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속죄가 예고됨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 5과 속죄가 예고됨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0.21 09:45 조회수 4,121
글씨크기

본문

 

제 5과  속죄가 예고됨

11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4분)


도입)

인류의 죄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계획은 결코 하나님의 때 늦은 방편이 아니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은 뜻밖의 일이라고 놀라서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성급히 만들어 낸 것이 속죄의 도리가 아니었다.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나중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 인간을 구속할 속죄의 도리를 마련하였다. 마치 어떤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만들기 전에 벌써 그의 머리 속에 설계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도리가 실제로 성취되기 이전에 그의 마음속에 속죄의 도리를 설계하셨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유월절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기 몇 일 전에 "미리 정해졌다"(출12:3,6) 이와 마찬가지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니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벧전1:19,10) 그는 인간의 영생을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런데 이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1:2) 이와 같은 희생을 통하여 인간들이 의롭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창세전에" 선언되었다.(엡1:4).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비록 그들이 무지하여 악한 손을 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기" 때문이다 (행2:23).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천여 년 전에 비로소 시작된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연구범위: 창 3:15, 22:1-18, 출 32장, 34:6-10, 단 9장.


중심 사상: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있기 수 세기 전에 이미 여러 다른 방법으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예고해 주셨다.


안식일 오후

여호와께서는 죄의 치명적인 실체와 결과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신 후에 신속히 그 좋은 소식을 타락한 인류에게 알리셨다. (우주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는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자신이셨다!) 여호와께서는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 초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당신의 백성이 준비되어 있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이 구속의 약속을 그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셨다. 구약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계획과 직접 연결되는 실물들과 제도들을 고안하셨다. 성소 제도와 제사장, 그리고 메시야를 상징하는 왕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최고의 희생제물이시고 참된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실현시킬 메시야 왕이신 분의 도래를 고대하게 하셨다.

일요일(10월 26일)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약속(창 3:1-15)

 

(도입)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무화과나무 잎의 옷 대신에 가죽옷으로 옷을 지어서 입히셨다. 하나님께서 가족옷을 입히시고 그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 것은 죄인들을 위한 배려로서 그들의 수치를 가리어 주시고, 또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하시고 추위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셨다. 또한 이것은 곧 피흘림의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결국 이 피흘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어질 구원의 징표였다. 이는 먼 훗날 여자의 후손, 즉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며 구원에 이를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그들의 수치를 가리어 주시려고 가죽옷을 만들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동물이 피를 흘리고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보혈의 피를 흘리므로 의(義)의 옷을 죄인들에게 입혀 주실 것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의의 길을 예비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감격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프로젝트는 이 피흘림의 징표를 출발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이렇듯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정되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인하여 얻은 것임을 기억하고 평생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창세기 3:1-15을 읽으십시오. 특히 15절에는 어떤 예언이 주어졌으며, 거기서 우리를 위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 3:15을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알고 있다.

첫째, 창세기 3:15의 문맥에서 뱀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의 앞잡이를 가리킨다(계 12:9). 에덴동산에서 이 악의 세력은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렸고, 하나님의 신실한 무리를 상징하는 여자의 장래 후손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둘째, 창세기 3:15은 뱀이 여자의 후손에 의해 멸망될 것을 예고한다.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그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상하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슈프(shuph)는 두 경우에 다 사용되었다. 그 상하게 하는 것의 치명적인 정도는 신체의 어느 부분이 상하게 되었느냐에 달렸음을 시사한다. 그 후손은 치명상을 입지 않을 것이나, 뱀은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멸망당할 것을 의미한다.

셋째, 히브리어 명사 제라흐(zerah)는 일반적으로 '후손,' '후세,' 또는 '씨'를 가리키는 말인데, 단일 혈통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단어는 또한 특정한 하나의 후손을 지칭할 수도 있다(참조 삼하 7:12-13). 창세기 3:15에서는 이 두 가지 용법이 다 사용되었는데, 신실한 교회를 가리키는 그 여자와 사단의 '후손들'을 각각 가리키는 경우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 여자의 특정한 한 후손(남성 단수 명사)을 지칭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씨'가 특정한 후손을 가리킬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받는 대명사가 단수로 온다. 그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창세기 3:15이 시사하는 바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구원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NIV)이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영원한 죽음을 맛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면서 에덴동산을 떠났다.


교훈: 원복음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타락한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을 예고하시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셨음을 보게 된다.


