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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생명(4/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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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4.14 06:06 조회수 4,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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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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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연구범위: 창 2:7, 시 139:13-14, 요 1:1-3, 3장, 10:10, 고후 5:17, 빌 2:1-5.

 

중심 사상: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생명을 가졌다는 사실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육체적 및 영적인 삶을 돌보아야 할 거룩한 의무를 지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신앙 공동체 안에서 다른 신자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우리는 하늘에서와 땅에서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식일 오후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해 수명이 길다. 소위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오래 사는데, 이는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오래 산다는 것과 어떤 질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때때로 의사들은 거의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기계에 의존하여 목숨이 붙어 있도록 하기 위해 온갖 조처를 다 취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험은 육체적인 것에만 제한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넓게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 동안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동료 인간들과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특히 우리의 창조주와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생명을 선물로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핵심본문: 요 10:10

 

학습 목표

깨닫기: 생명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를 체험한다.

행하기: 그분의 임재하심이 우리 매일의 선택을 결정하도록 허락한다.

 

교과 개요

I. 생명의 선물(요 1:1-3)

A.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이 놀라운 선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B.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돌보기 위한 많은 지침을 주셨다. 식생활에 관한 권면과 생활방식에 관한 다양한 지시를 주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심을 어떻게 보여 주는가?

 

II. 풍성한 삶(고후 5:17)

A.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예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음으로 나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B. 이번 주 기억절이 말해 주듯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더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오셨다. 그분께서 나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셨는가?

 

III.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삶(벧후 3:18)

A. 우리 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는 목적이 분명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베드로후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나의 매일의 삶에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요점: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1-21).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일요일(4월 19일) 육체적 생명의 선물(시 139:13-14)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가 생겨난 다음, 인간을 포함한 더 복잡한 생물들로 진화하는 수백만 년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대답하기 곤란한 더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다. 더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위해 진화의 방법을 이용하셨다는 힌트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최근에 몇몇 저명한 학자들도 이 이론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열렬한 진화론 지지자라 할지라도 생명이 위대한 신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을 세상과 온 우주의 창조주로 믿는 이들도 모든 질문에 다 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 것보다는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이치에 맞다.

 

1.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습니까?(창 2:7, 요 1:1-3)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답: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분은 인간과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대체로 생명은 신비에 싸여 있다. 비록 우리가 태아의 형성과 성장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은 부모는 새 생명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생명이 특별하고 신성하다는 것을 믿는다.

 

2. 다윗은 인간 생명의 신비와 기막히게 설계된 인체에 관해 무엇이라고 묘사했습니까?(시 139:13-14)

시139:13,14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답: 주께서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다고 고백하였다.

<부가설명> 신묘하다고 번역된 말은 “팔라”인데 “뚜렷하다, 구별하다, 명확하다”는 뜻이고 막측이라고 번역된 말은 “야레”인데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상태는 너무 경이로워서 두려울 정도로 뚜렷하게 구별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을 부여하여 번역하면 “나는 경이로운 것에 의하여 구별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다윗자신 곧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창조된 상태가 너무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다른 피조물과는 뚜렷하게 구별된, 각별한 경외감을 표해야 할 정도라는 뜻이다. 정말 그렇지 않는가!

 

청년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온 세계를 그분의 손이 붙드시네."라는 찬양은 우리 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손으로 붙드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그분의 은덕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비관주의와 허무주의에 대한 치료제

“창조 이야기는 만물은 우연한 진화 때문에 존재케 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게 창조되었음을 말해 준다. 인간은 창조주 자신과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의도되었다. 우리가 이유 있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인생은 의미 있고 풍요롭게 된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표현하고 있는 고통스런 공허감과 불만족감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 잡게 된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106)

 

<우리는 생명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과학적으로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명현상이지 생명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안다. 생경은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서 생명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떤 생명도 태어날 수 없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 중에 생명력을 주신 피조물은 생명현상을 나타낸다. 이 생명현상은 생명이신 분의 성질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명력이 생명이신 창조주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명력을 상실한 것은 사망이 지배하며 사망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것이 모든 도덕적 부패와 악행들이며 악한 성질들이다. 마침내 썩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원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요일5:11-13).

 

교훈: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신묘막측하게 설계된 인체의 신비를 생각할 때 그분의 창조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월요일(4월 20일) 우리 몸의 건강(막 6:30-32)

 

우리가 창조주의 은덕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맡겨주신 몸을 잘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안녕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수많은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셨고, 그들에게 건강한 식사와 위생에 관한 수많은 지침들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그들을 만나로 먹이셨고, 온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해 주셨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체적 안녕에 관심이 많으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다. 사복음서를 대충 읽어보더라도 예수께서 신앙에 대해 얼마나 실질적인 이해를 갖고 계셨는지를 알 수 있다.

 

1.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과 그 주변의 사람들의 육신적 안녕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다음 구절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 줍니까?

