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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그분의 경이로운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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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4.24 00:21 조회수 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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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그분의 경이로운 사역
5월 3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4분)

도입)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750년 전에 이 땅에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마치 눈으로 보고서 말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예언해 주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사야는 만백성을 구원하려 오실 메시아에게 다섯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첫째가 ‘기묘자’였다. 기묘자라니 참 이름도 기묘하다. 기묘자를 영어 성경을 보면, ‘The wonderful’로 되어 있다. ‘놀라우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출생에서부터 그가 하신 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모두가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야말로 놀라우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한 사람,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그들을 감동시켜 새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만드는가? 그분의 부활은 얼마나 놀라운가? 성경말씀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는 놀라움이다. 천군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그분이 재림하실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나고, 모든 믿는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해서 주님을 맞이하는 그 영광스러운 재림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성경에는 이 놀라우신 분을 만나본 사람들의 경이로운 간증으로 가득 차 있다.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7:38)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더라”(눅 5:26) 성경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놀라는 장면은 수도 없이 많아서 다 말씀드릴 수가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그의 권세와 능력에 놀랐다. 주님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노도와 같은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귀신들이 쫓겨 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세리 삭개오와 막달라 마리아,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할 것 없이 주님을 만나는 자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분이었다.

기억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연구범위: 마 4:23-25, 8:25-27, 11:2-6, 12:22-23, 3:19-21.

안식일 오후
사복음서를 대충 읽어 보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기이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그분의 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공백기 동안에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수세기 동안 온갖 추측이 난무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엘렌 G. 화잇이 시대의 소망(제7장 ‘유년시대’)에 기록한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성년기, 그 중에서도 특히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기간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던가!
세상에 그와 같은 생애를 산 사람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남을 위해 살았던 그분의 사역은 새로운 날의 시작 곧 하나님의 왕국의 탄생을 증언해 주었다. 산 위에서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장면은 갑자기 바뀌어, 예수께서 부지런히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모습으로 전환된다(마 8-9장 참조). 예수님은 말로써 사역을 대신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말보다 행동을 많이 하셨다.
하나님의 왕국은 도래했으며, 예수께서는 그 시작을 주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일요일(4월 27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마 8:25-27)

도입)
주님께서 자연까지 지배하신 이 이적은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고 의아하게 만든다. 사실 예수님 외에 자연을 지배했던 분은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주의자들은 이 이적을 우연히 그때에 바람이 잔잔해졌다느니 또는 스트라우스처럼 이것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적은 오직 신앙적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탈무드에 보면 바람과 바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기도했을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역사를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시대 사람들은 바람을 일으키고 풍랑을 만드는 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봤다. 심지어 루터까지도 귀신들의 능력이 물과 바람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참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함께 기록한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이 사건을 기록한 기록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강조하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자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나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 모두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다와 강과 바람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참여하시고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이 이적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풍랑을 멈추게 하신 이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주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자연의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자연을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치신다. 바다를 꾸짖으시며 고요하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주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 마태복음 8:1-4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어떤 중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답:
마태의 말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 그분께서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즉시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달려가셨다. 그리고 그분이 처음 만난 사람은,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상징하는 나병환자였다. 예수께서 그 나병환자를 만지시자 나병이 사라졌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케 하심(마 8:23-27)으로 천연계를 주관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28-33절)으로 마귀를 제어하시며, 중풍병자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심(9:1-9, 20-22)으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심(18, 23-25절)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이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생애의 폭풍과 우리 삶의 귀신과 장애를 다스릴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2. 마태복음 8:23-27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어떤 고대 신화에서는 물을 하나님이 정복하시는 원수로 간주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사납고 성난 물결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대되는 세력의 상징이었다”(해설자의 성경 사전, 애빙던 출판사, 1962년, vol R-Z, 809).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반응해야 한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반역하는 당신의 백성에 대해 이사야서 1장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그분의 백성만이 반역하였다. 우리는 만물 가운데 예수님께 반역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닌지 자문해 보자. 바람과 물결도 그분께 순종하였다. 우리는 어떤가?

교훈: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마치시자마자 섬김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백성까지도 섬기신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겠는가?

