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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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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5.08 12:25 조회수 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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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은혜
5월 1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35분)

도입)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살면 그것은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살고 인본주의로 사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품에 안겨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의지해서 살면, 그때로부터는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돌보아 주심을  통해서 살고 하 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죽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 흥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성하는 것도, 쇠하는 것도 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 이러므로 우리의 일을 주님의 손에 완전히 맡기자.

전도자 부스 터커가 시카코에서 전도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의복이 남루한 한 노동자가 "목사님도 내처지에 있다면 그런 설교는 못할 것입니다. 내 아내는 죽고 아이들은 울고 보챕니다. "라고 말했다. 얼마 후 교통사고로 터커의 부인이 죽고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 울며 보채는데 구세군 바라크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터커 목사는 "며칠 전 상처하고 아이들이 울며 보채던 형제가 있으면 들으시오. 내가 지금 당신 처지에 처하게 됐습니다. 상하고 찢어진 슬픈 내 마음에 주님이 한 노래를 심어 주었습니다." 슬픔이 더할수록 주님의 위로도 더하고 고난과 시련이 거듭될수록 주님의 평안과 은혜가 더한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보시고 은혜를 주신다. 십자가는 자식을 잃은 하나님의 애통하신 사랑이며 은혜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해야 참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기억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연구범위: 출 25:8, 사 53장, 롬 5:18-19, 고후 3:16-18, 엡 2:4-10, 딛 2:11-14.

중심 사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계획을 가르치시기 위해 사용하신 상징들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속죄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데 있어서 대속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안식일 오후
비교종교에 관한 어떤 회의가 영국에서 개최되고 있었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전문가들은 그리스도교만이 갖는 독특한 교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에서 독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성육신? 다른 종교에서도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야기를 한다. 부활? 역시 다른 종교에서도 죽은 자가 되살아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토론이 계속되던 중, 저명한 그리스도인 작가 루이스(C. S. Lewis)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루이스는, '무엇을 그렇게 진지하게 토론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은 세계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고 했다. 루이스는 주저 않고, '아, 그거야 쉽죠. 은혜입니다'라고 대답했다."(필립 얀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1997년, 45)
지난주에 우리는 죄의 무서운 현상과 "불법의 비밀"(살후 2:7)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해결책이 제공되었음을 보았다. 하나님의 개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번 주에 공부할 것이다.


일요일(5월 10일)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심(창 22:8)

도입)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되어 있다. 곧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여러 방향에서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으며(죄), 은혜를 떠난 자들에게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심판), 다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은 무엇이며(용서), 은혜의 내용은 무엇이며(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인간은 은혜를 어떻게 자신들의 것으로 할 수 있으며(믿음), 은혜 아래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이 성결을 지켜야 하는 원리는 무엇이며(성화)와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이며(성령) 은혜를 입을 수 없는 자가 은혜를 입었으므로 은혜를 배반하면 안 된다는 것(배은망덕의 경고)과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땅히 은혜에 합당하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내용(성도의 거룩한 삶)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은혜에 대하여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지 못한 이삭은 단지 희생을 드리러 가는 줄로 생각하고, 왜 희생제물을 가져가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이 대답한 예언적인 말은 신약뿐 아니라 구약의 모든 페이지마다 메아리치고 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1. 아브라함의 말은 이삭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까?
답:

2. 구약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다른 구절들은 무엇입니까? 그 구절들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예, 창 3:15, 출 25:8, 사 53장)
답: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중심이시다. 지상성소의 목적은 메시야의 초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참조 히 8, 9장). 그분의 초림 전에 있었던 구속사의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때를 기다리셨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갈 4:4)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오셨다.
“각 시대를 통하여, 매 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한 인류에게 베풀어져 왔다. 사람들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표징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때가 찼을 때에 구원의 경륜이 성취될 때까지 결코 방해되거나 철회되지 않을 치료하는 은혜의 홍수를 세상에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시대의 소망, 37)

교훈: 하나님께서는 정확한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구원의 계획을 성취시키셨다. 모든 것은 예언대로 정확히 성취되었다.


