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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십자가에서의 속죄(1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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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1.26 05:51 조회수 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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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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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연구범위: 마 26:37-38, 27:46, 막 14:33-34, 눅 22:40-44, 요19:28-30.

 

중심 사상: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겟세마네와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분의 경험을 살펴본다.

 

안식일 오후

어떤 사람이 패스트푸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비만과 그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일주일에 네 번씩 패스트푸드(fast-food)를 먹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음식점 탓으로 돌렸다!

우리도 그런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놓고 남을 비난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명을 수용하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아름다운 속죄의 신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진실로 예수님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우리가 책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죄에 대한 형벌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그 형벌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형벌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죄의 형벌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핵심본문: 골 1:13-14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는 사단의 발밑에 있지 않고 주님의 품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분리되시면서 느끼셨던 번민을 느껴본다.

행하기: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패배시키셨다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교과 개요

I. 겟세마네에서의 번민과 복종(마 26:37-38, 막 14:33-34)

A.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그리스도의 번민이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극도의 슬픔 가운데 압도되었던 적이 있는가? 이 슬픔을 경험하면서 홀로 있다고 느꼈는가? 그러한 경험은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번민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B.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생각은 영혼을 두려움으로 채운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와 십자가와 무덤에 계신 동안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무엇을 느끼셨을지 탐구해 보라.

 

II.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함(요 19:28-30)

A.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에 의지하셨다. 나는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구원에 의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B. 십자가는 가혹하고 고통스러우며 치욕적인 사형 도구였다. 우리는 십자가를 신성한 것으로만 묘사해버리기가 쉬운데, 실제로 어떻게 그 일을 행하고 있는가? 십자가를 신성화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희생을 바로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요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극진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해 그 사랑을 그분께 돌려드리자.

 

일요일(11월 30일) 번민: 겟세마네로 향하심(마 26:37-38)

 

1. 마태복음 26:37-38과 마가복음 14:33-34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무엇을 경험하셨습니까?

마26:37,38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막14:33,3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답: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힘드는 경험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다음 몇 시간 안에 어떤 일을 당할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 경험은 극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이었다. 그분은 겟세마네에 이르시자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으셔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야기하셨다(마 26:37-38, 막 14:33-34).

그분께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막 14:33). '심히 놀라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크탐베오(ekthambeo)는 당황하고 놀라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는, 감정이 격앙된 상태로서, 종종 두려움과 공포와 떨림이 수반된다. 마태는 비슷한 의미의 루페오(lupeo)라는 동사를 썼는데 번민과 염려로 격해진 감정을 가리킨다(마 26:38).

마가복음 14:33에 두 번째로 나오는 '슬퍼하다'(헬, 아데모네오)라는 동사는 번민이나 슬픔, 혹은 공포 그 이상을 표현한 말이다. 예수님의 정서적 및 육체적 상태는 깊은 슬픔의 상태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분께서 일생 동안 늘 지니셨던 평안은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그 대신 두려움과 떨림과 번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가는 예수께서 겟세마네에 이르셨을 때 그 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정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와 같은 신체적 및 정서적 상태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이유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분께서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세상 죄를 담당하신 결과라는 사실을 신약의 전체 내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막 14:34)고 하신 것은 그분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신 말씀이다. '내 마음'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분의 경험을 가리키는 말로서 '나 자신'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여기서 '심히 고민하다'라는 말은 페리루포스(perilupos)인데, 측량할 수 없는 강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가리킨다. 이 극심한 슬픔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둘째 사망의 경계에까지 이르셨다.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가 겪었어야 할 고통을 겪기 시작하신 것이다.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무서운 슬픔

“문득 겟세마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는 이상하게도 침묵에 잠기셨다. 그분께서는 때때로 기도와 명상을 하시기 위하여 이곳에 오셨으나 당신의 마지막 고민의 이 밤처럼 이렇게 슬픔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오신 때는 일찍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의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서 행하셨다. …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붙드시는 임재의 빛을 차단당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분은 범죄자들과 같이 헤아림을 받으셨다. 타락한 인류의 죄짐을 당신이 지셔야만 하였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분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지셔야만 하였다. 죄가 그분에게 매우 무섭게 보이는 그만큼 그분이 지셔야 할 죄악의 무게는 컸으며, 그분은 이것이 당신을 아버지의 사랑에서 영원히 쫓아내지는 않을까 염려하도록 유혹받았다.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달으시고 예수께서는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685)

 

<부가설명>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은 십자가만큼 무겁고 큰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돌이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시는 것이다. 이 죽음 앞에 우리 주님은 전율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죽는다고 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이 진짜 상태를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잘 아시는 분이 바로 그 진짜 죽음을 당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 죽음은 존재와 생명을 완전히 상실하는 죽음이다. 그러고도 부활이 이루어질 것인가? 예수께서는 자기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제 막상 둘째 사망 앞에 섰을 때 그는 두려우셨다.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부활로 일어난 생명이 어디서 온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이 잔을 마셔야 하는지 고민의 기도를 하셨다.