부가적용)
세상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바람이나 바다가 그것들 중 하나이다.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아 바다와 바람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 그것은 단순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그분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잔잔하라고 명령하셨다.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보고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불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자신들과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예수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제자들의 불신앙을 질책하신다. 그들은 바다와 바람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창조주 예수를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가다라 지방에는 유명한 사람 둘이 있었다. 그들은 무덤을 집으로 삼고 길 가는 사람을 사나운 소리로 위협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이었다. 창조주 예수가 그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 안에 있던 귀신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사단의 권세를 멸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에 대해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 명령에 귀신들은 순종하였다.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바다에 빠져 모두 몰사하였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예수께 찾아와 마을에서 떠나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세상 일에 눈이 가려져 창조주 하나님을 눈으로 보면서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월요일(4월 28일)
사람들이 심히 놀람

도입)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이적은 “경이로운 일”을 의미한다.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 법칙을 초월한 물리적 세계의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이적의 정의를 더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만으로도 이적이란 단어의 개념은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설명된다고 본다. 백성들을 심히 놀라게 했던 “경이로운 일”들을 예수께서는 많이 행하셨다. 이런 이적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법칙들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 모든 이적들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이적들은 그들이 설명하는 주장보다는 더 합리적이다. 사실인즉 예수의 이적을 믿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쉽다. 비평가들은 “이적 사건이 보편적 경험에 모순”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적을 보았다고 확신할 뿐 아니라 생명을 내걸고 그리스도를 증언했다. 비평가들이 초자연적 사건을 본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도 그러한 사건을 보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현대의 번역 성경들 중에 문단별로 제목을 붙여 놓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새 국제역 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에는 마태복음 9장에 ‘죽은 소녀와 병든 여인’이라는 소제목을 붙임으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자비와 능력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였다. 이 말은 구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동안 끊임없이 직면하셨던 도전이 그저 눈속임으로 넘어갈 수 없는 그런 도전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날, 죽은 소녀는 살아났고 12년 동안 피 흘리던 가련한 여인은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을 하나씩 묵상해 보십시오. 아무 문장도 쓰지 말고, 우리의 구주께서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그냥 단순한 마음으로 경탄을 나타내 보십시오(마 9:27-34, 12:22-23, 14:25-31, 34-36, 15:29-31, 20:29-34, 막 2:1-12, 눅 6:19).
답:
이 구절들에 담긴 충만한 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배경을 떠올리며 천천히 묵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22-23에는 사람들이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잠시 동안만 눈을 감고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이 불쌍한 영혼의 형편을 상상해 보자.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물어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렸고 트인 혀로 찬양하면서 거룩하신 분 앞을 떠나갔다!
마태복음 15:30-31은 어떤가?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0-31, 개역 개정판). 마태복음 14:34-36과 누가복음 6:19에서 사람들이 구주를 만지기 위해 밀고 당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눅 6:19).

교훈: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그분의 사역에 대해 얼마나 놀랐을지 우리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일까? 용도가 목적을 결정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적이 발생한 다음에 일어난 상황이 이를 설명해 준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준 후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이적이 더 필요했다. 예수가 폭풍을 잔잔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적은 믿음”이 강건해져서 외쳤다. “이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바다와 바람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배 안으로 영접하고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예수가 5천명을 먹이셨을 때 백성들이 말했다. “진실로 이는 세상에 오신 선지자이시다.” 거라사 촌에서 귀신의 군대(무리)를 돼지 속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귀신에게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온 생애를 통해서 주님이 그에게 하신 일을 전파하였다.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첫 번째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후에 그는 이 일을 널리 전하였고 그 소문은 일시에 퍼졌다. 누가는 “큰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그에게 왔다.”라고 말한다. 주님이 맹인을 고쳐 주실 때 요한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절했다고 했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모든 이적의 목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게 하려고 행하신 예수님의 축복이다.

화요일(4월 29일)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마 4:23-25)

도입)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들은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적의 참된 목적은 요한복음서 저자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어떤 나라가 외국에 대사를 보낼 때에는 그에게 전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신임장을 휴대케 한다. 하나님께서도 특수한 임무를 수행키 위해서 그의 일군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 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가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예언자들이 그의 활동을 알렸고 아무도 그에 관해서 헛된 환상을 갖지 않았다. 이사야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라고 말하였다. 이것을 우리가 상기한다면 “오실 분이 당신이니이까 다른 이를 찾으리이까?” 하고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답변은 이것뿐이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3~5).”

1980년대에 미국의 몇 수사관들이 텔레비전 방송 설교자들에 대해 비밀 수사를 착수했다. 수사관들은 이 설교자들이 방송 중에 사람들에게 개인 기도를 신청하게 하면서 그 프로그램이 계속 방영되도록 ‘소정의 금액’을 동봉하도록 긴급하게 호소하는 것을 주목하고 그 기부금과 기도 요청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조사하고자 했다. 마침내 충격적인 사실이 발견되었다. 방송 설교자의 직원들이 우체국으로 가서 보내온 편지를 모은 다음 그 자리에서 개봉하여 기부금만 꺼내고 기도 요청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갈릴리 온 지역을 다니실 때 여러 지방에서 온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태는 9장에서 앞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예수님이 방송 사기꾼들과는 얼마나 확연히 다른 동기를 가지고 일하셨는지에 대하여 중요한 특징을 첨가하였다.

