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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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
5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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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깊은 애정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참으로 바쁜 나날이었기에 자신들을 위한 시간을 내지도 빵 한 조각 제대로 먹을 시간도 낼 수 없었던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막 6:31)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며, 예수님은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며 늘 기도해 왔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시며 영원한 관계로 맺을 관계로 승화시키신다(요 13:8).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시며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가지고 계신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셨다(요 13:4-5 참조).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떠나고 싶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 28:2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 지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셨다. 당신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누룩(눅 13:20-21), 빵 그리고 소금(눅 14:34)을 포함해서 목자와 잃어버린 양(눅 15:1-7), 나이 많은 여인들과 잃어버린 은전(눅 15:8-10), 등불(눅 8:16-18)와 농부(눅 8:11-15; 요 15:1) 그리고 집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용품 등을 소재로 사용하셨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하나님을 저녁 식탁에서 마주 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해준다. 그것들은 일상 삶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기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정감어린 이미지를 드러내며 예수님을 평범한 것들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 평범한 분으로 보여준다. 그것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테이블에 있는 소금처럼 자연스러우며, 아침식사의 밥처럼 일반적이고 된장국이나 김치처럼 풍요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섬세한 예수님은 친구들과 물고기와 빵을 나누시면서(요 21:13), 요동하는 배 안에서 그들을 진정시켜 주시면서(마 8:21-25),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시면서 당신의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 다음 친인척 관계처럼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통해 당신을 내어주시고(눅 22:14-23) 그들이 서로 절대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요 14:26). 예수의 삶에서 드러내신 예화와 그분이 사람을 만나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람들에게 그분이 얼마나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들로 충만하다.
기억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연구범위: 마 5:44-48, 19:13-14, 23:37, 눅 10:38-42, 요 8:2-11, 행 6:7.
안식일 오후
마태복음 9:35은 예수께서 팔레스틴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고 기록한다. 요즘 같은 냉소적인 시대에는 누군가 남을 도와준다면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는 ‘불쌍히 여김’(36절)이라는 말로 묘사된 진실한 사랑이었기에 우리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했으며, 언제나 그들에게로 향하였다. 그분의 이와 같은 연민의 정은 마가복음 8:1-3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기진(氣盡)할 것을 염려하시고,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2-3절)고 말씀하셨다.
이 놀랍도록 부드러운 관심은 예수님의 품성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통감하셨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도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은, 광야에 사흘을 머무는 동안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된(먹을 음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임)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염려하셨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그러한 사랑스런 동정심을 배우자.
일요일(5월 25일)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요 8: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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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복음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마음에 감동적이 아니면 알려질리 없다. 무엇이 그러한 감동을 남겼겠는가? 용서이다. 모두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넓고 따뜻한 마음이다. 예부터 간음은 여자의 크나큰 잘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기에 가혹한 벌로 다스렸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우리나라도 그랬다. 그러나 어찌 여자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두를 용서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범치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지....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는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 앞에 설수 있으며, 말씀이 되돌아와 우리를 삶을 감싸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밝은 생각이 먼저이다. 간음한 여인보다 그녀를 고발했던 이들이 더 어두웠다. 그들은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두려움을 떨쳐야 한다. 용서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삶이 바뀌었다.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바뀌게 한다.
1.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엘렌 G. 화잇은 그 여인이 어떤 음모에 걸려들었다(시대의 소망, 461)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셨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무죄하신 그분께서는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시대의 소망, 462).
이 얼마나 부드러운 동정과 사랑인가!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고소한 자들로 하여금 총총히 떠나가도록 조치하셨는데, 그분께서 그 아침에 길바닥에 쓰신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2. 예수께서는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 여인을 당신께로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까지도 어떻게 구원의 사역을 행하셨습니까?
