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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성령의 열매인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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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2.24 00:34 조회수 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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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성령의 열매인 절제

3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0분)


도입)

성경에 ‘훈련’이라는 말 대신 사용되는 매우 독특한 용어 가운데 하나가 ‘절제’라는 단어이다. 절제는 헬라어로 “엥크라테이아”인데,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훈련을 목적으로 모든 종류의 욕망을 자제(自制)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self control'이라고 번역한다. 결국 자제력을 뜻한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을 점령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였다. 자기를 통제하는 일은 성을 점령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절제가 어렵다. 여기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주로 욕망을 억제함을 뜻한다. 특히 성령님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억제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는 자제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알맞게 조절하여 방종하지 않도록 통제함’을 말하는 것이다. 갈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절제의 열매를 마지막에 쓴 것은 바울이 그 덕목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절제의 훈련 없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인격적인 열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억절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연구범위: 삿 13~16장, 고전 9:24~27, 빌 4:8, 골 3:1~10, 히 12:1~2, 요일 2:15~16.


안식일 오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성령의 열매들 가운데 절제를 맨 마지막에 언급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절제가 가장 덜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절제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을 영글게 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장 중요한 열매로 불릴 수 있다. 절제는 다른 열매들을 한데 묶어주는 접착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성령의 열매와 같이 절제도 은혜의 선물이다. 절제를 ‘연단하는 은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을 ‘은혜’라고 한 것은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이며, ‘연단’이라 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절제라는 말이 자칫 부정적인 이미지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서 은혜의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여, 감정과 욕구와 정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따라서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혹은 어떤 사물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결국 결정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다.


일요일(2월 28일)

절제의 문제(빌 2:12~13)


도입)

1988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불과 22년 전이다. 9월 2 일 월요일 아침 캐나다의 CBC 아 침뉴스에서 "오늘은 우리 캐나다의 국가적 수치의 날입니다."라는 아나 운서의 멘트로 뉴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캐나다의 국가적 영웅, 세계적인 육상선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뛰는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던 캐나다 국민의 hero, 영웅이었던 벤 존슨이 약물복용으로 선수의 자격을 박탈당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든 기록은 깨끗이 취소되고 말았다. 약물복용을 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다. 벤존슨에게 왜 약물을 복용했냐고... “솔직히 저는 그 동 안 훈련을 게을리 해왔습니다. 의욕이 없었습니다. 챔피언의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저는 약물을 복용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에게 의욕이 상실되었을 때 더 이상 그는 훈련을 기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계속 쓰임을 받고 싶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정말 열망한다면 우리는 훈 련을 기피해 갈 수가 없다. 또 기피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 을 쳐서 복종시킨다. 내 몸을 쳐서 내가 복종시킨다. 그 이유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다시는 쓸모없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계속 쓰임 받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훈련한다. 절제한다 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절제는 다른 말로 자제력, 의지력, 정신력 등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령의 열매는 단지 금지된 것을 억제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좋은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

1. 요한일서 2:15~16은 우리가 피해야 할 세 가지 욕망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것들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우리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의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따릅니까?

답:

2. 빌립보서 4:8에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어떤 것들이 열거되어 있습니까? 바울이 여기서 말한 것들은 요한일서 2:15~16에 열거된 위험들로부터 어떻게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답: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자아와 육체, 그리고 세상적인 방식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7:15~18에서 이와 같은 딜레마를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유혹을 받아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로마서 8:1~2에서 그는 해답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성령이 없는 생애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의지를 가진다 해도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로마서 7장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언제’ 극복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키고 성령 안에서 행하며 그분의 의를 주장하고 승리의 약속을 주장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 약속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열쇠이다. 바로 여기에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교훈: 우리는 죄와 자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자신을 주님 앞에 굴복시키고, 성령 안에서 행하며,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여야 한다.


