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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긍휼이 많으신 구주(8/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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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7.30 05:03 조회수 5,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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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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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연구범위: 요 1:14, 3장, 4장, 9:1-7, 엡 4:32, 요일 2:12.

 

중심 사상: 예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셨다. 우리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에, 그분의 모본에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자유의 여상’ 맨 아랫부분에는 에마 라자러스(Emma Lazarus)가 지은 ‘새로운 거상(巨像)’이라는 유명한 시가 새겨져 있다. “너의 피곤함과 너의 가난함, 쌓여있는 골칫거리와 자유롭게 숨쉬고자 하는 열망, 그 모든 것을 나에게 다오.” 이 시구(詩句)는 예수님의 사역을 상기시켜 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봉사하셨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성별, 혹은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충만한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속(贖)하시기 위해 친히 형벌을 받으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좀 더 살펴볼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때에 지침이 될 만한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핵심본문: 마 9:36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께서 나타내신 ‘긍휼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운다.

느끼기: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긍휼의 마음 갖기를 열망한다.

행하기: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의 긍휼을 나타내고 있는지 돌아본다.

 

< 교과 개요 >

I. 긍휼의 높이와 깊이(눅 11:1-13)

A. 만약 어떤 사람이, “교우님들이 매우 ‘동정적’이에요”라고 말했다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동정의 마음은 단순히 느낌일 뿐인가, 아니면 행동해야 하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긍휼의 마음을 가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II. 개인적인 접촉(막 1:22, 11:18, 12:37)

A. 긍휼의 마음과 ‘개인적인 접촉’은 어떻게 관계 되는가?

B. 엘렌 G. 화잇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보다 오늘날 조금도 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교회증언, 4권, 234)고 했는데,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개인적인 접촉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긍휼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는가?

 

III. 긍휼의 구성 요소(마 11:28-29)

A. 용서는 왜 긍휼의 마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인가?

 

요점: 긍휼이 많으신 구주 예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으나 죄인은 사랑하셨다. 그분께서 개인 혹은 군중을 섬기신 방법을 오늘날 우리는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

 

일요일(8월 3일) 무리에게 다가가심(마 4:25)

 

1. 마태복음 4:25과 누가복음 6:17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이 두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었는지를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

마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눅6: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답: 1) 다양한 목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2) 여러 지방의 먼 거리에서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예수님 당시에는 지하철이나 기차나 버스가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는 이도 없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그 당시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느리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었다.

 

2. 다음 구절들은 군중이 예수께로 온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막 5:25-29, 요 6:15, 12:9)

막5:25-29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답: 어떤 이들은 병 낫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그분을 찾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기 위해 호기심 때문에 찾아 왔다.

 

군중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매우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원했다. 그들은 영적 양식에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이나 친구 혹은 가족의 병을 치유하기 원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분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약속된 메시야이신지 알고자 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분께로 왔다. 한번은 군중이 너무 많아서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서 그들을 가르치셔야만 했다(마 13:2). 군중이 점점 더 늘어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라고 말하였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좇음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그곳에서 필요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는데,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사람들은 고침 받기를 갈망하고 예수의 말씀듣기에 열중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좇아 모여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마음이 끌렸는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모든 축복의 원천이 되는 듯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리스도의 주위에 모여들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중한 건강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저희의 구주로 받아 들였다”(시대의 소망, 359).

 

<부가설명>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이 많았고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결하였다. 예수님은 그런 실력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를 위하여 그분을 따랐고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가장 효과적으로 공급하셨다. 우리가 그처럼 실력이 있으면 군중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능력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실력이 없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며 교인들이 그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재림교회가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면서 실력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데는 크게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지방의 개교회도 정말 연합 합심하여 그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주의 재림을 촉진하는 능력이 될 것인데.

 

교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섞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그들 각자의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셨다.

 

월요일(8월 4일) 개인적인 접촉(요 9:1-7)

 

사람들은 예수님께 매료되었다. 마가는 그들이 “즐겁게 듣더라”(막 12:37)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분의 “교훈에 놀랐”다(막 1:22, 막 11:18). 예수께서는 종종 큰 무리를 위해 말씀하시고 봉사하였으나, 그것은 그분의 사역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1. 요한복음 3장과 4장, 그리고 9:1-9에서 한 가지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은 우리가 행하는 사역에 관해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까?

