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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4.16 20:10 조회수 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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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생명

4월 25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6분)


(도입)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다. 정성이 갸륵해서였는지 하루는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더니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어디어디에 가 있으면 도사가 그리로 지나갈 터인데 그에게 긴말할 것 없이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하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백발노인이 꿈에 일러 준 장소에 서 있자니 과연 바랑을 짊어진 도사가 나타났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짜고짜 말하기를 '그 보물을 나에게 주시오' 했다. 그랬더니 도사는 말없이 바랑을 뒤져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를 꺼내 들고는 '이것 말이요? 그럽시다. 자, 가지시오'하고는 던지다시피 안겨주고 가던 길을 휘적휘적 걸어갔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얻었으니 이제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 그는 서둘러 도사가 가는 길의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행여 처음 먹은 마음이 달라져서 도사가 보물을 돌려 달랄까봐 겁이 나서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보니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 두려워졌다. 혹여 내 보물을 빼앗아 가면 어쩌나 싶었다. 그렇게 한나절을 도망치듯 달려가던 이 사람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뭔가 꼴똘히 생각을 하더니만 급히 발길을 돌려 도사가 사라져 간 쪽으로 달려갔다. 그 날 밤 수소문 끝에 도사가 묵고 있는 여관에 도착해서는 네 활개를 벌리고 자고 있는 도사를 깨웠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도사는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아니, 왜 그러시오? 보물을 가져가고선 왜 또 날 찾아온게요?' 그러자 그 사람은 품에서 다이아몬드를 꺼내 도사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 소용없소. 당신이 도로 가지시오. 그 대신에...' '그 대신에, 뭐요?' '그 대신에 이런 보물을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내어 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당신의 그 부요함을 내게 좀 주시오. 나는 이것보다 그것을 더 갖고 싶소...' 라고 물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산다는 게 뭔가를 새삼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부요한 삶, 풍성한 삶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물질의 풍성함일까? 우리 세대가 불행한 것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지고도 불안해하고 넘치는데도 불만족해 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믿음 안에 살면서 새삼 깨닫는 진리는 '행복이란 현실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생각 속에 있다'는 발견한다. 일찌기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가리켜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사람은 생각함으로 사람이요 또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겠다. 즉 사람은 누구든지 그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고 또 그 '갈대'라는 표현처럼 그 생각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꾸 이리 저리 흔들리며 바뀌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행복은 '생각 속에서 즐기는 것'이다. 행복은 현실 속에 있지 않고 의식 속에 있다는 말이다. 좋은 물건을 받았다고 해서 다 기분이 좋은 건만은 아니다. 받고서 즐거울 수 있지만 또 찜찜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건네 준 선물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썩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도를 깔고 반대급부를 요청하며 건네주는 뇌물로 인해서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해 하기도 하며 사는 것이다. 생각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행, 불행을 경험하기에 생각이라는 것, 의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인생의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풍성한 삶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에 달려있다. 재산이 많고 물질이 풍성하고 소유가 넉넉한데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의식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다는 말이다.


기억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연구범위: 창 2:7, 시 139:13-14, 요 1:1-3, 3장, 10:10, 고후 5:17, 빌 2:1-5.


중심 사상: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육체적 및 영적인 삶을 돌보아야 할 거룩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우리는 하늘에서와 땅에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식일 오후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해 수명이 길다. 소위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오래 사는데, 이는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오래 산다는 것과 어떤 질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때때로 의사들은 거의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기계에 의존하여 목숨이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조처를 다 취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험은 육체적인 것에만 제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넓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 동안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동료 인간들과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특히 우리의 창조주와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생명을 선물로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일요일(4월 19일)

육체적 생명의 선물(시 139:13-14)


도입)

사람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대답이 있다. 하나는 창조론 이고 또 하나는 진화론이다. 옛날 사람들은 대체로 조물주(造物主)가 생명을 만들었다는 막연한 원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옛날부터 모든 생물들이 저절로 생긴 것이라는 자연발생설을 믿고 있었다. 먼지나 진흙이나 썩은 물질에서 벌레나 곤충이 나오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발생설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대석학이 자연발생설을 주장했으니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의 시조인 뷔퐁(1707-1788)은 약 2만년 전에 원시 바다 속에서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생겨나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그 후 동식물 학자 라마르크(1744-1829)의 「동물 철학」이나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도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세균학자인 파스퇴르(1822-1895)는 공기 중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을 발견해서 벌레나 곤충 등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생명은 오직 생명에서만 생겨났다」는 주장을 함으로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정면으로 공박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세상에는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가 생겨난 다음, 인간을 포함한 더 복잡한 생물들로 진화하는 수백만 년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대답하기 곤란한 더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다. 더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해 진화의 방법을 이용하셨다는 힌트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최근에 몇몇 저명한 학자들도 이 이론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렬한 진화론 지지자라 할지라도 생명이 위대한 신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을 세상과 온 우주의 창조주로 믿는 이들도 모든 질문에 다 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것보다는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이치에 맞다.


