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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여자에게서 나심: 속죄와 성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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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1.12 10:00 조회수 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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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여자에게서 나심: 속죄와 성육신

11월 2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7분)


도입)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내용은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나 신앙하는 사람에게 성경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하다. 과연 남자 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라는 생물학적 문제가 논란의 주된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늘과 같은 과학주의 시대에서 이 문제는 더욱 더욱 크게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 세상으로 찾아오실 때 하나님 스스로 택하신 신비이다. 이 사실에서 제시하는 근본 핵심은 "하나님의 성육신" (Incarnation)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자신을 낮춘 사건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기비하 사건인 것이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구원은 하늘과 땅 사이 어느 곳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다. 인격적인, 집단 적인 역사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세계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헌신 안에서 우리와 그 사이의 무조건적인 연대성, 동일성, 인간됨이 문제인 것이다." 먼저 "성령으로 잉태 되사"에서 "잉태되다"는 어떤 근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궁극적인 수태, 그 참된 주도권이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의 시작이 인간의 선제권이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그가 아들을 낳을 것 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 때 "마리아는 자신이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천사는 그러한 일이 남자의 도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오심으로, 예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되었다. 이 역사는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영원한 근원에서부터 우리의 시간 안으로 라는 변경될 수 없는 방향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고, 전적으로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기억절: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연구범위: 마 1:18-25, 3:13-17, 4:1-11, 9:35, 막 1:12-13, 요 1:1-2, 14, 골 2:9, 히 1:3.


중심 사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통하여 인류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인간 상호간에도 조화를 회복하셨다는 사실을 탐구한다.


안식일 오후

아무리 학식이 많은 과학자라 할지라도 우주가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또한 신비로 가득 차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신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신 사실을 공부할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일 것이다. 인간의 유한한 머리로는 창조주께서 기꺼이 비천한 인간이 되셔서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가지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시지 않았다면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일요일(11월 16일)

성육신의 신비(골 2:9)


도입)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랑을 위하여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Incarnation 곧 성육신의 신비요 은총이다.


마리아는 특별한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서 이렇게 반응하였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 1:34)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눅 1:35). 이 아기는 성령의 창조적인 능력을 통해 마리아의 태를 빌어 역사 속으로 오셨다(마 1:18). 여기서 '덮으리라'는 동사는 출애굽기 40:35을 생각나게 해 주는데, 거기에는 구름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 임하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태에서 탄생하시기 위해 신비로운 방법으로 강림하셨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비록 두 본성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하나님이 '인간 속에' 사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신 것이다. 그분은 참으로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고, 참으로 인간이셨다. 성경은 마리아의 태에서 두 본성이 결합되는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고 그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사셨다.


1. 골로새서 2:9은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셨다고 말합니까?

답: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신 동안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것을 잃어버리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빌 2:6)시요, 하나님과 동등하셨으나, 성육신을 통하여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6-7).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모든 것을 아버지의 권능 아래 두셨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동안 그분은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잃지 않으셨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안에 숨겨지셨다. 그분의 신성은 항상 완전히 유지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인간의 속죄를 위해 그분께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다.


교훈: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동안에도 그분의 신성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진리와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부가적용)

인류를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야만 그 뜻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성육신하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구원사역의 본질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 일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일(구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선한 일(good works)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사랑의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면서 “인간의 선한 일로는 구원에 절대 이르지 못하느니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독생자)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게 된단다.”라고 일깨우신다. 이런 관점에서 독생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풀이가 되는 이치이다. ‘보내신 이’란 신의 하강이며 초월의 현존화를 의미하는 성육신의 신비를 일컫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심오한 신비는 하나님이 친히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셨으며, 몸을 지닌 채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고, 몸을 지닌 채 죽으시고, 몸을 지닌 채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그 몸의 생명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것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이다. 기독교만큼 몸을 중시하는 종교도 없다. 기독교는 몸을 원수나 영혼을 잡아 가두는 감옥으로 보지 않는다. 거룩한 영이 깃드는 거룩한 성전으로 찬양한다. 성육신의 주님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몸이 하나님이 지니신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가 되도록 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허약한 몸은 하나님이 지니신 생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우리의 허약한 몸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셨다. 즉 예수님과 더불어 신적 생명으로 부활할 채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성육신(Incarnation)이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신의 하강, 초월의 내재와 영원성의 현존인 신비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월요일(11월 17일)