답:
이 이야기를 주의 깊이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아주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있던 자들까지도 동정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가련한 여인에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호소하셨을 때 그들이 마음을 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교훈: 예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까지도 동정하시고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도 동정심을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인생은 누구나 지우고 싶어 하는 허물이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쾌락의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죽음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불쌍한 여자가 현재 삶에 만족을 못 느끼고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이 여자를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없다. 7절에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정죄하는 사람들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죄를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물으신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된다. 늦게 서야 깨닫고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만 그 누구도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지우개가 되신다. 우리를 불행과 죽음 속에 빠지게 했던 죄악에서 얼룩진 부끄러운 모습으로부터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생의 지우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4장 7절에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하였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가지고 있어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가리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상 연락에 사로잡혀 죽음 앞에 선 여인을 구원할 수 없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신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더 멋진 인생을 써내려갈 수 있다. 여인의 죄를 깨끗이 지워주신 주님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죄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이라면 다시 죄를 범치 아니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떠나라”고 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월요일(5월 26일)
어린아이들에게(마 1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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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는 아이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그가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중대하다 여긴 것 같다. 예수님께 와서 무슨 유익을 얻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 예수님도 그들이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육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어머니들의 염려와 수고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머니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는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팔에 안으시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을 주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고 계신다. 내 나이가 몇인데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수세기 동안 고통의 표적이 되어 왔다. 힘이 없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은 종종 전쟁이나 분쟁에서 사로잡히고 사회적 폭동이나 가정적 불화의 희생자가 되어 왔다. 고대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을 때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유아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헤롯이 내린 살육 명령(마 2:16)에 희생된 것도 남자 아이들이었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당시에 있었던 또 다른 무차별적인 유아 학살을 상기시켜 준다(마 2:17-18, 비교 렘 31:15). 예수께서 모친의 무릎에 앉아 헤롯의 살육에 대해 들으셨을 때, 어떤 면에서 자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겠는가?(그분께서는 그들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건만 그분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인식하시기도 전에 그들은 그분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이신 부드러운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기사들은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를 넘어 어떤 심오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까?(마 18:2-6, 19:13-15).
답:
그날 예수님의 무릎에 앉았던 아이들과, 그분께서 손을 얹어 축복하신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했겠는가? 기억할 만한 나이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추억했겠는가? 그들 중에 얼마는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축복의 손을 얹으신 그 사랑스런 분이 이제 하늘 높은 곳에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느꼈겠는가?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확신이 들었겠는가! 정치가들이 아기들에게 입 맞추는 것은 그 부모의 표를 의식하기 때문이지만,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고 말씀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에도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셨다. 어린 영혼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신 것은 막연한 짐작이나 추측이 아니다. 예수님은 한 이방 여인의 마음의 고통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먼 여행을 하시기도 하셨다.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셨다. 일부러 그 지방에 가신 것이다. 그 과부의 슬픔과 통곡과 절망을 거두어주시기 위해서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마리아를 기억하고 요한에게 맡기신 예수님이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어머니들에게 문이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린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다니고 어머니에 이끌려서 예수님께 올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모든 어머니들을 초청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화요일(5월 27일)
나사로의 가족에게(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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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누이들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예수께 사람들을 보내어 아뢰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났이다” 서편 베다니에서 동편 베다니까지는 하룻길인데 사환을 보냈다. 사실은 나사로가 이 사환이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죽은 것 같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저들이 얼마나 예수님과 친숙하게 지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을 보내서 무슨 말을 전했는가? 아주 짧은 말이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무슨 간청을 드린 것보다도 사실 그대로 알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말한 말을 주목해 보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를 말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를 말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데 비하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큰 힘을 얻을 사실이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 사실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면 된다. 주님이 아셔서 잘 처리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하는 것보다 더 잘 처리해 주신다. 요 11: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은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에 대하여 미리 다 아시고 계셨다. 사환의 보고를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일을 선언하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미래와 모든 삶에 대한 관심을 이미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베다니 나사로의 가족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한다. 사복음서에는 그들에 관한 정보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세 명의 장성한 미혼 남매들로서 함께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유대인 가족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 마을에 오실 때면 언제나 그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마리아)과 (그들의 오라비)나사로를 사랑하”셨다(요 11:5)고 요한은 말한다.
