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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그분의 의미심장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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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5.29 11:57 조회수 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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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그분의 의미심장한 죽음
6월 7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1분)

도입)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상에서 가장 참혹한 형틀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십자가는 가장 추악한 죄인들이 지어야 할 형틀로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 자체는 사형틀일 뿐이다. 십자가의 형벌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페르시아제국에서 이다. 땅을 신의 거룩한 곳으로 여겼던 페르시아 사람들이 죄인들로 인해 땅이 더럽혀질까봐 십자가 위에서 사형을 집행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이것을 로마제국이 정치범을 처형하는 수단으로 삼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제국이 아직 이 땅에 생기기도 전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 것과 그 의미가 저주임을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었다. 이 저주의 죽음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죄로 인해 주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사슬을 끊으시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곳은 '골고다'이다. 이 지명의 뜻은 '해골의 곳'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추측하는 것처럼 이곳의 모양이 해골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지명이 골고다였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법이 '십자가'였다는 것과 그 장소가 다른 곳이 아닌 골고다 '해골의 곳'이었다는 점이다. '해골'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의 상징, 죽음의 심장부를 죽음의 장소로 택하심으로 죽음을 죽이려고 하셨던 주님의 죽음의 의미가 극적인 시각효과로 드러나고 있다.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려 상상해 보라. 골고다 그 해골의 곳 죽음과 저주의 땅에 십자가가 세워진다. 예수가 그 십자가 위에 달린다. 그리고 그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 저주의 땅에 뿌려진다. 그리고 죽음의 땅에 생명이 돋아난다. 절망의 땅에 희망이 생겨난다. 그날의 골고다는 바로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죄 때문에 죽었던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죽음이었으며 십자가에서 산 것은 생명이었다.

기억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연구범위: 마 27:45-46, 눅 2:25-35, 고전 15:3, 고후 5:18-21, 갈 6:14, 히 2:17.

안식일 오후
기독교 한 주요 잡지의 표지 기사로 어떤 성경연구 모임에서 벌어졌던 토론 내용이 게재되었다. 토론의 주제는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였다. 그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던져졌다. “만일 예수께서 오셔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좋은 가르침만 주셨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분은 반드시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 가르침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는가?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은 수세기 후에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거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십자가의 의미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안겨주는 주제이다. 사실상 그분의 죽음 이전의 선지자들도 성령의 증거하심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고난과 그 후에 얻으실 영광이 어느 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를 계속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벧전 1:10-11).
그래서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만 했고, 그분의 죽음을 통해 어떤 목적이 성취되었으며,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노력할 것이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느낌을 바꾸어주기 위해 죽으셨는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모든 주제는 깊은 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

일요일(6월 1일)
죽으시기 위해 탄생하심

도입)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정확하게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인류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서 유한한 존재, 즉 죽음을 맛보는 존재일 뿐 아니라 심판을 기다리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즉 인간은 정죄 받을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받아야 할 죄 값을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죽음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그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실 것인데, 그 때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의 구주이시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오신 목적을 규명하신다. '대속물'이란 구약의 제사 개념에서는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드려진 제물'을 의미하고, 헬라 개념(뤼트론)은 '노예를 해방시켜주기 위해 지불할 대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죄인)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죄의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섬기신 목적이다.

1. 누가복음 2:25-3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리아에게 예수님에 관한 어떤 메시지가 주어졌습니까?
답: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고 함축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를 마침내 만났던 경건한 시므온은 그 아기의 미래에 관해 신비스럽고 간결한 말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4-35). 여기서 ‘칼’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골리앗이 쓰던 것 같은 큰 칼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십자가에서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한 것이었다. “시므온의 신비스런 이 표현은 틀림없이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오싹하고 불길한 전조처럼 마리아의 생각을 스쳐갔을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222).

2.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이었습니까?(마 16:21, 26:52-54, 막 10:45, 눅 18:31-33, 요 3:14, 히 9:25-28).
답:
이 구절들의 일치하는 주제는, 예수께서 죽으시기 위해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었다. 왜 그분은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이성적 논리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것이 비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영역에 속하며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다가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난”바 된 비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골 1:26). 성경은 그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데, 이는 인간의 논리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 역사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서 이와 비교할 만한 어떤 사건도 없었다. 우리는 다만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뿐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속죄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었다. 이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자.

부가적용)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다. 도란 십자가의 도를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이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은 죄악 때문에 인간이 당할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것이 비참할수록 인간이 운명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라. 이 모든 것이 죄값이다. 동시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 많은 인간들의 값을 치러 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인간이 당할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원수에게 퍼부어질 무서운 형벌을 자기 몸에 받았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지금 이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너를 대신 하는 것이다. 내가 네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렀다. 무서운 지옥도 담당했다. 자 이제 이 선물을 네가 받겠느냐?" 이제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의를 위해서 죄를 벌하심이 이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무서운 형벌을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원수가 달려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문제 해결의 증명서이다. 거기 내 죄가 못 박혀 있다. 거기 내 병이 내 가난이 나의 무서움이 죽음과 멸망이 못 박혀 있다. 이 의미를 깊이 깨달어야 한다.