부가적용)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어떤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만 이삭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처음 나오고, 우물 이야기나, 쌍둥이 아들 낳고 살다가 두 아들을 축복하고 끝나는 게 기록된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에 처음 등장한다. 그가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그는 어린 양이 없는 것을 알고 이상하게 여겨 아버지께 질문을 한다(창세기 22장 7절下).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충실하게 가정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서 그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적잖이 당황했을 법도 한데, 그는 순순히 따르며 제단 위로 나아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신 것과 매우 흡사하다. 어쨌든 우리는 이를 통해 진리 앞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이라는 것은 그 사랑하는 존재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의 순종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혹,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지라도 이삭은 그의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순종이라는 모습은 사랑과 신뢰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의미는 같은 사물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모리아는 “하나님께서 보시다”라는 뜻을 지닌 산이다. 모리아 산의 의미는 “하나님의 관점의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서 산에 오를 때에 그는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며 모리아 산에 올랐을 때에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어린 양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관점을 깨닫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하는 사람, 믿음이 자라는 사람은 좁은 틈 갇힌 어린 아이의 관점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뀐 사람이다.


월요일(5월 11일)
은혜의 기적에 대한 상징(사 53:7)


도입)

갈바리 언덕의 거룩한 땅에 서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거의 이천년 동안 인류의 양심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한 장면에로 끌려 왔는지 또한 왜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모든 것의 핵심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지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그의 죽음에 의해 지상을 정결케 하는 구원의 능력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고 또한 공공연히 확언하셨다. 그 능력은 주로 두 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참 성격을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던 죄악들이 결코 낯설거나 전혀 변태적인 것이 아니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야바]의 이기주의나 [빌라도]의 두려움, 그리고 헤롯의 불순함, 군중들의 분노와 원한, 이러한 죄들이 죄 없으신 분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고의적으로 그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평범한 죄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동참한 자들이다. 우리가 갈보리 언덕에 설 때에 우리의 마음과 양심은 그곳에 보이는 광경이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행해진 것이며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죄들이 언제나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위대한 기독교적 사상을 인용하여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하시며](계13:8)오늘날에는 죽임을 당하고 계신다. [파스칼]은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고통 중에 게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오, 깨뜨려 주옵소서 나의 굳은 마음을! 나의 연약한 자기애와 교만의 죄가 그를 죽이는 [빌라도]와 [유다]로다. 우리 주 예수님,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진정한 성격과 진상을 드러내 준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회개를 낳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 능력의 큰 비밀의 하나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준다. 진노하신 하나님을 달래거나 그의 마음을 바꾸어 우리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은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도록 설득 당해야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


세 살짜리 아이에게 전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신호등이 무엇이며,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물리학자가 초등 교육만 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의사소통에서 이보다 더 큰 장벽에 직면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나타난 거룩한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 충분히 묘사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속의 계획에 관한 합당한 개념을 갖기를 바라셨다. 그분께서는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몇 가지 상징들을 사용하여 그분의 은혜의 신비를 깨닫게 하고자 하셨다. 이 상징들 중 어떤 것도 다른 개념과 관계없이 별개로 사용될 수 없다.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취함으로써 경이와 무한한 감사를 느끼게 된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심오한 은혜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자 어떤 특별한 상징을 사용하셨습니까?(사 53:7, 요 1:29)
답:

2. 속죄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 또 어떤 상징이 사용되었습니까?(마 20:28, 행 20:28, 고전 6:20)
답:
우리가 어떤 특정한 상징을 사용할 때에 다른 '상징들'과 별개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속죄에 관한 모든 상징들을 종합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상징하고자 한 본래의 의미를 충만히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다는 속전(ransom)의 개념은 참으로 강력한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셨다. … 이 은유를 통해 배울 교훈은 (a) 구원의 대가는 비싼 것이며, (b) 우리는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구속이란 소유권의 이전을 의미한다."(에드워드 W. H. 비크, 확신을 드립니다, 퍼시픽 출판사, 1968년, 33)

교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상징들을 사용하셨는데, 이 중에서도 우리는 속전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부가적용)

