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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성령의 열매인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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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3.13 11:32 조회수 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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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성령의 열매인 진리

3월 20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3분)

 

 

도입)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이런 말을 하였다. "가난한 자가 더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 병든 자의 편에 서는 삶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정의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재산이 많은가 적은가, 학식이 많은가 적은가, 능력이 많은가 적은가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에게 머물러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진리의 척도가 무너지고 기준이 애매모호하게 변질되는 혼탁한 세대를 살면서 영적으로 깨끗하고 진실한 일군이 아쉽고 귀한 세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들음으로 천국백성의 성품과 신앙인격을 구비하게 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예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존중하신다. 그리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성도를 인도 하시며 기르시며 감동과 감화로 역사하신다. 천국백성은 바로 성령으로부터 깨우쳐 주시는 정보와 지시를 따라서 움직이며 살며 기동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들은 곧 진리를 따라 성령 안에서 순종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 맺는 추수는 곧 진리를 따라 성령으로 행하여 열매를 맺는 사람들의 것이다.

 

기억절: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연구범위: 대하 25:2, 시 51:17, 렘 29:13, 요 7:16~17, 14:6, 17:3, 히 5:14.

 

안식일 오후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알레쎄이아(aletheia)인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실제적 사실, 사건, 원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과 가장, 기만이 없는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는 주관적 진리이다. 그런데 진리는 우리가 아는 대로, 사실에 기초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그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주관적인 면도 있다. 이 둘이 우리 삶에 실현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진리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기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진리에 의해 삶이 변화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가룟 유다를 보라. 그는 예수님과 3년 반 이상이나 함께 있었다. 유다는 그에게 계시된 온갖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다만 읽음으로써 알게 된 사실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지식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조심해야 한다.

 

일요일(3월 14일)

"내가 … 진리요"(요 14:6)

 

도입)

세상에는 빛과 같은 가르침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그와 같은 빛들은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고, 이슬람에도 있고, 라마승들의 가르침에도 있다. 또한 많은 교육기관들에서도 그 빛 된 가르침을 우리가 받을 수가 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불리우던 유대인들에게 있어 저들의 빛은 종교적인 관습과 관행들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모든 것을 사람들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가르침 곧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일컫는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러한 빛들과 비교가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참 빛이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영원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분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출발이시며, 참된 빛이시며 그분은 생명이시며, 그분이 보이는 모든 것의 참 형상이 되신다. 그런 분이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곧 그분에 대한 말씀이다. 생명은 바로 진리이신 그리스도 이 말씀 안에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처음부터 이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힘주어 소개함으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여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진리를 소유한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만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를 거짓과 죄에서 지켜 주며 삶의 방향을 인도해 준다. 거짓과 미움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과의 교제는 복되다. 그들 가운데 참 평안이자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소유하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은혜로 진리 안에 사는 삶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삶을 사는 것은 아름답다. 진리가 함께 할 때 에만 진정한 사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14: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자신의 말로 간단히 설명해 보십시오.

답: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오늘날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주장 즉 진리는 단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일 뿐이라는 상대주의적 주장에 대하여 강력한 도전을 던진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는 식의 모호함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객관적 진리의 실체를 확립하셨다. 그분은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명명백백하게 선언하셨다. 성경에서 상대주의의 주장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반박하는 구절은 없다.

이제 진리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진리는 한 분 곧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진리가 단지 사실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2. 위의 설명은 요한복음 17:3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하지만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개념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조차도 그분과 무관하게 살지는 않는다. 빌라도도 예수님과 관련이 있었으며, 대제사장 가야바도 그러하였다. 심지어 마귀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는 그분을 증오하는 관계이다. 복음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그분께 헌신하라는 부르심이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마침내는 자신의 생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헌신의 관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관계가 필요하다!

