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선지자의 기별(3/7/09)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10과 선지자의 기별(3/7/09)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2.25 13:31 조회수 3,800
글씨크기

본문

 

3월 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1분)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기억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5:)

 

연구범위: 출 20:1-17, 레 16장, 마 24:24-31, 롬 3:21-28, 히 8:1-2, 9:23.

 

학습 포인트: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왜 계명들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안식일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비해 어떤 면에서 특별한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며,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해 바르게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광경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안식일 오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리적인 틀은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작지만 헌신적인 모임을 통해 대부분 만들어졌다. 그들의 모임은 열렬한 성경 연구와 기도로 특징지어졌다. 재림운동이 있은 지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1904년에도 엘렌 G. 화잇은 여전히 그 회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빛을 받기 위해 기도하였으며 말씀을 연구하였고,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있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06). 엘렌 화잇은 비록 교리를 체계화하는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에 이상을 통하여 받은 해답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상은 믿음과 독창성과 열성적인 활동과 말씀 연구를 대신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 교회의 교리들은 오직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의 글들이 어떤 가르침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교리들이 그 글들에 의존되어 있지는 않다.

 

핵심본문: 딤전 4:16

 

학습 목표

깨닫기: 선지자들을 통해 드러나고 엘렌 G. 화잇에 의해 확증된 성경의 주요 교리들을 이해한다.

느끼기: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다.

행하기: 이 귀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교과 개요

I. 구원(롬 3:21-28)

A.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의 교리와 사명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B.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구원의 계획에 대해 무엇을 알려 주셨는가?(히 9:1-8) 지금도 어떤 구속의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가?(히 8:1-2)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지고 설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II. 구별된 재림교인(요 11:11-14)

A. 조건적인 불멸의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희망과 위안을 가져다주는가?

B.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불태우시는 것은 그들이 소멸될 때까지이며, 영원한 세월이 아님(계 14:9-11)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가?

 

III. 복스러운 소망(마 24:24-31)

A. 재림에 대한 기대감은 우리의 생활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B. 세월이 흘러가도 어떻게 이 소망을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는가?

C. 성경과 예언의 신은 ‘기다림의 시간’ 동안 어떤 도움을 주는가?

 

요점: 우리 재림교인들은 이 귀중한 교리들의 유일한 기초가 언제나 성경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말씀의 백성으로서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 물론 엘렌 G. 화잇의 글들이 우리에게 귀한 통찰력을 제공하지만, 성경이 우리의 교리와 믿음의 근본적인 토대임을 기억해야 한다.

 

일요일(3월 1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 3:21-28)

 

1.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숙명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왕상 8:46, 롬 3:21-28, 5:12)

왕상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롬3:21-28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답: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죄는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 애굽인들은 죽음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여, 미라를 만들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세웠다. 헬라 철학자들은 무지가 인간의 참된 행복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여 교육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이다. 죄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앗아간다. 현대 의학도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치료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유일의 치료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뿐이다. “타락한 인간의 어떤 선행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열렬하게 강조하고 자주 되풀이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아무리 각인시켜 주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19)

헬라의 시인 호머(Homer)에 따르면, 메시나(Messina)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은 스킬라(Scylla) 암석에 부딪치거나 반대쪽의 카리브디스(Charybdis)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 중 한 쪽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값싼 은혜로 이끌고 죄된 행위를 관용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순종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삶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율법주의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동시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것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신 자를 또한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에는 선한 행위가 따른다. 비록 그 선한 행위 또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한다.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받는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믿으라 믿으라’하는 것이 그들의 외침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고 한다. 참된 믿음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한편 그 믿음은 그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일치하게 할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라고 선포하였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72)

 

<부가설명> 죄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이 오해하는 문제인 것 같다. 애굽에서는 인생의 문제 중에 사망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미라를 만들었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했다. 미라를 만든 것이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으로 사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은 미련한 것이지만 죽음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죄 문제는 곧 죽음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죽음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바로 죄 문제에 대한 함정이 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사실은 죄를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죄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죄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죄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양심적으로는 죄가 아니지만 실정법을 범하면 죄가 된다. 반정부 운동을 하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죄가 된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죄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실정법이나 그 정권이 도덕적으로 죄의 상태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참으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에 걸릴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적으로 왜 그렇게 죄를 짓게 되는 상태에 있느냐는 것이다. 사회적 환경 때문인가? 그렇다면 사회적 환경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데 대한 대답이 나와야 한다.

