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5/17/08)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7과 그분의 당혹스런 행동(5/17/08)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5.07 06:27 조회수 5,645
글씨크기

본문

5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6분)

기억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 11:19).

연구범위: 마 4:12-13, 8:28-32, 11:18-19, 21:12-13, 눅 2:41-51, 5:32, 고전 1:26-28.

안식일 오후
지난주에 우리는 현대인들이 듣기에도 당혹스러운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했다. 이번 주에도 비슷한 문제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것이다.
예수님에 관해 탐구할 때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문제 중 하나는 그분을 인간적인 생각의 범주로 끌어내리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급진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사교적 보수주의의 성향을 가진 이들은 그분을 우리가 머무는 곳에 함께 계시는 분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어느 정도 이러한 현상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문화와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실체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문제가 파생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인간적인 견해를 뛰어넘어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바라도록 도와 줄 것이다.
일단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어두지 않게 되고, 그분을 조그마한 꾸러미 속에 묻어 두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행동의 진정한 의도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접근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몇몇 당혹스런 행동들을 탐구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혹은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핵심본문: 요 5:30

학습 목표
깨닫기: 만물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행하신 예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각 사람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를 열망한다.
행하기: 각 사람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전도하기로 결심한다.

교과 개요
I.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A.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아셨고 이 지상에 오신 목적을 이해하셨음
        B. 비록 그분께서는 부모를 공경하셨으나, 하나님께 더 충성하셨음

II. 우리의 형제이시며 모본이신 예수님
        A. 예수께서는 많은 경우에 우리와 같이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심
        B. 여러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아무 반응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심
        C.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의 이면에 있는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야 함

III.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
        A. 예수께서는 보통 사람들뿐 아니라 버림받은 계층들과도 교제하심
        B. ‘죄인들’과 교제하시는 주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정죄하고 비난했음

요점: 구주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당신의 사역에 모든 사람을 널리 포함시키셨다. 그분께서는 창녀로부터 설교자에 이르기까지, 나병환자로부터 법관에 이르기까지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셨다. 그분께서는 항상 무엇보다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셨다.

일요일(5월 11일) 부모를 경홀히 여기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30세까지의 생애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적은 정보 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끄는 한 사건이 있다.

1. 누가복음 2:41-51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부모에게 대하신 모습은 얼핏 어떤 인상을 줍니까? 한편 여기에는 어떤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까? 그 일에 대한 실마리를 47절에서 찾아 보십시오.
눅2:41-5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답: 이 장면은 마치 소년 예수께서 염려하는 부모에 대해 무례하게 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랍비들 중에 앉으사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

표면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마치 염려하고 고생한 부모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소년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떤 부모가 가족의 편익과 규율을 위해 이처럼 명백하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행동을 인용할 때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 중 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12살의 어린 나이에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부모를 매우 존경했으나, 그들보다 무한히 높으신 하늘 아버지의 권능에 충성해야 할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짤막한 기사는, 그 사흘 동안 누가 이 소년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는가? 제사장들은 소년 예수의 부모를 찾는 데 관심이 없었는가? 등 수많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남긴다.

2. 예수께서 당신의 부모에게 하신 대답을 읽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간접적으로나마 무엇을 말씀하고 계셨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이때에 하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인식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누가는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50)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자녀로서 순종하며 받드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높은 권위에 충성을 다 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셔야만 했다. 소년 예수께서 부모에게 끼친 극심한 염려와 불편에 대해 사과했다는 어떤 간접적인 암시도 성경에는 없다.

성전에서 당신의 사명을 깨달으심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셨음을 나타내셨다. …
성전에서 당신의 사명이 그에게 공개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셨다. …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보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의 영적 생명을 구원할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81-82).