월요일(6월 2일)
누가 그분을 죽게 했는가?(마 27:45-46)

도입)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온갖 조롱과 저주의 대상이 되어 뭇 사람들의 박해를 받으며 진정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속죄양이 되어 골고다에 오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시는 모습은 일찍이 이사야가 고난 받는 종의 넷째 노래에서 예언한 바 있다(사 52:13-53, 12).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4-7)....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이사야가 예언한 53장의 내용은 예수께서 당하신 수난과 죽음의 의미와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예언의 정확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모습이 일치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하나님 계획의 신비함마저 느낄 수 있다. 그분의 죽음이 바로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각각 1/3을, 누가복음은 1/4을, 그리고 요한복음은 1/2을 할애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확실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복음서는 전기(傳記)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에 가깝다.

1.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고 수난주간의 두려운 사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마 27:27-31, 45-54, 막 15:21-32, 요 19:28-30).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감동이 마음을 적십니까?
답: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다 깨달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분의 재판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자들이 어느 인종과 민족에 속하였나 하는 것은 신학적인 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해서 오늘날 유태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성경적 신앙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다. 그분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약 내가 거기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실제로 거기에 있었다!

2. 마태복음 26:38을 읽으십시오. 구주의 마음을 그토록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분께서는 이 엄청난 시련 중에 어떻게 하셨습니까?(참조 눅 22:43) 엘렌 G. 화잇은 기록하기를, “이와 같은 결정을 하신 후 잠시 일어나시던 몸은 죽은 듯이 땅에 쓰러지셨다”(시대의 소망, 693)고 하였습니다. 비록 그분은 후에 로마 군병의 손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이미 그 이전에 우리의 집단적인 주먹질에 치명타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우리에게도 죄가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느낌을 갖습니까?
답:

교훈: 예수님은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병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실은 우리 각자의 죄가 그분으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시게 한 것이다.

부가적용)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갈 3:13). 바울은 십자가에서 모든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보았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런 저주를 받으신 이유를 예수 자신에게서 찾는 데 비해서 바울은 그 이유를 우리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저주가 우리가 받아 마땅한 율법의 저주였다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어 자유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저주의 십자가가 우리를 해방하는 축복의 도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차이가 있다. 그 둘 모두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본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자신들과는 상관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야할 저주로 보는 데 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감당해야 했던, 그러나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져 주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아 마땅한 저주가 그리스도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저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그리스도인의 확신의 한 부분이고,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화요일(6월 3일)
십자가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 1

도입)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54)“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에서 이김은 바로 승리를 말한다. 해석이 조금 어색하게 되어서 그렇다. 영어로 보면 Death is swallowed up in victory 사망이 승리에게 삼킴을 당했다 이다. 이것은 마치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하듯이 사망이 승리에게 삼킴을 당했다는 것은 의미이다. 이 승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사망은 사형 집행을 당했다. 십자가는 바로 사망의 묘지 인 것이다. 사망이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죽음을 살리시기 위하여 오셨다. 인간의 모든 실패와 좌절을 성공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어두움에 사로잡힌 우리의 세상과 인생과 미래를 밝은 빛으로 밝혀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이다. 구원이다. 살리시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끝난 것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었다.

1. 다음 구절들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고전 2:2, 15:3, 갈 6:14).
답: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와 표상과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희생, 제물, 대속물의 개념: 에베소서 5:2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9:26에는 그분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다고 하였다. 히브리서 10:14에는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들에 나타난 개념은 대속적인 죽음 즉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5: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고, 로마서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으며, 베드로전서 2:24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셨다(벧전 2:24)고 하였다.

2. 속전의 개념: 속전(贖錢, ransom)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루트론(lutron)에서 파생된 것으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일컫는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용어는 노예나 전쟁 포로를 되찾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성경의 기자들은 이 개념을 차용하여 더 성스러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마태복음 20:28(비교 막 10:45)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루트론)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다(여기서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루트론과 같은 어군(語群)에 속한 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속적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주셨는데, 여기서 ‘주다’라는 동사는 원어상으로 어느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시사한다.