치유(막 5장) 예수께서는 병든 자에게 치유를 베푸시는 분이심

마가 5장에는 거라사 땅에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것을 비롯하여 열 두해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친 것과, 야이로의 딸을 살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휴식(막 6:30-32) 예수님은 육신의 회복을 위해 쉼을 권장하셨음

여기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는 말씀이 있다.

식사(막 6:33-43) 예수께서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심

여기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눅 4:16) 예수께서는 정규적인 휴식의 날인 안식일을 지키심

여기에는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예배에 참석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위의 말씀에 참석하신 회당은 나사렛 마을 회당이다.

 

우리가 우리 몸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은 청지기 직분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가진 물질, 시간, 달란트 그리고 몸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이 선물들을 신실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몸을 건강하게 돌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견해와 직결되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죽을 몸과, 죽지 않을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육과 영과 혼의 결합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전인적 건강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러한 사상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영양분이 있는 음식의 축복

“오늘날 건강 문제는 퇴행성 질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은 음식 및 생활 방식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곡식과 과일과 견과와 채소로 이루어지는 음식은 최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영양소를 공급해 준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91)

 

<부가설명> 성경은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한다. 영육 이원론은 육을 죽여야 영이 거룩하여진다는 전혀 비성경적 사상을 도입하여서 기독교 역사에 소위 고행이라는 엄청난 육신 학대의 사조를 일으켰다. 지금도 가톨릭에서는 고행을 시행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부활절을 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행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고행 등등. 그러나 성경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가르친다. 우리의 의식이나 영적 삶이 모두 몸을 매개로 하여 드러난다.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구는 몸이다. 이 몸이 허약하고 병들면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건강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곁에 계신다. 건강을 위하여 주신 말씀들을 잘 따르는 것은 영육 간에 온전한 예배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건강관리를 주신 말씀대로 잘 하자. 먹고 마시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교훈: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육체적 건강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우리의 안녕을 위해 힘쓰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몸을 잘 돌볼 책임을 지고 있다.

 

화요일(4월 21일) 영적인 생명(고후 5:17)

 

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고후 5:17)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답: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의미상으로만이 아니고 실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 순간, 영생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지상에 사는 모든 거민들은, 그들이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누리는 생명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는 인류뿐 아니라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 쇠퇴와 죽음을 가져왔다. 죄로 인한 파멸적 황폐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전부로 하든지 아니면 놀라운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생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요구된다. 성경은 이 중요한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몇 가지 은유를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생생한 것은 '새로운 탄생'의 은유이다. 이 은유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전환점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일이 일어날 때에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탄생하는 것이다.

 

2. 성경에서 요한복음 3장은 이 새로운 탄생을 가장 분명하게 묘사한 곳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담화하신 부분(1-21절)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새로운 탄생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요3:1-2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답: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곧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은 영이 된 사람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곧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돌이킨 사람들의 새로운 생명은 계속해서 자라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올바른 영적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있으며, 점점 성숙해야만 한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그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모든 행위 가운데서 나타나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시대의 소망, 172)

 

<부가설명>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영적 생명과 육신의 생명을 구별하는 일이 없었다. 육신의 생명이 곧 영적 생명이며 영적 생명이 육신의 생명이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사람을 육적 존재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이런 표현들이 인간 실체를 이원론으로 보는 생각을 만든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생명력은 사망 집행이 유예된 생명이다. 이 유예기간이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분이 그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영광과 평화와 행복 중에 삶을 누리도록 한다. 이 생명을 얻은 자 만이 진짜 산 자이고, 이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은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죽은 자이다.

 

교훈: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경험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끊임없이 자라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수요일(4월 22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빌 2:1-5)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이다. 물론 우리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고, 기도와 명상을 위해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개인적 공간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항상 혼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가엾은 생각이 들고, 특히 우정을 쌓아가는 사교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딱한 생각이 든다.

성경은 다양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족과 우정, 인종과 공동체, 그리고 교회에 관해 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아버지를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 가리키면서,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다(행 17:26).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자마자 곧 그의 반려자를 지으셨다. 그분께서는 가족의 삶을 인간 행복의 모델로 설계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진정한 우정의 가치와, 더 큰 공동체에 소속되는 축복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1.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 원칙들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습니까?(빌 2:1-5)

빌2:1-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답: 위에 제시한 말씀의 원리가 사회적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열쇠가 된다. 곧 1)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 2) 사랑을 나타내는 것. 3) 한 마음으로 뜻을 합하는 것. 4) 다투지 않고 허영을 추구하지 않는 것. 5)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존중하는 태도. 6) 자기 일을 스스로 잘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잘 돌보아 주는 것. 7)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친교하는 것 등이다.