1. 마태복음 9:35-3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답:
‘연민’이라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감성의 자리, 즉 ‘마음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헬라어(스플랑크논)에서 왔다. 연민은 단지 지성적인 면만을 가리키는 동정심 그 이상을 의미한다. 연민은 내면 즉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지셨던 마음이다. 사람들의 돈을 꺼내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 요청을 우체국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런 일을 예수님은 상상조차도 하실 수 없으셨다. 사복음서는 거듭거듭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연민의 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 1:40-41)고 말씀하셨다(참조, 마 20:29-34, 막 10:46-52).

교훈: 예수님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가련한 형편을 바라보시며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셨다.

부가적용)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서 자비와 긍휼하심과 은혜가 다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죄인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과 섭리와 완성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땅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바라신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변함없는 향기를 내뿜는다.’ 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다. 이 말은 사실상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아마 장미꽃의 장미 꽃된 특성과 그 고유한 매력을 두고 한 말같이 느껴진다. 이것이 저들의 변함없는 사랑고백에 씌어진 말이다. 우리 신약성경에 100회 이상이나 사용된 매력(칼로스, kalov")이란 단어가 있다. 흠정역에는 단순히 ‘good’으로 번역되었으나, ‘진실한 것’(honest), ‘선한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롬 12:17, 고후 8:21). 라틴어에서는 ‘말쑥한 것’, ‘우아한 것’, ‘보기에 멋진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야고보서 2장 7절에는 예수를 가리켜 「그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함으로 예수의 매력을 알려주고 있다. 수많은 세기와 역사 속에서 세계사를 붙잡고 있는 축이, 구심력이, 힘이 바로 ‘예수’라고 하는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왜 그분은 우리에게 이토록 크게 매력적인가? 그분이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이다.

수요일(4월 30일)
새 날을 알리는 신호(마 11:2-6)

도입)
예수님 자신이 행하신 3년간의 복음사역이 권능이요 표적이요 기사(이적) 그 자체였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잔칫집에서 행하신 처음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다. 잔치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표적의 맛을 보고 말았다(요 2:1-11).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그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채웠다(요 6:1-15). 예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요 6:16-21). 그리고 노기 띤 바다의 물결과 바람을 명하여 잠잠하라고 하였다(마 14:22-33). 예수께서 방장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렸다. ‘달리다굼’ 하셨다(막 5:35-43). 예수께서 죽어 그 시체를 관속에 넣어 장사지내러 가고 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명하셨다(눅 7:11-17). 예수께서 죽어 나흘이 되어 무덤에서 이미 썩기 시작하였던 나사로에게,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그 무덤에서 불러내고 말았다(요 11:43-44). 그 결과는 모두 살아나고 말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살아나서 말도 하고 음식도 먹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관 뚜껑을 열어 제치고 일어나고 말았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자기 발로 걸어 나오고 말았다. 예수의 초자연적 권능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이요 기사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놀라고, 믿고,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였다. 벙어리를 말하게 하였다.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소경을 보게 하였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였다.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였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마 11:5). 마태복음 4장 24-25절에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하였다. 바로 나사렛 예수께서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죄인 구원 사역을 위하여 행하신 큰 권능(힘)과 기사와 표적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죄인들의 구주가 되신 증거였다. 이 모든 것이 죄인들을 이끄는 매력이었지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역사적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새 날에 대한 놀라운 축복과 신호였음을 보여준다.

침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님께 긴급히 전갈을 보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이 질문은 굉장히 의외의 질문처럼 들릴 것이다. 이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확신 있게 선포했던 그 사람(요 1:29-36)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왜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마 11:2) 나서 이런 질문을 하였는가?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에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개역 개정판). 요한에게 전하신 암호와 같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이 밝아오는 새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며, 참으로 메시야가 왔음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여러 선지서들 특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영광스런 예언을 마음에 떠올리셨던 것이다.

1. 이사야 29:18-19, 35:5-6, 61:1-3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요한과 그 외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속히 믿지 못했습니까?
답:
마태는 사건들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의 성취로 보고 메시야의 시대가 밝아 오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을 보다 넓은 관점 즉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사 53:4 인용).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을 요약하면서 이와 동일한 개념을 피력하였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5-36, 참조 마 4:23-25).

교훈: 예수님의 사역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사역과 일치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당신의 사역을 전하심으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리셨다.

부가적용)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시대가 되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랫동안 ‘하나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혼이 사후에 가서 살게 되는, 하늘 어딘가에 있는 나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들과 그의 메시지에는 그런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소경을 고치고 문등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아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런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아였으며, 주님을 통해서 이 땅에 메시아 시대가 도래 했음을 증거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메시야가 아닌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질 나라가 어떤 나라임을 보여주신 축복의 예증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잠시 저들이 들여다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하신 이 큰 구원을 들여다 본 것이었다.

