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과 하나님의 본성: 속죄의 기초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 1과 하나님의 본성: 속죄의 기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9.24 10:47 조회수 4,254
글씨크기

본문


 

제 1과  하나님의 본성: 속죄의 기초

10월 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11분)


도입)

 “어떤 일을 할 때와 누군가와 잘 지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일이 무엇이고 어떤 성격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아는 것”이 선행되면,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생략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과거에 해 오던 방식대로 새로운 환경에서 행동하고 알아 가려고 노력하지 않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신앙생활은 어떤가? 능력 있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그 분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가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는 삶”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교회에 왔다가 떠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없다. 정말 알아야 할 분을 모르기에 “생명을 포기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어려움과 좌절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된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아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 동시에 알게 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따라가는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기억절: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연구 범위: 시 139:1-4, 사 46:10, 요 1:4, 롬 5:8, 8:37-39, 요일 5:11-12.


중심 사상: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그분의 속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죄인들이 그분께 사랑을 간청함으로써 그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안식일 오후

작조차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이다. 그 사랑은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으며 우리 개개인에게 감동을 준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속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구원의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공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된 이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일을 행하시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분으로 하여금 그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이 타락한 세상에 쏟아 붓도록 결심하게 한 이는 그분 자신이셨다.


일요일(9월 28일)

영원하신 하나님(시 10:25-27)


도입)

영원이란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이다(롬 16:25,26).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므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영원이란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이다(요 1:3; 벧후 3:8).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종말이 없으시기 때문에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결국 시간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한 하에 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의 영광(시 104: 31), 언약(창 9:16), 말씀(시 119:142,144), 의(시 119:142,144), 인자하심(시 100:5), 사랑(렘 31:3), 경륜(엡 3:9-11), 능력(롬 1:20), 자비하심(사 54:8), 복음(계 14:6), 하나님의 나라(시 145:13)가 영원하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사 45:17), 속량함을 얻은 기쁨(사 35:10), 영생(요 4:36), 성도로서 얻는 영광(고후 3:10),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사 56:5),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벧후 1:11), 기업(히 9: 15), 속죄받음(히 9:12)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성도는 영원히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시 30:12).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인해 기뻐하고(사 61:7), 그를 의지해야 한다(시 125:1). 하나님께 있어서 영원은 ‘하나의 현재’이다(시 2:7; 90:4; 벧후 3:8).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과거의 하나님도 되시고,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영원한 미래의 하나님도 되시며,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는 현재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히 13:8).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구절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암시되어 있습니까? 답을 적기 전에 창세기 21:33과 시편 90:2을 읽으십시오.

답: 

영원이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며,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안다. 사실상, 우리의 모든 존재와 소유는 일시적일 뿐이다. 오늘 여기에 있지만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개념을 우리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머리로는 영원이나 끝없는 삶에 관해 생각하기가 무척 어렵다.


2. 시편 102:25-27의 말씀은 신약의 어떤 이에게 적용됩니까?(참조 히 1:10-12) 이 구절은 시편 90:2과 함께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존재하신다고 말해 줍니까?

답: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셔야 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우리는 계속 생존하기 위해 공기와 물과 음식이 필요하지만(창 1:29), 하나님은 존재하시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기 전에, 영원을 통하여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홀로 존재하셨으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신 분, 곧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분만이 회개한 죄인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실 수 있으시다. 이제로부터 영원히, 창조된 생명은 위대한 생명의 시여자(施輿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4, 요일 5:11-12).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께 의존한다.


교훈: 영원한 자존자(自存者)이시며 생명의 시여자이신 하나님만이 회개한 죄인에게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수 있다.