1. 누가복음 10:38-42에 기록된 일화를 숙고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르다를 대하신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서도 예수께서 보이신 사랑스런 동정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마르다의 요청은 매우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풍습은 환대의 표시로 음식을 대접했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아마도 마르다는 너무 가난해서 하녀를 둘 형편이 되지 않아 부엌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반응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이라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눅 2:48-49)을 통해 그분의 부모도 깨닫게 되었듯이, 예수님께는 그 어떤 것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매 분초가 그분께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엌일은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실 때의 표정을 우리는 볼 수 없고, 연민의 정이 배어 있는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종합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 이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두 번이나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부르시고, 뒤 따라오던 마리아를 가리키시며 “대접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했구나.”라고 하셨을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나사로의 가족에 나타내신 동정어린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가정도 예수님이 즐겨 찾으실 만한 곳이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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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가장 받은 사랑을 받은 가정이 있다면 아마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이었을 것이다. 이 가정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도의 가정 가운데 으뜸가는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까지 예수님이 사랑하는 가정의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였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대로 하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사람까지 보내서 알리는데 지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다. 여기에 대하여 해석이 다르다. 가령 바우어와 같은 사람은 그 누이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하였고, 고대나 홀츠만 같은 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였다고 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주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였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셨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보다도 그들의 지혜와 신앙과 인내가 더욱 훌륭한 것을 아셨다. 그래서 이틀을 더 기다리셨고 나중에 영광과 찬양을 돌리게 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믿음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시험을 당하면 그것은 믿음이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체를 하셨다. 더욱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나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지체 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면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고쳐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이나 그전에 행하신 몇 가지 이적보다도 다를 것이 없으므로 그저 지나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 계시지 않았으므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를 살리게 되어 하나님의 더욱 큰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볼 때는 지체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간구와 응답이 지연된다고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이사야서 54장 7절 이하에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고 하셨다.
수요일(5월 28일)
당신의 원수들에게(마 5:44)
도입)
기독교는 사랑을 빼놓고는 무엇이든 말할 수가 없다. 신자에게는 방언도 중요하다. 예언도 중요하다. 신유도 중요하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사랑이 전제될 때 보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 없는 방언이나 예언은 의미가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랑의 삶이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이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제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찼을 때 말씀은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강력히 권면한다. 말씀은 능력이 있다. 더러움을 씻어 준다. 말씀의 검으로 죄악된 마음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좁은 마음이 더욱 넓은 마음으로 변화된다. 말씀이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말씀을 담아야 한다.
1. 예수께서 하신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마태복음 5:44-48에 나옵니다. 이 성경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이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답: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온 생애와 죽음은,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네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을 베풀라’는 이 원칙의 현현(顯現)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온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의 영토가 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원수 된 지구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범죄한 지구를 쓸어버리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2.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원수에게까지도 나타내신 명백한 사랑의 모본들 중에 가장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예를 들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을 때 낫게 해 주신 일(눅 22:50-51)은 어떤가? 혹은 그분께서 유다가 행할 일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마음이 굳어져가는 그 제자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키도록 또 다른 기회를 주신 사례(마 26:25)는 어떤가?
물론 가장 위대한 모본은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늘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여러 면에서 이 기도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 그분의 모본을 궁극적으로 나타내 준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당신이 누구이시며, 적어도 그런 거친 대우를 받을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넉넉한 기회를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동정심을 그들에게까지도 보여주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의 온 생애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당신의 명령을 친히 보여주신 모본의 삶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가적용)
기독교 윤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생활에서 적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 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시면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율법에는“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이는“네 이웃(동족)을 사랑해야 되지만 원수(이방인)는 미워하라”는 잘못된 해석이며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시정하기위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문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혈과 육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첫째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은총의 원리에 의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을 아니다 그것은 “정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원리보다는 은총의 원리를 적용하신다.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율법적 원리보다는 은총의 원리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로서“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둘째, 본능의 원리를 따르지 말고 죽음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편리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데, 이는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본능이다. 이러한 죄로 인해 부패된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원리” 를 적용해야 된다. 이것을 예수님은“자기 부인의 원리”라고 하였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속함을 받았다면 이제는“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이라”하며, 죽음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자만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쳤다. 셋째, 감정의 원리를 따르지 말고 의(義)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네 원수를 사랑하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감정에 사로잡힌 느낌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상관없는 의지의 결단에 근거한 사랑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원리에 따른 사랑이 아니라 의의 원리에 따른 아가페 사랑일 때 가능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좋아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그를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의 태도이다.