성경은 여기에 분명히 대답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게 된 것은 유혹의 욕심 때문이다. 유혹의 욕심은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 가면 실상을 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였고 여자가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 유혹의 욕심이 생겼으며 그것은 곧 선악과를 먹고 사망이 된 것이다. 사망이 되었으니 당연히 썩게 된다. 생명이 있다가 생명을 잃은 것은 썩을 수밖에 없다. 썩는 것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죄들이다. 썩게 된 원인은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근본적인 실상 그것은 사망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고전15:22). 아담에게서 이어받은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한 사람의 예외없이 다 죽은 자들이다. 당연히 썩는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죄를 짓게 된 근본 원인이다. 이것이 죄이다.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며, 구주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부활이며 이 부활의 생명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얻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경험을 하였으면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이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 사람들이다(고후5:21). 이런 사람들은 부활의 생명이 그의 삶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생명의 생태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을 깨닫고 이 경험에 있으면 무법주의나 율법주의라는 이론이 발붙일 곳이 없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바로 이것이다.

 

교훈: 우리는 율법주의와 무법주의 양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따른다.

 

월요일(3월 2일) 성소(히 9:1-8)

 

1. 구약 성소에서 어떤 봉사들이 행해졌으며, 그것들은 구원의 계획을 어떻게 예증해 주었습니까?(히 9:1-8)

히9:1-8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답: 구약 성소의 모든 구조와 기구들과 봉사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나타내는 실물교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소 봉사를 통해 시각적인 교훈을 베풀어 주셨다. 자백, 희생, 용서, 믿음, 화목, 성결 등 이 모든 것들이 지상 성소에서의 매일의 봉사와 매년의 봉사를 통해 생생하게 설명되었다.

 

2. 히브리서 8:1-2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봉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왜 히브리서 9:23은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까?

 

 

히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답: 하늘에 있는 것들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더 좋은 제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죄인은 약속된 후손(창 3:15)의 속죄하는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용서를 받았는데, 그 약속된 후손은 성소 봉사의 동물 희생을 통해 예시되었다. 지상 성소의 봉사에서, 한 해가 마쳐질 때에 성소가 정결케 되는 속죄일 즉 심판의 날이 있었던 것처럼 하늘 성소의 봉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심판의 날이 있다.

재림 전 심판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고백한 자들이 참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인지를 우주 앞에 드러낸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책들을 온 우주 앞에 펴실 때에 각 사람의 심판에 대하여 그분의 판결이 공정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옹호해 준다(롬 3:4).

 

하늘 성소와 지상 성소

“신약 성경은 새 언약에도 성소, 곧 하늘의 성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신다. 이 성소는,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히 8:1-2)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늘 성소의 ‘식양’, 사본, 축소판 모델을 보았다(출 25:9, 40). 성경은 모세가 지은 성소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혹은 ‘참것의 그림자’(히 9:23-24)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지상 성소와 그 의식들은 하늘 성소의 역할에 대한 특별한 통찰을 우리에게 준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428-429)

 

