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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구원에 관한 은유적 표현들(11/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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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1.19 12:48 조회수 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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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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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연구범위: 롬 2:1-29, 3:19-26, 고후 5:18-21, 요일 4:7-11.

 

중심 사상: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몇 가지 해석 방법들을 정리해 본다.

 

안식일 오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어떤 하나의 상징이나 개념은 없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해 지불된 속전(贖錢)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을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시로 본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희생으로 보고,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인 죄를 제해 준다고 믿는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죄 선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전한 의미를 어느 하나의 개념 아래로 몰아넣기는 불가능하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을 묘사한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을 살펴볼 것이다.

 

핵심본문: 롬 3:25

 

학습 목표

깨닫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음을 확인한다.

느끼기: 그분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버려야할 책임이 없으셨음을 깨닫는다.

행하기: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기쁘게 노력하기로 한다.

 

교과 개요

I. 값없이 주어진 구속, 화목, 그리고 칭의(갈 4:4-5, 딛 2:14)

A. 만약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그분께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랬다면 그분께서 소외된 자들과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시기가 쉬웠을까?

B. 관계가 깨어져버린 후에 그것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C.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로 선택하셨다. 만약 그분께서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으셨다면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고려해 볼 때, 그분의 선택에 대한 나의 느낌을 표현해 보라.

D. '칭의'의 정의(定義)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주장하기만 하면 칭의가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확신을 갖지 못할 때가 많은가?

 

II. 십자가의 원동력이었던 사랑(요일 4:8)

A. 이번 주에 다루는 구원에 관한 예증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깊은 의미를 던져주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3분 동안 그리스도를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그 예증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B. 구원에 관한 예증들 가운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요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로 선택하심으로 우리는 그분과 연합되었다. 이 사실은 하늘의 존재들조차도 결코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었다.

 

일요일(11월 23일) 구속(막 10:45)

 

1. 다음 구절들은 ‘구속’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막 10:45, 갈 3:13, 엡 1:7, 벧전 1:18-9)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답: 구속은 죽을 수밖에 없도록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자를 대신하여 값을 지불하여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죽을 자를 대신하여 죽어줌으로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구속(救贖)이란 속전(贖錢)을 지불함으로 빚이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개념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온 세상은 죄의 포로가 되었고, 율법은 감시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갈 3:22-23). 죄의 노예 된 인간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뿐이었다(롬 6:6, 23). 그리고 그 빚을 갚는 길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값을 지불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것이다.(18절)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를 "율법의 저주"(갈 3:13)에서 구속하셨다. 율법의 저주가 그것을 범한 자들에게 내려졌다(10절). 율법 그 자체는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망 선고에서 우리를 구해낼 수 없다(21절). 율법은 단지 그것을 범한 자의 죽음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갈 4:4-5)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딛 2:14). 그래서 구속은 우리의 삶을 성결케 하는 성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갚으시고 죄의 용서를 주셨다(엡 1:7). 구속은 또한 우리에게 칭의(稱義)의 선물을 주었다(롬 3:24).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신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셨고, 친히 속전을 지불하심으로써만 당신의 도덕적 요구에 만족하셨다. 그분은 인류와 온 세상을 위해 생명의 권리를 되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인류의 구세주로서 이 지상에 오셨으며 교활한 원수를 정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바른 원칙에 대한 주님의 확고한 충성으로써 당신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께서는 갈바리의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대가를 치루셨다. …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부가설명>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는 말로 인류를 윽박지르며 율법을 범한 자들은 사망의 세력 아래 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하나님이시다. 율법을 범했다는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입법자이시기 때문이다(약4:12).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의 존재와 생명을 창조주께 돌려드려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사망이며, 그렇게 되게 된 상태가 죄이다. 그러므로 죄는 곧 사망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사람이 사단에게 속아서 이런 상태에 빠졌다. 창조주께서는 이런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인간의 사망을 대신 당하고 인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하여 이 사망의 값을 치러야 할 구주를 보내셨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것은 인류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 그 생명을 대신하여 버리신 것이며 그것은 곧 율법의 정죄를 친히 당하신 것이며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속적을 드리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생명의 능력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셨다. 즉 복음으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딤후1:10).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믿음이며, 이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생명의 능력이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생명이신 성령으로 인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사는 이유가 바로 이 까닭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죄의 삯인 사망에서 건져내심으로 영생의 특권을 되찾아 주셨다.