 

교훈: 예수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써 그분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맺게 되고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부가적용)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세 가지 있는데, 첫째는 죄를 해결하는 것이요, 둘째는 인간다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며, 셋째는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해결하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써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만이 이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은 기독교를 배타적이라고 공격한다. 종교를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정상은 하나이지만 올라가는 여러 길이 있듯이 어떤 종교를 믿어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을 한다. 그럴 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그런 주장에 동조하기 쉽다. 그러나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 원래 기독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에 있어서는 배타적인 종교이다. 요 14:6절을 직역하면 ‘내가 유일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6절)라고 말씀하고 있는게 그 증거이다. 또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성경에서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에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다시 한 번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오직 그분만이 진리의 실체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유일한 분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는 오직 예수님 밖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 진리를 소유하는 길이며 진리에 이르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월요일(3월 15일)

성령과 진리(요 16:13)

 

도입)

’진리의 성령’께서 자기 고유의 무엇을 제자들에게 교수(敎授)하시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진리’에로 이끌어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여기서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실 자신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바로 하나님의 진리이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하다. 온전한 진리 파악이란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계시된 내용에 대한 올바른 해석자이시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과 역사의 전부를 주관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다음에 나오는 심오한 통찰을 보라.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시다. 진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마음에 감화할 때에만 양심은 일깨워지고 생애는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명령과 약속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로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671~672)

 

1. 위의 글에서 엘렌 화잇은 성령의 사역의 어떤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답:

성령의 사역은 진리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에서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고,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세상을 책망하신다. 이러한 책망들은 세상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나 현실에 있어서도 어려운 사실들이다.

한편 성령의 사역은 단지 우리에게 이러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진리들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게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이 중요하다 하여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다.(참조 시 51:17)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어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부가적용)

어떤 청년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야동을 보는 것도 죄가 되나요?” 야동은 ‘야한 동영상’의 약자이다. 컴퓨터에 익숙해지는 순간 가장 먼저 싸움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젊은 세대는 야동에 대한 면역결핍증에 걸린 것처럼 무력하다. 청년이 이렇게 물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며 그것을 통해 엉킨 감정을 해소시키면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며 요사이 성교육 강사들 또한 건강한 성욕의 해소처럼 두둔하고 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심사가 있다. 지금 자신이 언급한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다. “죄”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깨우치시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게 되고, 성령과의 깊은 사귐에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더 예민하게 자신의 죄성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잊고 있던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고 인정하게 이끄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경우 저들은 참으로 다양한 이유를 댄다. 교회가 썩었다. 교회가 돈만 밝힌다. 설교가 형편없다. 교인들이 모두 위선자들이다. 교회가 차별대우한다. 등등...참 불행한 일은 그 모든 이유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믿기를 거부하는 참된 이유는 아니다. 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일어날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면,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무너져 스스로의 죄성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반대편으로 흘러가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빠져 나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감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나태한 욕망과 길들여지지 않은 충동을 따라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어령 교수가 74세에 기독교에로의 회심을 경험하면서 그가 쓴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늘 우리의 죄를 조명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 아래 놓여야 한다. 성령이 없어서 즉 양심에 화인을 맞으면 아무리 율법지식을 쌓았어도 결코 죄를 알지 못할 것이다. 가치관이 세속적으로 굳게 세워진 자에게는 그 주관은 그릇된 믿음이 되고 자기이익을 위해 골로새서 3장22절 말씀처럼 눈가림용 믿음이 될 것이다.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가 성령으로 인하여 죄인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죄인인줄 모르고 살거나 또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세월을 허송하는 어리석음이 없도록 보혜사 성령님으로 죄를 극복하여 승리하게 하소서.

 

화요일(3월 16일)

“전심으로”(렘 29:13)

 

도입)

너무 거창하게 망하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맺고 있는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진정성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점점 높아지는 신뢰의 위기만큼 진정성에 대한 요구는 정비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진정성(眞正性)이란 무엇일까? 진정성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사전에 나와 있지도 않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정의 같은 것은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데로 느끼는 데로 '진실된 마음' 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진실된 마음만으로도 진정성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무엇일까? 진정성은 진실에 정성을 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심으로는 말은 진정성을 담은 정성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진정성'이 담고 있는 핵심으로, '진실'에 더해 '정성'을 강조하여 말할 수 있겠다. 정성은 바르고 성실한 마음으로.. 진실이 진실로 들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맥락적으로는 최선이나 배려에 가깝겠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정성이 들어갈 때 진실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심으로”라는 말은 우리 입술의 말과 행동이 ‘진실로’ 참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하다’(sincere)라는 말은 라틴어의 시네(sine, ~없다는 뜻임)와 세라(cera, 밀랍을 뜻함)가 합쳐진 말이다. 옛날에 정직하지 못한 조각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난 흠집과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몰래 밀랍을 발랐는데,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실함이란 인위적이지 않고 참되고 진솔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1. 역대하 25:2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 속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어떤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까?