하나님과 인간의 재결합(고전 15:45)


도입)

성육신 자체는 심오하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최고의 기적이며,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그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경이롭게 찬양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그분이 젖먹이 아기가 되셨다. 지혜로우신 그 분이 새로 태어난 아기의 어리석음을 입으셨다. 하늘도 품을 수 있는 그 분이 한 여자의 뱃속에 갇히셨다. 스랍이 “거룩하다” 계속 외친 그 분이 세상에 죄인으로 나셨다. 변함없으신 그분이 변화의 세상에 나시기 위해 열 달 동안 끊임없이 변화를 겪으셨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분이 울음을 통해 의사를 표시해야만 했다. 무한하신 그분이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세포가 되셨다. 사랑이신 그 분이 아무도 방을 내어주지 않아 여관 밖에서 태어나셨다. 창조자이신 그분이 피조물이 되셨다. 항상 영이신 그분이 인간의 육신의 거북함을 입으셨다. 영원하신 그분이 자신이 시간에 의해 제한 되도록 허락하셨다. 성육신의 신비. 하나님의 아들이 왜 사람이 되셨는가? 그것은 신비중의 신비였다. 높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자신을 낮추심은 우리 인간과 같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자신의 대속적 죽으심을 통해) 사망의 세력을 잡고 인간위에 군림하는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죽기를 무서워하며 일생에 매여 마귀의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기 위함이었다. 곧 혈육을 입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는 중보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함께 육체적 고난을 겪으셨기에 이제 육체 가운데서 고난과 시험당하는 우리를 또한 이해하시고 도우실수가 있는 것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핵심구절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


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셨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마 26:38, 눅 2:40, 갈 4:4)

답: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 어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여자에게서 나셨고, 아이로 자라나시면서 순종을 배우셨으며(히 5:8),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마 26:38, 눅 23:46). 성경은 또한 예수님을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한다(요 1:1-2, 14, 히 1:3).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과 하나님의 연합은 구속 사역에 있어 필수적인 일이었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와 그 모든 후손들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분리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였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과의 재결합을 시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심으로 인간과의 재결합을 주도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재연합을 위한 결합의 장(場)이 되셨다. 성육신을 통해 "신성과 인성은 신비롭게 결합되었고, 인간과 하나님은 하나가 되었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6년 7월 30일자). 이 결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래의 연합보다 더 심오한 것이었다.


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5에서 예수님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답: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한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분은 창조주시요 그 새 인류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새 인류를 존재하게 하신 새 아담이시다. 그분 밖에는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은 옛 인류가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으로 달려갈 뿐이다(고전 15:22). 이들을 위한 유일의 희망은 성육신하신 하나님 밖에 없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의 줄로 인류를 하나님과 묶으셨다.


교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영원한 사랑의 줄로 하나님과 인간을 재결합시키셨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


부가적용)