생명의 속전을 내는 기준이 있다. 다른 모든 것은 가난한자와 부자와 차이를 두셨지만 이 생명의 속전만은 하나님께서 부자라고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생명의 속전이기 때문이다. 생명만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다른 모든 제사나 규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를 두시고 힘이 안 되면 그것을 감해 주셨지만 생명을 속하는 속전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반드시 반 세겔을 내게 하셨다. 생명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부자의 생명이나 가난한 자의 생명이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부자라 해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 해서 덜 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구원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부자라 해서 넘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미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이다. 만약 너무 가난해서 반 세겔을 낼 수 없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이 구약의 생명의 속전은 그림자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신약에 가서 보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 구원은 누가 도와 줄 수 없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도와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반 세겔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화요일(5월 12일)
갈바리에서 일어난 일(사 53:4-5)

도입)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을 한다. 거의 2000년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 왔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고린도전서 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한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다.


속죄의 교리에 관하여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주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가지 개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나는 속죄에 대한 객관적인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견해이다. 첫 번째 개념은 역사적인 사건, 즉 우리에게 구원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예루살렘 밖의 한 언덕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개념은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자기희생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강조점을 둔다. 즉 우리가 그 위대한 사랑을 묵상할 때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는 다 사실일 뿐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에 함께 이해해야 한다.

1. 죄인인 우리가 당했어야 할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신 것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설명합니까?(사 53:4-5, 롬 5:18-19)
답: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면하게 되고 그분께서 제공하신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주로 대속(代贖)의 개념과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싫어한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든가 이러한 법적 용어의 사용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합당한 방법으로 죄 문제를 다루신 것이 분명하다. 그분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묵과하실 수 없으며,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버리실 수 없으시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므로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라는 대가를 스스로 지불해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꺼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이끌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개인적인 부분에 해당한다.(요 12:32, 롬 5:1)

교훈: 갈바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구속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응이다


부가적용)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 대신 전가 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댓가를 다시 치루어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40장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충분하다. 시편 40:1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라.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려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들을 구원하여 내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 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이다. 이 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수요일(5월 13일)
마음의 변화(고후 3:16-18)

도입)

인류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다. [벧전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고통의 의미를 물어도 누구도 속 시원하게 그 의미를 다 해결하거나 대답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고통 속에서 나와 더불어 아파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가운데 많은 고백은 “나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무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생의 쓴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거든 주님의 십자가로 데려와서 죄인들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아무리 비참한 인생도 복 된 인생으로 변하게 된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정결케 된다. 쓴맛을 내는 인생이 변해서 단맛을 내는 인생이 된다.

갈바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긍휼과 은혜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을 바라봄으로 변화되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시고, 그 수치스런 죽음 후에도 미래를 가지신 분임을 알았다(눅 23:39-43). 로마 백부장도 그분께 아무 죄가 없음을 깨달았다.(47절)

1. 예수님과 그분의 대속적 사역을 묵상하는 일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줍니까?(고후 3:16-18, 히 12:2-3)
답:
“회개하는 죄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에 그 눈을 고정시키도록 하라.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를 받게 된다. 우리의 공포는 기쁨으로, 의심은 소망으로 변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오른다. 돌 같은 마음이 깨어진다. 사랑의 조수가 심령에 밀려온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임재하심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십자가에서 고통의 죽음을 당하신 광경을 깨닫게 될 때 자아는 더 이상 인정받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냉담함과 무기력과 이기심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439-440)

2.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들은 무엇입니까?
답:
신학자들은 속죄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떤 이론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전 1:20-2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은 토론의 주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고 경험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미 우리는 충분한 빛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교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역사는 토론의 주제이기보다 깊이 있는 묵상을 통하여 변화를 경험해야 할 체험의 문제이다.


부가적용)

현대인들은 육신의 질병으로도 고생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다. 때로는 마음의 병이 육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우울증이나 공황증은 마음의 병이지만 육신도 병들게 한다. 악령에게 사로잡히면 정신 뿐 아니라 몸에도 이상이 생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에 앞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음의 건강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신적인 환경이 너무나 나쁘다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이 죄 아닌 것이 거의 없다. 병든 심령을 고치려면 치료자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 만병의 대 의사이신 하나님께 나와서 치료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욕망이 좌절된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병을 치료해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의 질병을 담당하시기 위해 채찍질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 4:23-25] 이하에 이 같이 증언한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온 병자를 단 한 사람도 물리치신 적이 없이 다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현대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도 말씀 한 마디로 다 고쳐주셨다.


