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과 사도 요한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 7과 사도 요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8.07 20:52 조회수 5,489
글씨크기

본문

 

제 7과  사도 요한

8월 1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3분)


도입)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이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에 민감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을 편애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지마는 그중에서 요한만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불린 것은 사도요한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라고 고백할 만큼 그가 주님의 사랑에 민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만 그 비가 모든 곳에 고이지 않고 그 비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열려 있는 곳에서만 그 비가 고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사랑에 민감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팔에 기대면서까지 주의 사랑에 민감했던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된 것이다.

사도요한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이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그 입술 열어서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나누다보면 새로운 사랑의 갈망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하고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그 사랑이 다시 채워지면서 주님과 나사이의 사랑이 무뎌지지 않고 인생 마지막까지 증거 하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기억절: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4).


연구범위: 마 8:21-22, 막 10:35-45, 요일, 요이, 요삼.


중심 사상: 사도요한은 성경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 가장 사랑 받은 이들 중에 속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에베소에 살고 있던 연로한 사도 요한이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제자들이 그를 옮겨주어야만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제자들이 다 모이면 요한은 늘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어린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이 항상 같은 말만 하자 제자들은 싫증이 나서 이렇게 물었다. “스승님, 왜 항상 이 말씀만 하십니까?” 그러자 요한이 대답했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이것만 행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무튼 성미 급한 ‘우레의 아들’이 어떻게 ‘사랑과 은혜의 아들’로 변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에 나오는 요한의 세 편지서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의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이 편지서들에서 용기를 주는 성경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 말씀일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번 주에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거인이었던 요한의 생애와 사명을 공부할 것이다.



일요일(8월 10일)

특별한 부르심(막 1:20)


도입)

사도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세베대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이다. 그는 신약성서의 제4복음서와 계시록, 3편의 편지를 쓴 저자이다. 부친의 업을 따라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요한에게 어느 날 예수가 찾아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마 4:21~22) 예수의 제자가 된 후 요한은 친형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예수가 가장 가까이 두는 제자가 됐다.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내내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겼으며 요한복음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감히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 21:7)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극진했다. 예수는 요한과 야고보 두 형제를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너게」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예수가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눅 9:54)라고 분개할 만큼 격렬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인 듯하다.


예수께서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배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20).


1. 우리는 마가복음 1:20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어떤 중요한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까?(참조 마 8:21-22, 눅 14:26, 빌 3:8).

답: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부친의 일터에서 떠나기로 한 요한의 결정은 그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관해 잘 묘사하고 있다(눅 5:1-11).


2. 누가복음 5:1-11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답: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복종이 요구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우리는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이 얼마나 맹렬한 것인지를 아신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굴복하지 않은 자아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있다면, 사단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

요한은 그렇게 하였다. 그는 고기를 잡는 대신, 그의 나머지 인생을 사람 낚는 어부로 헌신하였다. 이제 세상은 그의 선교지가 되었다. 요한은 소망의 기별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며, 복음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는 주님께 신실하기 원했기 때문에 그가 배워야 할 어떤 힘든 교훈들도 기꺼이 배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그 교훈들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자신을 두었다.


교훈: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을 때 그는 고기 잡는 어부였으나, 그 부르심에 응함으로써 그는 주님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때때로 우리는 믿는 사람들로부터 실망할 때나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이 다가올 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된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잠깐의 후회가 있을지는 몰라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결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 “내 사랑하는 자니라”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반열가운데 우리가 들어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반열에 들어가는 특권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잴 수가 없는 가치 있는 인생이다. 12제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마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사도 요한뿐이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도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 축복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칭호이다. 그는 어부였으나 주님의 부르심에 응함으로써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으며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다.


월요일(8월 11일)

우레의 아들(막 10:35-45)


도입)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질을 하여 먹고사는 어부였다. 험한 파도와 싸우는 뱃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그 역시 괄괄한 성격으로 인해 주님께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 성을 지날 때, 그와 그의 형제 야고보가 복음을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며 이들을 저주하자 예수께서 붙여주신 별명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세심하게 요한의 책을 확인한다면 그의 별명이 참 은혜로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한 일서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목소리는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탐하여 다투는 그의 성격과는 대조된다. 우리는 이로서 변화되기 이전의 우뢰의 아들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랑의 사도를 오버랩하여 볼 수 있다. 그는 부인할 수없는 강력한 성령 체험을 통해 마침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된 것이다. 생의 말년에 혹독한 밧모섬 유형지에서 돌아온 요한은 근 일백 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에베소교회를 섬겼다. 간혹 제자들이 간청하여 강단에 설 때면 그는 오직 한 말씀을 전했다.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 오직 사랑하시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같은 말만 되뇌는 노 사도의 말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때 당돌한 한 청년이 그에게 물었다. “사도님, 어째서 똑같은 말씀만 계속 전하십니까?” 요한이 대답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이면, 족합니다.”