교훈: 우리는 죄의 노예였으며 영원한 죽음이라는 정죄를 받았고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형편에 있었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부가적용)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이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옛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 모든 율법의 행위는 다 거짓이다. 그것은 마치 회칠한 무덤과 같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다면 우리는 모든 죄악을 한 순간에 종식시킬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과 불화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거나 사람에 대해서 화평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뿐이다. 우리의 타고난 성정이 게으르다면 근면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으로 옛 사람이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고난 게으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용기가 없고 비겁하다면 우리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스포츠나 다른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용기 없음 혹은 비겁함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처리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도 끝났다 게으름 비겁함 이러한 모든 악이 우리- 바로 우리의 옛 사람 안에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게으름이나 비겁함을 개선시키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우리 자신이 죽었음을 보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재가 되지 않는다. 믿음만이 옛 사람의 죽음이 실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고난 게으름을 처리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게으름을 행하는 주체인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도 함께 죽었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가장 놀랍고 기쁜 소식이다. 예수와 함께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평안이다. 오직 죽은 자만이 평안할 수 있고 평안한 자만이 기뻐할 수 있다.

수요일(6월 4일)
십자가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 2

도입)
어떤 사람이 연필을 자기의 귀에 끼고 “내 연필이 어디 갔느냐”고 찾으니까 옆에 있던 애가 “아버지의 귀에 끼운 것은 연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하고 말을 하였다. 연필을 자기의 귀에 끼우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 해 “내 연필 어디 갔느냐?”고 찾는 것과 같이, 현대 교인들은 십자가를 모표로 달고 양복 깃에 붙이고 시계 줄에 차고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가지지 못한 자들이 많다. 십자가라는 말은 희랍어로 스타우로스라는 글자로 그 뜻은 화형용(火刑用)의 기둥이라는 의미이다. 고대에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고통과 부끄러움을 주어 죽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 틀이었다. 역사적 권위가의 말에 의하면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이 사형을 받는 형틀 중에 제일 싫어하는 형틀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죽는 것도 어렵게 죽지만 그보다는 수치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천 년 전에는 수치스러운 죄인의 사형 틀인 십자가가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랑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로 되었을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로운 의의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새로운 의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이루었음을 알고서 우리의 눈을 우리와 그분이 죽음 안에서 하나 된 사실에 고정시킬 때이다. 우리의 승리의 기반은 결코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됨이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음을 체험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 산 자" 즉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있는 자들이다(사는 것이 죽음을 체험케 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다." 타락한 천사들에 관해 앤드류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 "천사들이 타락하게 된 것은 즉 그들이 불순종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자신들을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만약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한다면, 그 십자가에서는 구원과 동시에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도 발생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내적인 십자가를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와 분리시킬 수 없다.

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취한 바를 표현하기 위해 신약의 기자들이 사용한 여러 은유들 가운데 두 가지를 검토해 보았다. 여기서 두 가지를 더 살펴보자.
3. 속죄(Propitiation)의 개념: 속죄(힐라스테리온)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련된 단어인데, 히브리서 2:17에는 그리스도께서 “백성의 죄를 구속(힐라스테리온)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 말은 신이 진노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신을 다시 기쁘게(힐라로스) 하기 위해 진정시키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이 단어를 고전 헬라어나 다른 데서 차용하였으나 전혀 새로운 의미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단어를 속량(expi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이해하는 대로 이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덮어 가리시며, 도말하셨다는 의미이다. 신약의 기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랜다는 개념은 완전히 낯선 개념이었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당한 전 인류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힐라스테리온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덮어 주신다.

4. 화목(Reconciliation)의 개념: 다음 구절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한 가지 개념이 있다(롬 5:10-11, 고후 5:18-21, 엡 2:16, 골 1:20-22). 죄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원(疏遠)한 상태, 즉 죽음으로 끝나는 상태에 놓이게 한다. 화목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조화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화목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롬 5:8-1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 5:19). 죄 때문에 온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십자가를 통하여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영생의 보증을 받게 된다.

교훈: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납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자.

부가적용)
위대한 캠브리지대학의 설교자였던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은 십자가의 틀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간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당한 박해를 통해 얻은 승리의 교훈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박해를 당하고 난 후 고난 속에서 손에 신약 성경을 들고서 방황하며 걷고 있었다. 나는 책을 펴면서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구절을 찾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내 눈에 들어온 첫 번째 성경 구절은 "시몬이란 이름의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로 하여금 억지로 그분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였더라." 시몬과 시므온은 같은 이름이다. 이 사실은 실로 나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축복의 말씀이었다. 내 위에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 그야말로 엄청난 특권이었다. 그 한 구절로 모든 것은 해결되었다. 나는 그때 기뻐 뛰며 노래를 할 수 있었다. 그분의 고통의 친교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그 십자가를 제 위에 놓으십시오. 저에게 놓으세요. 주님을 위해 제가 그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해를 면류관으로서 내 머리 위에 매고 갈 수 있었다!(Two-Fold Life 에서 A.J.Gordon 이 인용함)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요 승리요 영광인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끝장내어야만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다. 우리도 역시 우리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기쁘게 내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우리의 머리에 묶고 이 모든 상황을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낮추며 자아를 포기하며 우리의 무든 우상을 용기 있게 희생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 담대하고 용감하며, 타협하지 말고, 불평 없이 우리의 매일의 십자가를 붙들고 나가자. 우리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로 가져가서 새로운 자유와 부활의 능력을 얻도록 하자.