 

교훈: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시자 극심한 번민과 슬픔으로 전율하셨다. 그분께서는 인류가 겪어야 할 둘째 사망을 경험하실 것이었다.

월요일(12월 1일) 잔: 자원하여 복종하심(마 26:39-42)

 

1.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마 26:39-40, 막 14:35-36, 눅 22:40-44). 예수께서는 이제 곧 직면하게 될 일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마26:39,40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막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눅22:40-44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답: 예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의 잔이 이른 것을 느끼셨다. 이 잔이 마시기 어렵지만 아버지 뜻대로 하시기를 구하였다.

예수께서 동산에 계실 때 사용하신 잔(盞)이라는 상징적 언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내면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 성경에서 잔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시 16:5, 23:5)이나, 우리에게 제공된 구원(시 116:13)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잔은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시 75:8)을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 잔에는 그분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가리키는 진노의 포도주가 담겨 있다(렘 25:15-16). 예수께서 할 수 있으면 그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마 26:39, 막 14:36)고 아버지께 요청하셨을 때, 그 잔은 심판의 잔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로부터,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외로움을 경험하셨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지지를 바라셨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마시기를 홀로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하나님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한 다른 길이 없다"는 응답을 확인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원하여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2. 폭도들이 그분을 사로잡기 위해 왔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요 18:11)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당하기로 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답: 예수께서 피하시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잔을 마시는 것이 인류의 구원이 되는 것을 깊이 헤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이 지상에 오셨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으시지만,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당하실 수 있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셨다.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심

“차가운 밤이슬이 예수님의 극도로 지친 몸 위에 내렸으나 그분은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의 창백한 입술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고통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그분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덧붙이셨다.”(시대의 소망, 687)

 

<부가설명>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 흐르는 기도의 탄원은 그분이 사람으로 사시는 모습을 보게 한다. 당신의 신적 능력은 다 내려놓으시고 사람 아담과 그의 후손의 사망을 짊어지셔야 하는 부담이 얼마나 고통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울러 더 힘 드는 일은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 능력을 결코 사용하지 않고 이제 죄가 되셔야 한다. 사망이 되셔야 한다. 사단은 계속해서 그의 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이 구질구질한 인간들을 위하여 죽으려는 그 시도를 던져버리고 하늘로 돌아가라고 부치고 있다. 그분은 자기를 비워 세상에 오셨는데, 지금 여기서 그 비운 자기를 도로 찾으라고 충동받고 있는 것이다. “굳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네 자신도 하나님이지 않는가. 그러니까 아버지와 상관없이 네 자신의 신성으로 이 잔을 던져버리라.”고 사단은 속삭이고 있다. 인간이 받는 시험 중에 자아를 찾아 독립적으로 서라는 시험이 가장 크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대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독립하여 생존하라고 속삭이는 이 유혹을 견디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렇거든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신의 하나님적 위치와 능력으로 이 잔을 던져버리라는 그 유혹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그러나 그분은 아버지 뜻대로 하라고 부탁하고 기도를 끝내셨다. 우리도 그렇게 부탁하고 죽어야 한다. 그러면 살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속절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자원하여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하셨다. 그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자.

 

화요일(12월 2일) 어둠: 원수의 손에 넘겨지심(눅 11:20-21)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계셨으며, 사건들은 십자가로 향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거센 악의 세력에 직면하고 계셨다. 사단의 세력과의 싸움은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받으시고 “죄인의 손에 팔리”셨다(마 26:45). 여기서 '팔리다'(헬, 파라디도미)라는 동사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다. 유다가 그분을 배반하였으나, 하나님의 계획은 불가사의하게 성취되고 있었다.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을 죽음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롬 4:25).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과 에베소서 5:2에 언급되어 있듯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시고 자원하여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마태복음 26:45-46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셨다. 이것은 소유권이 다른 이에게 넘어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미 하나님의 빛이 그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분은 어둠의 세력에 넘겨지고 있었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2년 8월 1일자). 이제 그분은 완전히 죄인들의 손에 넘겨지실 것이었다. 그분께는 이 시간이 “어두움의 권세”(눅 22:53)가 지배하는 시간이요, 아버지의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시간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어둠의 왕국으로 들어가고 계셨으나, 거기서 단번에 악을 물리치실 것이었다.

