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바울의 전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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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바울의 전도법
7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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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다. 바울의 거듭남으로 본받을 것은 영적 성장이다. 바울은 은혜를 받음으로 급성장하여 옛 사람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탄생시켰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우리도 받은 은혜의 큰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마 7:18) 바울은 신령하고도 거룩한 성령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은혜의 광채가 났고 그의 마음에서는 사랑과 영혼 구원의 사명에 불타는 열정이 있었으며, 그의 생활에서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과 말씀을 증거 하는 권세가 나타났다. 이것이 바울의 열매이다. 바울 사도는 일하는 일군이다. 그는 전도의 일을 자비로 하고 어느 개인이나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애써 주야로 일했다. 그의 전도의 일은 처음부터 수고였다. 바울의 수고는 육신의 수고, 정신적인 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 곧 전도하거나 교회를 치리하거나 심령을 인도하는 영적인 일의 수고와 충성의 수고를 하였으며, 자기를 쳐서 날마다 죽는 겸손의 수고도 하였다(고전 15:31).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일을 많이 간증하고 또 사모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심령에 은혜를 받건 육신에 복을 받건 수고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의 수고와 고을과 촌을 찾아가는 수고를 하셨고(막 1:38-39),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는 수고를 하셨으며(요 8:29), 바울도 충성하는 일군으로써 수고를 하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다(고전 4:2). 수고 없는 믿음의 생활은 없다.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들도 수고의 일이 있은 후 복을 받는다. 일을 해야 한다. 수고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의 전도방법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할 때 바울의 이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
기억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
연구범위: 행 11:19-26, 13:16-42, 17:18-34.
중심 사상: 사도 바울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면서, 우리에게 상황에 맞는 기별 전파 방법을 배우라고 권한다. 이것은 기별 그 자체와 다양한 문화를 함께 접목시키는 문제이다.
안식일 오후
재림교회 초창기에 외방 선교사들은 우리의 현대 진리 메시지를 선교지 현장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전 세계적인 ‘글로벌 미션 프로젝트’(Global Mission project)는 다른 종교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여러 연구센터들을 후원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의사소통을 하려면 먼저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의 기별을 다른 배경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맞도록 조정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의 기별을 다양한 군중들과 나눌 때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찰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더 잘 전하기 위해 바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일요일(7월 6일)
바울이 선교사업에 가담함(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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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8:3, 9:1-2)하던 사울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성령 충만을 받고, 침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라 증거 한다. 이러한 급회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아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다메섹에 살았어도 결코 사울을 용납하기에는 어려웠을 것 같다. 좀 더 관찰해야 할 대목은 사울이 거듭난 이후 '즉시로'복음을 전하였다는 대목이다. 사도행전 9장의 내용으로 하면 1주일 정도 지난 후에 곧바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9,19b,23). 하지만 사도와 전도자가 되기까지를 간단히 적고 있는 갈라디아서 1장 11절 이하를 보면 상황은 좀 다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을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갈1:16b-18)''''''''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울이 회심한 후에 3년간의 아라비아 연단 기간이 있었다고 동의한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자신의 심성을 새롭게 갱신시켰으며, 주의 말씀을 연구하고 깊은 영적 사색과 묵상을 통해 '사도수업'을 받았다. 이 준비 기간을 거치고서, 그리고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일에 헌신한다. 그는 단지 열정 하나만으로, 부르심을 받아 '택한 그릇'이 되었다는 소명만으로, 주님을 직접 만났다는 경험과 확신만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최소한 3년 동안이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라는 승부를 인내로서 경주한 이후에 복음 전도자의 삶으로 헌신하게 된다. 배(桃)도 3년생 가지에서 열린다. 뭔가를 진득하게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성급하게 시작하면 '풋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다. 평생 헌신과 사역을 위해서 3년을 준비한 사울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에도 어떤 사도들은 그가 참된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행 9:26).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파괴하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첩자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때 바나바가 일어나 바울을 옹호하고 나섰다(27-28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행 11:24).
1.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행 11:19-24). 그 교회에서의 사역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습니까?
답: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의 새로운 모임에 관해 들었다. 안디옥은 그 당시 로마제국의 3대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유명한 바나바를 신속히 파송하여 안디옥 교회를 강화하고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다.
2. 사도행전 11:25-26에 따르면, 바나바는 왜 바울을 그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까?