부가적용)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사람의 마음은 그릇과 같다. 그래서 악한 생각으로 채워지든지, 선한 생각으로 채워지든지 하게 되어 있다. 마음에 의심과 불안과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꽉 들어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오직 믿음에 서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마음을 소유한 사람만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 수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생각들을 절제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 긍정, 절대 희망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고방식과 말씀을 통해 승리하는 자화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이다. 인간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기 때문에 생각과 말은 곧 그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음의 생각은 말로 표현된다. 혀는 작지만 온몸을 어거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게 성령의 절제의 열매가 있는지를 알려면 말에 절제가 있는지를 보면 된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기억하라. 그리스도인이 절제한다는 것은 자신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월요일(3월 1일)

요셉이 의의 길을 선택한 단기적 결과(창 39:7~20)


도입)

절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첫째 교훈은 절제는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절제, 즉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인생의 브레이크와 같다. 요셉이 애굽에서 이룬 성공은 자신의 욕망이나 야망을 이룬 것이 아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입신양명이나, 성공의 이야기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요셉은 다만 절제하며 자신을 다스렸을 뿐이다. 믿음과 성실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요셉은 다만 그리 살았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셉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절제는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다. 우리의 욕심과 죄성과 감정을 다스리는 힘이 바로 절제이다. 절제에 대한 두 번째 교훈은 절제는 남을 향한 배려심이다. 절제가 자신을 향하면 자신을 다스리는 힘으로 나타난다. 절제가 남을 향하면 그를 향한 배려심으로 나타난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남을 지배하고 휘두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절제가 자신과 관련해서는 인내로 나타난다. 똑같이 절제가 타인과 관련해서는 예절로 나타난다. 사람이 예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절제의 문제이다. 신앙의 절제의 훈련을 잘 받았으면 그 모습이 예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 절제는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힘이다. 절제의 반대는 무엇인가? 절제의 반대는 욕심이다. 절제는 마음을 다스림이요, 욕심은 그 마음을 망아지처럼 내버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도 욕심 때문이었다.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에 대해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1. 창세기 39:7~20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에서 요셉이 그렇게 행동한 어떤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까?

답:

2. 요셉은 유혹에 굴복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보상(?)을 받았습니까?(창 39:20). 그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신실하게 행한 대가입니까?

답: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겠다고 결심하면 당장 만사가 형통하게 풀리는가? 죄와 타협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직업이나 배우자나 가족을 잃거나,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예를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겪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감옥에서 썩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래도 그는 여전히 옳은 일을 행했을 것인가?


교훈: 요셉은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히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 했으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당장의 손실이 영원한 손실은 아님을 기억하자.


부가적용)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나를 누구보다 잘 되시기를 바라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맘대로 안 된다고 지레 절망해 버린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안 도와주신다고 원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하고 계신다. 나의 최선의 길을...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역사는 연속성의 연장선위에 이루어진다. 요셉이 감옥에 있는 세월은 절망의 세월이 아니었다. 요셉은 남들이 보기에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왜 절망을 주시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요셉은 감옥에 있는 절망의 세월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꼈다. 마지막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어가는 순간에도 온전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요셉의 고난 중에 클라이막스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며 도저히 보일 것 같지 않은 절망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절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고 억울한 옥살이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절망은 희망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축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훈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화요일(3월 2일)

삼손의 실패와 그 결과(삿 13:24~25)


도입)

어촌 마을에서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가기 위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청년이 그물 한쪽에 그물코가 한줄 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정도야 고기를 잡는데 어떨려구." 청년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일을 끝냈다. 그물을 배에 싣던 아저씨도 그물코가 나간 것을 발견했지만 "이 정도야"라며 무시하고 그물을 실었다. 그물을 바다에 던지려던 아저씨도 그물코가 나간 것을 봤지만 "이 정도야"라며 바다에 던졌다. 결국 바다 속에 던져진 그물은 빠른 물살 때문에 다른 그물코도 함께 다 풀어져서 고기는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작은 그물코 한 줄 끊어진 것이 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는 무력한 그물이 될 수 있다. 끊어진 그물코 하나가 모든 그물을 풀어지게 하였다. 우리 인생의 작은 허물 하나가 우리 전 인생을 못쓰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 인생에 풀린 작은 그물 코 하나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혀 무력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엄청난 괴력과 힘으로 블레셋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삼손이, 지켰어야 할 그의 풀린 그물 코 하나로 인하여 한 사람도 죽일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이 되게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절제하지 못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볼 수 있는 귀중한 교훈이 될 것이다.