1.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습니까?(창 2:7, 요 1:1-3)

답: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분은 인간과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대체로 생명은 신비에 싸여 있다. 비록 우리가 태아의 형성과 성장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부모는 새 생명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생명이 특별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믿는다.


2. 다윗은 인간 생명의 신비와 기막히게 설계된 인체에 관해 무엇이라고 묘사했습니까?(시 139:13-14)

답:“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청년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온 세계를 그분의 손이 붙드시네."라는 찬양은 우리 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붙드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그분의 은덕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교훈: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신묘막측하게 설계된 인체의 신비를 생각할 때 그분의 창조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부가적용)

사람이 원숭이의 후손이냐? 하나님의 자녀냐? 하는 문제를 놓고 진화론자와 창조론자간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에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며, 가정은 작은 동물원과 같고, 이 세상은 거대한 동물원과 같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라 상대방을 잡아먹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라고 하는 동물적인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 사상만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 없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문화생활도 필요 없을 것이다. 참으로 다윈의 진화론 위에 세워진 인류 문명은 자연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의 허구성과 거짓됨이 만천하에 속속 증명됨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이것을 바로 고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당장 무너뜨리면 현대 사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 중에서 소진화(小進化)는 인정하되, 대진화(大進化)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소진화는 같은 種안에서는 진보라는 개념은 발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대진화는 種에서 種에로의 탈바꿈도 뜻하는 것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개들 중에 여러 종류가 있고, 소중에서 여러 종류가 생기지마는 개가 소가 되고 소가 개가 되고,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대진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지에서부터 우연히 자연 발생한 생명체가 진화해서 된 존재라고 하는 진화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사람은 창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사람의 기원에 대한 근거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특별히 사람을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6-27, 2:7). 즉 성경에서는 ①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것과 생명은 생명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②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전에 계획하셨다는 것과 ③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닮게 지으셨다는 것과 ④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월요일(4월 20일)

우리 몸의 건강(막 6:30-32)


도입)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절)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육체가 다른 동물들의 육체와 같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 동물들은 죽은 후 썩어 무의미한 흙으로 돌아가 끝이 나게 되지만 인간의 육체는 그렇지 않다. 그 핵심은 인간의 육체와 다른 동물들의 육체의 의미가 동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데 이것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고전 15:40a) 라는 말씀은 죽음 이후의 삶이 있는 존재인 인간과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끝나게 되는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그렇지 않은 다른 동물들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다'(고전 15:40b)는 말씀은 하늘에 속한 백성에게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이 허락되었으며 땅에 속한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광이 있는데, 그 영광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 우리는 그냥 썩어버리고 세상에 묻혀 영원히 잊혀질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창조주의 은덕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맡겨주신 몸을 잘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안녕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수많은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셨고, 그들에게 건강한 식사와 위생에 관한 수많은 지침들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고, 온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셨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적 안녕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다. 사복음서를 대충 읽어보더라도 예수께서 신앙에 대해 얼마나 실질적인 이해를 갖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다.


1.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과 그 주변의 사람들의 육신적 안녕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다음 구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 줍니까?


치유(막 5장) 예수께서는 병든 자에게 치유를 베푸시는 분이심

휴식(막 6:30-32) 예수님은 육신의 회복을 위해 쉼을 권장하셨음

식사(막 6:33-43) 예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심

안식일(눅 4:16) 예수께서는 정규적인 휴식의 날인 안식일을 지키심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은 청지기 직분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가진 물질, 시간, 달란트 그리고 몸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이 선물들을 신실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견해와 직결되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죽을 몸과, 죽지 않을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육과 영과 혼의 결합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전인적 건강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러한 사상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교훈: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체적 건강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우리의 안녕을 위해 힘쓰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몸을 잘 돌볼 책임을 지고 있다.


부가적용)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악한 사람도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사용될 수도 있고 아니면 마귀의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다. 우리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 이를 몸값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령이 되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단한 걸작품이다.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건강이 없으면 예배도 찬송도 할 수 없으며 기도도 하기 힘들다. 교회 봉사하는 것도 힘들고 세상에 나가서 돈 버는 것은 더욱 힘들다. 건강이 없으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인생이 큰 짐과 고통이 된다. 사람이 무용지물이 된다. 건강을 소홀히 하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짐이 되고 가족과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 건강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 건강은 평소에 잘 훈련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잘해 건강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 사람들이 기독교는 “뭐 그리 안되는게 많습니까?라고 말한다. 술도 담배도 이것저것 가리는 것이 많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인데 거룩한 성전에 술을 마구 마셔 우리의 몸을 술통으로 만들고 담배를 피워 온몸을 굴뚝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화요일(4월 21일)

영적인 생명(고후 5:17)


도입)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6~29)-생명이 있는 곳에 창조가 있으며 속죄가 있고, 또한 생명이 있는 곳에 구원과 심판이 있는 것이다. '맑스'는 <물질>이 제일이라 했으나,  예수님은 생명이 온 천하보다 더욱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영적생명이란 뜻은 그리스도를 모신 삶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창 2:7~19>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 속에 있던 생명을 아들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모든 성도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영적 생명의 혈관 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생한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상대성 원리의 아버지 아인슈타인 박사는 칼등 외과 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고 한다.  "하나님 외에는 인공적으로 나의 생명을 연장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영적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로버트를 통해 인간을 만들지 언정 그에게 참 생명을 줄 수는 없다.