예수께서는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우레의 아들’(아람어로 보아너게)이라는 특별한 별명을 주셨다. 이 이름은 이 두 형제의 성미가 급하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들의 급한 성질을 부드럽게 고칠 수 있는지를 알고 계셨다.


1. 마가복음 10:35-45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이 일화는 두 형제들의 성격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요한과 그의 형제는 건강치 못한 자만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최후의 고난에 그들도 참여할 수 있느냐고 되물으셨다. 그들은 자랑하는 태도로 “할 수 있나이다”(막 10:39)라고 대답했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증오하여 그들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평소의 습관대로 직접 사마리아를 통과하실 계획이었다. 그분께서는 밤에 쉴 곳을 찾기 위해 야고보와 요한을 미리 보내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행인 것을 알아채고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2.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에 대해 야고보와 요한이 나타낸 반응은 이들의 성격의 어떤 면을 드러내 줍니까?(눅 9:54). 이 사랑받는 제자는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했습니까?

답:

여기에 나타난 요한의 모습은 성경 뒷부분에 나오는 그의 편지서에 나타난 모습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그는 참으로 많이 변화되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은 위대한 선교사가 되기 위해 자신이 배워야 했던 힘든 교훈들을 기꺼이 배웠던 것이다.


교훈: 우레의 아들이요, 자만심이 강했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주님의 가르침을 순종의 자세로 배웠기 때문이었다.


부가적용)

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을 높이는 사람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요한은 형제였던 야고보와 함께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과 큰 자가 되려는 야망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도 엉뚱한 말을 했다. 예수님께서 권력을 차지하시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은 더 이상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즉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3인칭의 표현을 써서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의 천국체험을 “내가”라는 표현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높임으로 큰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종이 되어 섬김으로 천국에 큰 일군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쉽다. 즉 신앙생활의 주어는 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무엇 무엇을 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된 믿음은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참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화요일(8월 12일)

요한의 증언(요 21:25)


도입)

요한복음은 특이한 복음서이다. 초대교회는 요한복음을 독수리에 비교했다. 공관복음을 모두 땅에 거주하는 사자 (마태)와 사람 (마가)과 황소 (누가)로 비교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을  유독히 하늘을 날며 비상하는 독수리에 비교한 까닭은 그만큼 요한복음이 초월적이며,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공관복음도 막상 서로 자세히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른 면들이 있다.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하여 아주 쉬운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어는 대체적으로 단문으로 되어 있고, 거의 기본적인 쉬운 단어들을 사용한다. 시제도 대단히 쉽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요한복음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는 자주 신학적인 사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를 로고스라는 특이한 용어로 설명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 성격 중에 가장 먼저 설명되는 것은 그분의 존재이다 (요 1:1-2). 그분이 "계신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처음 두절(1절과 2절)에서 "말씀이 계신다"를 네 번 사용한다. 말씀이 어떻게 계시는가? 시간적으로 볼 때 그분은 태초에 계셨고 (시간적 존재방식), 공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공간적 존재방식), 성품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셨다(인격적 존재방식). 그러나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존재(계심)하실 뿐 만 아니라 활동하는 분임을 설명한다(요 1:3-5).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활동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3). 또한 만물이 타락한 후에 로고스는 그것을 회복하는 일을 하셨다(4-5). 이 회복을 위하여 로고스는 성육신하셨다(요 1:14-18). 로고스는 세상에 오셨다. 성육신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먼저 육신이 되었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충만하게 넘친다 (16-17). 그리스도의 충만은 하나님을 나타내주는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18).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많은 시간 그분과 동행했던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할 얘기가 많았다.


1. 요한복음 21:25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했습니까? 이 구절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요한은 모든 이야기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모든 진리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어떤 철학들도 결코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었던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절에서 ‘말씀’(헬라어로 로고스)에 관해 언급하였다. 유대인 독자에게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었다. 그 로고스는 또한 우리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 주는 하나님의 가르침, 혹은 율법을 의미했다(참조 신 32:45-47).