"성육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훌륭하고 찬란하고 놀라워서 마치 눈부신 표정처럼 빛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육신의 신비 속에 담긴 무한한 겸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시며 존재 자체요, 무한자이시며 완전 자체로,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만물의 지고한 주인이신 위대하신 분이 가장 낮은 자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신비이다. 스승님처럼 작아지기 위해서, 스승님과 같이 있기 위해서, 충실한 종이요 제자로서 스승님의 뒤를 한 발짝 한 발짝 따라가기 위해서, 일생을 그렇게 사시고 탄생부터 그 모범을 보여주신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마지막 자리를 열망해야 한다."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가'는 오늘도 변함없이 울려 퍼진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의 찬가'가 빈껍데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찬가'가 수도 없이 반복되어 선포되어도 그리스도처럼 내려가는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울려 퍼지는 메시지를 잘 살펴보면 온통 올라가는 길이다. 그걸 '근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아무도 그들을 향해 감히 우려의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고지를 점령하라.' '깨끗한 부자'가 되어라. 그럴듯하게 성경 말씀으로 멋지게 포장되어 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리스도의 찬가'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화요일(11월 18일)

예수님의 침례(마 3:13-17)


도입)

중앙 아프리카에 살았던 니앙위라(Nyangwira)는 침례를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괜찮은 사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1년 이상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열망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그동안 배운 진리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남편은 격노하여 "우리 집에 이따위 종교는 필요 없어. 계속 공부하면 죽여버릴 테야"라고 소리쳤다. 낙담은 되었지만 니앙위라는 성경을 계속 공부했고 침례 받을 준비를 끝냈다. 침례식에 가기 위해 출발하면서 니앙위라는 남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오늘 침례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의 사냥칼을 집어 들며 "네가 침례 받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침례 받는 날이 곧 네가 죽는 날인 줄 알아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로 단호히 결심한 니앙위라는 남편의 위협이 귀에 쟁쟁히 울리는 가운데 떠났다. 물에 들어가기 전 그는 자신의 죄들을 고백하고, 오늘 또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생애를 그의 주님께 드렸다. 침례를 받았을 때 그의 마음에 평화가 가득 찼다. 집에 돌아온 그는 칼을 남편에게 가져 왔다. "너 침례 받았느냐?"라고 남편이 화를 내며 물었다. "네"라고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기 칼이 있어요." "죽을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네, 되어 있어요." 그의 용기에 놀란 남편은 더 이상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침례는 얼마나 중요한가? 침례는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침례를 요구하시는가? 구원은 침례를 받는 여부에 달려 있는가?


1.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침례 받으신 기사에서 우리는 어떤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까?(마 3:13-17)

답:

그리스도의 침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예수께서는 침례를 자청하심으로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하셨다. 침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그분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요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다.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본을 남기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침례에는 본을 남기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침례를 통하여, 우리도 침례를 받음으로 그분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이 침례 받으실 때에 임했던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예수께서는 침례 받으신 후 물에서 나오시자마자 무릎을 꿇으시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셨다(눅 3:21-22). 성경은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버지로부터의 대답은 그 내용에 대하여 암시해 준다. 아버지께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고 선언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도가 들으신바 되었음을 알리셨다.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 희망과 자비의 말씀이 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받으신바 되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가납하신바 된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4년 11월 12일자)


2. 위에 인용한 엘렌 화잇의 글에서 어떤 위대한 소망을 발견합니까?

답:

셋째, 예수님의 침례 시에 삼위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였다. 아버지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고, 성령께서는 볼 수 있는 비둘기의 형상으로 임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인류를 대표하신 당신의 아들에게로 흘러내렸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셨기 때문에,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교훈: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키셨다.


부가적용)

그리스도는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곧 침례를 베풀었다. 그것은 새신자의 믿음에 대한 확인이었다(행 8:12, 16:30-34 참조). 베드로는 침례와 구원의 관계를 예시하기 위해 홍수시 겪은 노아의 경험을 사용했다. 홍수이전 시대에 죄는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회개 하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선택하라고 세상에 경고하셨다. 단 여덟 사람만 믿고 방주에 들어갔고, 그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 21)고 말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을 침례로 기념하라는 말씀이다. (킹제임스 성경) 마태복음 28:19,20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표준 새번역)베드로전서 3:21 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침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침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가지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바르게 번역된 두 성경에선 세례가 아닌 "침례"라 칭하고 있다.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듯이, 우리는 침례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고 설명했다. 물론 홍수의 물이 아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 하셨다. 신자에게서 죄를 제거하는 것은 침례의 물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러나 침례는 방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노아의 순종처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찾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준비된 구원의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침례는 구원과 매우 필수 불가결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통과할 때 위의 구름과 양편의 물로 말미암아 "물 속에 잠김으로" 상징적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다(고전 10:1-5). 그와 같이 오늘날도, 침례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스라엘의 경험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1, 12).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신 이 복음은 예수께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고 하신 복음임은 틀림이 없다.