목요일(6월 5일)
우주의 안전
도입)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죽음’이라는 문제는 인생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그 뿐이다’고 하는 죽음의 그릇된 이해로 인하여 오로지 육체의 정욕과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사단 마귀에게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지개는 곧 주님의 십자가의 그림자이다. 노아의 후손들의 안전한 삶의 토대가 무지개의 약속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지개란 멸망당한 옛 인류에게 속하지 않고 그들 자신은 살아남는 은총을 입는 새 인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새 백성이다. 십자가는 새로운 인류와 새 삶의 유일한 언약이다. 또한 노아의 후손들은 아무리 비가 내리고 날씨가 비바람으로 흉용해도 구름 속에 무지개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무지개가 있는 한 두려워 할 이유가 없으며 바벨탑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고 절망스러운 일에 봉착한다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한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는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언약의 무지개와 같이 우리의 삶의 절대적인 안전한 기초이다. 노아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감사와 찬송의 기초가 무지개이듯이 우리에게는 십자가만이 안전, 확신, 기쁨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주적인 안전이 이 십자가에 있음을 기억하고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신약 신학에서 인간의 상태에 관한 몇 가지 사실뿐 아니라, 인간의 차원을 넘어 십자가가 이루게 될 그 궁극적인 성취를 보게 된다..

1. 다음 구절들은 인간의 상태와 예수님의 죽음의 필요성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롬 3:10, 23, 고전 2:2, 15:3, 갈 6:14).
답:
헬라와 고대 다른 세계에서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했다. 바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타고난 선량함은 꽃피어 번성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보편적 타락과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했다. 이 능력은 마침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할 것이었다(빌 2:10-11).
그러나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또 하나의 중요성을 지닌다. “천사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깊은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없이는 하나님의 낙원에서 집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 천사들도 그리스도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을 보지 않았더라면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효능으로 하늘의 천사들이 배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그들도 사단의 타락 전의 천사들보다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사의 완전은 하늘에서 무너졌고 인간의 완전은 축복의 낙원 에덴에서 무너졌다.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간에 안전을 원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확연히 드러내는 구원의 경륜은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을 사람들에게는 물론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에게도 또 다른 반역을 방지하는 하나의 영원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줄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교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우주의 반역을 방지하는 하나의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부가적용)
독일의 한 중년신사가 설암(혀암)으로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주사를 들고 의사가 잠시 동안 머뭇거리더니 "마지막으로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글로는 쓸 수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흘렀다. 그 때 그 환자는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말하기를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세 마디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이 세상에 가장 감사할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일 것이다. 십자가는 우주적 제단이고 바로 이 온 우주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번제단이다. 이 제단에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십자가의 승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인간의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끌려가지 않는다 하는 것이다. 인간의 철학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철학이 우리를 멸망의 길에서 구원해줄 수가 없다. 베드로전서 1:18에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라고 했다. 우리의 구속은 은이나 금처럼 없어지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승리는 곧 우리 성도들의 삶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우주적 십자가의 제단아래서 만이 우리의 참된 안전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라. 그분 안에서만이 참된 안전이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가장 감동스러운 러브 스토리 (love story)이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고,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이시고, 성경은 사랑의 편지이며,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 속으로 빨려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사랑의 밀어, 전도는 사랑의 전달, 찬송은 사랑의 노래, 그리고 우리에게 십자가는 사랑의 드라마이다. 그중에서도 절정의 부분이다.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백이다.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심장이 파열된 사건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다가 예수께서 심장이 터져서 죽으신 곳이시다.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다가 사랑의 심장이 터져서 죽은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갈라디아서 6:1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했다. 어떻게 구원을 위해 더 이 보다 안전한 장소가 있을까?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자.

금요일(6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78장 ‘갈바리’(744-757), 제79장 ‘다 이루었다’(758-764).

“그러므로 천사들이 구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한 것은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저희가 그 때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죄와 사단의 멸망이 영원히 확실해졌다는 것과, 인류의 구속이 보장되었다는 것과 이 우주가 영원히 안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에서 이루신 희생의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내다보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764).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죄의 창시자의 파멸을 확실하게 하였다. 사단이 멸망하면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속죄는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우주 안에는 또 다른 반역이 일어날 위험이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하나님의 사랑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속죄의 효력은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왜 잘못된 것입니까?

2. 십자가로 인해 우주가 안전하게 된다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대쟁투를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더 잘 인식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3.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신비로 남아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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