답:
사도행전은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핍박자 사울이 선교사 바울이 되고, 구원의 복음이 단지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신의 지난 날 핍박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상황을 듣고 바나바를 보내어 그곳의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의 소명에 관해 듣고 그를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1년 동안 바나바와 바울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교회가 점점 더 든든해지면서 자비의 정신도 배양되어 다른 이들을 돕기에 이르렀다. 이 교회의 신자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유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구호금을 보냈다(행 11:28-30). 그들은 자신들의 축복을 이기적으로 간직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훈: 성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파괴하던 사울이 그리스도의 선교사가 되어 교회를 부흥케 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의 실용성으로 방법적인 면을 알아보면 바울은 무작정 그의 선교를 전개시킨 것이 아니라 지역적 특성(4개 지역에 대한 선교, 대도시 중심의 선교), 상황적 특성(유대인 회당을 이용한 선교), 시간적 특성(반응자 우선 선교, 즉각 침례를 베푸는 선교), 선교의 융통성, 삶을 통한 인격적 모범을 통해 실용성을 확대 시켰다.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의 세계성으로 그의 선교의 범위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확대됨으로 그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로마를 지나 스페인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개하고자하는 그의 선교전략의 세계성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 선교전략의 지속성으로, 바울은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선교를 했으며,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충분한 기간을 체류했으며, 혼자 하는 선교가 아니라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였다. 특히 그는 세워진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바울의 선교전략의 특성은 선교를 교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현대교회가 반드시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월요일(7월 7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고전 9:22)
도입)
전도나 복음 전파는 일방적으로 한쪽의 주장을 강요하는 형식이어서는 안되며 도리어 상대방의 현실과 심령 상태에 대한 면밀한 배려와 헌신적인 사랑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타인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는 바, 바울은 본문에서 그 전형(type)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권위를 버리시고 세리와 창기들과 벗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셨다(마 9:10).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본 절은 곧 바울의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 롬 9:3).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 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고전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17-29).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
고린도전서 9:22에서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말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가 타협을 권장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바울은 복음과 교리, 원칙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변경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매력적이고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느 도시에 도착하면 회당을 방문하여 거기서 가르쳤다(참조, 행 9:19-22, 13:14-16).
1. 사도행전 13:16-42에 나오는 그의 설교에서 바울은 성경 역사의 어느 부분을 언급하였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권위의 근거로 사용하였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답:
2. 사도행전 14:8-18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이방인들은 구약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답:
여기서 바울은 성경을 권위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15절에서 구약을 응용하기는 하였다). 그는 시인의 시구(詩句)를 인용하기도 하고, 천연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 우상숭배의 무익함을 지적해 주고자 하였다.
교훈: 바울은 진리의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상에 따라 전도의 방법을 달리했는데,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에도 응용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본 절에서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변화하는 선교 환경에 따라 각 시대마다 선교의 수단과 방법, 전략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선교의 역사는 ‘연안선 선교시대(Coastal Mission Era)’, ‘내지 선교시대(Inland Mission Era)’, ‘미전도종족 선교시대(Unreached People Mission Era)’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 바야흐로 ‘전문인 선교시대(Professional Mission Era)’를 맞이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선교의 방법에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바울은 전도의 대상에 걸 맞는 방법에 맞게 전도를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요일(7월 8일)
철학자들에게 전도함(행 17:18-34)
도입)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도하였으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받아드리는 대신에 무시하여 버렸다. 바울은 그와 같이 자신들의 지혜만을 앞세우고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아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으로 논리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 복음 전도의 성과는 다른 곳에 비해 미미하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마치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과 철학을 혼합한 말과 지혜로 아덴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을 실패로 판단할 정도였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행17:32) 아덴을 떠난 바울이 우상과 무신론 철학과 죄악이 가득한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도하려고 할 때에 평소 바울답지 않은 연약한 면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여기서 ‘약하고’라는 말은 아무 무력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소심하고 마음이 약해진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또 ‘두려워하고’라는 말은 공포심과 놀람으로 경악할 정도의 심정을 뜻이고 ‘심히 떨었노라’라는 말은 두려움으로 인해 전율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바울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였을까?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도한 방법은 아덴에서 와는 사뭇 달랐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는 말은 아덴에서처럼 헬라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고, 화려한 문학적인 수식어를 동원하여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의 설교자들도 바울과 같은 시험을 당하기가 쉽다. 좀 더 자신을 실력 있는 사람으로 내 비취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실력 있는 사람을 알리고 싶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설교하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과일을 달리게 하는 가지와 과일을 잘 익게 만드는 나뭇잎 새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의 선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아덴(Athens)에서의 활동이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의 본고장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과 지성과 자유로운 사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하였다(행 17:16). 이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1. 사도행전 17:18-34에는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는 무엇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사역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습니까?
답:
에피쿠로스(Epicureans, 행 17:18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은, 지고(至高)한 행복이 아픔과 두려움이 없는 삶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몸과 마음에 두려움과 아픔을 일으키는 일은 무엇이든 피했다. 여기에는 남을 해하는 것, 과식과 과음, 지나친 성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Stoics, 행 17:18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모든 지혜와 자제력과 선량함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나쁜 판단과 인생의 그릇된 길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생기는 격정과 흥분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고 선량한 삶을 통해 이러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바울이 시장거리에 전도하는 소리를 듣고 그와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불렀다(행 17:18).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마르스의 언덕’(Mars' Hill)이라 불리는 아레오파구스(Areopagus, 행 17:19, 22 ‘아레오바고’) 모임에 초청하여 말하게 하였는데, 그 모임은 새로운 가르침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회집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그들의 문화와 연결시켰다(22-25절). 그는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세워진 단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고 말했다.