목요일(5월 29일)
이스라엘 백성에게(마 23:37)
도입)
마 23:37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눈물과 소회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과의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더냐?" 라는 말씀에서 "나" 예수는 "너"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고 애를 썼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쓰라린 고언을 던지고 있는 경우를 넘어서고 있다. 예수님의 이 "나"의 슬픔과 비탄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슬픔과 비통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뜻 이 본문을 읽으면, 예루살렘의 죄악상과 타락상을 향한 한 선지자의 피를 토하는 외침처럼 읽혀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외침이 담겨져 있는 관계의 틀은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의 외침 훨씬 이상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침과 비통함과 고언의 토로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안타까운 괴로움 -- 을 표출하고 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파송하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불순종의 극명한 실례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루살렘을 암탉이 그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품으려 하듯 보호하고 지키려 하셨던 하나님의 처신을 반영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1. 위의 본문에는 예수님의 품성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이 구절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구절은 사랑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기 전에 이 말씀을 어떻게 내 자신에게 직접 적용할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답: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신다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4천년간의 끊임없는 실망과 좌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때는 아주 드물고 비교적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가 다하자, 그분께서는 메시야의 초림에 이르는 490년의 기간(단 9:24)을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그 메시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과 동정의 태도로 일관하셨다.
2. 마태복음 23:25-35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강경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인내가 그 한도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또 아무리 오랫동안 그 완고함으로 버리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은 마침내 그분의 강경한 사랑의 껍질을 깨뜨리고 만다. 만약 이 백성 중에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자들이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그분은 그렇게 강경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교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는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호소를 보내신다.
부가적용)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역사였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는 것과 같은 하나님 편에서의 배려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하나님에게서 파송받은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는 극악한 반역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역의 기운과 운동은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야흐로 죽이려고 하는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불순종의 적대 행위를 통해 펼쳐질 순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소위 "하나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 존경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나님, 제사를 받으시옵소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기름진 제사입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을 칭찬하고 높여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셔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심령과 삶에 받아 그 뜻대로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선지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지자들의 비판과 지적과 지침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 그 선지자들을 "공경합니다, 공대합니다, 푸짐한 음식과 성찬으로 잘 대접해 드립니다"라는 식의 환대와 배려와 존중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통곡 혹은 애도는 이미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이 하나님백성의 대표자의 노릇을 박탈당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앞으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것이 예수님의 슬픔에 담겨 있는 뜻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담겨 있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소회이며, 또한 엄중한 심판의 말씀이며, 새로운 소망의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돌아올 수 있는 일말의 기회를, 여지를 남겨 두신 말씀이다. 물론 그 기회는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환영하고 받들어 모시는데 있는 것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모셔 섬기는데 있었다.
금요일 (5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58장 ‘나사로야 나오라’(524-536), 제75장 ‘안나스 앞과 가야바 궁전에서’(710-715), 제76장 ‘유다’(720-722)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는 많은 기지(機智)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구주께서는 결코 진리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많은 기지를 사용하시고 항상 사랑과 이해심이 많으셨다. 무례한 행동을 하신 일도 없었고, 쓸데없이 가혹한 말을 하거나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도무지 없으셨다. 사람의 약점을 힐난하는 일도 없으셨다. 그러나 외식과 불신과 죄악은 기탄없이 책망하셨다. 그러면서도 책망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분은 진리를 무정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 속에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의 눈에는 모든 영혼들이 다 귀중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위엄을 친히 지니고 계셨을지라도 하나님의 가족의 각 개인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돌아보셨다. 모든 사람들을 보실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여야 할 사명이 당신께 있음을 아셨다”(복음 교역자, 1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실제적인 면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으로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2. 우리는 어떤 식으로 참된 사랑과 값싼 은혜를 혼동할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도 묵인해버리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책무를 엄격히 지적해야 할 때도 있습니까?
3. 유대 민족과 오늘날의 재림교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사례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5월 3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7분)
도입)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깊은 애정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참으로 바쁜 나날이었기에 자신들을 위한 시간을 내지도 빵 한 조각 제대로 먹을 시간도 낼 수 없었던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막 6:31)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며, 예수님은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며 늘 기도해 왔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시며 영원한 관계로 맺을 관계로 승화시키신다(요 13:8).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시며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가지고 계신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셨다(요 13:4-5 참조). 마태복음의 끝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떠나고 싶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 28:2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 지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셨다. 당신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누룩(눅 13:20-21), 빵 그리고 소금(눅 14:34)을 포함해서 목자와 잃어버린 양(눅 15:1-7), 나이 많은 여인들과 잃어버린 은전(눅 15:8-10), 등불(눅 8:16-18)와 농부(눅 8:11-15; 요 15:1) 그리고 집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용품 등을 소재로 사용하셨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하나님을 저녁 식탁에서 마주 하는 것처럼 친근하게 해준다. 그것들은 일상 삶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기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정감어린 이미지를 드러내며 예수님을 평범한 것들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는 평범한 분으로 보여준다. 그것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테이블에 있는 소금처럼 자연스러우며, 아침식사의 밥처럼 일반적이고 된장국이나 김치처럼 풍요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섬세한 예수님은 친구들과 물고기와 빵을 나누시면서(요 21:13), 요동하는 배 안에서 그들을 진정시켜 주시면서(마 8:21-25),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시면서 당신의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 다음 친인척 관계처럼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통해 당신을 내어주시고(눅 22:14-23) 그들이 서로 절대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요 14:26). 예수의 삶에서 드러내신 예화와 그분이 사람을 만나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람들에게 그분이 얼마나 부드러운 사랑으로 대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들로 충만하다.