부가적용)

영원이란 영속적인, 제한이 없이 미래에까지 계속되는 상태를 뜻한다. 히브리어 '올람'('olam)은 성경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데 '영원한 계약', '영원한 성직', '영원하신 팔 밑에', '영원하신 하나님' 등과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들을 '영원한' 것으로 불렀다(창 17:7; 삼하 23:5). 이것은 모세가 노래하였듯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90:2). 이는 하나님께서 시간이라는 제약과 한계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물론 그 안에는 유한한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거룩한 세계창조가 내포되어 있다. 즉 언약의 확실성은 실제적인 가르침도 주지만 또한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구약에서 '영원한'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오직 하나님, 그의 목적들과 헌신에 대해서만 언급된다(레 24:8; 시 119:142; 사 54: 8 등). 인간의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은 오직 한 곳밖에 없다. 다니엘 12:2은 일부 사람들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게" 될 부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신약은 구약의 개념을 토대로 '영원'의 의미를 세우고 있다.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영원한 저주, 영생, 영원한 목적, 영원하신 왕 등에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과 같이 영원은 영원토록 존재하는 것이다(엡 3:11; 롬 1:20). 물질적인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이 구절들과 다른 구절들에서, 영원이라는 것은 단지 미래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후가 아니고 지금 영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속은 영원하며(히 5:9; 9:12),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새롭고 영적인 생명도 그러하다(요 17:3).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요 3:15-18; 요일 5:11-13). 그리고 베드로가 약속한 것과 같이, 우리의 소명에 대한 성실함은 우리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실 것"(벧후 1:11)을 확신시켜 준다. 영원이란 시간의 연속선상이 아닌 시간의 정지 선상으로서 물질세계의 것이 아닌 것이어서 인간은 혼자로서는 영원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영원할 수 있다.


월요일(9월 29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시 118:1-4)


도입)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주검들 가운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기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불길을 다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다시 그 집을 샅샅이 뒤졌다. 아기와 엄마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엄마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위나 학력을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가? "주님,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숭고한 사랑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기 원합니다. 저희들을 당신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유일한 사닥다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뿐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신비로우심은 우리의 모든 이해력을 초월한다. 그분은 인간 스스로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시다(욥 11:7).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시는지에 관해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그분께서 우리와의 관계와 활동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말씀한다. 그분께서 자신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에 관하여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그분의 속성의 본질은 자기를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다른 이들의 행복에 관심이 많으시다.


1.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시 118:1-4, 롬 5:8, 8:37-39, 요일 4:8-9, 16)

답: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분에 관해 탐구하면 할수록 그분이 본질적으로 사랑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속죄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분이 피조물들과 더불어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지성적 존재이심을 말해 준다. 그분께서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은 바로 개인적인 상호관계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안 하시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감정이나 느낌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께서 죄 많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셨는지를 보면 된다. (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그분께서 그 어떤 존재로부터 강요를 당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리고 구원의 계획보다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참으로 우리가 죄에 빠진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자가 되셨다.


교훈: 사랑이신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의 불행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시행하셨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부가적용)

우리는 하나님하면 흔히 위력적인 형상을 지닌 남성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한 부분일순 있으나 전체는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그분의 외향이 아닌 속성을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성을 지니셨고 동시에 모성을 지니셨다. 부성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시는 것처럼 힘 있고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강한 힘을 지니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부성은 강한 만큼 섬세하진 못하다.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함이 참된 강함이 되려면 섬세함이 어우러져야만 한다. 바로 그 섬세함을 지닌 존재가 어머니이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그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한다.(시121:3-4. 사49:15. 사66:13..) 어머니의 사랑은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끝없이 깊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23:37에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암탉에 비유하여 표현하셨다. 우리가 인생 중에 당하는 많은 좌절과 절망들 속에서 따스한 어머니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은혜이다. 특별히 내 잘못과 죄악으로 고개를 들 수 없을 때에 따뜻한 어머니와 같이 용서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내가 일어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말 큰 은혜일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비록 내가 죄악으로 넘어져서 울고 있을 때라도 "어서 일어나"하고 그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 좌절 속에서 함께 속상해 하시고 아파해주신다."내가 너를 도우리라" 말씀하신다.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니"하며 손 내밀어 일으키시는 분이시다.(사50:7)


