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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빛 가운데 행함 : 세속적인 것들을 포기함(8/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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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7.21 05:55 조회수 5,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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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안교 교과 공부를 애용하시는 성도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제 개인 웹사이트를 만들었기에 거기에 저의 안교교과 공부를 올립니다.
십년을 한결같이 애용하신 애용자 여러분들과 또 10년을 계속 교과 공부를 올리도록 지면을 할애하신 관리자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8월 마지막 까지는 양쪽에 다 교과를 올리려고 합니다.
9월부터는 저의 안교교과 공부는 카스다에서 나가서 저의 웹사이트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에 대하여 관리자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간 후대하신 일에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또 애용자 여러분들에게도 양해를 구하며 지금까지 애용하신대로 계속 저의 웹사이트에서 애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웹사이트 주소는 3amsda.org 입니다. 많이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직은 완전히 정돈된 상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히 정돈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명호 삼가 아룀

8월 1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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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연구범위: 단 5:13, 요 15:19, 골 1:14, 2:8, 13, 벧후 3:10~12, 요일 2:12~17.

 

학습 포인트: 우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우리 죄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세상의 최종적인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안식일 오후

1933년에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1920년대 중국 상하이에 살았던 불운한 한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에 관하여 다룬 인간의 조건(Man's Fate)이라는 책을 발행했다. 이 책에 나오는 첸(Ch'en)이라는 사회주의 혁명가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그리스도교 목사인 그의 스승을 만났다. 그 스승이 첸에게 믿음을 회복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 첸은 폭탄을 숨기고 정치적 암살을 기도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첸은 자신이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정치에 자신의 믿음을 두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스승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어떤 정치적 신념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치적 사상이 무엇이든지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물리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주목하면서,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영생과 대조를 이루는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핵심본문: 요일 2:15~17

 

학습 목표

깨닫기: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다.

느끼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행하기: 하늘에 초점을 둔 삶을 살아간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초점을 바르게 맞춤

A. "세상에 속한 것들"의 목록에 포함시켜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왜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가?

B. 빛 가운데 행하는 일에 있어서 용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토의하라.

C. 어떻게 하면 죄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는가? 용서의 확신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해 보라.

 

II. 느끼기: 구원의 선물을 감사함

A. 어떻게 하면 구원의 확신을 경험할 수 있는가?

B.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값없는 용서를 베푸신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용서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지 용서해야 하는가? 설명해 보라.

 

III. 행하기: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버림

A.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사물에 초점을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서로 나누어 보라.

B. 세상의 재물을 소유할 때 수반되는 책임은 무엇인가? 우리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C.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용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요점: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이라는 선물에 비하면 이것들은 극히 작은 것들이다.

 

일요일(7월 26일)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요일 2:12)

 

요한일서 2:12~15에서 요한은 "자녀들,"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 호칭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여기서 "자녀들"은 모든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 까닭은 요한이 그의 서신에 그와 같은 의미로 "자녀들"이란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요일 2:1, 12, 28, 3:7, 4:4, 5:21). 그리고 "아비들"은 나이 든 교인들을 지칭하며, "청년들"은 젊은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1. 요한일서 2:12에서 그는 그들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용서는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참조 행 5:31, 롬 4:7, 엡 4:32, 골 1:14, 2:13)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행5: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들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요한은 그의 독자들 곧 신실한 교인들이 구원의 절대적인 확신을 갖기를 원했다. 그는 요한일서 1:9, 2:1~2에 나오는 죄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용서의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고 용서의 확신 가운데 살아간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만 근거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그들이 용서받은 것은 그들의 선행이나 그들의 믿음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였다. 즉 예수님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이김에 관하여, 순종에 관하여 나눈 모든 이야기 가운데서 구원은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이르러 온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용서

“인류는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와 그의 거룩함과 그의 진리를 희생시켜 가면서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죄를 용서하시되 완전히 용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요, 만약 죄인이 신실한 믿음으로 이 소망 가운데 있으면 그는 용서를 확신할 것이다. 용서의 통로는 단 하나뿐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접근할 수 있는 통로이다. 바로 그 통로를 통하여 부요하고 풍성한 용서가 회개하고 통회하는 영혼을 기다리고 있으며 가장 검은 죄라 할지라도 용서를 받는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12)