목요일(5월 1일)
최후의 회복에 대한 전조(행 3:19-21)

도입)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셨다」(행 2:22)고 하였다. 예수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가지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그에게만 있었던 생명의 매력이었다. 바로 예수는 다시 보내신 그의 성령을 통하여 자신이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재현시켰다. 십자가의 표적을 구하고 증거 하는 사도들의 설교(전도)에 사람들이 예수의 권능(힘)을 받고, 예수의 표적과 기사를 받고, 예수에게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회개가 일어났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였다.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고,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었다. 서로의 물건을 나누는 유무상통의 교제가 벌어졌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2-47).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다(행 3:6-10). 사도들이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행 4:30). 기도하는 장소에 땅이 진동하면서 무리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 그 힘이 다시 입을 열어 전도하게 하였다. 사단이 교권주의자를 앞세우고 박해를 하였다. 사단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앞세워 교회를 시험하였다. 그래서 종들이 옥에 갇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 옥문을 열어주셨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다가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야고보는 순교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복음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말았다(행 9:31). 마침내 예수의 분부대로 예수님의 큰 권능과 기적과 표적이 사울에게 나타나고, 그가 성령에 붙잡혀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는 역사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주장하신 일이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가지고 나타낸 복음사역이었다(행 9:1-31).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는 기독교 2000년의 매력이 무엇인가? 교회가 예수께로부터 받은 예수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다. 이 모든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게 될 때 이 세상이 어떤 변화를 경험할 것인지 저들은 놀라운 축복을 조금씩 맛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다스린 나라의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잠시 맛본 것이다. 이것은 저들이 영광스러운 미래에 경험하게 될 완전한 치유의 실체이며 훗날 우리 모두가 경험하게 될 미래의 축복의 실체를 미리 앞당겨 경험한 축복이었다.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이며 귀신들렸던 자를 고치신 놀라운 치유의 사건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기는커녕 비난을 퍼부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마 12:24).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사건의 의미를 교훈적으로 설명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이 진술이 중요한 까닭은 복음서의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모습일 뿐 아니라, 미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참조 마 26:29, 눅 23:42, 요 18:36). 즉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최후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읽으시며 이사야의 핵심적인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짧은 3년 반의 지상 사역 동안 일어날 일 그 이상을 선포하고 계셨던 것이다.
옛날 희년을 상기시켜주는 “주의 은혜의 해”는 메시야의 강림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며, 눌린 자들이 억압에서 벗어남으로 그 기쁨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될 그 최후 성취의 시작을 알려 주었다.
  
1. 다음 구절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최후 회복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막 5:35-42, 눅 7:11-15, 요 11:38-44, 행 3:19-21).
답:
죄의 지배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죽음이 없게 될 그 날을 가리켰다. 요한의 계시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살리신 이들은 모두 다시 죽음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최후의 회복,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될 그 날(고전 15:52)을 내다보셨다.

교훈: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치유하신 이들과 죽음에서 살리신 이들은 우리가 마침내 맞이할 최후의 회복의 날을 가리키는 하나의 전조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을 오해하는 자들은 그를 '병을 고치는 자'로 여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이에 대해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이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신다고 선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동안 만나는 모든 병자들을 다 고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각종 질병들을 고치시기는 하셨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의 앉은뱅이의 질병을 치료하신 목적은 한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너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너희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천사와 그 못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그 병자들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은, 베데스다 못에 잽싸게 빨리 들어갈 수 있는 활동능력이나 천사와 물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에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의 병을 고치셨지만 그 메시지는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이다. 생명과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기를 주님께서는 바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질병들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셨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 의미도 이와 동일하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서만이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고 바로 이런 새날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렸음을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금요일(5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음 진술을 고찰해 보고 이번 주 교과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가? 혹은 같은 관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인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적(異蹟)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나 자칫하면 우리는 잘못된 곳에 강조점을 둘 수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적들에 강조점을 두지 않으셨고, 대부분 군중을 떠나서, 그리고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조용히 그 이적들을 행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한 말을 잘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보다 더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한번은 베드로가 무리에게 이야기하는 중에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 요약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 10:38)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겸손히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서민들과 어울리시고, 그들을 고치시며 그들에게 권면하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행하셨으나 그분과 함께 했던 자들의 평가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휴스턴 스미스, 예화로 엮은 세계의 종교들, 21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대한 복음의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마지막에 가까이 이름에 따라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11-612)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2. 예수님처럼 분명히 초자연적인 놀라운 이적들을 많이 행한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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