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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4.23 13:07 조회수 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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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계시

5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3분)


도입)

계시(revelation)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라‘'라는 말인데 우리 말로 '벗겼다' '나타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로는 '아포칼뤂시스(αποκαλυψιαζ )'와 '파네루운(πανερουν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이들 두 단어는 모두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아포칼뤂시스(αποκαλυψιαζ )'라는 말은 '폭로하다' 또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파네루운(πανερουν )'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뚜껑을 연다'고 하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시란 가리어지고 덮어져서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것을 벗기거나 열어서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를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하신 영광과 능력은 물론, 그의 본질과 속성 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시는 사역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계시라는 말을 어떤 미래사(未來事)에 관한 것이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나 물건 또는 대상 등에 관하여 초자연적 신통력으로 알아지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계시개념은 무속 신앙계에 널리 퍼져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계에까지 깊숙히 파급(波及)되어 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를 들면, 사업에 대한 성공과 실패, 또는 자녀들의 대학 진학에 대한 합격과 불합격 등은 물론, 결혼 상대자를 정하는 일, 심지어는 부동산을 팔고 사는 일 등에 이르기까지 기도해서 계시를 받아 해결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지도하는 교회 일반 개신교 지도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서 허다한 성도들이 자기 스스로가 기도를 하거나 또는 소위 신령한 종이라고 추앙(推仰)받고 있는 광신자(狂信者)들에게 기도를 받아서 계시를 통한 응답을 듣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미신적(迷信的)이며 비기독교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ㆍ구약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들이 속출(續出)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기독교적인 계시의 올바른 정의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연구범위: 출 7:1-6, 시 19:1-4, 롬 1:18-20, 딤후 3:14-16, 히 1:1-3.


중심 사상: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듣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식일 오후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그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분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아버지로, 피조물들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들과 결속을 굳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의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담이 창조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분께서는 곧바로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때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류에게 말씀해 오셨다(히 1:1). 성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호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계 22:17). 이번 주에 우리는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일요일(4월 26일)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시 19:1-4)


도입)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거짓되이 일컫는 과학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천연계를 통해 계시되는 주님의 지혜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덕분에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과 경배를 과학과 교육이 받고 있다. 천연계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영적 조명이 바로 자연 계시 즉 천연계이다. 하늘, 해, 달, 별, 낮과 밤,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말없이 입증해 주고 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빛을 마음 가운데 새겨 주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고, 방향을 정하시는 분이시다. ‘바람들의 무게를 정하시고 물들을 되어 무게를 정하시기 때문이라.’(욥28:25). 오늘날 태풍이나 이상 기온 등에 대해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바람, 천둥, 물, 비, 땅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1. 시편 19:1-4과 로마서 1:18-20은 하나님께서 천연계를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두 가지 좋은 예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말로 정리해 보십시오.

답: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흥미를 일으키기 위하여 우리 주위에 천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 놓으셨다. 우리로 하여금 천연계의 영광을 그분의 품성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우리가 신실히 천연계의 책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능력을 명상하는 데 있어 풍성한 근원이 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144)

성경을 믿는 자들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숲속의 수려한 나무들과, 눈 덮인 산 위로 아름답게 빛나는 태양을 바라볼 때 창조주의 사랑과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한 떨기의 들꽃, 또는 인체의 정교한 구조를 볼 때 경탄을 금치 못하며, 천연계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 주는데, 비신자들도 천연계를 바라봄으로 그 모든 것을 설계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면에서 자신들의 눈을 감아버린다. 그들은 진화론에 세뇌(洗腦)되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지적인 설계자가 계신 증거를 인정하고 있다.


2. 다음의 단순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아름답고 정교한 생명체에 대한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어느 것입니까?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주장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견해입니까?" 자신의 답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교훈: 하나님께서는 천연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비록 죄로 인해 손상되었을지라도 천연계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크게 말해 준다.


부가적용)

단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가능할까? 성경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창세기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로마서 1:18~22) 우연에 의하여 생명을 만들 수 있을까? 우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임의로 1에서 10까지 새겨져 있는 10개의 동전들 중에서 하나씩 선택할 때, 우연히 1에서 10까지 순서대로 배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100억 분의 1의 확률과 같은 것이다. 매번 시도하는 데에 5초가량 걸린다고 한다면, 우연에 의해 1에서 10까지 순서대로 나오는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하여도, 약 1,500년의 세월이 흐른다. 생명을 우연에 의하여 창조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도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다. 어리석은 일이다.


월요일(4월 27일)

우리의 양심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창 42:18-23)


도입)

우리는 지금 양심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양심적 행위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다. 인신매매, 청소년탈선 살인강도에 따른 사건들을 들을 때마다 충격을 받지만 충격의 강도는 점점 무디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정말 우리는 양심불감증에 걸린 채 살아가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 세상에 내가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요 둘째는 마음 속의 양심이다’라는 말을 했다. 양심은 인간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다. 이 선이 붕괴된 인간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비인간화된다고 성서는 경고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 49:20).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와 표준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법과 질서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이 올바로 형성될 수 있도록 양심을 통해 일하신다. 성경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디모데전서이다. 특히 딤전 1:5절에서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는 말씀이 있다. 양심을 가장 잘 지켜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도 바로 신앙인이다. 신앙인에게 있어 선한 양심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덕목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이때 선한 양심을 지켜 사회의 빛이 되어야 한다.