목요일(5월 14일)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엡 2:4-10)


도입)

[행 3:16]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했다. 주님은 믿음 있는 것을 보시고 치료해 주셨다. 의심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 내 병을 담당하셨음을 믿고 나를 고쳐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확신이 오지만 어떤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확신이 사라져버리는 이유는 왜 그런가? 환자의 믿음이 준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믿으려고 힘도 써야 하나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순종하며 성령의 은혜 속에 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칫하면 곁길로 벗어나기 쉽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초점을 성경에 두거나 교회, 전통, 혹은 교리에 둔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긴 하지만, 만약 그것들로 인해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시다.
종종 재림교인들은 소위 '진리'에 믿음의 초점을 둔다. 그것은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교리의 목록에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진리에서 그 중심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 한 분을 믿는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지금은 하늘에서 우리의 중보자로 봉사하시며, 머지않아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이 사실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중심이 되심을 어떻게 가르쳐주고 있습니까?(엡 2:4-10, 딛 2:11-14)
답:
에베소서 2:4-10은 대단히 귀중한 구절이다. 그 구절에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이 거듭 강조되어 있다. 이 은혜는 “지극히 풍성한” 것(7절)으로 묘사되었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4절)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은혜는 무료 즉 공짜이다. 그것을 노력으로 획득할 수 없다. 만약 우리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선행에 대해 자랑할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10절)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행도 또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2. 다음 구절들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중심이심을 얼마나 힘 있게 묘사하였습니까?(행 17:28, 갈 2:16-20)
답:

교훈: 우리가 믿는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진리를 체계화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시는 그분을 더 잘 알기 위해 힘쓰자.


부가적용)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지은 리스트로벨이라고 하는 예일대 출신의 학자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가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전혀 믿을 거 같지 않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가지를 긁던 그녀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변화시켰던 원인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리스트로벨은 학자였기 때문에 13명의 최고의 성경신학자를 찾아가 여러 가지 의문을 던졌고 주도면밀하게 연구하시기 시작했다. 결국 그도 아내처럼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독일로 신학공부를 위해 유학 간 청년이 신학수업 시간 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단다. 독일인 한 교수가 성경을 높이 들면서 껍데기 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한국인 청년이 손을 들었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 모두가 이상하다는 듯이 자기를 쳐다보더란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소설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고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필수품이 성경이다.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지명이나 위치가 고고학을 연구하다보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한다. 성경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고 예수님을 신비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조작물이라면 오늘 우리가 주제로 다룰 십자가 사건을 배제시켰을 것이다.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런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어떻게 메시야가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표현해 주고 있는 4개의 복음서에서 십자가 사건을 1/4이나 다루고 있다. 만약에 성경이 조작된 것이어서 이 책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했다면 최대한 좋은 부분만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메시야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라던지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 가족들에게 배척당하시는 모습, 믿었던 제자가 배신당하는 장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모든 정황들을 기록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성경은 있는 그대로 기록해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이 반증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의심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십자가 현장으로 초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금요일(5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관한 좋은 책을 말하라고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엘렌 G. 화잇의 시대의 소망을 추천한다. 제78장과 79장(741-768)은 특히 이번 주 교과와 관계가 있다. 다음 진술을 주목해 보라. “예수님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분의 십자가는 그들 가운데 세워졌다. 그처럼 그분의 십자가는 죄악 중에 놓인 이 세상의 한 복판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참회한 강도에게 하신 용서의 말씀은 지구의 가장 먼 변경에까지 비취게 될 횃불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75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셨다는 개념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 묘사된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대속의 죽음은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이며, 우리의 구속을 위해 얼마나 값비싼 대가가 치러져야 했는지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2.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로 충만한 삶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이 거룩한 은혜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신학자들은 속죄에 관한 여러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그 이론들은 대부분 불완전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친 것들이다. 그것들은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한쪽 면을 찍은 사진과 같다. 그것들은 모두 산맥의 한 부분을 보여주지만 산맥의 완전한 모습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은혜의 기적은 우리가 지적으로 동의하는 어떤 표현방식에 한정되지 말아야 한다. 은혜는 우리 믿음의 기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잃어버린바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신 그분과 더불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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