기억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연구범위: 마 5:44-48, 19:13-14, 23:37, 눅 10:38-42, 요 8:2-11, 행 6:7.
안식일 오후
마태복음 9:35은 예수께서 팔레스틴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고 기록한다. 요즘 같은 냉소적인 시대에는 누군가 남을 도와준다면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는 ‘불쌍히 여김’(36절)이라는 말로 묘사된 진실한 사랑이었기에 우리에게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했으며, 언제나 그들에게로 향하였다. 그분의 이와 같은 연민의 정은 마가복음 8:1-3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집으로 가는 도중에 기진(氣盡)할 것을 염려하시고,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2-3절)고 말씀하셨다.
이 놀랍도록 부드러운 관심은 예수님의 품성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아셨으며, 그들의 필요를 통감하셨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도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똑같이 행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은, 광야에 사흘을 머무는 동안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된(먹을 음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임)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염려하셨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우리 각자의 삶과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그러한 사랑스런 동정심을 배우자.
일요일(5월 25일)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요 8:2-11)
도입)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는 복음이야기는 많이 알고 있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마음에 감동적이 아니면 알려질리 없다. 무엇이 그러한 감동을 남겼겠는가? 용서이다. 모두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넓고 따뜻한 마음이다. 예부터 간음은 여자의 크나큰 잘못으로 인식되었다. 그러기에 가혹한 벌로 다스렸다. 이스라엘이 그랬고, 우리나라도 그랬다. 그러나 어찌 여자만의 잘못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두를 용서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범치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지....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는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 앞에 설수 있으며, 말씀이 되돌아와 우리를 삶을 감싸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밝은 생각이 먼저이다. 간음한 여인보다 그녀를 고발했던 이들이 더 어두웠다. 그들은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두려움을 떨쳐야 한다. 용서의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삶이 바뀌었다.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바뀌게 한다.
1.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엘렌 G. 화잇은 그 여인이 어떤 음모에 걸려들었다(시대의 소망, 461)고 하였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셨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무죄하신 그분께서는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시대의 소망, 462).
이 얼마나 부드러운 동정과 사랑인가!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고소한 자들로 하여금 총총히 떠나가도록 조치하셨는데, 그분께서 그 아침에 길바닥에 쓰신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그들은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2. 예수께서는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이 여인을 당신께로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까지도 어떻게 구원의 사역을 행하셨습니까?
답:
이 이야기를 주의 깊이 읽어보면 예수께서는 아주 좋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있던 자들까지도 동정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가련한 여인에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호소하셨을 때 그들이 마음을 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교훈: 예수께서는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까지도 동정하시고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 그분은 그녀를 끌고 온 위선자들에게도 동정심을 나타내셨다.