답:

이 구절에서 ‘온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의 샬렘(shalem)인데, 여기서 샬롬(shalom)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샬렘은 기본적으로 ‘충만한’, ‘완벽한’, ‘평화로운’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한 왕이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 사실을 통하여 잘못된 동기로 바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가 사람들을 얼마 동안 속이고, 우리 자신을 항상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윗이 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맨 먼저 구한 것이 “정성된 마음”(a perfect heart; 대상 29:19)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 참되고 바른 것에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나뉜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그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고,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충성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샬렘(shalem,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자아를 온전히 버리는 것이 열쇠이다. 그것은 물론 쉽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제 살펴본 대로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교훈: 우리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러한 마음은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올곧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리킨다.

 

부가적용)

우리의 옛 선조 중의 일편단심의 정신을 참으로 올곧게 이어갔던 인물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다. 가끔씩 자신의 위치나 권력을 사고파는 몰지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훌륭한 선조들은 결코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수많은 선조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살아왔다. 특히 고려의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단심가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동참해 줄 것을 권유받았으나 자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자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충신인 정몽주의 진심을 마지막으로 떠보고자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방원은 하여가를 읊게 된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시조는 '이렇게 살면 어떻고 또 저렇게 살면 어떠한가.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상존하며 살면 어떠한가. 우리도 이같이 상존하여 오랫동안 살 것을.'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정몽주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충신인 정몽주는 단심가를 답가로 읊게 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몸이 죽고 다시 또 죽고 하여 백번을 죽는다 한들 백골이 흙속의 티가 되어 넋이나마 없을 지언 정 임금님에 대한 한 조각 곧은 충성심이 없어질 줄 아느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곧은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 왕을 섬기는 신하에게도 이런 올곧은 충정이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올곧은 충성이 필요하며 죽기까지 그분의 편에 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수요일(3월 17일)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도입)

사도 바울은 말세에 벌어질 한 두려운 현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말세에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화인은 불에 시뻘겋게 달군 쇠 연장으로 살을 지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에 화인을 찍는 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칼에 베이거나 창에 찔려 생긴 심한 상처부위를 불로 지지는 것으로 그렇게 치료한 부위는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또 한 가지 경우는 노예나 전쟁포로 또는 가축에 화인을 찍어 누구의 소유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화인을 맞는다는 것은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와 누구에게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화인을 양심과 관련하여 말함으로써 화인 맞은 양심이 얼마나 무감각해지고 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것은 실제로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거짓과 외식에 사로잡혀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신 말씀(참조, 마 23:27)을 살펴보았다. ‘위선자’란 헬라어로 후포크리테스(hupokrites)인데, ‘연극배우’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의 내면의 감정과 은밀한 죄도 분별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너희는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마음이 서로 다르구나. 겉과 속이 일치하게 행동할 수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은 또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라고 하셨다. 그분이 의미하신 바는 아주 분명하다.

1. 디모데전서 4:2과 디도서 1: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접촉점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우리 내면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

답:

의심할 바 없이 우리가 계속해서 악에 머물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계속 그 일을 행하면 우리의 양심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우리가 가진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기에 넉넉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가엾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 풍성한 객관적 지식을 가진 채로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만으로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진리야말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인 것이다.

1. 요한복음 7:16~17과 히브리서 5:14은 성령의 열매인 진리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떻게 도와 줍니까?

답:

 

교훈: 우리의 은밀한 속마음까지 읽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양심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겠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를 나타내어야겠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육신 아래 있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자아를 더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말씀을 읽어도 규제할 힘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순간의 제단 위에 영원을 불사르게 된다. 영원에 대한 가치관이 희미해진다. 세상과 육신의 발로가 그의 양심의 소리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에는 때가 많이 끼어 급기야 그 양심이 달구어진 인두로 지진 것처럼 죄에 대하여 감각이 없게 된 것이다. 성경은 그런 자를 죄인이라고 부른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게 되면 너무 늦은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매일 같이 말씀의 물로 죄를 씻어내고(엡 5:26)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써(살전 5:17) 주님과 교제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도, 또 듣고서도 반응을 할 수 없는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며, 이것은 양심일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고, 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 성령께 굴복하는 것은 죄를 탐하던 우리의 옛 본성에게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동안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면 우리는 알게 된다. 죄 안에서 즐기는 것은 실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볶는 것이며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고 전심으로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령과의 사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과 깊은 교제와 전심으로 그분을 찾는 노력이 없을 때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한계 속에서 좌절하게 될 것이다.