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고후 5:17)

답: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순간,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지상에 사는 모든 거민들은, 그들이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누리는 생명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는 인류뿐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 쇠퇴와 죽음을 가져왔다. 죄로 인한 파멸적 황폐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전부로 하든지 아니면 놀라운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생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요구된다. 성경은 이 중요한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몇 가지 은유를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생생한 것은 '새로운 탄생'의 은유이다. 이 은유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전환점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일이 일어날 때에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2. 성경에서 요한복음 3장은 이 새로운 탄생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한 곳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담화하신 부분(1-21절)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새로운 탄생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7)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돌이킨 사람들의 새로운 생명은 계속해서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올바른 영적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있으며, 점점 성숙해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교훈: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경험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부가적용)

오늘날 영적 생명의 흐름에 대해서 인식하거나 그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를 않다. 그것은 아직도 내가 주님의 생명을 충분히 공급받지를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안에 어떤 것이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흐르는 경험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도 아무리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도 마치 전기가 없는 가전제품과 같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주의 영의 흐름이 막히고 주의 사랑의 느낌이 없다면, 사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영적 생명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육신적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 결과는 어두움과 불안과 고통과 연약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임재 속에서 사는 사람은 그 안에 평안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는 빛이 있고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모든 풍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요일(4월 22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빌 2:1-5)


도입)

한국 초대교회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멕켄지(W. J. Mackenzie)의 삶과 우정은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이다. 우정이 무엇인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싫다고 떠나 갈 때에 좋다고 찾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선교사 맥켄지는 그 우정이 선율처럼 흐르는 삶을 살다가 1895년 '친구의 땅'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94년 가을부터 선교사 멕켄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는 황해도 솔내의 외딴 지역에서 그의 친구가 되어버린 조선인처럼 살고 있었다. 인정이 많았던 그는 좋은 집에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어렵게 살고 있는데 자기만 혼자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도 오막살이집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기 식성에 맞는 서양음식을 먹으며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어렵게 연명하고 있는데 자기만 혼자 좋은 서양음식을 먹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조선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우정이 무엇인가? 나의 감정과 필요에는 둔감하고 타인의 감정과 필요에 예민한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다. 물론 우리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고, 기도와 명상을 위해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개인적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항상 혼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엾은 생각이 들고, 특히 우정을 쌓아가는 사교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한 생각이 든다. 

성경은 다양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족과 우정, 인종과 공동체, 그리고 교회에 관해 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아버지를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 가리키면서,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다(행 17:26).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자마자 곧 그의 반려자를 지으셨다. 그분께서는 가족의 삶을 인간 행복의 모델로 설계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진정한 우정의 가치와, 더 큰 공동체에 소속되는 축복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1.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 원칙들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습니까?(빌 2:1-5)

답: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1-5)


그리스도인 생애의 다양한 면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정을 나누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사교적인 활동의 장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없다면 우리는 역할 모델을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이들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관계 속에서 신실하게 살며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만일 신자들 외에 다른 친구들을 갖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를 좀처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우정을 통한 전도'(friendship evangelism)는 교회 성장의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교훈: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로서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로부터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한번은 서울에 살고 있었던 언더우드의 부인인 릴리아스 홀톤(L. Horton)여사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빵, 케이크, 깡통에 담은 과실, 차, 우유, 설탕 등을 맥켄지 선교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한번 입에 대었다가는 다시는 조선밥을 먹을 수 없으리라고 여겨 자기는 하나도 취하지 않고 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몸은 영양 부족에 시달리며 점차 허약해졌다. 또한 언어는 제대로 통하지 않았기에 육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고독에도 시달려야 했다. 우정이 무엇인가? 그 무수한 잎새 속에는 실체가 없고 몇 개의 열매 속에 실체가 담긴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맥켄지 선교사의 친구를 향한 사랑과 인정, 겨레와 함께 가난에 시달리는 서양인의 우정, 어떻게 이러한 아름다운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리면서 복음을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멕켄지 선교사는 고통에 신음하는 조선인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친구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정을 통한 전도'였다. 그러했기에 동네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설교가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의 삶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알게 되었으며, 그에 관한 소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이 감격과 기쁨을 동반한 채 이 동네 저 동네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우정이 무엇인가? 인정이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인정이 많은 사람이기에 인정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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