 

<부가설명> 죄를 용서받은 확신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이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워 하나님과 온전한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자신의 생활과 행위를 생각하고 거기 초점을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 항상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때 묻은 자기를 보게 되고 그럴 때 구원을 확신은 뒤로 밀리고 자기의 허물이 크게 눈앞에 막아서서 완전한 용서의 확신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과연 이래도 구원을 받을까 하는 회의에 젖으며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 죄를 완전히 사유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이 약속을 굳게 잡고 용서의 확신으로 믿음의 살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굳게 바라보며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며 까지 약속하신 그 약속을 확실히 붙들고 용서의 확신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교훈: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르러 온다는 것이다.

 

월요일(7월 27일) 흉악한 자를 이김 (요일 2:13~14)

 

1. 요한일서 2:13~14에서 요한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요일2:13,14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답: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고, 아버지를 알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악한 자를 이겼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인 죄의 용서,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 죄에 대한 승리,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에 따르면, 자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는 사실을, 아비들은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태초부터 계신 이분은 분명히 예수님이시다. 요한일서 1:1에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태초부터 계신 이(예수님)를 서로 다른 두 분으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 요한이 두 번째로 "청년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 그는 반복해서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를 더욱 확대하였다. 청년들은 악한 자들뿐 아니라 사단 자신을 이긴 것이 분명한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하였고, 그분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으로 볼 때 승리는 이미 과거에 얻은 것이고, 그 결과는 실제로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청년들은 또한 영적으로도 강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속에 간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저자이신 성령님이 계심을 암시해 준다(엡 6:17, 벧후 1:21).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삼위일체, 즉 아버지 하나님, 태초부터 계신 분이신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신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분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인 죄의 용서,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 죄에 대한 승리,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있음을 알기 때문에 15~17절에 나타나는 도전에 직면할 준비가 된 것이다. 12~14절에는 서술적인 진술이 나오는 반면에 15절부터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적인 진술 또는 호소가 나타난다.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는 자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참된 상태가 숨겨진 듯하다. 그들은 진리를 보지만 그 중요성과 요구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진리를 들으나 자신의 생애를 진리에 일치시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며, 진리를 순종함으로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인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기둥이 그들 앞에 행하는 양, 태연하고 만족스럽게 쉰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택하신 특별한 백성이라고 생각하나, 어떠한 죄인이라도 구원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그들에게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증언보감, 1권, 157)

 

<부가설명>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요17:3) 여기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인식을 넘어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한다.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증거가 그의 계명이 생활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분의 계명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요일2:4) 이런 생활은 악한 자를 이기는 생활이다. 악한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을 나타낼 수 없도록 공격한다. 여러 가지 이유와 합리화로 하나님의 계명과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론을 만든다. 계명을 폐했다고 성경 구절을 들어 설명하든지, 자신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어떤 부분을 폐했다고 주장을 하든지, 그럴듯한 이론을 만든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실을 생활을 통하여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교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있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고 요한은 강조한다.

 

화요일(7월 28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1.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성경은 세상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요 12:19, 15:19, 행 17:24, 롬 1:20, 골 2:8, 딤전 6:7, 약 4:4, 계 11:15)

요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행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롬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딤전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계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답: 성경에는 세상이 사람들, 우주, 창조된 세계, 세속적인 것, 지구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kosmos)는 우주, 땅, 인간, 존재의 범위, 하나님과 반대되는 삶의 방식 등을 가리킨다. 그 용어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 20회 이상 나온다. 세상은 구원을 필요로 하지만(요일 4:14),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해 적대적이다(요일 3:13). 세상은 악한 자의 세력 안에 놓여 있고(요일 5:19), 거기에는 거짓 선지자들, 적그리스도들, 기만자들이 존재한다(요일 4:1, 3, 요이 1:7). 세상의 사물들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을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요일 3:17).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요일 5:4~5). 요한의 서신들에서 세상이라는 용어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였는데 그 까닭은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와 세상 사이에는 흥미로운 긴장이 존재한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지만 한편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묘사되어 있다(요 3:16).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한다.

