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죄로 인해 타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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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죄로 인해 타락함
10월 18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1분)
(도입)
미국의 설교자 가운데 노만 빈센트 필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를 가리켜 100만의 설교자라고 했다. 그의 설교집이 불티나게 팔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집을 읽었다. 그의 설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죄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의 설교를 듣고 설교집을 읽고 감동받은 100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만이 자신을 개혁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니까 죄인된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없다. 세상과 교회에서는 종종 타락이라는 말을 잘 쓴다. 무엇을 타락이라 하는가? 타락이란 성경에서 풀이하기를 곧 죄를 말한다. 성경은 증거 해 주기를 인간이 타락하여 결국 비참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 같은 비참함을 알지 못하여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비참한 자리에 놓여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축복을 주셨고, 행복한 땅 에덴을 주셨고, 아름다운 가정을 주셨으며,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결과 이 같은 축복이 일시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죄를 범한 결과 그들의 운명이 비참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창 3:24 말씀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고 했다. 설혹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해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더 이상 교제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죄는 이처럼 사랑을 끊게 하고 교제를 단절시켜 버린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다. 이사야 59:2 말씀을 보면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사이를 내었고, 벗을 길 없는 죄의 보자기로 얼굴을 스스로 가리웠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나타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죄인 그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도 될 수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이룰 수 없다. 회개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기억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연구범위: 창 1-3장, 롬 3:9-18, 5:10-21, 6:16, 벧전 2:19.
중심 사상: 타락과 그로 인해 인류에게 닥쳐온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살펴본다.
안식일 오후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가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타락은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더 낮은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고상한 영적 상태로부터 떨어져 죄의 종노릇하며 고통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비록 에덴에서의 타락에 관하여 많은 정보가 주어져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인간의 본성뿐 아니라 지구 자체에 손상을 가져온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타락의 결과는 결코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약속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절망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타락의 실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을 직시할 때에만 십자가의 영광이 그 구원하는 능력과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요일(10월 12일)
에덴에서의 반역(창 2:16-17)
도입)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고, 이브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린 후, 사단은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곧 바로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 이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고, 그 결과로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했다. 죄를 범하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경험에서만 배우는 것인데, 이브는 이 분야에서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그녀가 분명히 알았던 것은 하나님의 심판(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라는)에 대한 엄중한 사전경고였다. 사단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라고 유혹하자, 심판에 관한 어떤 생각도 그녀의 마음에서 금방 사라졌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사단 자신의 추락을(이사야 14:13–14) 초래했던 것과 같은 욕망이었고[6], 이제 사단은 이브를 저항할 수 없는 동일한 욕망에 감염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사단이 제안한 이득은 거짓이었다. 앞으로 그녀(그리고 아담)는 선을 잃어버림으로서 선을 알게 되고,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악을 알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선을 일관되게 행할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은 악을 삼갈 능력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지금부터 그들은 사단의 노예가 될 것이었다. 그들의 눈은 뛰어난 지혜로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두려움으로 표현되는 죄책감을 맛보게 될 것이었다.
1.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는 성경상의 증거를 창세기 1-3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참조, 창 2:16-17, 3:2-3, 6)
답:
창세기 1-3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죄를 묘사하기 위해 '반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은 드러나 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의 충성의 대상을 바꾸었다. 하와는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보다 원수의 논리를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말에 귀 기울였다.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이 너무 엄격하다고 결론짓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상으로 계발하기 위해서는 창조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반역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 그 반역에 가담하였다.
2. 하나님께 반역한 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사 59:2, 참조 창 3:23-24)
답:
아담과 하와의 반역은 그들이 처음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의 파국을 가져왔다. 그들의 반역은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에도 분열을 가져왔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인해 그들 상호간의 사랑과 헌신은 부끄러움(창 3:7)으로 변하였다. 그들의 상호 관계는 더 이상 친밀하거나 조화로운 것이 아니었다(12절). 그 반역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을 두려운 분, 혹은 피하고 싶은 분(8-10절)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은 더 이상 사랑과 조화로 연합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킬 특별한 행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교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버리고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 반역하였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은 깨어지고 말았다.
