3:2). 요한은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는 법(눅 11:1)과 금식하는 법(막 2:18)을 가르쳤다. 요한은 자신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요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능력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능력의 기별 선포자가 되게 하였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헬라어로는 요한이 ‘황소와 같이 부르짖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언급하셨듯이, 요한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 11:7)와 같이 연약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를 보러 가지 않았으나, 그가 위대한 능력으로 진리를 선포하였을 때에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교훈: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나 그에게 맡겨질 사명을 위해 광야의 훈련을 받아야 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부가적용)
침례 요한, 그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마지막 선지자로서, 철두철미하게 그의 전 일생에 걸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았다.(마 11:13,눅 16:16) 그는 태어나기 전, 모태 속에서조차도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뛰놀며 증거 하였다.(눅 1:41) 또한 그는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며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였던(마 3:2) 침례 요한은 `네가 누구냐'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도, 선지자도 아니며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음을 증거 하여.(요 1:19-23) 오직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증거 하였던 그는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막 1:7)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화요일(7월 15일)
엘리야의 심령(마 11:14)
도입)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침례요한보고 그리스도 전에 와야 할 엘리야가 침례요한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엘리야가 다시 온 것이 침례요한이라고 주장한다. 침례요한이 엘리야는 물론 아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유명하고 존경하는 선지자이다. 그는 당시 타락한 북이스라엘왕국의 국민들에게 강력하고 권위 있게 하나님을 증거한 사람이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바로 뒤에 오실 메시아인 예수님에게 대하여 같은 심령으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증거 했고 자기 사명을 다하고 순교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을 비유하고 설명하고자 성경에서 침례 요한에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선지자나 위인들도 메시아를 증거 하는 이런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두고 예수님이 "여자가 난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느니라" 하신 것이다.
사가랴에게 나타났던 천사는 말라기의 예언에 암시되어 있는 기별을 요한에게 적용하였다(눅 1:17). 예수님 자신도 이 사실을 지지하시면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 참조 마 17:11-13)고 하셨다.
엘리야는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 가운데 우뚝 서 있다. 그는 아합 왕과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견책했으며 그들의 길을 개혁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호소하였다. 갈멜산의 대결에서 엘리야는 이교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을 위해 일어섰다. 이 대결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 중 하나이다.
‘엘리야의 기별’은 재림교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엘렌 G. 화잇은 엘리야와 침례자 요한, 그리고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임무를 비교하면서, “엘리야의 기별은 단순히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기별이었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4권, 1184)고 요약하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아합 왕에게 심판의 기별을 선포했으며, 이스라엘에게는 회개의 기회를 전달하였다.
침례자 요한도 회개의 기별과 천국의 원칙을 선포하였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준비시켰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개혁자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회개하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므로(계 14:7) 주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라는 기별을 전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때에 세상을 향해 특별한 기별을 외칠 세 천사에 관해 기록하였는데(계 14:6-12), 그 기별 속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끝까지 충성하라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경고의 기별은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엘렌 G. 화잇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기별은 참으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4월 1일자)라고 기록하였다.
교훈: 엘리야와 같이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준비하게 하였다. 마지막 때의 엘리야인 우리의 사명도 이와 같다.