교훈: 바울은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이교 철학자들에게 말할 때는 성경을 사용하는 대신 그들이 익숙히 아는 문화를 진리와 연결시켜 말하였다.
부가적용)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는 세상에 세 가지 종류의 전도자와 설교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설교로 십자가가 빠진 보편적인 설교로 흔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주제이다. 두 번째는 아덴에서 바울처럼 십자가와 더불어 철학적인 논리를 통해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회복을 논하는 혼합적인 설교이다. 지성인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전도 방법처럼 생각된다. 세 번째는 오로지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 하는 전통적인 설교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너무나 재미가 없는 전도 방법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로부터 식상해 하고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조는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천하에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 뿐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이나 종교나 철학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없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뿐 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인간의 생각으로는 복음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세상에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되기 때문에 비웃고 조롱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음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는 곳마다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비결은 바울의 말재주가 아니라 배후의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세상이 갈수록 인간의 심성이 바위처럼 무감각하게 굳어져가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연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나 인간의 말재주로 가능한 일일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세상 지혜 자들이 볼 때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과연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 사항일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바울이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의 도를 전파할 때마다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게 되면 지난 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똑같은 복음인데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아덴에서와 달리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할 때에 사람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만을 사모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깊으신 것을 다 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각 사람에 맞도록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능히 믿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귀로 들려지는 소리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삼년이나 가르치시고 난 후에 세상 땅 끝으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오순절 마가에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땅 끝까지 능히 증거 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수요일(7월 9일)
마르스 언덕에서의 기별(행 17:18-34)
도입)
우리가 선교사를 파견할 때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재무장시킨다. 베드로의 오순절 날 유대인에게 한 설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기별이 필요 없었다. 모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에게는 그 창조주가 예수라는 사실이 중요했다.(행 2: 14 - 40) 그러나 아테네 마르스 언덕에서의 사도 바울의 설교는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 창조주를 선포하므로 시작된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창조주를 모르던 당시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기별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이다. 이를 비교해 보면 우리 각자가 전도 대상에 따라 해야 할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창조주를 가르치시길 바란다.
1. 사도행전 17:18-34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를 다시 읽으십시오. 이 설교에서 창조, 구속, 심판 등의 기본 교리가 어떻게 제시되었습니까? 그 교리들이 마치 재림교회 기별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답:
바울은 이교의 문학을 알고 있었고, 암송하고 있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첫째로 그는 크레타(Crete)의 시인이 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28절)는 시를 인용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 철학자 클레안테스(Cleanthes)가 제우스신에게 바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28절)는 사랑의 시를 한 구절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문화에서 한 부분을 취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와 연결시켰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 찬 신전을 향하여 손을 펼치고는, 그의 심령의 부담을 토로하면서 아덴 사람들의 종교적 오류를 폭로하였다.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도 그의 정연한 논리를 듣고 놀랐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었다”(사도행적, 237).
엘렌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바울의 말에는 교회를 위한 지식의 보배가 담겨 있다. 바울은 자신의 말로 교만한 청중들의 분노를 일으켜 스스로 어려움을 초래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만일 그의 설교가 직접적으로 그들의 신들과 그 도시의 위인들을 공격하였더라면 그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얻은 기지(機智)를 가지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참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이교의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하였다”(사도행적, 241).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그들의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그들의 필요와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관심을 우리의 기별과 연결시켜 전할 수 있다. 이것은 기별을 은폐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라는 의미이다.
교훈: 사도 바울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할 때에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익숙히 아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진리로 전환해갔다.
도입)
기독교는 맹신적 신앙이 아니고 객관적 신앙이다. 사실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논리적 신앙이다. 바울의 전도 방법은 눈높이 전도였다. 바울은 전도 대상이 논리적인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이고 자세하게 복음을 소개하고, 철학적인 사람은 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전도의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그 사람에게 맞게 올바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발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이 그만큼 복음을 어느 상황에서나 잘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투른 요리사가 서투른 요리를 꺼낼 수밖에 없듯이 복음을 위해서는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알고 익숙한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먼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과 상대방이 익숙한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목요일(7월 10일)
바울의 교회 개척 방법(롬 15:18-23)
도입)
바울에게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에 있어 과연 선교 전략이 있었을까? 전략 이라는 말이 인간의 관찰과 경험을 기초로 한 의도적이며 공식화된 인위적인 활동 계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에게 거의 혹은 전혀 전략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성령의 지시와 통제를 철저히 따르는 융통성 있는 운용 방식(modus operandi)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은 분명히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인간의 지혜나 기술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지도에 더 의존하였다.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여 성령께서 열어 놓으신 문들을 통해 나아갔을 때 복음은 뜻하지 않게 저절로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교회 개척 방법은 철저히 성령께 의존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나아갔다.