부가적용)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여야 한다. 여러 목표가운데 하나이거나, 여러 목표 중에서 최우선의 것이 아니라 유일한, 하나의 목표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사이를 말한다. 종교적이나 교리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즉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됨, 즉 개인적으로 극도의 친밀함이 있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되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댓가라도 지불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이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더 알게 된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심판이란 결국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뜻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자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주셔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고 사랑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심판이다. 그러므로 관계의 깨어짐이 죄요, 단절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런 삶에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며, 그래서 꺾여 영원히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월요일(10월 13일)
죄의 종이 됨(벧후 2:19)
도입)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진상을 바로 깨닫지 못하는데서 그리스도인이 누릴 아름답고 영광스런 축복의 삶을 잃고 있음을 본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진상을 깨닫고 확신하게 하기 위하여 ‘죄의 종’이란 말과 ‘의의 종’이란 말을 사용했다. 죄의 종으로의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인간을 말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에 관한 보편적인 진술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죄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자기들이 죄의 주장에 따라 살아가고 죄에 끌려 다니는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전혀 불신자이며 가장 위험한 사람임을 보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조정 받지 않는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 6:20)는 말씀에서처럼 이런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라도, 분명히 그는 죄의 종이며, 하나님의 의가 가지는 지배력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주장하고 세우는 의는 자기 자신의 의이지, 결코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도덕적 삶과 선함은 모두 자기 자신의 선함과 도덕적 삶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신의 의일 뿐이다. 결국 그를 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사상과 철학일 뿐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엄격히 따져보면, 그는 궁극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고 그 죄에 능력에 따라 조정되는 사람일 뿐이다.
1. 베드로후서 2:19과 로마서 6:16에 따르면, 죄는 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답:
바울은 무서운 죄의 세력을 묘사하기 위해 그것을 폭군에 비유하였다. 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롬 5:12),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며(롬 5:21, 6:12), 사람들을 속이고(7:11), 사람들 속에 거하며(17절), 그들을 종으로 삼고(6:20), 마침내 죽게 만들었다(7:13). 아담과 하와의 죄는 모든 것을 무서운 죄의 세력 아래로 떨어지게 하였다. 사단은 이 세상 임금이 되었다(요 12:31, 14:30) 자치권(自治權)을 찾아 나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주(主)로 섬기는 대신 속박하는 사단을 주인으로 섬기게 되었다. 죄는 온 세상을 뒤덮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기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롬 5:12)
2. 로마서 3:9-18에 의하면, 죄 아래 팔린 인류는 어떤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까?
답:
바울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천연계에까지도 영향을 미쳐 죄의 세력 아래 놓이게 했다고 가르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죄의 파괴적인 세력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도 미쳤다. 천연계는 사단의 권세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세력은 천연계의 참된 아름다움과 의미를 앗아가 버렸다. 이것은 이 세상에 들어온 죄의 결과였다(롬 5:12).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의미와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피조물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천연계도 죄로 인한 부패의 상태 속에 던져졌다. 이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구출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한 능력이 나타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이 일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었다.
교훈: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파괴적인 죄의 세력 아래 놓이고 말았는데,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길뿐이다.