 

1. 예수께서는 어두움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눅 11:20-22)

눅11:20-22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답: 예수님은 사단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사단을 이기고 그 손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것임을 표현하신 말씀이다.

누가는 예수께서 어둠이 지배하는 때를 맞이하고 계셨다고 말했으며(눅 22:53),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고 덧붙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흑암의 영역 안으로 가셔서 우리가 겪어야 했던 것을 겪으셨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사단의 권세(행 26:18)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 2:15)

 

어둠의 세력에 넘겨지심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그분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으며, 그분은 흑암의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영혼의 고민 가운데 그분은 차가운 땅 위에 엎디셨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불쾌히 여기심을 깨닫고 계셨다. 그분은 죄인의 입술에서 고난의 잔을 취하셔서 그것을 스스로 마시기로 하시고, 그 대신 사람에게는 축복의 잔을 주시기를 자원하셨다. 사람 위에 떨어졌어야 할 진노는 이제 그리스도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신비한 잔이 그분의 손에서 떨린 곳은 바로 이 곳 겟세마네에서였다.”(증언보감, 1권, 222)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흑암이 뒤덮였다. 이것은 여러 가지 사실을 나타내는 것인데,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흑암의 세력에게 내어준바 된 것을 드러낸다. 빛이신 분이 어둠에게 삼켜진 것이다. 그가 구원해야 할 인류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둠의 세력에게 곤욕을 당하시고 사망이 되므로 인류는 진정 빛으로 나와서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또 어둠은 하나님이 그 아들의 고통을 만물 앞에서 숨기시는 의미도 있다. 창조주가 지금 그 존재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또 어둠은 죄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신성의 신비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빛이신데 이제 어둠에게 넘겨준바 됨으로 둘째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둘째 사망은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이 사망을 이기고 생명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죄 자체가 되셨기 때문에(고후5:21) 이런 사실을 의식할 상태에 있지 않으셨다. 사단은 승리하는 줄 착각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죄가 십자가에 달려 처리되는 줄 사단은 미처 몰랐을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사단의 영원한 죽음이었다(히2:14).

 

교훈: 예수께서는 죄인의 손에 넘겨지심으로 흑암의 세력에게 내어준 바 되셨다. 그분께서 이러한 경험을 겪으신 것은 우리를 흑암에서 건지시기 위함이었다.

 

수요일(12월 3일) 외침: 하나님과 분리되심(마 27:46)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셨다"(엘렌 G. 화잇, 위를 바라봄, 223).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할 수 있다(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94년 3월 26일자). 그 고통은 어떤 고통이었기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부르짖으시게 했는가?

 

1. 예수님의 그 부르짖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마 27:46)

마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답: 예수께서 죄 자체가 되신 심경을 절규하는 외침이다. 그분이 인류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에 생명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다. 이 부르짖음은 참으로 죄가 되는 순간의 부르짖음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는 전에 결코 경험한 적이 없으신 죄의 형벌을 경험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거두어졌기 때문에 두려운 어두움이 그분의 영혼을 휘감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는 그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기 때문이다. …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의 형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큰 슬픔을 가지고 그분을 바라보셨다. 신성의 능력들이 이렇게 분리된 것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24)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을 아들로부터 거두신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의 자리에서 죽으시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아들에게 전해 줄 자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실 때 아버지의 마음에는 원한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죽음을 즐거워하지 않으셨고, 아들과 함께 고통당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당하신 진정한 형벌은 "신성의 능력들이 분리되는 것"이었다. 엘렌 화잇은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신비 속으로 인도하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삼위 하나님이 겪으신 일을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다. '분리되다'라는 동사는 '끊어져 갈라지다'라는 의미가 있다. 유지되어야 할 연합이 찢어진 것이다.

 

아버지와의 무서운 분리를 경험하심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을 가장 많이 반역한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크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최종적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둘째 사망'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분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죄가 야기한 아버지와의 무서운 분리, 곧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번민이었다.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들도 그와 꼭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이생에서 뿐만 아니라 최후의 멸망에 있어서도 그들이 뿌린 것을 거둔다.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이 범한 죄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한다.