<부가설명> 성소 문제를 연구할 때 구조와 기구와 제물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하면서 봉사의 실상은 대략 말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성소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할 때 “저희가 섬기는 것은”(히8:5)이라고 하였다. 지상 성소는 구주와 기구뿐만 아니라 섬기는 것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지상성소 봉사는 성소봉사와 지성소봉사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성소도 성소봉사와 지성소봉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이다. 성소봉사가 공급의 봉사라면 지성소 봉사는 결산의 봉사이다. 성소에서는 속죄와 영적 육정 양식의 공급과 어두운 세상을 밝게 살아가는 등불의 공급과 필요할 때마다 응답하시는 기도의 향단이 있다. 이것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절대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1년을 공급 받았는데,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의 영광과 뜻을 잘 드러내도록 자신에게 적용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지성소봉사이다. 이때 그 뜻대로 잘 적용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정결이 선언되고 그것을 자기 생각대로 처리한 사람들에게는 그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의 보혈과 성령의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여 영원한 정결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주님의 지성소봉사의 성질을 잘 나타낸다. 지금은 지성소봉사 시대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살피고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바르게 받아 바르게 적용하여 그날에 온전한 정결을 선고를 받는 복을 누리는 것은 특권이 아닌가.

 

교훈: 지상 성소와 그 봉사는 우주에서 죄를 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즉 하늘 성소의 정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실물교훈이었다.

 

화요일(3월 3일) 안식일(출 20:1-17)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제도는 안식일과 결혼 제도뿐이었다. 그래서 이 두 제도는 낙원의 쌍둥이 자매라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볼 때 사단이 얼마나 이 제도들을 훼손시키고 더럽히려고 부지런히 일해 왔는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

 

1. 출애굽기 20:1-17은 다른 계명들에 비해 안식일 계명이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고 말해 줍니까?

출20:1-17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지니라 14 간음하지 말지니라 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답: <부가설명> 10계명 중에 1-3 계명은 종교적 계명이다. 5-10 계명은 도덕적 계명이다. 즉 1-3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지적하고, 5-10 계명은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계명이다. 그러나 4 계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하신 것과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을 지적하며 그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을 가르친 계명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금석이 된다.

 

넷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 시금석과 같은 계명이다. 이 계명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시험한다. 이 계명은 만질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시간을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측정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나타낸다. 이 계명은 사람이 그것을 어기고도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유일한 계명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일곱째 날은 왜 다른 날보다 귀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도둑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며, 탐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비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떤 자연 현상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우리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 아니고, 인기가 있기 때문도 아니며, 어떤 자연의 주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계명들에 순종함으로 믿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약 2:10-11, 요일 5:2-3, 계 14:12).

우리는 안식일에 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쉼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쉼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참조 히 4:1-11).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날

“우리가 특별히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은 끝없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매일이 똑같으며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도래는 소망과 기쁨과 의미와 용기를 가져다준다. 그것은 예배와 기도와 찬미와 말씀에 대한 연구와 명상을 통하여, 그리고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55)

 

<부가설명> 안식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창조를 끝내시고 하나님이 쉬신 사실을 담아놓은 날이다.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실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또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시인한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며 확인하는 것을 뜻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창조주에 의하여 생명을 얻고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은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는 행위이다. 안식일에 선교하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을 나누는 일이다. 안식일에 환자를 방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곤고한 자와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찾고 위로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생명을 나누는 일이 없는 선행은 진정한 선이 아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시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다(막3:4).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명백하게 전하신 것은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훈: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열쇠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쉼을 밖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수요일(3월 4일) 죽은 자의 상태(시 146:4)

 

1. 다음 구절들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시 146:4, 전 9:5-6, 요 11:11-14, 행 2:34)

시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전9:5,6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6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요11:11-1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행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답: 예수님은 죽음을 잠에 비유하셨다. 죽은 자는 곧바로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상태로 무덤에서 쉬다가 부활 시에 일어나게 된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영감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하시며(딤전 6:16),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잠으로 가르치셨고 두 가지 부활 즉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요 5:28-29) 중 어느 하나로 귀결된다고 하셨다. 캔터베리의 감독인 템플(William Temple)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불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을 따름으로 영생을 받을 수 있고, 그분이 주시는 부활을 통해 불멸에 이를 수 있다.”(자연, 사람, 그리고 하나님, 1934년, 472)

 