헬라 독자에게 로고스는 다른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를 결속시키는 생명의 힘이었다. 그들은 로고스가 나뭇잎과 계절과 별들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헤라클레투스, 플루타크, 필로, 플라톤 같은 헬라 철학자들도 로고스에 관해 말했다.

유대와 헬라 독자들에게 요한은, 이 로고스가 인간의 구원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인류 역사에 뛰어드신 한 분이시라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였다.


2. 요한복음 1:13-14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깨닫고 이해한 것을 자신의 언어로 적어 보십시오.

답:

우리의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셨다. 그것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교훈: 요한은 예수님을 로고스로 소개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유대인과 헬라인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부가적용)

로고스와 연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진술한다.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로고스의 신분은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진술된다 (요 1:1). 로고스가 태초에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점에서 로고스가 하나님이라는 신분은 자연히 결론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라는 한 단어로 두 인격이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자는 로고스 밖에는 없다(요 1:18).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기독론이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로고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 1:14). 이 때문에 로고스는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당신과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당신과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요 17:5).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기에 (10:30,38), 그 일에 있어서도 동일한 기능이 강조된다. "나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한다" (요 5:17).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으로부터 예수는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고백된다. "도마가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 요일 5:20).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과 구별된다.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이라는 것은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요 1:18).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묘사되고, 로고스는 "독생하신 자"로 묘사된다. 인격은 둘이며, 성격은 아버지와 나신 자 (아들)이다.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는 없다. 이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 10:30)라는 명제적인 선언이 가능하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아버지 안에 있다 (요 10:38; 17:21).


수요일(8월 13일)

생명의 시여자(요 20:31)


도입)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 다르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 마지막이 상처와 이별과 아픔으로 끝나는 사랑은 더더욱 아니다. 그 사랑은 구원이다. 그 사랑은 생명이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는다.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머물면서 살아 역사하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도 요한의 삶을 변화시켰던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다. 생명의 시여자이신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다. 즉 언어나 관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한 공개적인 사랑이라고 말이다. 또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끝이 아니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더 이상의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았더라면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분의 십자가적 사랑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시여자로서의 부활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시여자가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고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이 이르러 온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 스스로가 부활의 증인이 되셨고 또한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요한복음 20:31에서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사람들을 이끌어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약 전체의 핵심 주제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이 이르러온다는 것이다.


1. 요한이 그 핵심 단어인 ‘생명’에 관해 말한 몇 가지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구절들을 찾아 읽으십시오(요 6:35, 63, 10:28, 12:25, 14:6, 17:3).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현재의 생명도 의미하는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답:

영생의 약속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죽지만 오직 인간만이 영생의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 인간만이 이 땅에서의 짧은 삶과 영원한 삶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맥경화나 술 취한 운전사나 에이즈 등에 의해 어느 때라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가! 죽음은 마치 몇 초 동안의 잠과 같을 것이다. 그 다음에, 부활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훈: 사도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진리를 강조하였다. 생명의 시여자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죽음도 잠에 불과하다.


부가적용)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기다리셨다. 죽어가는 나사로는 분명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다. 구주께서는 과연 고통 받는 그의 친구들의 가정을 고의로 피하셨을까? 예수께서는 강한 원수인 죽음과 더불어 투쟁하는 오빠를 보고 마음이 찢어지듯이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다니에 있는 사랑하는 그들만을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교육을 생각하셨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축복이 모든 사람을 포섭할 수 있도록 그의 대리자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을 것이었다. 제자들을 위하여 나사로가 죽는 것을 허락하셨다. 만약 예수께서 나사로를 병에서 회복시키셨더라면 예수의 신적인 신분을 가장 명확하게 증거 하는 그 이적은 행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나사로의 병실에 계셨더라면 사단이 그를 이길 힘이 없었을 것이므로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의 시여자 앞에서 죽음은 그의 창을 나사로에게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떠나 계셨다. 원수가 그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가 정복한 원수로부터 나사로를 다시 찾아오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나사로가 죽음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으며, 고통 받는 누이들은 저희 오빠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오라비의 죽은 얼굴을 바라볼 때에 구주에 대한 믿음이 격렬하게 시험 받을 것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겪는 투쟁으로 말미암아 저희 믿음이 더욱 큰 능력으로 빛나게 될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한 모든 슬픔의 고통을 경험하셨다. 예수께서 지체하는 것은 그들을 덜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산 모든 슬픔의 고통을 경험하셨다. 예수께서 지체하시는 것은 그들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나사로와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소망 528p)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며 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