 

2. 여기에 나타난 이 긴장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는 사람들 이외에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또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답: 성경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세상에 속한 속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속된 것들을 경계해야겠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한다.

 

15절 끝 부분과 그 다음 절의 말씀은 요한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우리가 인간을 미워하거나 지구를 증오하라고 말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미워하라고 하였다. 만약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경험하는 데서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구원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함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면서 동시에 세상 사물에 애정을 둘 수는 없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에 두 주인 곧 하나님과 세상을 제시하시며, 우리가 양자를 동시에 섬기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하셨다.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이 주도권을 쥔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주의를 끌 가치가 있는 사물을 옳게 식별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추방시켜 버릴 것이며, 우리의 최고의 관심은 세상에 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애정과 헌신에 있어서 세상의 사물과 같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증언보감, 1권, 404)

 

<부가설명> 영과 육이 대조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이 대조되어 있다. 이렇게 대조될 때 육은 죄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 그처럼 하나님과 대조되는 세상은 사단과 그의 사상에 속한 것을 가리킨다. 환경으로서 세상이나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상이나 사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육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자가 된다.(롬8:9) 영으로 난 것을 영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영이 된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그것은 영역이 다르다. 우리는 그 영역에 살지 않는 자들이다. 이 영역을 넘어가면 월경(越境)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를 침입하는 것이다. 포로가 되어 항복하든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잘 지켜야 한다. 내 영역에 있는 것을 사랑하고 수행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교훈: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미워해야 하지만,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한다.

 

수요일(7월 29일) 세상과의 문제들(요일 2:16)

 

15절에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개략적인 경고가 주어진 반면에, 16절에는 상당히 세부적인 경고가 주어져 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세 가지를 언급한다. (1) 육신의 정욕, (2) 안목의 정욕, (3) 이생의 자랑이 그것이다. 요한은 이 세 가지가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과 눈과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요한은 무엇을 경계하고 있는가?

육신의 정욕을 단지 정욕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지만(참조 갈 5:19~21), 어쨌든 정욕이 포함되어 있다.

안목의 정욕은 물론 육신의 정욕과 연관되어 있지만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열망, 우리가 봄으로써 갖기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참조 출 20:17)

 

1. 요한이 말한 "이생의 자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왜 그렇게 나쁜 것입니까?(참조 욥 12:10, 행 17:28)

욥12: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답: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이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스스로 교만하여 자랑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생의 자랑' 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마치 우리 자신이 우리의 생명을 창조한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성취한 것들에 대한 영광과 명예를 스스로 취하려고 하는 생각이 여기에 포함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라(시 100:3). 이와 반대로 우리의 매 호흡, 매 심장박동,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 마음에는 교만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우리는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이다.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생명에 대하여 자만하는 대신 겸손하고 온유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루스벨이 완전한 세계에서 타락한 것은 교만 때문이었으므로, 불완전한 우리는 교만을 전염병처럼 피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단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기뻐한다. 그는 그들을 속였고, 감각을 무디게 하였고 그들 가운데 지옥의 깃발을 세웠으며, 그들은 철저히 속아서 그것이 바로 사단이라는 것도 모른다. 백성들은 새긴 우상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덜하지 않다. 그들은 돈을 섬긴다. 그들은 세속적 이익을 사랑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목표를 이루려고 양심을 희생시키는 일도 불사한다. 하나님의 공언하는 백성이 이기적이며 자기만 돌본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물을 사랑하며 흑암의 일과 친교한다. 그들은 불의 가운데서 낙을 누린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이교도, 더 나은 길을 몰라 새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못하다.”(교회증언, 2권, 440)

 