<부가설명>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것을 언제 의식하셨을까 하는 문제는 신학자들이 흥미를 가진 문제이다. 대체적으로 12세 때 유월절에 성전에 가셨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목자들이 찾아와서 경배하고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할 때에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2:19). 모친이 자라는 아기에게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마리아는 이 모든 된 일을 자라는 아기 예수께 이야기 했을 것이 당연하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라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성령의 역사 안에 성장하는 아기 예수, 소년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것을 안 것은 일찍 부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2세 때 그는 그 사실을 한번 확인했을 것이다.
선전에 계신 사흘 동안 누가 돌봤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돌보았을 r서이다. 그는 사흘 동안 날마다 성전에 오신 것이 확실하고 거기 선생들과 문답을 하신 것이다. 제사장들은 이 똑똑한 소년이 누군가의 집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그의 부모를 찾을 생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이 지혜롭고 명민한 소년의 부모가 누군지 궁금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것을 물었다면, 예수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대답을 하셨을 것이며, 제사장들과 율법의 선생들은 신앙이 독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그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흘 만에 그를 찾아온 부모에게 한 대답이 그렇게 부모를 경홀히 여겼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 대답하는 태도나 모습은 우리가 볼 수 없다. 아마도 지극한 정성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그의 양육을 맡은 인간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고 효도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 될 필요가 없는 것을 문제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교훈: 소년 예수께서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으시고 효성을 다해 섬기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더 높은 충성의 의무도 인식하셨다.

월요일(5월 12일) 화를 내시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 있던 군중으로부터 한 남자가 나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도 데려갔으나 그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설명하였다. 그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노여움이 묻어나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이러한 어조는 적어도 우리가 알아 온 ‘온유하고 부드러운 예수님’의 특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이다. 복음서에는 분명히 예수께서 노하신 다른 경우들도 언급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합니까?(마 21:12-13, 막 3:1-5).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막3:1-5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답: 성경에는 예수께서 노하신 몇몇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일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고 자문하는 것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에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위의 구절들을 오늘날 우리의 행동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예수님이라면 오늘날 어떻게 행동하실까 하는 가정은 그분이 1세기에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틴에서 실제로 어떻게 행하셨는가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나 성전을 뒤엎으신 일과 같은 특이한 사건들은 오늘날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만일 자주 가는 식료품 가게에 사고 싶은 어떤 과일이 아직 계절이 아닌 까닭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진열대를 저주하고, 농산물 담당자에게 호통을 치며, 눈에 보이는 대로 저주를 퍼부어야 하는가? 그리고 만일 설교자가 돈에 대해 너무 많이 강조하거나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이 대체로 화나게 만든다면 예배 도중에 일어나 의자와 강도상을 뒤집어엎고 던질 수 있는 것은 내던지며, 안내자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가?”(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ix).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예수님
“예수께서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시면서 구내 입구에 모아 둔 노끈으로 된 채찍을 드시고 장사하는 무리에게 성전 구내에서 떠나가라고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전에 결코 나타내시지 않으셨던 열정과 준열하심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 주화는 대리석으로 깐 보도 위에 떨어져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무도 감히 예수의 권위에 대하여 질문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 수단으로 얻은 이익을 주워 모으려고 감히 멈추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께서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시고 그들을 때리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손에 들린 간단한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이 무서워 보였다. …
공포가 무리를 휩쓴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의 표시를 느낀다. 공포의 비명이 수백 명의 핏기 잃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다. 제자들까지도 떤다. 그들은 예수의 평상시의 태도와는 동떨어진 그 언행의 위엄에 위압을 느낀다”(시대의 소망, 158)

<부가설명> 옳지 못한 일을 보고 노하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하는 것과 노한 태도를 행동에 폭발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죄의 세상의 성질들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실 때 노하셨다. 그러나 그 노는 아주 절제된 중에 행동으로 나타내셨다. 성정 청결만 해도 그렇다. 그는 노한 감정으로 폭력을 행하지 않으셨다. 성전 안에 불합당한 것들을 내어버리신 것이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했겠지만 그런 일들을 통하여 주님은 기별을 전하신 것이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도 그렇다. 안식일 날짜만 아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정신을 가르치신 것이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다. 선은 생명을 살리고 악에서 사람을 해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은 생명을 죽이고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악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한 기별로 전하신 것이다. 이런 경우 노를 발하는 것은 합당하나, 그 노가 감정적 폭발로 나타나나서 사람을 해롭게 할 때는 합당하지 않다.