부가적용)
인생은 누구나 지우고 싶어 하는 허물이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쾌락의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혀 죽음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불쌍한 여자가 현재 삶에 만족을 못 느끼고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이 여자를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없다. 7절에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정죄하는 사람들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죄를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물으신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는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된다. 늦게 서야 깨닫고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만 그 누구도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지우개가 되신다. 우리를 불행과 죽음 속에 빠지게 했던 죄악에서 얼룩진 부끄러운 모습으로부터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생의 지우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다. 로마서 4장 7절에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하였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가지고 있어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가리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상 연락에 사로잡혀 죽음 앞에 선 여인을 구원할 수 없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지우는 지우개가 되신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더 멋진 인생을 써내려갈 수 있다. 여인의 죄를 깨끗이 지워주신 주님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죄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이라면 다시 죄를 범치 아니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떠나라”고 하시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월요일(5월 26일)
어린아이들에게(마 19:13-14)
도입)
유대인들에게는 아이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그가 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중대하다 여긴 것 같다. 예수님께 와서 무슨 유익을 얻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 예수님도 그들이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지레짐작 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는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육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어머니들의 염려와 수고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어머니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는다. 예수님은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팔에 안으시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을 주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고 계신다. 내 나이가 몇인데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스런 자녀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수세기 동안 고통의 표적이 되어 왔다. 힘이 없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은 종종 전쟁이나 분쟁에서 사로잡히고 사회적 폭동이나 가정적 불화의 희생자가 되어 왔다. 고대 애굽의 바로가 히브리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을 때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유아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헤롯이 내린 살육 명령(마 2:16)에 희생된 것도 남자 아이들이었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당시에 있었던 또 다른 무차별적인 유아 학살을 상기시켜 준다(마 2:17-18, 비교 렘 31:15). 예수께서 모친의 무릎에 앉아 헤롯의 살육에 대해 들으셨을 때, 어떤 면에서 자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겠는가?(그분께서는 그들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건만 그분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인식하시기도 전에 그들은 그분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이신 부드러운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기사들은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야 할지를 넘어 어떤 심오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까?(마 18:2-6, 19:13-15).
답:
그날 예수님의 무릎에 앉았던 아이들과, 그분께서 손을 얹어 축복하신 아이들의 미래는 어떠했겠는가? 기억할 만한 나이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날의 기억을 어떻게 추억했겠는가? 그들 중에 얼마는 후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축복의 손을 얹으신 그 사랑스런 분이 이제 하늘 높은 곳에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느꼈겠는가?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확신이 들었겠는가! 정치가들이 아기들에게 입 맞추는 것은 그 부모의 표를 의식하기 때문이지만,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고 말씀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에도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셨다. 어린 영혼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깊은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신 것은 막연한 짐작이나 추측이 아니다. 예수님은 한 이방 여인의 마음의 고통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먼 여행을 하시기도 하셨다.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셨다. 일부러 그 지방에 가신 것이다. 그 과부의 슬픔과 통곡과 절망을 거두어주시기 위해서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마리아를 기억하고 요한에게 맡기신 예수님이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어머니들에게 문이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다. 어린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다니고 어머니에 이끌려서 예수님께 올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모든 어머니들을 초청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화요일(5월 27일)
나사로의 가족에게(요 11:5)
도입)
나사로의 누이들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예수께 사람들을 보내어 아뢰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어났이다” 서편 베다니에서 동편 베다니까지는 하룻길인데 사환을 보냈다. 사실은 나사로가 이 사환이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죽은 것 같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사람을 예수님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저들이 얼마나 예수님과 친숙하게 지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을 보내서 무슨 말을 전했는가? 아주 짧은 말이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무슨 간청을 드린 것보다도 사실 그대로 알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말한 말을 주목해 보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를 말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를 말할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가 병들었나이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데 비하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큰 힘을 얻을 사실이 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 사실을 그대로 주님께 아뢰면 된다. 주님이 아셔서 잘 처리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하는 것보다 더 잘 처리해 주신다. 요 11: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은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에 대하여 미리 다 아시고 계셨다. 사환의 보고를 들으시고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일을 선언하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미래와 모든 삶에 대한 관심을 이미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베다니 나사로의 가족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한다. 사복음서에는 그들에 관한 정보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세 명의 장성한 미혼 남매들로서 함께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유대인 가족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수께서는 그 마을에 오실 때면 언제나 그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마리아)과 (그들의 오라비)나사로를 사랑하”셨다(요 11:5)고 요한은 말한다.
1. 누가복음 10:38-42에 기록된 일화를 숙고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르다를 대하신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서도 예수께서 보이신 사랑스런 동정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마르다의 요청은 매우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동양의 풍습은 환대의 표시로 음식을 대접했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아마도 마르다는 너무 가난해서 하녀를 둘 형편이 되지 않아 부엌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반응은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이라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눅 2:48-49)을 통해 그분의 부모도 깨닫게 되었듯이, 예수님께는 그 어떤 것도 평범한 것이 없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매 분초가 그분께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엌일은 덜 중요하게 여겨진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실 때의 표정을 우리는 볼 수 없고, 연민의 정이 배어 있는 그분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다른 곳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종합하고,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 이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두 번이나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부르시고, 뒤 따라오던 마리아를 가리키시며 “대접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마리아는 그것을 발견했구나.”라고 하셨을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나사로의 가족에 나타내신 동정어린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가정도 예수님이 즐겨 찾으실 만한 곳이 되게 하자.