그러므로 죄가 크면 클수록 고통도 크다. 죄의 교사자요 조장자인 사단은 가장 많이 고통을 받을 것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503)

 

<부가설명>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죽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은 1천년 후에 악인들이 유황불에서 존재를 상실한 것과 같은 죽음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바로 둘째 사망을 당하신 것이다. 생명 자체이시며 존재 자체이신 분이 그 생명과 존재를 내어놓아야 하는 고통을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다. 온 우주가 놀랐고 온 천연계가 놀랐다. 이제 흑암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골2:15). 사망을 영원히 처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온 우주에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교훈: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영원한 사망을 맛보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와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셨다.

 

목요일(12월 4일) 다 이루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요 19:28-30)

 

1.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겪으신 마지막 경험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요 19:28-30).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분의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까?

요19:28-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답: 예수께서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속죄의 대과업을 완성하고 계셨다.

 

비록 원수 사단은 몇몇 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으나, 그분께서는 중요한 순간에 자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드리셨다.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신뢰하면서 잠드셨음을 시사한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고 하셨다. 이제 적절한 순간이 왔을 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완전한 속죄의 희생이 단번에 바쳐졌으며, 그 희생을 통해 하늘과 땅이 다시 연결되었음을 뜻한다.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져 있던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우주에 완전히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희생을 제공하셨으므로, 이제 십자가를 구원의 유일한 방편으로 바라보는 모든 인간에게 속죄가 주어질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구약의 희생제도는 끝났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는데(마 27:51, 막 15:38), 이는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길이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희생으로 열렸음을 보여준다.

"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승리의 함성이었다. 그분은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사단을 패배시키셨다(히 2:14). 십자가에서 사단과 그의 부하들의 궁극적 파멸이 확정되었다.

이 승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던 때에 분명히 드러났으며 인침을 받았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그 일요일 아침에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성취되었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 “나는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온 우주가 구속의 완성을 기뻐함

“천사들이 구주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기뻐한 것은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저희가 그 때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죄와 사단의 멸망이 영원히 확실해졌다는 것과, 인류의 구속이 보장되었다는 것과 이 우주가 영원히 안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은 갈바리에서 이루신 희생의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셨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내다보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다.”(시대의 소망, 764)

 

<부가설명>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것은 구속의 사업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그분은 승천하셔서 하늘성소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시므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그를 믿는 모든 개인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보혈을 자기에게 적용할 때 주님은 그를 온전히 구워하신다(히7:25). 이제 구원을 위한 다른 제사가 없다. 예수를 믿으면 된다. 다 이루신 것이다. 아멘.

 

교훈: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완전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시고 죄인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셨음을 뜻한다.

 

금요일(12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의 담당자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주님이 지신 죄의 저주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엄청난 힘으로 내려 누를 때에 그분께서 느끼신 그 슬픔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 정도의 시련만을 견딜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더 큰 고통을 느끼시었다. 왜냐하면 인성과 신성이 함께 결합해 있었으며, 잃어버린 세상의 죄로 인하여 야기된 고통을 견딜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견디신 고뇌는 죄의 성질과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실 보복의 성질을 더욱 넓고 깊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더욱 확대된 이해를 갖게 해주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는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 유한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겪으신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위의 인용절은 가르쳐 줍니다. 이 사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이 지불하신 대가가 어떤 것이었음을 말해 줍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에서 어떤 위안을 얻게 됩니까?

* 예수님이 죄 자체가 되셔서 사망 자체를 처리하시는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었다.

 

2. 삼위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경험을 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속죄의 심오한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게 됩니까? 삼위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경험하셨습니까? 안식일 교과토의 시간에 함께 토의해 보십시오.

* 삼위는 영원한 일체이시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위가 인간의 시간으로 한 삼일동안 죽으셨다. 그러나 영원한 신성은 아버지와 성령 안에서 여전히 생명이셨다. 아들로 세상에 오신 신성의 한 위이신 예수님은 이 생명 안에서 여전히 생명이셨다. 신성의 한 위가 죽는 경험은 신성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속히 죄 된 성질과 죄 된 생활 습관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 그 생명으로만 살 수 있도록 기도드린다.

 

요약: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경험을 온전히 맛보셨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죄를 위한 형벌을 갚으시고, 우리 죄를 위해 속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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