요한 3장은 니고데모를 만나서 대화하신 장면이고

요한 4장은 사마리아 여자를 수가 우물가에서 만나서 전도하신 사실이고,

요한 9장은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 고친 사건이다.

요9:1-9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답: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 개인적으로 접촉하셨고,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도 개인적으로 만나셨다. 그분께서는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과 만나셨을 때에 그 사람의 개인적인 필요를 채워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열쇠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셨다는 데 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눅 8:1).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오래지 않아서 그분의 기별이 당시에 알려진 온 세상에 퍼졌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했던 유일한 이유는, 주님의 손길이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며, 그분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다른 이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사람들과 섞이시는 것을 보아왔다. 그들은 그분께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자들(마 9:36)에게 어떻게 위안과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지를 보아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오늘날과 같이 스트레스가 많고 피곤한 시대를 살면서 위로와 평안을 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름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따로 떨어져 계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가정에 들어가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경솔한 자를 깨우치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면 우리도 그분이 하신 대로 해야 한다. 우리도 그분께서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구호봉사, 60).

 

<부가설명> 전도의 제일 원리는 접촉이다. 즉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며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수한 사람들과 접촉하셨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을 증거하신 사례를 보면 그들의 필요를 유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우물곁에서 물을 길러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 공동 관심사를 조성하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셨다. 상대방의 관심사를 복음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도 사람을 만나면서 그의 관심사에서 복음으로 연결할 내용을 신속히 찾아서 예수님처럼 복음을 듣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큰 무리를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오늘날은 이러한 개인적 접촉이 더욱 절실히 필요 되는 시대이다.

 

화요일(8월 5일) 용서(마 18:21-22)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의 동기는 긍휼에 있었다. 복음서 기자들이 그분의 긍휼에 대해 얼마나 자주 언급했는지 주목해 보라. 때때로 그분은 강하게 죄를 지적하시고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셨으나, 언제나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긍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은 용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종 용서를 가르치시고 또한 보여주셨다.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있어서 용서가 그렇게 힘 있게 강조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 다음 성경절들은 용서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마 18:21-22, 눅 23:34, 요 8:1-11, 엡 4:32, 요일 2:12).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요8:1-1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답: 예수께서 우리에게 용서라는 값없는 은혜의 선물을 주셨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야 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예수께서는 당신의 은혜를 큰 빚을 탕감 받는 것에 비유하셨다. 당신이 만약 누군가에게 10억원을 빚지고 있는데 그 빚이 탕감되었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빚이 탕감된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갚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용서받은 자는 남을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께서는 거듭 강조하셨다.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좋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 감사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마 18:21-34). 이것은 마리아와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이다(눅 7:36-50).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눅 11:4)라는 구절이 나온다.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용서가 왜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하고, 남을 용서하는 일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를 상하게 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게 된다면 세상의 정치 및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달라질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근거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은 여부를 증거하게 된다”(실물교훈, 251).

 

<부가설명>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기인한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만하신 분이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셨다. 십자가에서까지 그를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기도하셨다.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동기를 읽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기초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도록 예수님 안에서 연습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몸소 용서의 모본을 보여주셨다. 우리도 남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자.

 

수요일(8월 6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요 1:14)

 

1. 요한복음 1:14에는 어떤 놀라운 개념이 제시되어 있습니까? 이 개념은 하나님의 품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자신의 답을 적으면서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답: 여기에 성육신의 놀라운 진리가 소개되어 있다.

 

1700년대와 1800년대의 과학 혁명으로부터 하나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신론(理神論)인데, 이 이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고 가르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마치 시계처럼, 태엽을 감은 후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법칙들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18살까지 길러준 다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 됐다. 아들아, 너는 이제 독립이다. 나를 찾지 말고 너 스스로 잘 살아라. 행운을 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의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4에 묘사된 하나님이시다.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스케노오(skenoo)이다. 요한복음 1:14에서 스케노오는 ‘천막을 치다’ 혹은 ‘텐트 안에 살다’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펴셨다.’ 그분은 사람들 가운데 사시고 일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관계를 맺으셨다.