부가적용)
요한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칠 때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착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 앞에서 회개하며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탁월한 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요3:28) 그는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신것이요”(눅3:15-16)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자아발견은 정말 귀한 은총의 사건이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소명을 알고 한계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무엇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 발견을 한 사람들의 특징은 겸손이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성품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킨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시작할 때는 겸손했다가 나중에는 그 겸손을 상실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 우리 모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할 이 시대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수요일(7월 16일)
행동의 변화(눅 3:10-15)
도입)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요즘 세대는「감성의 세대」라고 한다. 이는 자기가 느끼기에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즉「feel」이 오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나쁜 것이라고 한다. 특별히 한번에 feel 이 콱 꽂혀오면 제일 좋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요즘은 단연코「돈」이 모든 것의 판단의 기준이다. 그 사람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앞으로 돈을 얼마나 잘 벌 수 있는가에 따라 유능, 무능이 판단된다. 진리야 어떻든 여론과 대중 인기도에 따라 대세가 확정되기도 한다. 또한「능력」이 있어야 한다. 요즘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모든 것이 철저히 능력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잘릴지 몰라 순간순간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신문 칼럼에서는 이제 우리 모두는 프로 야구 선수처럼 스스로 실력을 길러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학원가를 전전하며 자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실력 증진에 힘을 쏟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뭔가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는 이런 말씀 등을 붙들고 살아가면,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고 이용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힘들어서 어떨 때는 하나님이 이해해 주시겠지 하고 많이도 말고 아주 조금이라도 타협해 약간의 숨통이라도 트고 싶은 유혹도 받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 마음을 다해 주의 모든 말씀을 흠 없이 지키며 살았으며 증거하고 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것은 그들이「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은 주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었고 결국에 진리가 승리할 것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개인 문제를 초월해 어두운 세상에 메시야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후 3세기 초의 로마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신앙이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는 고민과 노력과 고통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결국 세상을 이겨낸다.
침례자 요한의 기별은 회개와 행동의 변화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요한이 사용한 ‘회개’라는 헬라어 단어(메타노에오)는 ‘변화’를 의미하는 메타(meta)와 ‘생각’을 의미하는 노에오(noeo)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회개란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말했을 때, 그는 도래할 천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켰으며, 주님의 길을 예비하여 그분을 위해 “첩경을 평탄케”(3절)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권고하였다.
1. 누가복음 3:1-15에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2:14-26도 함께 읽으십시오.
답:
회개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는 죄를 자복하는 것이다(마 3:6). 또 다른 한 부분은 천국의 원칙을 따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8절). 이 두 부분은 예수님의 초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분이 오실 때에는 그들이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유쾌하게 되는 때가 이를 것이었다.
침례는 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가는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였다(눅 3:3)고 말한다. 물에서 씻음을 받는 것은 인생관이 바뀌고 죄의 용서를 받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상징하였다.
요한의 강력한 설교를 듣고 어떤 이들은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성경은 많은 무리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나아왔다고 말한다. “이 때에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왔다(마 3:5). 그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왔으나, 그 말씀을 듣고 또한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침례를 받았다(6절).
교훈: 요한이 외친 회개의 기별에는 죄를 자복하는 것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수반된다.
부가적용)
고든 맥도날드의 책 [내면세계의 실서와 영적 성장]에서 내면세계의 질서가 정돈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로 사울 왕을 든다. 반면 잘 정돈된 사람은 침례요한 이라한다. "그는 사울왕을 “쫓겨 다니는 사람(a driven person)"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특징은 소명을 따라 살지 않고 욕망과 야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성취함으로 만족을 얻는다. 존재 자체에서 참된 목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 한다. 권력. 물질. 인기. 군중에 집착한다. 이들은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이다. 이것은 탐욕에서 나온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와 같다. 타이타닉호가 파선된 것도 속도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속도로 질주하다가 빙산에 부딪힌 것이다. 속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속도 방향을 전환할 수 없는 정도의 속도는 위험하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전인적 인격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희생 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사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수없이 시도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장애물로 여기거나 경쟁상대로 여긴다. 쫓겨다는 사람은 지나치게 바쁘다. 분명 열심히 사는 것과 지나치게 바쁜 것은 차이가 있다. 인생에는 리듬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안식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사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안식이 될 수 있지만 그래도 가족 관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안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침례요한은 쫓겨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부름 받은 사람(a called person)이다. 이들은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이며 충동이나 인기를 따라 살지 않는다. 대중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내면이 정돈 사람이다. 외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내적인 것을 추구한다. 성공보다는 성품에 성취보다는 섬김에 관심이 있다.