1. 로마서 15:18-23에 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9절)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답:
바울은 그 광활한 지역에서 주요 도시들에 먼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로마의 중요 도로와 항구에 위치한 중심지들을 선별하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행정의 중심지들이었다. 바울은 그 지역에 중요한 등대가 될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그는 신자들의 새 그룹들이 이 중심지에서 주변 지역으로 복음을 전달하도록 계획하였다. 교회를 개척하는 바울의 사역이 마쳐졌을 때, 지역선교의 사역은 새 신자들을 통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한 제2차 선교여행 때에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 도시는 로마의 두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그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 세워진 신자들의 튼튼한 모임은 하나의 견실한 중심점이 될 것이었다. 이 중심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교회들이 개척되면서 그 지역 전체로 복음이 확산될 것이었다.
예측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7-8).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본이 되었다.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모임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에클레시아는 단지 함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교회는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할당된 지역사회로 뻗어나가야 한다.
교훈: 바울의 교회개척 방법은 먼저 주요 도시에 중심적인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전 지역으로 복음을 확산시켜 나가는 전략이었다.
부가적용)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도시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선교지로 나아가면 어떤 도시에서든지 먼저 회당으로 들어갔다. 회당에서 그는 먼저 유대인을 만날 수 있었고, 이방인 개종자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을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헤들런드(Roger E. Hedlund)는 이러한 바울의 선교 방법에 대하여 참으로 좋은 선교 전략 이라는 격찬과 함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당 공동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유일신교에 매력을 느낀 지지자들은 물론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회심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할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아직 완전한 개종자들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범주에 속하는 경건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건한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흔히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였다(행13:45,50, 14:2,19, 17:5, 18:12, 21:27, 23:12등).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추방당하는 일들이 잦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으며(행18:7, 19: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그는 또 다시 회당으로 향하곤 하였다. 이러한 회당 중심의 선교에 대하여 케인(J. H. Kane)은 바울을 대적하는 대부분의 세력이 회당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은 로마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고 평가하였다. 바울이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한 회당들은 다음과 같다. 구브로에서의 살라미 회당(행13:5), 비시디아의 안디옥회당(행13:13-52), 이고니온회당(행14:1-6), 데살로니가회당(행17:1-9), 베뢰아회당(행17:10-14), 아덴회당(행17:15-34), 고린도회당(행18:1-17), 에베소회당(18:18-22)등이다. 다만 회당을 찾을 수 없었던 빌립보에서만은 다른 기도할 장소를 찾아야 했을 뿐 그는 회당을 복음 전파의 본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바울이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을 구사한 것도 역시 도시를 거점으로 한 주변의 복음화를 위한 전략이었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신학적으로 빈틈이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 청중에게 유대인 회당이 도시에서마다 바울로서는 목회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장소였지만 그것이 그의 목회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아니었다. 그의 선교는 선교 본부 중심의 선교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안디옥교회가 그의 이방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은 안디옥교회의 소달리티(Sodality)였으며, 그들의 선교는 또한 디아스포라와 회당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해 나가는 선교였다. 그러나, 바울의 도시 중심의 집중 선교 전략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대도시를 선택하게 된 것은 거기에는 생활이 보다 안락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대도시들이 복음의 빛을 주변 지역에 전파하는 데 있어서 전략적 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타이센(Gerd Theissen)의 지적처럼 인구가 새롭게 불어남으로 발전되어 가는 도시들은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인 시골보다는 새로운 메시지에 대하여 더욱 열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등 네 지역을 선택하였다. 갈라디아와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역이었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유럽 지역이었다. 그는 모든 지역을 다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좁은 지역을 선택하였고, 이들 지역의 중심 도시들을 선교의 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전도함으로서 그 주변의 복음화는 새로 설립된 교회에 일임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즉 바울이 골로새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케인(J. H. Kane)은 바울의 이러한 선교 방법을 통한 효과를 산술급수적인 것 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고 표현하였다.
금요일(7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와 같이 바울은 때와 경우에 따라 일하는 방법과 기별 전하는 법을 달리하였다”(복음 교역자, 118).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일하는 데 상투적인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지 말고, 상대하는 사람의 신분과, 또 만나는 때와 처지에 따라 진리를 소개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복음 교역자, 119).
“바울은 유쾌하고 끈기 있는 친절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그들의 편견을 잠재우고, 그들의 감정을 격동시키지 않으면서 진리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엘렌 G. 화잇, 바울의 생애의 소묘,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무신론자인 대학생에게 어떻게 진리를 소개할 수 있을까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믿지만 재림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떻게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까? 이전에 재림교인이었던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우리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은 무엇입니까? 즉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증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현재 출석하는 교회는 선교 중심의 교회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더 널리 손길을 펼칠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상대가 우리의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모본을 통해 보여주었다.