화요일(9월 30일)

창조주이신 하나님(시 100:3)


도입)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의 제 일성, 이 첫 구절은 성경 전체의 모퉁이 돌과 같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이 말씀을 믿지도 않고, 우습게 여겨서 버린 말씀인데,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하고도 가장 요긴한 인생의 신뢰할만한 모퉁이 돌이 되고 있다. 세상에서 누가 이 말씀을 머릿돌로 삼고 살고 있는가?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습게 여기고 있다. 이 말씀을 인생의 모퉁이 돌처럼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이것이 자신의 삶에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로 자신의 인생을 건축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모퉁이 돌이며 기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이 이처럼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퉁이 돌과 같이 중요한 것인데, 믿는 사람들마저도 그 사실을 참으로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갈피를 잡지고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있어 제대로 살아가려면 인생의 머릿돌이 분명해야 한다. 모든 건축에 있어서 모퉁이 돌이 세워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좌우와 높이로 건축하게 되어 있다. 이런 중요한 기준이 되는 머릿돌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의 삶이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자기의 삶을 건축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을 다 믿는다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인생이 확실한 안정감과 신뢰와 믿음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이 근본적인 진리가 없이는 성경의 기별은 무의미해진다. 한편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은 그분이 창조와 구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그분은 창조 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은 그분 이전에 혹은 그분의 창조사역(롬 4:17, 히 11:3)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은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하였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생존을 위해 그분의 은택을 입고 있음을 뜻한다(시 24:1-2, 104:10-14).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은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이 그 지으신 만물 가운데 나타나 있음을 의미한다.(시 19:1-3, 롬 1:20)


1.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손상된 세상에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사 65:17, 계 21:1)

답: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능력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요 1:1-3, 히 1:2-3). 속죄란 하나님께서 이 창조의 세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와 반역의 궁극적 결과인 영원한 파멸을 당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에 구원의 계획을 수립하셨다.

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 어떻게 묘사했습니까?(고후 5:17)

답: 

우주를 창조하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타락한 인류를 당신의 형상으로 재창조하실 때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셨는데(시 33:6), 이제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신 말씀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재창조하신다.(요 1:1, 12-13, 고후 4:16)


교훈: 말씀의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육신 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를 재창조하신다.


부가적용)

천지가 창조된 사건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게 된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의 엄청난 천지가 하나씩 확실하게 조성되었다. 창조와 관련된 말씀 중에서 히브리서의 말씀에는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하였다.(히1:2) 아들을 통해서 모든 세계가 지어진 상태를 설명하기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하였다.(히1:3) 바로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의 능력의 말씀이 창조된 모든 세계의 대들보와 같이 중심적인 뼈대가 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라는 골조가 만물 중에 들어있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뼈대가 살아서 만물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만물은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말씀이 만물의 모든 구석에서 골조 역할을 함으로써 창조물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창1:3절부터 잘 나오고 있다. 이제 만물 중에 말씀이 버티고 살아서 역사하면 그 만물도 살아있지만, 말씀이 없어져 버리면 그 만물도 거기서 쓰러질 수밖에 없다. 재창조 역시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중생, 즉 새로남 또한 말씀의 뼈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삶의 뼈대가 세워지고 새롭게 재창조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그 뼈대를 이루어 우리의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창조는 헛것이 되는 것이다.


 수요일(10월 1일)

거룩하신 하나님(사 40:25)


도입)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거룩하시다. 따라서 "거룩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거룩"에 대해 구약에서는 (히: 카도슈), 신약에서는 (헬:하기오스)말로 표현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 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 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째, 죄 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도(참조; 레11:44, 45; 요17:11) 성자 예수님도(참조; 막1:24, 요6:69) 또 성령 하나님도(참조; 마3:11; 눅3:22)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다(참조; 출26:33; 레1, 8장; 고전1 :2).


