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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그분의 도전적인 말씀(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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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29 16:14 조회수 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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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0분)

기억절: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연구범위: 마 5:48, 18:21-22, 19:3-12, 눅 12:32-34, 요 19:25-27.

안식일 오후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것들은 종종 보통의 견해와 충돌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악에 대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악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원수는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친구와 가족들이 아닌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더욱 혼동되는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소위 의롭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버림받은 자들과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예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들, 권세 있는 자들, 잘 생기고 친구가 많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말씀들보다 더 도전적인 말씀들이 예수님의 입술에서 나왔다. 이번 주 교과에서 예수님의 말씀 중 몇 가지 도전적인 선언들을 살펴볼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말씀들은 그분의 가르침과는 구별된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핵심본문: 마 4:4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께서 하신 여러 말씀들 중에는 그 당시의 규범과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었음을 인식한다.
느끼기: 예수님의 말씀의 원칙이 매일의 삶에 적용되어야 함을 느낀다.
행하기: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순종하며 따르기로 결심한다.

< 교과 개요 >
I. 예수께서 하신 ‘말씀’
        A. 예수께서는 당시의 인기 있는 신념과 전통적인 행동에 반대되는 당혹스러운 말씀을 많이 하셨음
        B.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 이혼에 관한 문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참조 마 19:3-12)
        C.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난해한 예수님의 말씀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지 말아야 함

II. 관습에서 벗어난 말씀
        A.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재물을 얻는 것, 그리고 완전을 추구하는 것 등에 관해서 전통을 가르침을 뛰어넘으심
        B. 주님께서는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심
        C. 예수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세속적인 것보다 하늘 왕국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심

요점: 예수님의 많은 말씀들은 그 당시의 인기 있는 전통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어떤 말씀은 따르기 어렵고 우리의 ‘일상’의 생활 방식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듯이 보인다. 이런 특별한 말씀의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그 원칙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요일(5월 4일) 결혼과 금욕에 관하여

1. 예수님의 강한 진술들 가운데 결혼과 이혼에 관한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3-12을 읽으십시오. 어떤 점들이 분명합니까? 그리고 어떤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적인 기별은 무엇입니까?
마19:3-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답: 예수께서는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는 말씀으로써 왜곡된 결혼제도의 관행들을 바로 잡으시고 에덴에서 제정하신 그 제도의 근본 취지를 높이셨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는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우위의 성향을 가진 다음의 질문을 주목해 보라.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물론 예수께서는 명확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셨다(4-6절). 그런데 질문자들의 진정한 의도는 7절에 나온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는 모세의 지시를 뛰어 넘어서, 아내를 버리고자 하는 남자들의 열망을 호되게 꾸짖으시며 결혼관계를 깨뜨리는 조건을 엄격히 강화하셨다. 그분께서는 단 한 가지, 음행한 경우만을 예외로 하셨다. 그 외의 다른 사유로 이혼하는 것은 간음이 될 것이었다(8-9절). 적잖게 놀란 제자들은 토론을 벌였으며,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마 19:10)라고 말했다.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가장 난해한 진술 중 하나를 말씀하시게 했다.

2. 마태복음 19:11-12을 다시 읽으십시오. 예수님의 이 강경한 말씀을 받지 못할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마9:11,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답: <부가설명> 저자는 타고난 자라야 받으리라는 말씀을 어렵게 여기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위하여 독신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타고난 자라는 말은 예정된 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받을 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바친 사람들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12절에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도 있다는 말씀이 타고난 자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그들은 면제를 받는다는 의미인가? 여기서 “오직 타고난 자”(마 19:11)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도덕적으로(혹은 성적으로) 은사를 받은 특별한 부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고자(鼓子)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 부류의 고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며,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가장 난해한 말씀은 마지막에 나온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2). 이 말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표준은 너무 높아서 연약한 사람들이 따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양보하신다는 뜻인가?