부가적용)
“구원의 과학--이것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과학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참된 철학과 순결하고 순수한 종교가 된다.” “구속의 과학은 모든 과학 중의 과학이 된다. 이 과학은...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들이 끝없는 세월동안 연구해야 할 학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요체가 된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종교, 즉 구속의 종교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어떤 교리나 신조를 수긍하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인격에 헌신하며 사랑의 순종을 바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된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아무 조건 없이 “예”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 십자가는 기독교의 “위대한 중심(the great center)”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나타나 있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가 가능한 것이다. 마틴 쾰러(Martin Kähler)는 복음서가 십자가 수난 기사에 대한 장문의 서론이라고 말했다. 이 십자가상의 속죄 사역의 장엄성과 비의는 인간의 필설로 다 묘사하기에 벅찬 깊이와 신비가 담겨 있어서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탐구하며 음미하는 학문의 주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의 종으로의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후의 인간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그 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들을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의이다. 죄의 종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용서의 의이고, 은혜로 주신 의이고, 사랑으로 주신 의이다. 내가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내가 죄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이미 내 안에서 주인으로 지배하기 시작 되었으며, 그 의의 권능과 힘이 이미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서 종이 되었느니라”고 함으로 그것이 단번에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임을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이 내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이고, 그렇게 됨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죄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화요일(10월 14일)
영적인 죽음(롬 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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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인데 우리가 죄로 인해 타락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더 이상 친밀한 영적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다시 한 번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금지된 열매만 따먹지 않았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구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고전 15:45). 이 말은 창세기 2장 7절과 관련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산 영'(a living soul)은 하나님이 아담의 몸을 지으시고 거기 생기를 불어 넣은 뒤에 생긴 것이다. 창세기 2:7의 생령은 숨, 호흡, 영혼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영혼’이란 뜻이다. 네페쉬 하야가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1:20), 그러므로 생령 이란 단어 자체에서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생령(동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한 영물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산 영 즉 생령인 인간은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려 살려주는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했다.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의 접촉점이자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엡 4:24; 골 3:10)이 모두 훼손되었다. 이런 것을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 결과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가 불가능해지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죄는 인간 내면의 생명을 손상시켰다. 하나님의 우주를 지배하는 영적 가치는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더 나은 삶을 갈망한다. 그래서 때때로 선하고 바른 일을 시도하지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롬 8:6-7)을 깨달을 뿐이다.
인간의 영적 속성은 약화되어 죄의 세력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죄와 악이 존재한다. 죄가 세상에 편만하게 됨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었다(롬 3:10). 죄란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자연적 상태를 말한다. 타락함으로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게 되었다(렘 17:9).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의 의지와 지성의 중심으로 간주되는데, 그것이 부정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간은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과 그 안에 가득한 것(전 9:3)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면의 두려움과 외로움 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내적 투쟁을 경험한다(갈 5:17). 그들은 자신과 세상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없이 어둠 가운데서 살아간다.(롬 1:21-25). 이러한 부패와 혼수상태는 자신과 다른 이들과 하나님에 대한 악한 행동으로 나타난다(마 15:19).
부패시키는 죄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제어하실 수 있으시며, 궁극적으로 우주에서 제거하실 수 있으시다. 만약 타락한 이 세상에 선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평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악을 미워하고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활동하기로 결정하심으로써 죄의 세력을 제어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생긴 무서운 상황에서 벗어날 출구가 필요하였다.
교훈: 인류는 죄로 인하여 영적인 죽음에 이르렀으며 그 늪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류를 구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지성, 감정과 의지가 심하게 타락하고 기능이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 즉 인격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타락하기 이전에 사람의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최고의 기쁨은 이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의 희락을 즐기는 것이 되어버렸다. 타락하기 이전에 사람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최고의 보람으로 삼았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지성과 감정과 의지도 동반 타락하여 자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타락 후 인간의 이성은 타락한 이성이다. 타락한 이성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과 우상을 섬기는 이성으로 타락해버렸다. 오늘날 이성주의와 인본주의에 의한 학문은 스스로가 신이 되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감정도 타락한 감정이다. 타락한 감정으로 인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정욕과 물질과 명예를 즐거워한다. 의지도 타락한 의지이다. 타락한 의지로 인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우리의 지성, 감정, 의지를 회복시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수요일(10월 15일)
육체의 영원한 죽음
도입)
걷는 것이 다리(足)의 작용이듯 마음(영혼, 정신)은 신경계통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할 수 있다. 즉 다리라는 물질이 없다면 걷는 다는 작용이 일어날 수 없고, 신경계통이라는 물질이 없다면 마음이라는 작용은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물질이라는 육신이 있어야 마음이라는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과 정신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육신이 없다면 정신도 없고 정신이 없다면 육신도 없다는 것이 일원론적인 설이라 할 수 있겠고, 그렇게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러셀이라 기억된다. 현대의 과학이나 학문에서는 대체로 이 입장에 서 있고 우리의 교회도 이런 입장에 서 있다고 보겠다. 이와는 반대로 육신과 영혼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설도 있다. 즉 육신과 영혼은 하나가 아니고 따로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육신이 없어져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이원론적인 설이라 할 수 있겠고, 그렇게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데카르트라 생각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이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육신과 영혼과 죽음은 우리 모두의 본질과 궁극의 문제이지만 누구도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신비라 생각된다. 인간의 감성, 이성, 오성의 넘어에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 생각해 본다. 보통 인간의 상태는 겉 사람은 살았고, 속사람은 죽어있는 상태다. 그래서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욕심과 정욕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속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주목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영혼이 없는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가 죽음임을 가리킨다. 죽음과 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죽음은 죄인을 영적으로 죽게 할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영원히 죽게 한다. 죽음은 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되는 것, 즉 두려운 영멸을 의미한다. 죽음은 죄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롬 5:12, 히 9:27).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류는 우주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에 만드신 피조물은 완전히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1. 로마서 5:10-21은 죽음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다고 설명합니까?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는 무엇입니까?