교훈: 예수께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의분을 일으키셨는데, 이는 우리가 보통 화를 내는 것과는 구분된다.

화요일(5월 13일) 남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시다?

이번 주 교과는 예수님의 행동을 우리의 모본으로 삼는 비결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그분의 본’을 따라야 하는가? 이것은 가장 주의 깊은 판단을 요하는 문제이다. 그분의 행동 가운데 대부분은 우리가 분명히 따라야 할 모본이지만 어떤 행동은 우리가 어떻게 따라야 할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다.

1. 마태복음 8:28-32(비교 막 5:1-20, 눅 8:26-39)과 마태복음 21:18-19(비교 막 11:12-14, 20-21)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왜 그 귀신들을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까? 만약 그 동물이 양이었다고 해도 그분은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행동에서 동정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 가축들은 그 마을 사람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마8:28-32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 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21:18,19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답: 예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신 일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리게 하신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에 관한 매우 중대한 경고를 주시기 위해 행하신 일이었다.

“만일 이 돼지가 이방인들의 소유였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몰사한 것에 대해 구구한 설명 없이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단지 귀신들로 하여금 그 사람들에게서 떠나도록 명령하셨는데, 귀신들이 스스로 돼지에게로 들어갔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맞지 않으며, 예수께서 그것들을 허락하셨다고 기록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진술과 모순이 된다”(R. C. H. 렌스키, 마태복음 주석, 옥스버그 출판사, 1943년, 353).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의 행동을 하나의 ‘강력한 저항’으로 본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군대’라는 이름과 돼지라는 동물은 로마 군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포악한 로마에 대해 저항하신 것이었다”고 하였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101).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돼지의 소유주에게 이런 손실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에 골몰하여 영적 생애의 큰 관심사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저들이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기적 무관심의 마력을 깨뜨리기를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338).

거라사 사람들의 반응에서 배울 교훈
“거라사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비의 산 증거를 저희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속적인 이익이 위험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저들의 눈앞에서 흑암의 임금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한 방해꾼으로 취급함으로써 하늘의 선물이신 그분을 그들의 문전에서 돌아서시게 하였다. 우리는 거라사 사람들처럼 실제로 그리스도에게서 돌아서는 그런 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순종하면 세속적인 이익을 희생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임재로 인해 금전상의 손실을 당치 않기 위하여 그분의 은혜를 거절하고 그 성령을 내쫓는다”(시대의 소망, 339).

<부가설명> 예수님의 행동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2천 마리의 돼지를 물에 몰사하도록 귀신들의 요구를 허락한 사건이다. 화잇부인의 설명대로 그 주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사건이었을지라도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드는 일이다. 주인에게 그런 일 외에 경각심을 강하게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방법이 가장 강하게 기별을 전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영적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인간의 물질적 손실을 주장한 것은 사단이지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요청한 것은 귀신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요청을 수락하신 것뿐이다. 문제는 왜 그것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깊은 의미를 확연히 이해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건 안에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선언하신(마16:26) 예수님의 기별의 증거가 있다. 사람들은 생명보다 물질을 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은 바로 귀신이 준 마음이다. 또 돼지는 죄인 된 인간들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탕자 비유에서 둘째 아들이 돼지 치는 자가 되어 돼지와 함께 먹고 자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돼지의 처지에 이른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돼지가 마귀와 함께 물에 빠져 죽는 것은 돼지 같이 된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만든 마귀와 함께 물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적으로 보여주신 비유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돼지와 함께 물에 빠져죽어야 한다. 그러면 귀신이 범접 못하는 새 사람이 될 것이다.
아마 그 돼지 주인과 마을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신 그 일을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면 물질적 보상이 그보다 풍성하게 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주가 주님이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한 영혼의 가치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돼지 떼의 소유주를 비롯한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다.