2. 다음 구절들은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칩니까?(마 25:46, 계 14:9-11)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계14: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답: 성경에서 악인이 영벌에 들어간다든지, 영원한 불에 소멸된다는 말은 그 결과가 영원하다는 뜻이지 불타는 과정이 영원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불멸에 관한 개념은 모든 원시종교와 정령숭배와 다신교에서 발견된다. 그 개념은 또한 헬라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어둑한 지하 세계인 하데스(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죄인은 생과 사의 중간 상태로 살아간다고 가르친다. 헬라인들은 인간이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죽을 때에 영과 육이 분리되어 영은 육의 감옥에서 풀려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과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영원히’ 또는 ‘세세토록’으로 번역된 말은 반드시 끝이 없는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헬라어의 아이온(aion)이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그 물질의 본질이 허락하는 한의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유다서 1:7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아이오니오스) 불의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으나, 베드로후서 2:6에는 이 도시들이 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영원히’ 또는 ‘세세토록’이라는 말이 불멸의 삶을 얻은 구속받은 자들의 생명을 언급할 때에는 끝없는 시간을 의미하지만, 그 말이 불멸의 삶을 얻지 못한 악인의 형벌을 언급할 때에는 제한된 시간을 뜻한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은 없음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악인을 태우는 불은 땅을 정결케 한다. 모든 저주의 흔적은 일소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죄의 무서운 결과를 언제나 생각나게 해줄 영원히 불타는 지옥은 없다. 오직 한 가지 기념물은 남게 된다. 우리 구주께서는 십자가의 표를 영원히 언제나 간직하실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73-674)

 

<부가설명> “영원한”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아이온 아이오니스”인데 히브리어로는 “올람”이다. 이 말은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때”를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엄마가 집을 나서면서 아이에게 집을 잘 보고 있으라고 부탁을 할 때 아이가 엄마 언제 오실 건데요? 라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올 때가 되면 올 거야. 라고 대답을 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올람이다. 엄마가 오기는 오지만 언제 온다고 시간을 정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올람은 엄마가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런 예가 요나서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2:6). 이 말씀에서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의 “오래도록”이 올람이다. 구역에는 “영원히 나를 막았사오나”라고 번역되어 있다. 구약성경에 “영원히, 영원한”등을 번역된 말이 대부분 올람이다. 레위기를 읽으면 성소봉사와 제사법들에 대한 것을 말할 때에 “영원한 규례”라고 한 것을 많이 읽게 된다. 그것이 다 “올람”이다. 그 규례를 언제 폐할 것이라고 시간적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성소의 휘장의 찢어질 때 그 영원한 규례의 대부분이 끝났다. 그처럼 영원한 불도 태울 것을 다 태울 때까지 탄다. 그것이 언제까지 다 탈 것이라고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영원한 불, 세세토록 고난의 연기가 올라간다”등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 탈 것이 다 타면 불이 꺼진다. 이런 진리를 대부분의 기독교가 믿지 않는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의 기별인데도 속이는 자에게 속아서 교회가 그것을 믿지 않고 영원 지옥설 영혼불멸설 등을 가르친다. 이것을 바르게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데 예언의 신의 감동으로 기록한 화잇의 증언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지자의 기별은 성경의 사상과 일치한다.

 

교훈: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는 사단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죽음은 잠이며, 그 후에는 두 부활 중 하나에 참여하게 된다.