<부가설명> 사단이 사람을 유혹하는 길이 여러 가지이지만 기본원리는 바로 이 세 가지이다. 에덴에서 여자를 미혹할 때 나타난 설명을 보면 역시 이 세 가지로 유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을 만큼 탐스러웠다. 이것을 요한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요약하였다. 이것은 마귀가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바로 그 원리이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육신의 정욕),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안목의 정욕), 높은 데서 뛰어내려라(이생의 자랑)이다. 식욕은 육신의 정욕의 대표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먹는 것과 보는 것과 명예를 얻는 것을 위하여 살고 있지 않는가. 그것들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 썩어지고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을 사모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 영원과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면 안 된다. 그것들은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도 소유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영원한 것을 위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는 것이라면 도구로 잠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하늘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서 나그네로 지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생활로 일관해야 한다.

 

교훈: 요한이 경고한 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목요일(7월 30일) 세상의 일시적 속성(요일 2:17)

 

16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 까닭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절에서 요한은 두 번째 이유를 추가한다. 그는 말하기를, 세상은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도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의 삶에 미혹되고, 물질세계에 현혹되며, 가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므로 바울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고 하였다.

 

1. 이 세상과 지구의 일시적 속성에 대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단 2:35, 고전 7:31, 벧후 3:10~12)

단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고전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답: 다니엘이 말한 대로 이 세상의 역사는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간 곳이 없”이 사라질 것이다(단 2:35). 우리는 형적도 없이 지나갈 세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요한일서 2:8에서 요한은 어두움도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빛이신 예수님의 성육신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 세상의 사물과 함께 인생도 지나간다. 이 지나가는 세상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대안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만약 세상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바른 신학도 중요하지만 순종의 생애를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신학과 윤리적 삶은 분리될 수 없다. 경건의 말씀과 바른 교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신학적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영원한 목표를 기억하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사물들에 미혹됨으로 영원한 것을 상실하지 말자.

 

일시적인 세상과 영원한 천국

“거룩함, 존귀, 명예, 하나님 앞에 있는 지극한 행복 등등은 믿음의 눈이 아니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 곧 세상의 명예, 세상의 쾌락, 세상의 부와 영광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의 탁월한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가리워진다. 이 세상 것들은 일시적이요, 잠시 잠깐 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고 무궁토록 있을 것이다. 이 무한한 보화를 얻는 것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100)

 

<부가설명> 세상을 사랑하면 모두 잃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두 얻을 것이다. 세상은 다 부서져서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마치 영원할 것처럼 부둥켜안으려고 하지 않는가. 이미 말한 대로 세상 것은 영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에게 도구의 역할보다 크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고 부자 청년이 그랬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것을 도구로 여길 줄 알았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 세상을 영원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어떤가?

 

교훈: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을 택하기보다 하늘의 영원한 사물을 택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잠시 후면 지나가고 말 것이다.

 

금요일(7월 3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교회증언, 2권, "교회 안에 있는 세속주의"(196~197)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막대한 자금을 쓸데없고 해로운 일들에 낭비하고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얻지 못하여 멸망하여 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릴 십일조와 헌금을 도둑질하는 한편,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거나 복음사업을 유지하는 일보다 더욱 많은 것을 그들을 멸망시키는 정욕의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버린다. … 세상은 자아 방종에 빠져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고상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475)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랑의 순종을 나타내며, 악을 정복할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며,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았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과 그분의 영광을 가로막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세상은 참으로 일시적입니다. 세상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과학이 줄 수 없는 어떤 희망을 줍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과 영원한 나라를 주신다는 약속이 확실하다.

 

2. 어떤 이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들이고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사상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좋습니까?

* 그것은 세상과 격리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이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어울려 사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 되라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3. 이 세상 사물들 가운데 우리의 태도에 따라 나쁜 것이 되거나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는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지식과 재물과 명예가 다 그렇게 될 수 있다. 모든 감정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

 

4. 죄를 이기는 것이 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됩니까? 어떻게 하면 이러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요?

*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이시면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기 때문이다.(요1:4)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 도구와 소유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도구로 하여 영원한 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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