'양심'이란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내적인 원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또 거절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롬 2:14-15).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위대한 율법의 시여자이시며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을 두신 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인 문제에 관하여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이 도구도 죄로 인하여 무디어지고 말았다. 구약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지만, 신약에는 아주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개념은 나타나 있다.


1. 사람들이 양심의 영향을 받아 행동한 이야기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참조 창 42:18-23, 단 5장, 마 27:3-5, 요 8:1-9)

답: 요셉의 형제들은 아우 요셉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하여 양심에 찔림을 받았고,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거룩한 기명으로 술잔치를 벌이다가 분벽에 쓰인 글자를 보고 양심에 자극을 받았다. 가룟 유다는 무죄하신 예수님을 판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하였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땅에 쓰실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곳을 떠나갔다.


우리의 양심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항상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특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다양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양심은 깨끗하나, 그것이 나를 결백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시니라”(고전 4:4, NIV). 사도는 또한 우리가 양심의 호소를 거절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사실상 그 양심이 화인(火印) 맞거나(딤전 4:2), 더럽혀진(딛 1:15) 자들도 있다.

한편,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로써 그분과 자주 교통함으로 그분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우리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보다 민감하게 될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통로는 우리의 양심이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써 둔감해진 양심을 예민하게 간직할 수 있다.


부가적용)

양심은 우리의 인격형성에 요체가 된다. 인격이 성숙할수록 양심의 기능은 더욱 분명해지고 보다 민감해진다. 신앙인이 희구하는 바가 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숙한 인격자로 생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양심이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편이 된다고 밝힌다. 성경은 인간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이며 성령은 양심의 기능을 활발히 해주는 촉진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서 선하고 올바른 양심을 갖고 이 사회에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화요일(4월 28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출 7:1-6)


도입)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단절된 역사의 초기 시대로부터 그분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와 교통해 오셨다. 선지자들의 사역에는 수많은 일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계시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귀히 보시고 그들 중에서 당신을 대표할 선지자들을 택하셨음을 보여주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사랑과 품성을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하시는 방편이었으며, 또한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한편 선지자들은 구원의 계획을 드러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에 관해 매우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지자가 주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이며, 성경을 기록하고 자기 이름으로 표제를 붙인 사람들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훨씬 더 광범위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일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1.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의 관계는 선지자라는 용어의 핵심적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출 7:1-6)

답: 아론은 모세의 대변인으로서 모세가 준 말을 전달하였다. 선지자는 대언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달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7:1-6에 선지자의 역할이 나온다. 위대한 선지자로 언급된 모세(신 34:10-12)는 그의 대언자 역할을 한 형의 도움을 받았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과 같았고, 아론도 선지자로서 바로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만을 전했다는 것이다."(존 딥달, 풍성한 삶을 위한 성경 확대경: 출애굽기, 퍼시픽 프레스, 1994년, 80)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그 메시지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그 말에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표현할 단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교통하시기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 아모스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2. 구약시대 이후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신약의 다음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이름이 언급된 선지자들(눅 1:67, 2:36, 행 13:1)_______________

* 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은사의 지속성(고전 12:28, 14:1-5)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 고전14:1-5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3. 거짓 선지자들(벧후 2:1, 계 2:20)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4. 남은 교회의 특징(계 12:17, 19:10)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계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께서 초림하신 이후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교회에 예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으며, 특히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는 대언의 영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기별을 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도 선지자를 보내셨다.


부가적용)

국가를 이끌어 가는 두 개의 축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와 종교이다. 고대로부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국가나 개인은 망하기 때문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볼 때 사사시대는 정종일치(政宗一致) 시대를 맞았다. 그리하여 사사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역할과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선지자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이후 선지자 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이 나라를 맡아서 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지자는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국민을 치세하는가를 지키는 감독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지자들은 때때로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들과 귀족들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나라를 뒤엎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이스라엘 초창기부터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 그 초점을 두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어떤 새로운 윤리를 소개해 줌으로서 그들의 도덕심을 앙양시켜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맨 처음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루게 한 언약적인 유대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초월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우리가 선지자로 믿고 있는 엘렌지 화잇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각자의 몫이지만 그를 참된 선지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열매와 그녀의 행적과 기록을 살피고 조사하는 것도 우리의 각자의 몫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보내신 선지자이시기 때문이다.


수요일(4월 29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딤후 3:14-16)


도입)

19세기의 러시아의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신론과 유물론 사상에 꽉 절어 살던 사람이었다. 그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간이역에 기차가 멈춰 섰다. 그 때 어느 한 점잖은 부인이 작은 성경책을 그에게 건네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유배지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그는 저녁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성경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구원자임을 깨닫고 크게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어느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내게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싶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불후의 명작인 ’죄와 벌‘을 쓰게 되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계시 중의 계시가 바로 성경인 것이다. 성경을 우리가 집중해서 제대로 한 번 만이라도 읽으면 성령님께서는 반드시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고 반드시 새롭게 변화를 받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내신 것들 중 많은 것들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약 1,500년간에 걸쳐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들을 편집해 놓은 것이 우리가 보는 성경이다. 예수님과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구약성경이라 부르는 기록들 밖에 없었으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복음서와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기록한 글들도 포함되어 있다.


1. 바울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는 것을 칭찬하면서, 그 말씀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구절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에 대해 또 무엇을 말해 줍니까?(딤후 3:14-16)

답: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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