 

월요일(11월 24일) 화목(고후 5:18-21)

 

1. 고린도후서 5:18-21은 화목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고후5:18-21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셔서 죽게 하시고 그가 다시 부활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영원하시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신 것을 화목이라고 가르친다.

화목(和睦)이란 과거에 원수였던 사람들이나 단체가 서로 간에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며, 대개 중재자나 협상자를 필요로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러한 관례를 사용하였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당신과 화목시키기 위해 첫발을 내디디셨다. 이는 우리가 아직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에라도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분을 통하여 화목할 수 있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8).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19절).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너무나 큰 간격이 생겨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셋째, 화목의 대상은 '우리'와 '세상'이다. 여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18절)고 할 때 사용된 동사는 과거형으로서, 그 행위가 완료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신자들이 지금 당장 화목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19절)고 했는데, 문맥상으로 세상과의 화목은 아직 진행 중에 있음을 암시한다.

넷째, 진행되고 있는 화목은 두 가지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의 화목인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19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불가능하게 한 장벽은 죄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분의 진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 죄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흘러오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화목이란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화목의 두 번째 부분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18절) 즉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19절)을 전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20절) 이 일을 위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심과 같이 …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20절)

 

화목 제물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위한 화목뿐만 아니라 회복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넓은 웅덩이가 갈바리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메워지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하고 완전한 속전이 지불되었으며 그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이 용서함을 받게 되고 율법의 공의가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심을 믿는 모든 자들은 나아가 저희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으실 수 있고 또한 나는 주님을 요구할 수 있으며 나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시켜야 할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대치물이 되시고 담보물이 되시기 때문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3)

 

 

<부가설명> 사람이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은 사람과 친교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산자와 죽은 자는 교제할 수 없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 죽은 것을 대신 처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화목이다. 이런 화목을 위하여 예수님은 사망을 처리하셔야만 하셨다. 그래서 그는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생명이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생명이 없다(요일5:11,12). 생명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신 분과 교제를 하게 된다. 생명이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신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죄 지은 인류와 화목하시고, 또한 화목케 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다.

 

화요일(11월 25일) 칭의(롬 3:19-24)

 

본래 칭의(justification)란 범죄자로 기소된 사람이 법정에서 무죄로 인정되어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 법적 용어이다. 이 개념도 또한 신약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대조시킨 것은 칭의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롬 3:19-24)

롬3:19-24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법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이 범죄자로 기소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소송에서 인간은 고소자의 말대로 죄가 드러났으며, 그리하여 모두 율법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되었다.(롬 2장)

둘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바울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22절)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용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이 칭의(稱義)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이다(22, 29절).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그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기 때문이다(24절). 그러므로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한 해결책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칭의 밖에 없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영접함으로써 이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갈 3:2-3, 롬 6:4)

넷째,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과 칭의라는 두 개념이 서로 연결된 것을 본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법적인 근거를 제공해 준다(롬 4:3-6).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고후 5:21),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성취될 수 있었다.

 

<부가설명> 칭의라는 말은 말 그대로는 우리말 성경에 없다. “의롭다하심을 받은다”는 말을 한자를 빌어 간단히 쓴 말이 칭의일 것이다. 즉 의롭다고 칭해준다는 말이다. 전혀 의롭지 못한 자를 예수를 믿을 때 의롭다고 여겨주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칭의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상태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생각된다. 본 교과의 저자는 이것이 도덕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것은 사법적 용어이다. 법정에 재판을 받기 위하여 서 있는 사람은 그 도덕적 성품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저지른 불법이 문제인 것이다. 그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고 고소된 사안이 불법이 아니면 그는 죄가 없다고 선고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도 그가 불법을 저질렀으면 죄가 있다고 선고된다. 칭의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즉 우리에게 불법한 일이 없다고 선고하셨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 없이 이렇게 선고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불법자이다. 그 불법은 존재하면서 행한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행한 것이 곧 사망 자체가 되어버린 그런 불법이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이미 선고한 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그날에 이미 사망이 선고된 그런 사람들이다. 다만 아직 사형 집행이 미루어지고 있는 상태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를 그냥 두고 사망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 없다. 그 사망을 처리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다음에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선고된 사망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아담을 대신하여 사망이 집행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선악과를 먹고 선고된 그 사망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셨을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칭의이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선언하시고 이제는 더 이상 죽은 상태로 썩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이제는 부활의 생명 곧 영생의 생명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짐을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실 수 있게 되었다. 칭의의 선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자.