부가적용)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가장 받은 사랑을 받은 가정이 있다면 아마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이었을 것이다. 이 가정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성도의 가정 가운데 으뜸가는 가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까지 예수님이 사랑하는 가정의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였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대로 하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사람까지 보내서 알리는데 지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다. 여기에 대하여 해석이 다르다. 가령 바우어와 같은 사람은 그 누이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하였고, 고대나 홀츠만 같은 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였다고 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주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였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셨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보다도 그들의 지혜와 신앙과 인내가 더욱 훌륭한 것을 아셨다. 그래서 이틀을 더 기다리셨고 나중에 영광과 찬양을 돌리게 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믿음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시험을 당하면 그것은 믿음이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주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체를 하셨다. 더욱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나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지체 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다면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고쳐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이나 그전에 행하신 몇 가지 이적보다도 다를 것이 없으므로 그저 지나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 계시지 않았으므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를 살리게 되어 하나님의 더욱 큰 영광을 나타나게 되었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볼 때는 지체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간구와 응답이 지연된다고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이사야서 54장 7절 이하에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노라”고 하셨다.
수요일(5월 28일)
당신의 원수들에게(마 5:44)
도입)
기독교는 사랑을 빼놓고는 무엇이든 말할 수가 없다. 신자에게는 방언도 중요하다. 예언도 중요하다. 신유도 중요하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사랑이 전제될 때 보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 없는 방언이나 예언은 의미가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랑의 삶이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이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제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으로 가득 찼을 때 말씀은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강력히 권면한다. 말씀은 능력이 있다. 더러움을 씻어 준다. 말씀의 검으로 죄악된 마음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좁은 마음이 더욱 넓은 마음으로 변화된다. 말씀이 미움을 사랑으로 이기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말씀을 담아야 한다.
1. 예수께서 하신 가장 유명한 말씀 중 하나가 마태복음 5:44-48에 나옵니다. 이 성경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이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답: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온 생애와 죽음은,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네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을 베풀라’는 이 원칙의 현현(顯現)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온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원수의 영토가 되었고,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원수 된 지구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범죄한 지구를 쓸어버리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셨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끝장내는 대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2.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원수에게까지도 나타내신 명백한 사랑의 모본들 중에 가장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예를 들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을 때 낫게 해 주신 일(눅 22:50-51)은 어떤가? 혹은 그분께서 유다가 행할 일을 미리 아셨으면서도 마음이 굳어져가는 그 제자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키도록 또 다른 기회를 주신 사례(마 26:25)는 어떤가?
물론 가장 위대한 모본은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늘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여러 면에서 이 기도는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 그분의 모본을 궁극적으로 나타내 준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당신이 누구이시며, 적어도 그런 거친 대우를 받을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넉넉한 기회를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게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동정심을 그들에게까지도 보여주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의 온 생애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당신의 명령을 친히 보여주신 모본의 삶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가적용)
기독교 윤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생활에서 적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 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시면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율법에는“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이는“네 이웃(동족)을 사랑해야 되지만 원수(이방인)는 미워하라”는 잘못된 해석이며 가르침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시정하기위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문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혈과 육으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시대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첫째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은총의 원리에 의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을 아니다 그것은 “정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원리보다는 은총의 원리를 적용하신다.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율법적 원리보다는 은총의 원리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로서“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둘째, 본능의 원리를 따르지 말고 죽음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인간에게는 편리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데, 이는 죄로 인해 부패한 인간의 본능이다. 이러한 죄로 인해 부패된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원리” 를 적용해야 된다. 이것을 예수님은“자기 부인의 원리”라고 하였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속함을 받았다면 이제는“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것이라”하며, 죽음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자만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쳤다. 셋째, 감정의 원리를 따르지 말고 의(義)의 원리를 따라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네 원수를 사랑하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감정에 사로잡힌 느낌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상관없는 의지의 결단에 근거한 사랑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원리에 따른 사랑이 아니라 의의 원리에 따른 아가페 사랑일 때 가능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좋아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그를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의 태도이다.