1. 이사야 40:25과 이사야 57:1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특별한 속성 중 하나이다. 그분의 거룩하심은 적어도 두 가지 근본적인 개념과 연결된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을 매우 특별한 분으로 나타낸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해 놓으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룩'이라는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그분이 비길 데 없이 특별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주에는 하나님과 같이 장엄하고 위엄 있는 분이 없으며(참조 사 46:5, 9),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수 없고 우리와 교제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 그분은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는 이들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당신의 피조물들도 그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신다.


2. 다음 성경절에서 어떤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까?(고후 5:21)

답: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묵인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반대한다(사 5:24, 호 9:15, 롬 1:18).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신다(합 1:13).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중보자의 역할을 필요로 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거룩하게 되어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이 일은 속죄와 거룩함이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해졌다. 거룩하신 분께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의 능력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자 죄로 더러워진 이 세상에 아기로 탄생하셨다(눅 1:35).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교훈: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인하는 대신 죄인들과의 교제를 회복하시기 위해 유일한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도입)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그와 같은 적극적인 거룩적 행동이 하나님께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지어 낸 신화적인 신과 다를 바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 무르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해주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 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인 셈이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 해 주는 것이다. 그 율법 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참조; 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참조; 롬3:21, 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참조; 롬3:25-27).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 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구현해야 한다.


목요일(10월 2일)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시 139:1-4)


도입)

열세 살에서 열여덟 살의 십대 자녀들은 자기 부모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아홉 살이 되면 부모들도 아는 게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아는 하나님의 속성(Omniscience)에 대해, 어떤 때에는 우리들도 십대 아이들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이 아시는 게 아무 것도 없으며 우리를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지각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계시기 때문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없다(NO surprises with God). 하나님은 모든 것의 겉과 속을 다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겉과 속을 알기 위해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의 지식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시 139:14-16, 사 46:10, 마 10:30)

답: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 즉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요일 3:20). 그분의 시야에서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그분께서는 창조하신 우주를 바라보시며, 그 모든 부분을 세세히 아신다(시 139:7-10). 우리에 대한 그분의 지식은 완전하고 정확하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객관적이시고 공정하시다. 여호와께서는 현재를 완전히 아실 뿐 아니라 미래에 어떻게 될 것도 정확히 아신다(사 46:10, 마 26:34, 74-75). 과거와 현재가 그분의 눈앞에서 숨겨질 수 없듯이 미래도 마찬가지다.


2. 죄가 발생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벧전 1:19-20)

답: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속죄의 교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죄의 발생에 대해 놀라지 않으셨다.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천사 중 하나가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다. 그래서 죄가 인류에게 퍼지기도 전에 죄의 문제를 다룰 계획을 세워 놓으셨던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느니라(롬 5:20).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 속에 숨겨져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이 비밀의 경륜은 "영세 전부터 감취"어져 있었으며(롬 16:25),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어져 있었다(엡 3:9).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죄의 발생을 미리 보셨으며, 그것을 피하는 대신 정복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이시다.


교훈: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죄의 발생을 미리 아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할 대비책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속죄의 계획이었다.


부가적용)

전지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서 과거의 한 부분과 현재의 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한다. 또한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우주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와 양이 너무 적으며, 인간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며,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처럼 이러한 제한이 없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다. 그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하나님에게 과거가 있다면, 그 과거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게는 생소한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하나님은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재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즉 시간의 양과 질 모두를 자신의 지식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대해서도 모두 아시는 동시에, 창조된 시간이 그 때부터 그 시간이 계속될 영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결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현재적인 결단이며 그 믿음은 모두 동일하게 귀한 것들이다. 전지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공간의 제약도 받는다. 인간은 현재 자기 주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다. 즉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서부터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모두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바울은 (롬8 :2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우리가 아나니"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전지 하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바울은 각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모두 아시는 전지 하신 하나님이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받지 않는 전지 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지식의 대상인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참조; 롬8:22)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참조, 마10:30),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전지 하신 신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게 된 것도 죄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시,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단지 아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실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살피시며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