7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4분)
도입)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다. 바울의 거듭남으로 본받을 것은 영적 성장이다. 바울은 은혜를 받음으로 급성장하여 옛 사람을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탄생시켰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우리도 받은 은혜의 큰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마 7:18) 바울은 신령하고도 거룩한 성령의 사람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은혜의 광채가 났고 그의 마음에서는 사랑과 영혼 구원의 사명에 불타는 열정이 있었으며, 그의 생활에서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과 말씀을 증거 하는 권세가 나타났다. 이것이 바울의 열매이다. 바울 사도는 일하는 일군이다. 그는 전도의 일을 자비로 하고 어느 개인이나 교회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애써 주야로 일했다. 그의 전도의 일은 처음부터 수고였다. 바울의 수고는 육신의 수고, 정신적인 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일 곧 전도하거나 교회를 치리하거나 심령을 인도하는 영적인 일의 수고와 충성의 수고를 하였으며, 자기를 쳐서 날마다 죽는 겸손의 수고도 하였다(고전 15:31).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일을 많이 간증하고 또 사모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심령에 은혜를 받건 육신에 복을 받건 수고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의 수고와 고을과 촌을 찾아가는 수고를 하셨고(막 1:38-39),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는 수고를 하셨으며(요 8:29), 바울도 충성하는 일군으로써 수고를 하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다(고전 4:2). 수고 없는 믿음의 생활은 없다.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들도 수고의 일이 있은 후 복을 받는다. 일을 해야 한다. 수고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의 전도방법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전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증거 할 때 바울의 이 방법을 본받아야 한다.
기억절: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
연구범위: 행 11:19-26, 13:16-42, 17:18-34.
중심 사상: 사도 바울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면서, 우리에게 상황에 맞는 기별 전파 방법을 배우라고 권한다. 이것은 기별 그 자체와 다양한 문화를 함께 접목시키는 문제이다.
안식일 오후
재림교회 초창기에 외방 선교사들은 우리의 현대 진리 메시지를 선교지 현장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전 세계적인 ‘글로벌 미션 프로젝트’(Global Mission project)는 다른 종교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방법들을 개발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여러 연구센터들을 후원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의사소통을 하려면 먼저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의 기별을 다른 배경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맞도록 조정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의 기별을 다양한 군중들과 나눌 때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찰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더 잘 전하기 위해 바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일요일(7월 6일)
바울이 선교사업에 가담함(행 11:19-26)
도입)
사울은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교회를 잔멸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8:3, 9:1-2)하던 사울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성령 충만을 받고, 침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리스도라 증거 한다. 이러한 급회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아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다메섹에 살았어도 결코 사울을 용납하기에는 어려웠을 것 같다. 좀 더 관찰해야 할 대목은 사울이 거듭난 이후 '즉시로'복음을 전하였다는 대목이다. 사도행전 9장의 내용으로 하면 1주일 정도 지난 후에 곧바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9,19b,23). 하지만 사도와 전도자가 되기까지를 간단히 적고 있는 갈라디아서 1장 11절 이하를 보면 상황은 좀 다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을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15일을 유할새."(갈1:16b-18)''''''''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사울이 회심한 후에 3년간의 아라비아 연단 기간이 있었다고 동의한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자신의 심성을 새롭게 갱신시켰으며, 주의 말씀을 연구하고 깊은 영적 사색과 묵상을 통해 '사도수업'을 받았다. 이 준비 기간을 거치고서, 그리고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일에 헌신한다. 그는 단지 열정 하나만으로, 부르심을 받아 '택한 그릇'이 되었다는 소명만으로, 주님을 직접 만났다는 경험과 확신만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최소한 3년 동안이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라는 승부를 인내로서 경주한 이후에 복음 전도자의 삶으로 헌신하게 된다. 배(桃)도 3년생 가지에서 열린다. 뭔가를 진득하게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성급하게 시작하면 '풋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다. 평생 헌신과 사역을 위해서 3년을 준비한 사울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에도 어떤 사도들은 그가 참된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행 9:26).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교회를 파괴하고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 첩자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때 바나바가 일어나 바울을 옹호하고 나섰다(27-28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행 11:24).
1.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행 11:19-24). 그 교회에서의 사역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습니까?
답: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안디옥에 있는 신자들의 새로운 모임에 관해 들었다. 안디옥은 그 당시 로마제국의 3대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유명한 바나바를 신속히 파송하여 안디옥 교회를 강화하고 세우는 일을 돕게 하였다.
2. 사도행전 11:25-26에 따르면, 바나바는 왜 바울을 그의 동역자로 선택했습니까?