목요일(5월 29일)
이스라엘 백성에게(마 23:37)
도입)
마 23:37절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눈물과 소회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과의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더냐?" 라는 말씀에서 "나" 예수는 "너" 예루살렘의 자녀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고 애를 썼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쓰라린 고언을 던지고 있는 경우를 넘어서고 있다. 예수님의 이 "나"의 슬픔과 비탄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슬픔과 비통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뜻 이 본문을 읽으면, 예루살렘의 죄악상과 타락상을 향한 한 선지자의 피를 토하는 외침처럼 읽혀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외침이 담겨져 있는 관계의 틀은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의 외침 훨씬 이상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 외침과 비통함과 고언의 토로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안타까운 괴로움 -- 을 표출하고 있다.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파송하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불순종의 극명한 실례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루살렘을 암탉이 그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품으려 하듯 보호하고 지키려 하셨던 하나님의 처신을 반영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1. 위의 본문에는 예수님의 품성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이 구절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줍니까? 이 구절은 사랑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기 전에 이 말씀을 어떻게 내 자신에게 직접 적용할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답: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신다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4천년간의 끊임없는 실망과 좌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때는 아주 드물고 비교적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가 다하자, 그분께서는 메시야의 초림에 이르는 490년의 기간(단 9:24)을 그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그 메시야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과 동정의 태도로 일관하셨다.
2. 마태복음 23:25-35에는 예수님의 사랑의 강경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답: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인내가 그 한도에 가까이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또 아무리 오랫동안 그 완고함으로 버리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은 마침내 그분의 강경한 사랑의 껍질을 깨뜨리고 만다. 만약 이 백성 중에 자신의 잘못을 돌이킬 자들이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그분은 그렇게 강경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교훈: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는 메시야 시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의 호소를 보내신다.
부가적용)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역사였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려는 것과 같은 하나님 편에서의 배려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하나님에게서 파송받은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는 극악한 반역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역의 기운과 운동은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야흐로 죽이려고 하는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불순종의 적대 행위를 통해 펼쳐질 순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소위 "하나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 존경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나님, 제사를 받으시옵소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기름진 제사입니다" 라는 말로 하나님을 칭찬하고 높여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받들어 모셔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심령과 삶에 받아 그 뜻대로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선지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지자들의 비판과 지적과 지침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지, 그 선지자들을 "공경합니다, 공대합니다, 푸짐한 음식과 성찬으로 잘 대접해 드립니다"라는 식의 환대와 배려와 존중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통곡 혹은 애도는 이미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이 하나님백성의 대표자의 노릇을 박탈당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제 앞으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것이 예수님의 슬픔에 담겨 있는 뜻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담겨 있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소회이며, 또한 엄중한 심판의 말씀이며, 새로운 소망의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돌아올 수 있는 일말의 기회를, 여지를 남겨 두신 말씀이다. 물론 그 기회는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환영하고 받들어 모시는데 있는 것이며, 특별히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모셔 섬기는데 있었다.
금요일 (5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58장 ‘나사로야 나오라’(524-536), 제75장 ‘안나스 앞과 가야바 궁전에서’(710-715), 제76장 ‘유다’(720-722)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에는 많은 기지(機智)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구주께서는 결코 진리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 많은 기지를 사용하시고 항상 사랑과 이해심이 많으셨다. 무례한 행동을 하신 일도 없었고, 쓸데없이 가혹한 말을 하거나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 도무지 없으셨다. 사람의 약점을 힐난하는 일도 없으셨다. 그러나 외식과 불신과 죄악은 기탄없이 책망하셨다. 그러면서도 책망하시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그분은 진리를 무정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그 속에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의 눈에는 모든 영혼들이 다 귀중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위엄을 친히 지니고 계셨을지라도 하나님의 가족의 각 개인들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돌아보셨다. 모든 사람들을 보실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여야 할 사명이 당신께 있음을 아셨다”(복음 교역자, 1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실제적인 면에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으로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2. 우리는 어떤 식으로 참된 사랑과 값싼 은혜를 혼동할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도 묵인해버리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책무를 엄격히 지적해야 할 때도 있습니까?
3. 유대 민족과 오늘날의 재림교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사례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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