수요일(5월 14일) 핍박받는 자들에게 무관심하시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시면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되 양과 염소 두 부류로 나눌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양의 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6)고 말씀하셨다.

1. 심판에 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다음 본문들을 읽어 보십시오.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양의 편에 설 사람들의 행할 일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고려해 볼 때, 다음 본문들은 우선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줍니까?
마 4:12-13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11:2-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4:1-13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침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답: 성경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투옥 소식을 들으셨을 때에 방문하지 않으셨고, 능력을 행사하시어 그를 구출하지도 않으셨다.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을 때에도 그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침례자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동안에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요한의 투옥 소식을 처음 들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가셨다(마 4:12). 그리고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님의 방문을 받지 못했음을 마태복음 11:2-3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님과 접촉하기 위해 자기 제자들을 보내면서 한 가지 질문을 전달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의 방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투쟁 중에 있는 선지자를 높이 칭찬하셨으나 그를 방문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히는 질문 중 하나는 시련에 관한 다음의 질문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요한의 경험으로부터 부분적인 해답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이셨으나, 당신의 능력 있는 행동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위해 길을 예비한 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사실에 관해서도 그분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요한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신 것으로 보인다.

요한을 구출하지 않으신 이유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을 구해 내시려고 개입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그 시험을 견뎌낼 것을 아셨다. 구주께서는 친히 임재하심으로 감방의 음울함을 밝게 하시기 위하여 즐겨 요한에게 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원수의 수중에 두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충성스러운 종을 즐겨 구출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후년에 감방에서 죽음을 당할 수다한 사람들을 위하여 요한은 순교의 잔을 마셔야 하였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외로운 옥중에서 신음하고 칼이나, 고문대나, 화형주에서 죽임을 당하여 겉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한 것처럼 보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충성됨을 증거하셨던 침례자 요한도 그와 유사한 경험을 겪었다는 생각에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든든함을 느낄 것인가!”(시대의 소망, 224).

<부가설명>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어떤 구별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기록자들이 의도적으로 구별해 놓지는 않았지만 살피면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기록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이 35개인데, 그 중에 천연계와 관련된 표적들은 제자들이 전혀 행하지 않았다. 물 위를 걷는 것, 5천명, 4천명 먹인 것, 무화과나무 저주, 폭풍을 잔잔하게 한 것 등등. 이것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증거를 보여주는 표적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메시야이신 사실을 들어내는 행동들은 사람이 따라 행할 본을 보이신 행동이 아니시다. 요한이 투옥된 후에 나타내신 예수님의 행동은 도덕적 관점과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보통 사람 이하의 행동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메시야로서 구원의 종교를 창설하신 분으로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모친에게 어머니라고 부른 기록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후대에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교훈: 비록 예수께서 요한의 투옥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한의 고독한 죽음은 후세대에 있을 수많은 순교자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

목요일(5월 15일) 저속한 자들과 어울리시다?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고결하신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분께서 당시 사회가 용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생각에도 주저하게 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셨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종종 그분의 삶을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이처럼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이기 때문에, 그분의 행동을 그저 마지못해 억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그 당시에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신 일을 우리가 면밀히 살핀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거북함을 느낀다.

1. 다음 구절들을 숙고해 보십시오. 거기서 어떤 기별을 취할 수 있습니까?(마 9:10-13, 11:18-19, 눅 5:32, 고전 1:26-28).
마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11:18,19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고전1:26-28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답: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으며, 그들과 섞이시는 가운데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전 1:26-28).