부가적용)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나무로부터 떨어져나간 잎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싱싱하였지만 얼마 못되어서 시들어지고 태양빛에 말라비틀어지게 된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로 된 옷을 입고 활동을 하면 더 이상 옷이 될 수 없게 된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보다 가죽옷이 더욱 오래 입는다. 가죽옷은 평생 입을 수 있는 옷을 상징한다. 그러나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일시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을 상징한다. 사람은 일시적인 것을 위하여 일하나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일하신다. 가죽옷을 입히신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을 떠나게 되는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범죄를 저질러서 형무소에 들어가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이 비록 형무소에 들어가도 "그는 내 자식이다."라는 심정을 지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자식의 아픔보다도 더욱 큰 아픔을 가지고 부모는 안타까워한다. 그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이 가죽옷을 입어. 내가 만든 옷이야. 너를 보호하는 나의 손길을 이 가죽옷에다가 담아서 너에게 입힌다. 네가 비록 범죄하여 에덴동산을 떠나서 죽음의 세계, 곧 병과 죽음과 범죄와 괴로움과 전쟁과 미움과 사기와 도적이 들끓는 곳에 거하게 되어도 너에게 관심이 있고 진정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라." 아마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만들어서 입혀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의 마음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바로 가죽이 벗겨진 희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하며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으로서는 그 이상의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너희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이 바로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창조자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


월요일(10월 27일)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보았느니라"(창 22:1-12)


도입)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이에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돌로 치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예수님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오십도 안된 예수님이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불경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침례 요한은 침례 받으러 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 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고 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침례 요한의 그와 같은 말에 분개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선지자 침례 요한의 말을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침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29-30)고 말했다. 성경은 예수님이 아브라함 때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분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1. 창세기 22:1-12을 읽으십시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본질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요구하셨습니까? 여기에 어떤 중대한 문제가 연관되어 있습니까?

답:

창세기 22장에는 왜 그 시험이 필요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언약관계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기를 기대하셨다(창 17:1).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룩하고 순전한 삶의 표준에 항상 도달하지는 못하였다.(창 16:1-4, 20:1-10)

이삭은 언약의 아들이었고 그를 통하여 아브라함은 세상에 복이 될 것이며, 그 아들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은 언약관계의 끝을 말씀하신 것이었으며, 그에게 하신 특별한 약속이 이제 끝났음을 암시하신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복의 방편(창 12:3)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선물로 주어진 아들을 하나님께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그분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헌신을 나타내 보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결심하였다.(히 11:19)


2. 무엇이 그 언약의 갱신을 가능하게 했습니까?(창 22:13-18)

답: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으며, 그를 위한 당신의 특별한 목적을 끝내시었다. 그러나 이삭 대신에 한 수양이 제공됨으로써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아들을 대신할 희생 제물을 제공하심으로 그와 맺은 언약의 갱신을 가능하게 하셨다. 인간의 희생 즉 죄인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제공한 희생제물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통하여 '준비될'(창 22:14) 그 복음의 신비 즉 대속적 속죄를 보았던 것이다.


교훈: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대신하여 제공된 수양의 죽음을 통하여 장차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되실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았다.


부가적용)

이삭은 성격이 온순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여서 제사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중재하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칼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중지시키고 이삭 대신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셨다. 인간은 제아무리 이삭처럼 순전하고 온유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피를 흘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삭은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을 보시고 대속 제물을 보내셨다. 이삭으로부터 2천여 년 후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곳에서 이삭 대신 죽었던 숫양처럼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이삭이 결박당했던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었다. 솔로몬이 그곳에 성전을 지었고 이 성전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표상하는 수많은 제물들이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 값으로 드려졌다. 그리고 바로 그 성문 밖 골고다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삭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속의 언약을 세워주신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양 예수님을 만세 전에 준비하셨다가 때가 차매 보내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도 그의 후손에서 한 씨가 나와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을 통해 약속하셨다(창세기 24:60).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 것이다.


화요일(10월 28일)

모세에게 당신의 구원을 알리심(출 32:7-10)


도입)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하나님께서 친수로 쓰셨던 돌판이 깨뜨려 졌다. 이는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모세가 다시 돌판을 받기까지는 ‘산고의 아픔’이 필요했다. 중보자 모세의 “40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는” 산고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언약을 회복하려는 모세의 끈질긴 노력이 다시금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만들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고 ‘새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 가지 부당성을 들어 말하고 있다. 40주야를 엎드려 부당성을 제시하며 긍휼을 요청하고 있다. 첫 번째 부당성은 -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백성”이며 “주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모세는 확신 있는 설득력으로 하나님의 중심을 파고들고 있다. 주의 백성 삼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투자를 생각나시게 하고 있다. “주께서 큰 위엄으로 속하시고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져서 “주의 백성” 삼으신 것입니다! “멸하지 마옵소서” 라는 간구는 <손해 보시지 말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 모세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부당성-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멸하셔셔는 안되신다는 것이다. 선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부당성을 피력하고 있다! 선조들을 생각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과 죄를 “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강팍함과 악과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선조들을 생각해서 봐 달라는 요청이다.  셋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된 적극적인 이유-모세는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들어 허락해 주지 않으시면 안될 이유를 강도 있게 제시하고 있다. 모세의 강변-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강변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성이 욕이 되지 않으시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을 입혀 달라는 것이다. (1) 인도하여 들일 능력이 없으셨다는 비난  (2) 미워하여 광야에서 죽이셨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 낸 것이다.


1. 시내산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단호하게 반응하셨습니까?