 

수요일(11월 26일) 속죄의 희생(롬 3:25-26)

 

바울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룬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롬 3:25-26)

롬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답: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사람들이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또한 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히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바울이 '화목제물'이라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 희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핵심적인 일이다.

첫째, 이 희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이다(롬 3:25).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

둘째, 이것은 대속적인 행위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흠이 없으셨으나,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롬 8:3, 고후 5:21, 벧전 2:21-24). 그분께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 소개하면서, 세상이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1-3장).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났다(롬 1:18). 그런데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설득하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미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임과 동시에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가 드러난 곳이기도 하다.

넷째,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법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혈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행 20:28, 골 1:20, 계 5:9).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고(롬 5:9),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게 되었다.(롬 3:26)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와 의를 유지하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도덕적 그리고 법적으로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가 심판으로 옮겨질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와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셔야 한다. 이 선고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인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 이 속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아래 섰기 때문에 필요했다. 여기에 죄에 대한 용서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오묘와 핵심이 깔려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합당하게 만족시켰고, 또 하나님은 인간이 죽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을 기꺼이 받아주신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153)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당연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절정이 바로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의가 형벌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랑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그 사망을 당하신 것은 공의의 집행이었으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랑으로 다가오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고전15:22). 산 자와 죽은 자는 친교할 수 없고 화목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아담의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셔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그들은 예수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벗이 되며 화목이 되고 사귐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시다. 그 안에서 이 화목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이 충만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가능하게 되었다.

 

목요일(11월 27일)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요일 4:7-11)

 

구원의 계획을 실행시킨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었다(요일 4:8). 그분의 거룩한 사랑은 구속 사역의 모든 국면마다 새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고(14:31)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13:1),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약 2:5), 예수님을 사랑하며(요 14:21), 서로를 사랑한다(요일 3:1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믿음으로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요일 5:3).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와 죽음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이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요일 4:7-11)

요일4:7-1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답: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으로 반응해야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은 대쟁투의 맥락에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사단은 하늘 존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분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희생적인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그분의 이기적인 본성이 자아부정의 모습 속에 감추어져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이 모든 의심을 영원히 제거해 주었다. 창조주께서 미천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하셨다는 사실은 하늘의 지적 존재들조차도 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희생은, 그분께서 참으로 무아적인 사랑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품성에 관한 오해를 일소(一掃)해 주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보지 못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어두운 그림자를 펼쳐 놓는다. 그러나 갈바리의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영원한 보증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56)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의심으로 채움

“사람의 마음을 의심으로 채우는 것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사단은 그들이 하나님을 엄한 재판관으로 여기도록 이끈다. 사단은 그들로 죄를 범하도록 유혹한 다음, 자신들은 너무도 죄가 많아서 하늘 아버지 앞에 가까이 나가거나 그분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주께서는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궁핍하고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동정하신다는 것을 보증하신다. 사람이 한숨짓고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당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반드시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356)

 

<부가설명>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우주적 선포이다.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아니 우리가 허물진 존재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한한 용서와 사랑이 있다. 한없는 자비가 있다. 이런 자비를 통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은 그 생명의 성질인 사랑과 자비가 나타나는 일에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얻는 생명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이런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정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최고의 특질은 온전한 이해이다(고전13:12). 그리고 사랑이 이루는 가장 보편적인 성질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를 살리려고 나타났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우리 형제들을 살리려고 해야 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절정인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예수 안에서 살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구적인 보증이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금요일 (11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화목이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죄인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무엇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범죄자를 정당하게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령으로부터 죄인의 심령에 흘러내리는 자비와 사랑과 의의 통로가 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6)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내려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담당하셨다. 그분은 인간의 도피성이 되셨다. 비록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안전한 도피성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비록 죽을 운명에 처하였으나 생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74년 2월 24일자)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증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품성은 우리로 하여금 힘든 시기를 견디어 나가도록 어떻게 힘을 줍니까?

십자가에서 당하신 주님의 고통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한없는 사랑의 모습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영생과 영원한 나라를 얻게 되었다. 이것을 기억하면 잠시 받는 고통을 이기는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죄를 묵인하지 않으시고 그것에 대해 진노하십니까?

죄는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창조를 파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으시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구원에 대한 성경의 모든 표현들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증거한다. 하루하루의 삶에 이 사랑이 나의 생명이 성질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요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예증들을 사용하였다. '구속'은 그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회복시켜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늘 법정에서 무죄로 선언된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하노라!"고 외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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