답:
사도행전은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핍박자 사울이 선교사 바울이 되고, 구원의 복음이 단지 유대인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좋은 소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신의 지난 날 핍박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상황을 듣고 바나바를 보내어 그곳의 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바나바는 바울의 소명에 관해 듣고 그를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1년 동안 바나바와 바울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교회가 점점 더 든든해지면서 자비의 정신도 배양되어 다른 이들을 돕기에 이르렀다. 이 교회의 신자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유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구호금을 보냈다(행 11:28-30). 그들은 자신들의 축복을 이기적으로 간직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훈: 성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파괴하던 사울이 그리스도의 선교사가 되어 교회를 부흥케 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의 실용성으로 방법적인 면을 알아보면 바울은 무작정 그의 선교를 전개시킨 것이 아니라 지역적 특성(4개 지역에 대한 선교, 대도시 중심의 선교), 상황적 특성(유대인 회당을 이용한 선교), 시간적 특성(반응자 우선 선교, 즉각 침례를 베푸는 선교), 선교의 융통성, 삶을 통한 인격적 모범을 통해 실용성을 확대 시켰다.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의 세계성으로 그의 선교의 범위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확대됨으로 그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로마를 지나 스페인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개하고자하는 그의 선교전략의 세계성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 선교전략의 지속성으로, 바울은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선교를 했으며,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충분한 기간을 체류했으며, 혼자 하는 선교가 아니라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였다. 특히 그는 세워진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랬다. 바울의 선교전략의 특성은 선교를 교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현대교회가 반드시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월요일(7월 7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고전 9:22)
도입)
전도나 복음 전파는 일방적으로 한쪽의 주장을 강요하는 형식이어서는 안되며 도리어 상대방의 현실과 심령 상태에 대한 면밀한 배려와 헌신적인 사랑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이 타인과 동일시(identification)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하는 바, 바울은 본문에서 그 전형(type)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의 권위를 버리시고 세리와 창기들과 벗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셨다(마 9:10).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본 절은 곧 바울의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 롬 9:3).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부정하는 원리이며 그의 모든 행위는 이러한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Godet). 그가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다(고후 4:5). 바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한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고전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17-29).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
고린도전서 9:22에서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말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그가 타협을 권장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바울은 복음과 교리, 원칙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변경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매력적이고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느 도시에 도착하면 회당을 방문하여 거기서 가르쳤다(참조, 행 9:19-22, 13:14-16).
1. 사도행전 13:16-42에 나오는 그의 설교에서 바울은 성경 역사의 어느 부분을 언급하였습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을 권위의 근거로 사용하였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습니까?
답:
2. 사도행전 14:8-18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이방인들은 구약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십시오.).
답:
여기서 바울은 성경을 권위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15절에서 구약을 응용하기는 하였다). 그는 시인의 시구(詩句)를 인용하기도 하고, 천연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 우상숭배의 무익함을 지적해 주고자 하였다.
교훈: 바울은 진리의 원칙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대상에 따라 전도의 방법을 달리했는데,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에도 응용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본 절에서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세계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변화하는 선교 환경에 따라 각 시대마다 선교의 수단과 방법, 전략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선교의 역사는 ‘연안선 선교시대(Coastal Mission Era)’, ‘내지 선교시대(Inland Mission Era)’, ‘미전도종족 선교시대(Unreached People Mission Era)’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와 바야흐로 ‘전문인 선교시대(Professional Mission Era)’를 맞이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선교의 방법에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바울은 전도의 대상에 걸 맞는 방법에 맞게 전도를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요일(7월 8일)
철학자들에게 전도함(행 17:18-34)
도입)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도하였으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받아드리는 대신에 무시하여 버렸다. 바울은 그와 같이 자신들의 지혜만을 앞세우고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아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으로 논리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 복음 전도의 성과는 다른 곳에 비해 미미하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마치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과 철학을 혼합한 말과 지혜로 아덴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을 실패로 판단할 정도였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행17:32) 아덴을 떠난 바울이 우상과 무신론 철학과 죄악이 가득한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도하려고 할 때에 평소 바울답지 않은 연약한 면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여기서 ‘약하고’라는 말은 아무 무력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소심하고 마음이 약해진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또 ‘두려워하고’라는 말은 공포심과 놀람으로 경악할 정도의 심정을 뜻이고 ‘심히 떨었노라’라는 말은 두려움으로 인해 전율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바울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였을까?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도한 방법은 아덴에서 와는 사뭇 달랐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는 말은 아덴에서처럼 헬라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고, 화려한 문학적인 수식어를 동원하여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의 설교자들도 바울과 같은 시험을 당하기가 쉽다. 좀 더 자신을 실력 있는 사람으로 내 비취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실력 있는 사람을 알리고 싶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설교하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과일을 달리게 하는 가지와 과일을 잘 익게 만드는 나뭇잎 새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의 선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아덴(Athens)에서의 활동이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의 본고장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과 지성과 자유로운 사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하였다(행 17:16). 이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1. 사도행전 17:18-34에는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는 무엇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사역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습니까?
답:
에피쿠로스(Epicureans, 행 17:18 ‘에비구레오’) 철학자들은, 지고(至高)한 행복이 아픔과 두려움이 없는 삶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몸과 마음에 두려움과 아픔을 일으키는 일은 무엇이든 피했다. 여기에는 남을 해하는 것, 과식과 과음, 지나친 성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Stoics, 행 17:18 ‘스도이고’) 철학자들은 모든 지혜와 자제력과 선량함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나쁜 판단과 인생의 그릇된 길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생기는 격정과 흥분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고 선량한 삶을 통해 이러한 격정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바울이 시장거리에 전도하는 소리를 듣고 그와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불렀다(행 17:18).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마르스의 언덕’(Mars' Hill)이라 불리는 아레오파구스(Areopagus, 행 17:19, 22 ‘아레오바고’) 모임에 초청하여 말하게 하였는데, 그 모임은 새로운 가르침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회집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그들의 문화와 연결시켰다(22-25절). 그는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 세워진 단을 가리키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고 말했다.