목요일(7월 17일)
요한에게서 배울 중요한 교훈(골 2:8)
도입)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묻기 전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듣는데서 나오며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커 파머는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잠재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쇼펜하워는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기 잠재력의 3/4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소명은 vocation이다. voice즉 목소리 음성에서 나온 말이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 내명에 주신 음성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를 가져야 한다. 그곳이 바로 광야다. 광야는 장소보다도 우리 내면의 담아 두신 소릴 들을 수 있는 환경이다. 일평생 장단을 맞추고 춤을 추어야 하는 북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북소리. 군중의 북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르다가 좌절한다. 결국 남의 북소리에 장단을 맞춘 것이다. 그러나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 안에 담아 주신 북소리 즉 자신의 북소리를 따라 살아간다. 그래서 때로 인기를 잃어버리거나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해도 자족한다. 기쁨이 충만하다. 평화가 있는 것이다.
1. 골로새서 2:8은 문화와 전통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특히 무엇에 주의해야 합니까?
답:
성경에는 수많은 유전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별로 없다. 한번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예수께 나아와, 왜 그분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는지를 따져 물었다. 그분의 제자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던 것이다(마 15:2). 이러한 유전은 랍비들에 의해 세워진 규례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성경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2. 마태복음 15:3과 마가복음 7:13에서, 예수께서는 유전이 어떻게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면서 어떤 중요한 요점을 말씀하셨습니까?
답:
침례자 요한의 사명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유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엇이 침례자 요한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는가? 그는 유대 민족의 교사들이 가르치던 많은 유전들에 대해 마음을 닫았으며, 위로부터 오는 지혜에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엘렌 G. 화잇, 투쟁과 용기, 276).
침례자 요한은 유전에 속박되지 않았고 당시에 받아들여진 화술(話術)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간음으로부터 사회적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죄를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기별이 매우 분명하게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회개함으로 반응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요한에게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기까지 하였다(마 11:18). 물론 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들으셨다(요 7:20).
교훈: 요한이 참으로 담대하고 위대한 기별자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당시의 유전을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8; 마 15:2-6; 막 7:9-13; 골 2:8) “진리가 빠진 관습은 역사 깊은 오류이다.”라고 터툴리안이 말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전을 지켰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 진리가 빠진 관습이었을 뿐이다. 윌 듀란트는 “기독교는 이교주의를 파기하지 않고 그것은 도입했다.” 고 말을 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독교에도 특별히 천주교에서는 옛 종교들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하나의 종교가 되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에드윈 햇치는 "본래의 크리스천 신앙에 속해 있었다고 생각되는 많은 제도들과 제도의 요소들은 알고 보면 중세에 속한 것들이다.“고 말을 했다. 기독교적이 아닌 것들이 들어와 교회의 것인 양 유전처럼 지키고 있다. 일요일이 그렇고 크리스마스가 그렇고 부활절이 그러하며, 수많은 이교의 제도와 잘못된 유전들이 교회의 관습처럼 굳어져 현대에서도 우리 기독교의 계명과 진리가 아닌 유전들이나 제도들이 기독교에 유입되었다. 예수께서 계실 때에도 많은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 왔다. 예수께서 이것들을 지적하셨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최후의 보루는 인간의 유전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다. 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유일한 표준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금요일(7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10장 ‘광야의 외치는 소리’(97-108).
“하나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 광야에서 살도록 지시하신 것은 그를 제사장들과 랍비들의 감화로부터 보호하여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그를 준비시키려 하심이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고립된 그의 생애는 백성의 모본은 아니었다. 요한 자신도 청중에게 이전 의무들을 버리도록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회개한 증거를 보이라고 말했다”(시대의 소망, 150).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두 번째 오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대에도 역시 요한이 하던 바와 같은 일이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큰 날에 설 수 있는 백성을 준비시킬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전하신 기별은 ‘회개하라 세리와 죄인들아, 회개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무리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움을 믿는 백성으로서 우리가 전한 기별은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는 것이다”(복음 교역자, 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영적 생애에 도움을 주는 전통으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2. 당신 자신이 겪은 ‘광야의 경험’은 무엇입니까? 그 경험은 특히 어떤 면에서 큰 유익이 되었습니까?
3.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남은 무리의 사명이 같다는 사실을 배웠는데, 어떻게 하면 이 막중한 사명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요약: 침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여러 면에서 그의 사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림을 위해 준비하게 하는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사명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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