 

목요일(3월 18일)

진리 가운데 행함(요이 1:4)

 

도입)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삶을 살아 보이는 증인들이다. 참 주님의 제자의 삶의 본을 보여주는 제자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제자는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를 유기체인 교회 생활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의 삶을 보고 자라지 못한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부부는 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부모의 상을 창조해 나가는 데 많은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주님의 본이 없으면 주님을 따라가는 성장의 진도가 늦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진리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은 진리가운데 삶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4절).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복음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행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목적을 이루면서 생활한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평신도와 지도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또한, 가지고 있는 진리를 증거 할 뿐 아니라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수용자이면서 동시에 진리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1. 위의 두 구절은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의미에 관해 어떤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까?

답:

성령의 열매인 진리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요한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따라서 빛 가운데 행한다, 혹은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문(儀文)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진리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그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의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날카롭고 까다로우며 용서할 줄 모르고 복수심에 불타며 증오심이 가득하고 냉정하다면 우리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자신의 향상을 위해 그들을 짓밟는다면,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아무리 신실하게 건강 기별을 따르고 아무리 예수 믿음을 고백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바른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때가 많다.

 

교훈: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지식적인 차원에서 교리와 신학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넘어 진정 예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신앙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전통이나 암묵적 규정으로 똘똘 뭉쳐진 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교리적으로 죄라는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형제간에 덕을 세우는 사랑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사랑이 들어가면 자연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식도 덕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사랑의 덕이 함께 하여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이 우상제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일 때에 지식과 사랑을 대비시켜 덕을 논하고 있다. 지식의 위상은 사랑과 더해져야 빛이 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일할 때에라야 빛이 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3절) 사랑이 더해진 지식은 삶의 힘이요 근원이다. 김지철 목사의 글에 이런 글이 있다. “지식은 틈만 보이면 비판하나 사랑은 그 틈난 공간을 메꾸어 나간다. 지식은 그것을 가진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만을 세우려 하나 사랑은 자기 옆에 이웃이 있음을 알고 그를 존중하며 그와 더불어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지식은 끊임없이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열등감 속에 비굴케 하고 우월감으로 오만하게 하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하고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지향하게 한다. 그리하여 지식은 분노하는 열등감과 자랑하는 교만을 가져오는 반면 사랑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을 가져온다. 지식은 인간을 서로 비교하므로 차별화하나 사랑은 인간을 멍들게 하는 모든 경쟁적 비교를 거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포용하는 것이다. 지식은 끊임없이 질문한다면 사랑은 언제나 대답한다. 지식은 스승을 만드나 사랑은 아비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교리들이 연약한 자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고 은혜의 징검다리가 되게 하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의 솔제니친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불행은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닫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닫으시고 복의 문을 닫으신 것이다" 부지런히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나오며 생명의 꼴을 얻고(요 10:9)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가 되시기 바란다.

 

금요일(3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일이 하나님께 가납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일한 시간의 분량이 아니라 그 일에 자원해서 바친 우리의 마음과 충실함이다. 모든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요구된다. 아무리 작은 의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잊고 성심 성의껏 행할 때에는 이기심으로 오염된 가장 큰일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일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주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취한 일의 분량보다도 우리가 일하는 동안 가졌던 사랑과 성실성을 더욱 귀히 보신다.”(실물교훈, 402)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큰 보상을 받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생애함으로써 품성이 형성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사랑스러움이 영혼에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속성들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반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일하는 남녀들의 얼굴은 하늘의 화평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늘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영혼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 인류에게 축복이 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예를 가지게 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업을 행하도록 위탁을 받는다.”(재림신도의 가정, 5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상대적인 진리도 있을 수 있을까요? 혹은 시대나 상황에 따라 진리가 비진리로 바뀔 수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진리가 머리로 깨닫는 지식 그 이상이라면 왜 말씀 연구에 시간을 바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성경 연구를 통해 진리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3. 죄로 인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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