마태는, 처녀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을 것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다. 그는 그 이름을 예수님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마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속물로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또한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임마누엘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 중 하나인 임마누엘, 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당신의 신-인(神人)이심을 반영하여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하나님을 예증하였다(마 1:23). 그분의 이름 예수는 그분이 갖고 계신 구원의 사명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59-60)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걸음을 다 아시며,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신다. 그렇게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최대의 사랑을 쏟으신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우리의 하나님이 자기를 희생하시면서까지 관심을 두시고 우리가 최선의 생명, 곧 영생의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임마누엘이시다.

 

교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육신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시다.

목요일(8월 7일) 비유로 말씀하심(눅 15:8-10)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는지를 아셨다. 그분의 말씀은 그러한 차원에서 주어졌다. 예수께서는 심오한 철학적․신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말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천연계와 집안의 단순한 물건들을 당신의 가르침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동전(눅 15:8-10), 씨 뿌리는 농부(막 4:26-29), 누룩과 가루(마 13:33), 양(마 18:12-14), 무화과나무(막 13:28-32) 등 그 외에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1. 위에 열거된 비유들 중 몇 개만 선택하여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각각의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신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예증들이 매우 훌륭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예수께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 거니신다면 동일한 기별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어떤 예증들을 사용하셨을까요?

눅15:8-10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막4:26-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막13:28-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답: 예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천국의 속성에 대해 알리고자 하셨다.

 

이 비유들을 읽을 때에 아주 특별한 사실을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예증의 대부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2.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분의 기별과 같이 시대를 초월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러한 특별한 예증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답: 예수께서는 청중이 익히 알고 있는 사물들을 통해 천국에 관한 진리를 기억하도록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천국이 무엇과 같은지를 묘사하기 위해 몇 가지 짧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 한 알’(마 13:31), ‘누룩’(33절), ‘밭에 감추인 보화’(44절),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45절), ‘그물’(47절),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내어오는 집주인’(52절), ‘포도원 품꾼을 얻기 위해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마 20:1),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마 22:2)과 같다고 하셨다..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비유로 가르치는 일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었고 호평을 받고 관심을 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교수 방법을 사용하실 수는 없으셨다.…

비유로 가르치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전해야 할 진리를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경험과 천연계의 장면들과 연결시킴으로 그들의 주목을 끄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回想)하게 되었다”(실물교훈, 20-21).

 

<부가설명> 비유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옆에 이제 가르치려는 사실을 갖다놓음으로 서로 비교하여 이미 알고 있는데서 새로운 것을 쉽게 깨닫도록 하는 교육방법이다. 비유라고 번역된 헬라말은 “파라볼레”인데 “옆에 놓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익숙한 사물들 옆에 천국을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물을 볼 때 천국을 연상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교훈 덕택에 지금도 우리는 천연계와 우리 주위에 있는 허다한 사물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교훈을 되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쉬운 말과 쉬운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이 사실은 긍휼이 많으신 그분의 품성을 잘 나타내 준다.

 

금요일(8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시대의 소망, 제86장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818-828).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개인 지도는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지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훈련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접촉과 교제를 통하여 가르치셨다. 그분께서는 오직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두고도 당신의 가장 귀한 교훈을 베푸시는 일이 아주 많았다. 예수께서는 당시 존경받던 랍비와 감람산에서 심야 토론을 하실 때나, 수가의 우물가에서 만난 천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진리의 감화를 위해 열려 있음을 보시고 입을 열어 값진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라 끊임없이 몰려온 사람들도 그리스도께는 무분별한 군중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 직접 대화하듯 말씀하시고 각 사람의 진심에 호소하셨다. 예수님은 청중의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신 그 진리가 그들의 심령에 감응을 일으켜서 얼굴빛이 밝아지고 감동의 빛이 떠오름을 보시게 되면 공명하는 즐거움으로 깊은 감동을 받곤 하셨다”(교육, 23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개인적 접촉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한 감화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까? 우리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를 개인적 차원에서 더 잘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각 사람이 대답할 문제이다. 교인 개개인이 이웃과 좋은 친교관계를 계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고 용서하고 대하는 삶을 연습하기를 바란다.

 

요약: 긍휼이 많으신 구주 예수께서는 죄를 미워하셨으나 죄인은 사랑하셨다. 그분께서 일대일 혹은 집단으로 사람들과 접촉하시면서 그들을 섬기신 방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한 모본이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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