교훈: 바울은 유대인 청중들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이교 철학자들에게 말할 때는 성경을 사용하는 대신 그들이 익숙히 아는 문화를 진리와 연결시켜 말하였다.
부가적용)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는 세상에 세 가지 종류의 전도자와 설교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설교로 십자가가 빠진 보편적인 설교로 흔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주제이다. 두 번째는 아덴에서 바울처럼 십자가와 더불어 철학적인 논리를 통해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회복을 논하는 혼합적인 설교이다. 지성인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전도 방법처럼 생각된다. 세 번째는 오로지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 하는 전통적인 설교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너무나 재미가 없는 전도 방법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로부터 식상해 하고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조는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천하에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 뿐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이나 종교나 철학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없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뿐 이라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인간의 생각으로는 복음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세상에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되기 때문에 비웃고 조롱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음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는 곳마다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비결은 바울의 말재주가 아니라 배후의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세상이 갈수록 인간의 심성이 바위처럼 무감각하게 굳어져가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연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나 인간의 말재주로 가능한 일일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세상 지혜 자들이 볼 때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과연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 사항일 수 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바울이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의 도를 전파할 때마다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게 되면 지난 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똑같은 복음인데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아덴에서와 달리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할 때에 사람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만을 사모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깊으신 것을 다 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각 사람에 맞도록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능히 믿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귀로 들려지는 소리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삼년이나 가르치시고 난 후에 세상 땅 끝으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오순절 마가에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땅 끝까지 능히 증거 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수요일(7월 9일)
마르스 언덕에서의 기별(행 17:18-34)
도입)
우리가 선교사를 파견할 때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재무장시킨다. 베드로의 오순절 날 유대인에게 한 설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 창조주에 대한 기별이 필요 없었다. 모든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에게는 그 창조주가 예수라는 사실이 중요했다.(행 2: 14 - 40) 그러나 아테네 마르스 언덕에서의 사도 바울의 설교는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 창조주를 선포하므로 시작된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창조주를 모르던 당시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기별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이다. 이를 비교해 보면 우리 각자가 전도 대상에 따라 해야 할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믿지 않는 자에게는 창조주를 가르치시길 바란다.
1. 사도행전 17:18-34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를 다시 읽으십시오. 이 설교에서 창조, 구속, 심판 등의 기본 교리가 어떻게 제시되었습니까? 그 교리들이 마치 재림교회 기별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답:
바울은 이교의 문학을 알고 있었고, 암송하고 있던 일부 내용을 인용하였다. 첫째로 그는 크레타(Crete)의 시인이 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28절)는 시를 인용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 철학자 클레안테스(Cleanthes)가 제우스신에게 바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28절)는 사랑의 시를 한 구절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문화에서 한 부분을 취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와 연결시켰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 찬 신전을 향하여 손을 펼치고는, 그의 심령의 부담을 토로하면서 아덴 사람들의 종교적 오류를 폭로하였다.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도 그의 정연한 논리를 듣고 놀랐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었다”(사도행적, 237).
엘렌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바울의 말에는 교회를 위한 지식의 보배가 담겨 있다. 바울은 자신의 말로 교만한 청중들의 분노를 일으켜 스스로 어려움을 초래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만일 그의 설교가 직접적으로 그들의 신들과 그 도시의 위인들을 공격하였더라면 그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얻은 기지(機智)를 가지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참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이교의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하였다”(사도행적, 241).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그들의 위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그들의 필요와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관심을 우리의 기별과 연결시켜 전할 수 있다. 이것은 기별을 은폐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라는 의미이다.
교훈: 사도 바울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할 때에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익숙히 아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진리로 전환해갔다.
도입)
기독교는 맹신적 신앙이 아니고 객관적 신앙이다. 사실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논리적 신앙이다. 바울의 전도 방법은 눈높이 전도였다. 바울은 전도 대상이 논리적인 사람들에게는 논리적이고 자세하게 복음을 소개하고, 철학적인 사람은 철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전도의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그 사람에게 맞게 올바르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순발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이 그만큼 복음을 어느 상황에서나 잘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투른 요리사가 서투른 요리를 꺼낼 수밖에 없듯이 복음을 위해서는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알고 익숙한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먼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과 상대방이 익숙한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목요일(7월 10일)
바울의 교회 개척 방법(롬 15:18-23)
도입)
바울에게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에 있어 과연 선교 전략이 있었을까? 전략 이라는 말이 인간의 관찰과 경험을 기초로 한 의도적이며 공식화된 인위적인 활동 계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에게 거의 혹은 전혀 전략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성령의 지시와 통제를 철저히 따르는 융통성 있는 운용 방식(modus operandi)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은 분명히 일정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인간의 지혜나 기술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지도에 더 의존하였다.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여 성령께서 열어 놓으신 문들을 통해 나아갔을 때 복음은 뜻하지 않게 저절로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교회 개척 방법은 철저히 성령께 의존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나아갔다.