 

목요일(3월 5일) 재림(마 24:5, 24-31)

 

1970년대 초반에 핼 린지(Hal Lindsey)의 책, 대 유성 지구의 종말은 150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 최근에 팀 라하예(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Jerry B. Jenkins)가 쓴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역시 수백만 부나 팔렸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교회 이름 가운데 나오는 재림교인(Adventist)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일 정도로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레프트 비하인드나 핼 린지가 주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1.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며,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는 광경에 관한 어떤 기만이 있을 것을 미리 경고하셨습니까?(마 24:5, 24-31, 계 1:7)

마24:5, 24-31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비밀스럽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게 임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

19세기에 존 다비(John N. Darby)가 처음 소개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두 단계가 있다는 개념은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 가정적인 첫 번째 단계는 비밀 휴거인데, 이때에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끌려올라가며, 두 번째 단계는 7년 후에 그리스도께서 1,000년 동안 다스리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휴거와 강림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신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분할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문자적인 사건으로서, 보고 들을 수 있게 일어날 것을 말해 준다(살전 4:16-17, 계 19:11-21).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오심에 관한 거짓된 주장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기만이 만연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마 24:24), 그분의 오시는 광경에 대하여 그처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재림은 공개적인 사건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세계가 알게 된다는 묘사에 덧붙여 그분의 재림이 눈으로는 물론이요 소리에 의해서 알려진다는 것이 성경상 주장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큰 나팔 소리’(마 24:31)가 그분의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수반된다. 비밀리에 오시는 일이란 없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457-458)

 

<부가설명> 린제이나 젠킨스 라 하예의 저술들은 모두 세대주의 신학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비는 세대주의를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자이고 이것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데는 스코필드 레퍼런스 바이불이 큰 몫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다니엘 9장 27절의 마지막 한 주일을 적그리스도가 세상에서 활동하는 기간으로 보면서 그것을 7년 대환난이라고 해석한다. 이 기간이 시작할 때 예수께서 공중에 임하셔서 모든 의인들을 휴거시키는데, 두 사람이 매를 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고,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는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모르도록 비밀히 데려가기 때문에 비밀 휴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임하신다고 하였으며 그때 의인들이 공중으로 끌려올라간다(휴거)고 하였다. 결코 비밀이 될 수 없다. 아주 장엄하고 웅장한 세상에서 비할 수 없는 소리와 나팔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에 비밀이 될 수 없으며, 각인의 눈이 친히 볼 것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기 때문에 의인에게만 비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독교가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데 우리는 이 사상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것도 예언의 신으로 주신 기별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이다.

 

교훈: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 번의 실제적인 사건으로서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금요일(3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제34장 ‘죽은 사람들이 우리와 교통할 수 있는가?’(551-562), 제40장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635-652).

 

우리 교회의 초창기 선구자들은 율법에 관한 그들의 설교에 있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890년에 엘렌 화잇은 기록하기를,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는 길보아 산처럼 건조하게 율법을 설교해 왔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3월 11일자)고 했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기간에 와그너(E. J. Waggoner)와 존스(A. T. Jones)가 바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기별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오직 세상 죄를 속량하기 위해 갈바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진리를 확증하였다.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의 두루마기를 입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두루마기는 금이나 은으로 살 수 없고, 선행으로도 획득할 수 없다. 이 기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우리 모두의 삶과 설교의 중심에 두라는 호소였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기보다는 참된 개인적 경험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었다.”(A. V. 올슨, 위기를 통하여 승리까지: 1888-1901, 리뷰 앤드 헤럴드, 1966년, 35)

와그너 또한 인간의 순종이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義)만이 하나님께 가납되는 기초가 되며, 단지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엘렌 G. 화잇은 와그너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녀는 그의 설교를 “지극히 소중한 기별”이라고 불렀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재림교회의 교리들 중에 성경이 아닌 엘렌 G. 화잇의 글에서 온 것이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믿는다 할지라도, 왜 우리의 모든 신조가 성경, 오직 성경에서만 비롯되어야 합니까?

* 내가 배우고 기억한 대로는 성경을 떠나서 화잇의 글에 기초한 교리는 없다. 성경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완성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화잇을 통해 주신 증언은 성경을 더 바르게 깨닫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시기(時期)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사람의 사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사상이 뒤덮고 있는 때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주시고 그에게 기별을 주셔서 성경을 성령의 인도로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나와야 한다.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선지자를 통하여 진리를 바르게 깨닫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하사며, 이 증언을 귀하게 여기고 바르게 사용해야 하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