수요일(11월 19일)

예수님의 시험(마 4:1-11)


도입)

침례 받으신 후 예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림을 받았다. 거기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앞으로 주님께서 행하실 사역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런데 거기에도 시험이 찾아왔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에,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장소에 시험이 찾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영적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사단의 시험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금식기도 했으니까 사단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철저히 지키고, 성경 날마다 읽고, 열심히 새벽기도 드리고, 십일조 철저히 드리니까 사단이 아예 시험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단은 더 교묘하고 간교한 시험 문제를 가지고 찾아간다. 사단이 광야의 예수님을 시험했을진대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사단이 예수님 앞에 던진 세 가지 시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시험이다. 사단이 예수님 앞에 던진 세 가지 시험은 시간과 문화와 지역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이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그 이후의 모든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 가지 시험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승리함으로 더 큰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단이 광야의 예수님 앞에 던졌던 세 가지 시험을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던지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예수께서 침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직면하신 세 가지 시험은 무엇이었습니까?(마 4:1-11, 막 1:12-13)

답:

예수님의 시험은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시험과 몇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첫째, 아담은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의 세력이 득세하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둘째, 아담은 풍성한 음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못하셨다. 셋째, 아담은 금식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금식하신 상태였다. 넷째, 아담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무언가를 먹음으로 만족을 얻으라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하였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다섯째, 아담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드러냈으나, 예수님은 동일한 시험에도 굴복하지 않으셨다. 여섯째, 아담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의 왕국에 반역하는 일에 사단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단이 경배하기만 하면 이 세상 왕국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으셨을 때 아버지께만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단을 이기심으로 아담이 실패했던 자리에서 승리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승리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도 유효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인류는 아담을 통한 옛 인류와 달리, 불순종과 반역의 정신 대신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정신을 가질 것이다.


2. 예수께서 모든 죄에 승리하신 것은 속죄의 과정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고후 5:21)

답: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유대는 사단의 맹렬한 시험과 공격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심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 그분은 본성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우리를 창조주와 연합시키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승리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우리도 그분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다.


부가적용)

시험이 없는 인생이 없고, 시험이 없는 장소도 없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찾아오고, 어디에서나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왕에게도 시험이 있고, 걸인에게도 시험이 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고, 365일 앓아눕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어도 시험이 찾아오고, 산속에 꼭꼭 숨어 있어도 시험이 찾아온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시험이 찾아오고, 혼자 고독을 씹고 있어도 시험이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 시험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달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릴 때 달을 등지고 한참 도망가다가 돌아보면 여전히 달이 머리 바로 위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시험을 피해 도망가는 것은 그와 같다. 이 세상에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그 까닭은 우리를 시험하는 사단이 영적인 존재,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우리가 갖지 못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어둠의 왕으로 행세하면서 사람을 유혹하고, 시험한다. 사단은 우리가 속아 넘어가기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변장을 한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사단의 시험에 굴복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단의 시험을 이기는 승리의 생애를 사셨다. 승리의 생애를 사심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구세주가 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본이 되셨다. 예수님이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기 때문에 우리도 물리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극복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이다.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란다. 예수님과 함께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란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목요일(11월 20일)

치료 봉사(마 9:35)


도입)

예수께서 사람들을 치료하신 것은 천국의 증거로만 치료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또한 불쌍히 여기심만으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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