1. 로마서 15:18-23에 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바울은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9절)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답:
바울은 그 광활한 지역에서 주요 도시들에 먼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로마의 중요 도로와 항구에 위치한 중심지들을 선별하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행정의 중심지들이었다. 바울은 그 지역에 중요한 등대가 될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그는 신자들의 새 그룹들이 이 중심지에서 주변 지역으로 복음을 전달하도록 계획하였다. 교회를 개척하는 바울의 사역이 마쳐졌을 때, 지역선교의 사역은 새 신자들을 통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와 함께 한 제2차 선교여행 때에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그 도시는 로마의 두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그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 세워진 신자들의 튼튼한 모임은 하나의 견실한 중심점이 될 것이었다. 이 중심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다른 교회들이 개척되면서 그 지역 전체로 복음이 확산될 것이었다.
예측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 1:7-8).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의 본이 되었다. 교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모임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에클레시아는 단지 함께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교회는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할당된 지역사회로 뻗어나가야 한다.
교훈: 바울의 교회개척 방법은 먼저 주요 도시에 중심적인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전 지역으로 복음을 확산시켜 나가는 전략이었다.
부가적용)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도시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선교지로 나아가면 어떤 도시에서든지 먼저 회당으로 들어갔다. 회당에서 그는 먼저 유대인을 만날 수 있었고, 이방인 개종자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을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헤들런드(Roger E. Hedlund)는 이러한 바울의 선교 방법에 대하여 참으로 좋은 선교 전략 이라는 격찬과 함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당 공동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유일신교에 매력을 느낀 지지자들은 물론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회심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할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아직 완전한 개종자들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범주에 속하는 경건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건한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흔히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였다(행13:45,50, 14:2,19, 17:5, 18:12, 21:27, 23:12등).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추방당하는 일들이 잦았지만 그 때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으며(행18:7, 19:7),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그는 또 다시 회당으로 향하곤 하였다. 이러한 회당 중심의 선교에 대하여 케인(J. H. Kane)은 바울을 대적하는 대부분의 세력이 회당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은 로마 세계에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고 평가하였다. 바울이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한 회당들은 다음과 같다. 구브로에서의 살라미 회당(행13:5), 비시디아의 안디옥회당(행13:13-52), 이고니온회당(행14:1-6), 데살로니가회당(행17:1-9), 베뢰아회당(행17:10-14), 아덴회당(행17:15-34), 고린도회당(행18:1-17), 에베소회당(18:18-22)등이다. 다만 회당을 찾을 수 없었던 빌립보에서만은 다른 기도할 장소를 찾아야 했을 뿐 그는 회당을 복음 전파의 본거지로 삼았던 것이다. 바울이 도시 중심의 선교 전략을 구사한 것도 역시 도시를 거점으로 한 주변의 복음화를 위한 전략이었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신학적으로 빈틈이 없는 유대인과 이방인 청중에게 유대인 회당이 도시에서마다 바울로서는 목회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장소였지만 그것이 그의 목회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아니었다. 그의 선교는 선교 본부 중심의 선교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안디옥교회가 그의 이방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은 안디옥교회의 소달리티(Sodality)였으며, 그들의 선교는 또한 디아스포라와 회당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해 나가는 선교였다. 그러나, 바울의 도시 중심의 집중 선교 전략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대도시를 선택하게 된 것은 거기에는 생활이 보다 안락하고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대도시들이 복음의 빛을 주변 지역에 전파하는 데 있어서 전략적 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타이센(Gerd Theissen)의 지적처럼 인구가 새롭게 불어남으로 발전되어 가는 도시들은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인 시골보다는 새로운 메시지에 대하여 더욱 열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니아, 아가야등 네 지역을 선택하였다. 갈라디아와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역이었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는 유럽 지역이었다. 그는 모든 지역을 다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좁은 지역을 선택하였고, 이들 지역의 중심 도시들을 선교의 센터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전도함으로서 그 주변의 복음화는 새로 설립된 교회에 일임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즉 바울이 골로새에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골로새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 케인(J. H. Kane)은 바울의 이러한 선교 방법을 통한 효과를 산술급수적인 것 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인 것이었다 고 표현하였다.
금요일(7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와 같이 바울은 때와 경우에 따라 일하는 방법과 기별 전하는 법을 달리하였다”(복음 교역자, 118).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일하는 데 상투적인 한 가지 방법만을 사용하지 말고, 상대하는 사람의 신분과, 또 만나는 때와 처지에 따라 진리를 소개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복음 교역자, 119).
“바울은 유쾌하고 끈기 있는 친절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그들의 편견을 잠재우고, 그들의 감정을 격동시키지 않으면서 진리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엘렌 G. 화잇, 바울의 생애의 소묘,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무신론자인 대학생에게 어떻게 진리를 소개할 수 있을까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믿지만 재림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떻게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까? 이전에 재림교인이었던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우리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기본적인 사항은 무엇입니까? 즉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증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현재 출석하는 교회는 선교 중심의 교회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더 널리 손길을 펼칠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상대가 우리의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바울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 모본을 통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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