 

그리스도인 생애의 다양한 면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우정을 나누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저 사교적인 활동의 장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없다면 우리는 역할 모델을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이들과 교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관계 속에서 신실하게 살며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만일 신자들 외에 다른 친구들을 갖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증거할 기회를 좀처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 여러 곳에서 '우정을 통한 전도'(friendship evangelism)는 교회 성장의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교적이고 관대한 마음

“사랑의 표현을 연약함의 증거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와 같은 정신은 동정의 물결이 흘러오지 못하게 한다. 사교적이고 관대한 마음의 충동이 억제될 때 마음은 시들어지고, 황폐하고, 냉랭해진다.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랑은 표현되지 않으면 오래 존속하지 못한다. 그대들과 관련된 사람의 마음이 친절과 사랑의 결핍으로 굶주리지 않게 하라.”(치료봉사, 360)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람은 독처하지 않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독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단수인 “나의 형상”이 아니라, 복수인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우리”가 될 때 안정되고 평안하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가 되는 기본 사실을 깨어버렸다. 그것이 사랑인데, 죄는 사람을 “내가”되게 하여 독처하는 정신 곧 이기심으로 살게 하여 우리가 되는 사랑을 나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사교가 이해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사교 현상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교의 길이다. 교회는 이 일을 본으로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

 

교훈: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존재로서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로부터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친절하고 사교적인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다.

목요일(4월 23일) 풍성한 생명(요 10:10)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요 10:10). 그것을 '충만한 삶'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 다음에 열거한 '충만한 삶'의 몇 가지 중요한 요소를 살펴보고, 성경이 말하는 충만한 삶의 또 다른 요소를 찾아보십시오.

1) 가능성이 충만한 삶

2) 목적이 충만한 삶

3) 내적 평안이 충만한 삶

4) 사명이 충만한 삶

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이 충만한 삶,' '소망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며 자라갈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참으로 '충만한 삶'을 제공하신다는 확신을 더욱 깊이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것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따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제약을 받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모든 경험이 우리에게 부(富)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의 많은 일들이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충만함보다는 공허함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삶에서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경험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각 사람은 나름대로 인생의 역경을 만나게 된다. 육신의 건강을 잃거나, 인간관계가 깨어지거나, 물질적 손실을 당하는 등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경험들을 하게 된다. 이런 일들의 원인으로는 스스로 자초한 일도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연단의 과정인 경우도 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내적인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충만한 삶'이란 단지 우리가 좋은 건강과 외모, 훌륭한 교육과 넉넉한 수입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친밀하고 사랑스런 관계가 분명히 '충만한 삶'의 일부이긴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충만한 삶'이란 의미 있는 삶이다. 내면의 평안이 샘솟는 그런 삶이다. 그러한 행복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과 연결됨으로써 영원히 지속되는 그런 삶이다.

 

풍성한 삶의 비결

“예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얻도록 당신께서 오셨다고 강조하셨다. 우리를 충만한 생애로 인도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성령께서 개인의 생애 가운데 들어오실 때,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요 3:8). 성령께서는 생애에 최초의 변화를 일으키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영향은 계속적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5:22, 23). 그리스도교의 정당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한국어판, 2007년, 395)

 

<부가설명> 생명이 풍성하여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실현되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는 경험으로 사는 삶이다. 그런 삶은 이 세상에서만 사는 사람과 다른 형태의 삶을 만든다. 그래서 그 삶은 탁월하다. 한 번 죽게 되어 있는 이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안달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지만 또 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삶을 산다. 이직도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안 영원을 위하여 보람을 만들며 산다. 나아가서 바로 영원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충만한 삶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사셨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께서 어떠하셨던 것처럼(요일4:17)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여지는 생명으로 사는 삶이다.

 

교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 곧 충만한 삶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참된 행복은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연결되는 데서 온다.

 

금요일(4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엘렌 G. 화잇, 정로의 계단, 제8장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자라남'(67-7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애는 안정(安靜)한 생애이다. 광희(狂喜)적 기분은 없을지라도 지속적이고 안정한 의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의 소망은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 있다. 그대들의 연약함을 그분의 힘과 연합하고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그분의 지혜와 연합하며 그대들의 의지의 박약함을 그분의 견인불발과 연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하심에 대하여 생각하라.”(정로의 계단, 7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우리의 생명은 단지 육적인 것만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줍니까?

* 창조 당시에는 육신적 생명과 영적 생명의 구분이 없었다.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2.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우리에 대한 모든 기억은 잊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대답을 확실하게 하셨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지만(히9:27),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다. 사망이 이김에 삼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바로 이 부활의 생명이 나타내는 그런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우리의 건강 기별은 '충만한 삶'의 약속을 어떻게 도와줍니까? 혹 우리의 건강 기별이 '풍성한 삶'의 의미를 제한하지는 않습니까?

* 병이 들거나 허약하면 그 삶이 힘이 없다. 힘이 없는 삶은 풍성한 삶이 아니다. 건강은 우리의 정신적 영적 삶을 활기차게 한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날마다의 삶에서 영육간에 건강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이루도록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간절히 구해야 되겠다.

 

요약: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하고 풍성한 삶'에 관하여 배웠다. 그것은 책임을 다하는 삶이요, 육신의 생명을 돌보는 삶이며, 관계 속에서 사는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동료 인간들과 교제하며 살도록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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