이 구절들을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예수께서 도덕적으로 의심스런 사람들과 교제하시기 위해 함께 앉아 식사하시는 장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이 펼쳐지고, 크고 소란한 음악이 들려오며, 창녀들이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떠올려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곳으로 가셨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의 원수들이 그분을 향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마 11:19, 눅 7:34)는 가장 경멸적인 꼬리표를 붙인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방은 침례자 요한이나 간디에게는 어림도 없었으나, 예수님과 같이 파티와 연회에 자주 출입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적용될 뿐 아니라 과장되기도 하였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행하셨는가, 90). 아무리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구주께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로 비난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병든 자를 구하러 오신 크신 의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영적으로 건강하므로 의사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세리들과 이방인들은 영혼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의사로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시는 것은 그분이 하실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였을지라도 사실은 그들이 멸시하던 자들보다 더 중병에 걸린 상태에 있었다. 세리들은 고집과 자부심이 덜했으므로 진리의 감화에는 마음 문이 더 열려 있었다”(시대의 소망, 275).

<부가설명> 예수님은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며나으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나환자에게 그렇게 하면 부정해진다고 성경이 말했다. 그런 말씀을 계시로 주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바로 그 부정해질 그 환자에게 손을 대셨다. 그런데 결과는 예수께서 부정해지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가 나아서 정결해졌다. 이것이 예수께서 창기와 세리와 함께 어울리며 잡수시는 것과 우리들의 경우와 다른 요소이다. 우리도 그런 능력을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접촉하는 모든 것을 치유하셨고, 정결하게 하셨다. 그는 문둥병자가 부정하게 할 수 없었다. 그분은 그런 환자의 구주였다. 우리는 이 구주를 소개하는 자들이지 직접 구주가 아니다. 이 점이 다른 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겸손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받을 영혼으로 보셨으며 그들과 섞이심으로 구원의 진리를 소개하고자 하셨다.

금요일(5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께서는 모든 영혼이 당신의 나라에 부르심을 입어야 할 자임을 아셨다. 그분은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자로서 그들 가운데 행하심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셨다. 그분은 그들을 큰 거리에서, 개인의 집에서, 배 위에서, 회당에서, 호숫가에서, 그리고 혼인잔치에서 찾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그들의 일상 일터에서 만나셨으며 그들의 세상사에도 관심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교훈을 가정으로 가지고 들어가셔서 그 가정 안에 있는 가족들로 당신의 신령한 임재의 감화를 받게 하셨다. 개인들에게 나타낸 그분의 강한 동정심이 심령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시대의 소망, 151).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된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의분(義奮)이란 무엇입니까? 의분을 일으킬 만한 정당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는 각각 언제입니까? 자신의 생각을 교과토의 시간에 나누십시오.
*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분을 내는 것은 의분이 아니며 자기의 감정에 의하여 분을 내는 것도 의분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욕을 당할 때에 순전한 심정에 분이 일어났다면 의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생각해보자.

2. 예수께서 사회의 소외계층들과 관계를 맺으신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지침을 줍니까? 한편 어떤 조건 하에 죄인들과 섞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합니까? 예수께서 그러한 비난을 무릅쓰시고도 이러한 접촉을 가지신 사실은, 우리가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려 할 때 어떤 지침이 됩니까?
* 목요일 부가 설명을 참고하라.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에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런 경우를 압도하는신앙과 순결과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모본을 제시해 줍니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행동을 그대로 따를 수 없습니까? 즉 우리가 문자 그대로 따르기 곤란한 부분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예수님은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모본이다. 예수께서는 탄생하시면서부터 성령으로 나셨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으로 사셨다. 우리도 물과 성령으로 나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롬8:9). 그런 사람을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분을 소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동 중에는 메시야로서의 행동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께서 하신 봉사에는 메시야로서 하신 봉사가 특별히 따로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감사하고, 다른 분야에서는 우리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