결혼제도의 이상(理想)을 지적하심
“예수께서는 다처주의와 이혼에 대한 구약의 규정이 이상적이 아니었고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참고 묵인하셨던 일시적 편법이었음을 분명히 설명하셨다(마 19:4-8). 그리스도께서는 늘 일처주의였던(마 19:4-6; 딤전 3:2; 딛 1:6) 그리스도인 가정의 이상(理想)을 지적하셨다(마 19:9).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가졌던 제한된 구실을 내세울 수 없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2권, 570).

<부가설명> 이혼은 죄의 산물이다. 성격 차이 때문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이 성격 차이를 극복하고 그 차이 때문에 서로가 풍성해지는 경험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교회 안에도 이혼이 독버섯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깊이 음미하고 그 뜻을 깨달아 그리스도인 가정이 정말 진리의 말씀 안에서 튼튼해져서 이 도덕적 일탈(逸脫)이 극심한 사회에 경종과 모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결혼과 금욕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강경하게 들릴 수 있으나 그분의 말씀의 요지는 신성한 결혼서약을 쉽게 깨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월요일(5월 5일) 용서에 관하여(마 18:21-22)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용서의 완전한 모본이시다. 여기서 다시 용서의 주제로 돌아가, 용서에 관한 그분의 진술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해 보자.

1. 마태복음 18:21-22을 숙고해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께서는 어떤 죄를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반복되는 성적 혹은 신체적 학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2004년 12월에 미국 캔자스 주에서 발생했던) 임신부 살해 및 태아 절취(截取)사건과 같은 아주 엄청난 죄를 염두에 두셨을까요? 아니면 예수께서는 복잡하고 사악한 인간 범죄의 사례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시고 일반적인 죄와 실수,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흔히 경험하는 남을 상하게 하는 일 등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 예수께서는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하심으로 참된 용서의 본을 보이셨다. 그분이 의도하신 용서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대상은 없다.

시카고 법정에 13세 된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들어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동자의 움직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자신을 이처럼 심각한 불구로 만든 1997년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성폭행하고 살충제를 목구멍에 부은 혐의로 고소된 29세 된 패트릭 싸이키즈(Patrick Sykes) 씨에 대한 세 번째 증인 자격으로 출두하였던 것이다(마이크 로빈슨, 워싱턴 포스트, 2001년 3월 24일자, A22면)
예수께서는 이처럼 극악한 범죄의 희생자들에게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자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가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위에 열거한 잔인하고 무서운 죄를 다루어야 할 때 주님의 은혜로운 권면을 잘못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상처난 관자놀이에서 피가 흐르고 이마는 피땀으로 범벅이 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늘은 슬픔과 경탄으로 바라보았다. 그분의 손과 발에서 흐르는 피가 십자가를 세우기 위하여 뚫어 놓은 바위 위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못 박힌 상처들은 몸무게를 견디지 못해 크게 찢어졌다. 그분의 영혼이 세상의 죄짐에 눌려 헐떡일 때에 몰아 쉬는 호흡은 점점 빠르고 깊어만 갔다.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 하실 때에 온 하늘은 경탄으로 충만하였다”(시대의 소망, 760).

<부가설명> 이 말씀을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하여 친히 사람 되어 세상에 오시고 대신 죽기까지 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마음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빌2:5-8). 법적 심판을 받는 것은 법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주신 기별은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하는 상태로 계신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런 마음으로 일상의 생활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훈: 우리에게 용서의 완전한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용서는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화요일(5월 6일) 재물과 베풂에 관하여(눅 12:32-34)

예수께서는 당신께 온 젊은 부자 관원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눅 18:22)고 말씀하셨다. 극단적으로 들리는 이 명령은 선지자적인 통찰력을 통해 이 관원의 필요를 아신 예수께서 이 관원에게만 하신 명령으로 우리는 보통 해석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이 관원과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커다란 장애물 즉 재물에 대해 지적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 동일한 명령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는 않으셨는가?
누가복음 12:33에서는 예수께서 그 젊은 부자 관원에게 주신 동일한 명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라.