답: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반역의 행위였으며, 하나님과 방금 맺은 언약을 파기하는 행동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만약 모세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멸망당했을 것이다.(출 32:11-14)


2. 이 사건이 있은 후 모세는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출 32:30-32). 여기서 복음의 원리가 어떻게 드러나 있습니까?

답:

모세는 백성의 죄를 변명하는 대신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였다. 용서는 죄를 묵인하는 것과 다르며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도 모세는 알았다. 그는 스스로 백성의 속죄를 위해 간구하는 중재자로 나섰다. 그런 후에 그는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제안을 했다. 그는 자신을 여호와 앞에 속죄의 수단으로 드렸다! 그는 만약 그 백성이 여호와로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였다. 모세의 생명으로는 죄를 속(贖)할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으셨다.


3.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출 34:6-10)

답: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이 용서에는 "악과 과실과 죄"(7절),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히브리어의 '용서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짊어지다'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취급하시는 방법은 그 죄를 우리에게서 취하셔서 당신 자신이 담당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모세가 아닌 당신의 종을 통해 하시기로 정해 놓으셨다.


교훈: 모세가 반역하는 백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매달린 것은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예표한 것이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반적인 경향은 불신, 원망, 불순종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그들은 다베라(민 11:1-3)에서, 맛사(출 17:1-7)에서, 기브롯 핫다아와(민 11:4-34)에서, 가데스 바네아(민 13:1-14:38; 수 14:7)에서 환경만 탓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백성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불신하며 그분의 말씀을 거역했다. 이스라엘의 중보자 모세는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받을 형벌에 몸서리치며 눈물로 탄원한다. 그는 목이 곧은 백성과 달리 하나님 앞에 낮고 낮은 모습으로 엎드려 사십 일을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간구했다. 철저한 겸손과 전적인 희생과 끈기로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또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과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여 기도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도, 중보하는 자신에게도 아무런 의가 없음을 알았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갔다. 중보자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진멸치 않으셨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총에 한결같이 불충실하던 이스라엘은 급기야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을 애굽에서 건져 낸 신이라고 숭배하기까지 했다(출 32-34). 하나님은 격노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진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하지만 저주는 삼, 사대까지 베푸시고 은혜는 천대까지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참으셔서 결국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을 얻게 하셨다. 바로 이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중보사역의 아름다운 예증이다.


수요일(10월 29일)

여호와의 종(사 52:13-53:12)


도입)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기독론 적으로 예수님을 말하지만, 이사야 자신일수도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고난 받느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면서 원망할 때에 이사야는 당당히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바벨론 또한 멸망할 것을 말하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 인해 회복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희망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동족 이스라엘을 향해서 당당히 심판과 회복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사야가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 중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희망을 선포한 것이다.


1. 이사야 52:13-53:12에서 어떤 약속과 소망을 발견합니까?

답:

이 구절은 구약에서 가장 장엄한 성경절들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희생제도가 속죄의 수단으로서는 한계가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심각한 죄의 문제는 오직 여호와의 종만이 해결하실 수 있으셨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의 종의 경험을 묘사한다.

백성: 백성은 처음에는 불신하였으나 나중에는 회개하였다. 그들은 그 종을 거의 나병환자처럼 상하신 분으로 인식하였고(사 52:14), 그가 "하나님에게 맞으며 사람에게 고난당하는" 것으로 생각했다(53:4). 그 종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3절) 그들도 그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 종의 경험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즉 그분은 자신들의 슬픔과 질고를 당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분께서 그들 대신에 죄를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들은 그 종의 희생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만 죄로 인해 망가지고 뒤틀린 우리 모습을 깨닫게 된다.

그 종: 그 종의 경험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쓸쓸히 거절당하였으며(3절), 슬픔과 고난을 당하고 많은 곤욕과 심문을 당하였으며(7절) 심지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8절). 그러나 "그가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기 때문에(9절) 그렇게 취급받을 이유가 없었다. 왜 이 무고한 분이 고난을 당했는가? 그 까닭은 주께서 그 종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었다(10절). 그분은 백성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여 그들로 거룩하고 의롭다는 선언을 듣게 하시기 위해 그들 대신 죽으셨다(11- 12절). 그러나 그분은 그 희생적 죽음 후에 다시 빛을 볼 것이며(11절), 높임을 받으실 것이었다.(13절)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가납될 만한 유일한 속죄로 묘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자리에 서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


교훈: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한 몸에 지시고 많은 고난과 슬픔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다.


부가적용)

(사 52:13-53:12)은 소위 이사야에서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 부르는 부분으로 3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차 임하실 여호와의 종으로서 메시아가 어떤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그대로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고난당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이사야의 노래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본문에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빰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마태복음26:67과 27:26절에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면서 운명하시는 부분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씀했다.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이 말씀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께서 곤핍한 자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문제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곤핍한 우리 인간을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은 죄로 인한 고난도, 애매한 고난도 아니라 의로운 고난 인 것이다.


목요일(10월 30일)

다니엘서에 예고됨(단 9:7-11)


도입)

시간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물로서 모든 존재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연장이 연대를 이루며, 따라서 연대기는 역사의 척추가 된다. 시간이 일정한 시각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