성경 사사기 13~16장에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를 절제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 보라.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처럼 풍성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장래가 촉망되던 사람이 그렇게도 쉽게 곁길로 빠지다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위기에서 삼손이나 요셉은 똑같은 힘의 근원을 가지고 있었다. 삼손은 그가 좋아하는 대로 의나 불의를 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손을 꼭 붙드는 대신 그의 타고난 난폭한 정욕이 그를 마음대로 휘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성의 힘은 왜곡되고 양심은 부패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삼손을 부르시어 책임 있는 큰 지위를 주시고 명예와 유용성도 주셨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율법 순종하기를 배움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혔어야 했다. 요셉도 선과 악을 행하는 데 자유가 부여된 도덕적 존재였다. 그는 거룩함과 영예와 순결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고 부도덕과 타락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삼손은 자신이 스스로 그 같은 유혹 속으로 들어갔고 정욕의 고삐를 늦춘 것이다. 그가 들어선 길이 수치와 재난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끝에 가서야 발견하였다. 요셉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2권, 1007)

1. 우리가 삼손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사사기 13:24~25은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경고와 기별을 줍니까?

답:

삼손은 위대한 약속을 받았으나 자신의 정력과 욕망이 모든 선한 것을 정복하도록 허용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영적투쟁을 겪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대쟁투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진 실제 전쟁이며, 막연한 우주적 전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펼쳐지는 싸움이기도 하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승리로써 길을 닦아 놓으셨으나 우리의 심령과 육체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승리하셨으나 우리는 그분의 승리를 주장하여야 한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이 전쟁의 어느 한 편을 택하는 것이다.


교훈: 요셉과 대조적으로, 삼손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정욕의 지배 아래 버려둠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부가적용)

인간은 누구나 깊은 내면 속에 죄를 지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지은 '분홍신'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 보면, 마술사가 지어 놓은 분홍신을 한번 신기만 하면 일생을 춤추다가 죽어야 하는데, 한 소녀가 그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분홍신을 신게 된다. 그때부터 그 소녀의 비참한 운명이 결정되고 만다. 소녀는 춤을 추며 이곳저곳으로 방황을 한다. 어떤 때는 화려한 거리에서 많은 남성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무서운 악마의 계곡을 지나기도 한다. 자기 집 대문 앞까지 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간절하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분홍신은 억지로 소녀를 이끌고 집을 떠난다. 결국 소녀는 춤을 추다가 죽고 만다. 단 한 번의 유혹 그 신을 신고 싶은 유혹이 결국 그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일 그 유혹을 거절했다면 그 소녀의 인생행로는 바뀌었을 것이었다. 그렇다.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을 한 번만 더 냉정하게 거절했던들 인생의 막을 멋있게 끝맺음할 수 있지 않았을까? 들릴라의 유혹을 한번만 더 냉정하게 거절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그의 불행을 그가 결국 열어 놓은 이 일 때문에 그의 인생은 망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신고 싶은 예쁜 유혹의 분홍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신지 말아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할 우리의 유혹이 있다면 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절제란 자신의 생각과 말, 감정, 욕망과 육욕 등을 휘어잡아 예수님의 다스림 하에 복종시키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딤전 3:11; 딤후 1:7). 우리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감정과 욕망의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 즉 죄로 유인하는 잘못된 집착(예:세속적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절제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육정이 빚어내는 모든 행실이 나타난다. 무절제한 몸에서 드러나는 행실로는 음행, 방탕, 과음 과식 과로 등이 있고 무절제한 감정에서 나오는 열매는 시기와 질투, 분노, 이기심, 당파심, 탐욕 등이 있다. 절제의 열매가 성장하려면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자신의 무의식까지도 정화(淨化)하는 기도를 계속해야 하며, 악습(惡習)의 뒤에 있는 어둠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


수요일(3월 3일)

바울의 기나긴 경주(고전 9:24~27)


도입)

미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 가운데 린든 비 존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탐식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몸무게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그래서 부인이 미세스 존슨 여사가 first lady가 남편에게 경고도 했고, 호소도 했고, 애걸도 했다. 하지만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몸무게가 불어났다. 그러니까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남편에게 어느 날 이런 자극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는 그런 말이 있는 데 미국의 영어에는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말이 자극적으로 들렸다고 한다. "여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립니까?" 한국의 유식한 부인 같으면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도 모르오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 말이 없으니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느냐고 말했을 때, 이 말이 그에게 화살처럼 박혔다고 한다. 그것이 그에게 자극이 되고 충격이 되었다. 내가 미안하오. 내가 노력하여 좋은 대통령 되겠다고 그리고 좋은 대통령 될려면 건강해야 하겠고, 건강하기 위해선 몸무게를 이제부터 조정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냐가 당신하고 약속하고 1년 동안 20파운드 줄이겠다고 하고 그 한 해 동안 23파운드를 줄였다. 그 이후 그는 훨씬 정치력도 높아지고 아주 건강하고 명석한 판단을 하면서 그 해를 잘 보냈다고 한다. 절제가 중요하고 또한 뚜렷한 목표 라는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4~27)