1.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소유를 재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까? 그분의 명령을 문자대로 실행한다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공동체에서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겠습니까? 그리고 새로운 개척지에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해나갈 자금은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눅12:32-34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답: 예수께서 젊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말씀의 원칙은 자신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각자의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 세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실제로 어떻게 하셨는지 주목해 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금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다가 그것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요 12:6, 13:29). 둘째, 예수님의 진술과 밀접한 환경에서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자. 사도행전 4:32-37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힘쓰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질서 있게 실행해 나갔다. 셋째, 사도행전 이 외의 글에서 초기교회가 어떻게 했는지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과 요한과 베드로의 서신에는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 준 사례가 없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
“땅에 쌓아 둔 보물은 오래 가지 못한다. 도둑이 구멍을 뚫어 훔쳐 가고, 좀이 먹고 동록이 쏠기도 한다. 화재와 폭풍우가 소유를 쓸어가 버리기도 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둔 보물이 마음을 빼앗아 하늘의 것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 하늘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그것들만이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다.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화재나 홍수도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고, 그 어떤 도둑도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없고,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이다”(산상보훈, 88-89).

<부가설명> 재물은 있으면 좋은 것이다. 한신의 말이 아니라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그러나 그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면 독이 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주고 재물을 움켜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명을 주면 움켜쥘 자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재물이라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 재물은 생명을 속할 수 있다(잠13:8). 그러나 생명을 주고 재물을 취할 수는 없다. 부자 청년을 영생과 재물을 바꾸었다. 이런 정신을 다 팔아야 하는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영생은 관념일 뿐이었고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예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생이 하나의 관념일 뿐이면 이 청년과 같이 행동할 것이다. 재물이 영원을 위하여 유익한 도구가 된다면 복이 된다. 물질은 소유가 아니라 도구라는 사실을 재림성도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훈: 예수께서 부자 관원에게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하신 말씀은 그가 사로잡혀 있던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신 것이다.
수요일(5월 7일) 완전에 관하여(마 5:48)

많은 사람들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당혹스럽게 생각한다. 수세기 동안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항하여 온전한 승리를 거두고자 애써 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어떤 이들은 순례를 떠났으며, 또 어떤 이들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였는가?

1. 다음의 짝지어진 구절들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까?
마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눅 14:26-27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모형제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뜻
마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간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심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6:32-36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온전하라는 말씀은 자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음

누가복음 1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과격해 보이지만 평행절인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은 훨씬 완화된 것으로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약속에서 ‘좋은 것’(11절)을 구하라는 말씀이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성령’을 구하라고 호소함으로써 시각에 변화를 주고 있다.
세 번째 구절들에서도 이와 같은 조화가 잘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5장에는 “너희도 온전하라”(48절)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에는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예수께서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문맥을 살펴보면, 원수를 사랑하고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함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서도 마찬가지로,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 바로 앞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 없이 비를 내리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너희도 완전하라”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에 이르고자 애를 쓰며 피곤해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분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유하게 될 의의 품성을 지적하신다. 산상 설교를 통하여 그분은 의의 결과를 설명하시고, 지금은 또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의의 근원과 그 성격을 지적하신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라.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에 불과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통해 그분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태양에서 나오는 빛줄기처럼, 사랑과 빛과 기쁨이 그분에게서 나와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무아의, 사랑의 유출(流出)이다”(산상보훈, 77).

<부가설명> 완전하다는 것은 본성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사람은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본질로서 완전한 것이다. 개로 태어나면 개의 본질로서 완전한 것이다. 원숭이로 태어나서 점점 완전한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은 없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불구자나 장애자에 대한 말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본질에 대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면 된다. 요한 1:12,13이 이것을 지적한다. 예수를 믿으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러면 그는 신의 본성을 얻는 것이다(벧후1:4). 베드로후서의 “신의 성품”이라는 말은 본성(퓌시스)이라는 말이다. 이 말에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거듭날 때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 바로 그런 분이셨다.

교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은 우리도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이다.