답:
죽음과 고통은 둘 다 죄의 결과로 세상에 왔다. 이 지구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아무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시련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을는지 몰라도, 경험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성경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의 상태가 고통과 시련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준다. 죽음은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가 죽기도 전에 질병과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통해 육체적, 정서적, 심리적 고통을 일으킨다. 그 결과로 삶의 질은 떨어지고 우울함이 자리를 잡는다.
질병의 현상은 죄의 또 다른 결과로서,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었다(시 88:3-4)고 한 시편기자의 말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에 죽음이 닥친 것은 피할 수 없는 곤경으로서, 이는 죄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리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죄뿐 아니라 고통과 시련과 죽음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교훈: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 놓으셨다.
부가적용)
삼촌의 가게에서 잔 신부름을 하며 도와주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조금씩 받는 월급마저 고향 어머니께 보내는 터라 항상 용돈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는 날 그는 삼촌께 부탁하기가 어려워 그만 금고를 뒤지고 말았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 날 이후로 그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늘 얼굴을 펴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이 가게로 들어와 공손히 인사한 다음 전도지 한 장을 주고 갔다. 무료하던 중에 무심코 펴본 전도지 안에는 다음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순간 젊은이는 그동안 자신을 죄어오던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을 택하여 자신이 지은 죄를 삼촌께 소상히 얘기했더니, 삼촌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네가 받은 고통만으로 너는 이미 죄값을 치른 셈이란다. 이 기회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계기로 삼길 바랄 뿐이다.” 어떤 죄가 중대한 죄이며 어떤 일이 위대한 일일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 십자가에서 독생자 예수님의 피가 흐르게 하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길을 여신 구원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누리도록 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도록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한 것보다 더 심각한 죄가 있을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에 대해 평생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우리더러 “왜 그렇게 범죄했느냐”고 추궁하시기 전에 “왜 나와 나의 것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했느냐”고 추궁하실 것 같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무관심, 무반응, 둔감, 냉담, 소홀, 무시, 무례, 거절은 형법상의 범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을 구하고 찾고 갈망하고 사랑하자.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대하26:5). 성경은 우리더러 힘을 다하고(신 6:5) 목숨을 다해(마 22:37)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촉구한다.
목요일(10월 16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창 3:8-13)
도입)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미움이란 단어는 매우 강력한 어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이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말할 때 야단을 친다. 이 강력한 단어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앞부분을 더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은 매우 매우 죄를 미워하신다. 우리가 이성을 잃거나 진리를 부인할 때, 더러운 생각에 잠겨있을 때, 먹을 것을 탐하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행동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하신다. 그 분은 그것을 간과하시거나 변명을 용납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는 것을 멈추시는 일이 없다. 당신과 내가 거룩하게 되는 핵심적인 열쇠는, 내 죄를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듯이 나도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이기에 이에 대해서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을 대적한다. 다윗은 이를 그의 참회시에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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