목요일(5월 8일) 가족에 관하여(요 19:25-27)

1990년대에 텍사스 웨이코(Waco)에 소재한 데이비드 코레쉬(David Koresh)의 집단에 가담하였던 한 젊은 여인은 캐나다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않았다. 그녀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그 교주는 그녀의 계획을 가로막으며, 그런 일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시간과 재정을 써가며 그와 같은 세속적인 일로 여행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요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1. 다음 구절들은 자연스런 가족의 유대를 훼손하는 코레쉬와 같은 사람들을 지지해 준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마 10:34-37, 12:46-50, 눅 9:59-62, 12:49-53, 14:26).
마10:34-3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2:46-50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눅9:59-6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답: 이런 말씀들의 진의는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두라는 의미이다. 예수를 믿는데 믿는 것이 존재의 의미요 생활 자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이 가족의 가치를 변형시키고 땅의 가족과 하늘 가족 사이에 쐐기를 박는 듯한 말씀이 누가복음에 자주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진정한 가족이라고 하신 진술(눅 8:19-21, 11:27-28)에 덧붙여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는 조건으로서 ‘부모를 미워하고, 돌아가신 부친을 장사하지도 말라’(눅 9:57-62, 14:25)는 충격적인 명령을 하신 것처럼 보인다”(F. 스코트, 스펜서, 예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가, 국제 트리니티 출판사, 2003년, 35)
예수님의 진술은 현대인들의 귀에도 확실히 과격하게 들린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의미일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눅 9:60)는 말씀을 예로 들어 보자. 제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던 그 사람의 부친은 실제로 죽었는가? 아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재산을 챙긴 다음에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누가복음 14:26에 나오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고 하신 예수님의 진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행절인 마태복음 10:37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서 ‘미워하라’는 말은 종종 ‘덜 사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66).

“부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성경에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전형적인 동방식 과장법의 하나로 ‘덜 사랑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신 21:15-17). 이 사실은 예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말씀하신 평행 구절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인상적인 과장법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천국이 그의 모든 삶에서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물질적인 소유와 관련하여, 중요한 원칙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첫째로 여기느냐 하는 문제이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0권, 366-367).

<부가설명> 예수께서 교훈 하실 때에 때때로 과장법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교훈을 인상 깊이 새기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과장법에는 진리를 담고 있다. 이상에 기록된 말씀들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하늘보다 더 사랑하면 하늘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육신적 본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영적 본능의 실상을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되면 영적 본능을 가지게 되는데 그들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영원한 나라와 그 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것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 모든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가족적 가치를 왜곡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분은 가족제도를 제정하신 분이시다.

금요일(5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데, 특히 따로 떼어 놓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균형지게 표현된 평행 구절을 참조하거나 문맥을 통하여 보면 많은 구절들이 더 쉽게 이해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적당한 타협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께 전혀 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독신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또한 독신 생활이 다른 가능한 방법보다 더 월등하게 성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은 사단의 기만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독신자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들을 불쌍하게 여겼으며, 이러한 독신주의는 에세네파와 같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에 의해서만 행해졌다. 성경의 기록은 베드로도 결혼했음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아마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결코 독신생활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균형진 품성계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만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성경 전체의 취지에 역행하는 것이다. 신체를 불구가 되게 한다는 사상은 잘못된 것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마태복음 5:30에서 그리스도께서 천명하신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9권, 4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독신에 관한 위의 진술은 어떤 특정 종교의 독신제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미혼이나 배우자와의 사별, 혹은 다른 부득이한 이유로 인해 독신생활을 하고 있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의 아니게 실망을 안겨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들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을까요?
* 성경이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생활 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별로 인하여 재혼 하지 않고 독신으로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고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과부에 대한 말은 아마 홀아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일 것이다. 성경 시대에는 홀아비로 사는 남자들이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바울이 독신으로 산 기록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2.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함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재림신앙을 고백함으로 가정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음으로 진정한 도움을 주면서 실제적인 필요를 최대한으로 도우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주어야 할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그가 가족들과 함께 진리에 거하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표현된 말보다 의미를 깨달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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