바울이 말한 위의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깊이 읽어 보라. 여기서 그는 자신의 달음질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진정한 믿음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바울과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자아와 죄와 육체와 더불어 투쟁해야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우리는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육체의 소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1.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 모두가 싸우고 있는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을 이해시키기 위해 어떤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 비유와 현실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답:

2.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에 대해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의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이었습니까? 왜 우리도 그와 같은 확신을 가져야 합니까?

답:

3. 바울은 확신을 나타냈지만 그도 역시 실패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묘사했으며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번 주의 주제와 어떻게 부합됩니까?

답:


교훈: 바울은 자아와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싸움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 이 경주에 임하는 자들은 모든 일에 절제함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부가적용)

러일전쟁 때의 일이다. 과거에 많은 무공을 세운 러시아 장군으로서 특별하게 강직한 개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일본과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그의 부하 하나가 찾아가 "각하, 이제 소병은 치열한 전투에 나가는 중이옵니다. 백전무패의 장군의 손으로 내 손을 한번 잡아 주십시요"라고 했다. 그 장군은 기쁘게 그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나 소련은 일본에 패하였다. 역전의 용사라 할지라도 전쟁터까지 동행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디까지고 끝까지 동행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시는 용장이요, 구원의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는 한 결코 패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적은 마귀이다. 우리 힘으로는 마귀를 물리칠 수 없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귀로부터 승리하신 대장 예수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어디나 함께 하시면서 승리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사셔서 늘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란다.


목요일(3월 4일)

어떻게 자제력을 키울 수 있는가(히 12:1)


도입)

조니 에릭슨 타다의 「나의 연인,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요단)이란 책이 있다. 1967년 여름, 당시 17세의 꿈 많은 소녀였던 조니 에릭슨 타다는 다이빙 사고로 목을 제외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이 한 순간의 사고로 조니는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살아오면서 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죽고 싶은 육신의 요구를 절제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마비된 망가진 몸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결심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이제 그 뜻을 행하는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그녀 속에 계신 주님은 따뜻함, 친밀함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그녀는 “주님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날에도 자신과의 친밀감 속으로 나를 이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녀는 장애를 극복하여 구필화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제는 고전이 된 자서전「조니」(Joni)는 영화화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올렸다. 그녀는 현재 “조니와 친구들”이라는 선교 썬터의 설립자이자 회장으로 전 세계의 장애우들과 그 가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남편 켄과 함께 다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그리고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게 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1. 바울은 앞에서 비유로 들었던 경주에 관해 다시 언급합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무거운 것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답:

2. 골로새서 3:1~10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가지게 되는 규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절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행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를 쉽게 가로막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어떻게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답:

모든 노력과 기술이 동원되어야 한다. 절제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날마다 절제를 실천하려 할 때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자신의 연약성이 시험받을 만한 장소에 있지 말라. 그러한 곳에서는 유혹의 불길에 대해 제어하기 힘든 욕망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의 모양이라도 피해야 한다(살전 5:22).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교훈: 우리는 온전한 절제의 열매를 맺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시험의 장소에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가적용)

절제 없이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7,21)라고 하였다. 또 6장에서는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갈 6:8)이라고 하였다. 육체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면 아간과 같이 되던가, 엘리사의 종 게하시처럼 되던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될 것이다. 결국 욕망을 억제하는 일은 생명과 관계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부덕한 행동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우리가 모든 면에 있어서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금요일(3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 부조와 선지자, 제54장 “삼손”(560~568)

“마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정한 때에 성취되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삼손이라 불렀다. 소년이 성장할 때에 그는 비상한 체력을 가졌음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 체력은 삼손과 그 부모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튼튼한 근육에 의한 것이 아니요 그의 깎지 않은 머리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나실인으로서의 조건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삼손이 그의 부모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순종하였더라면 그의 생애는 보다 더 고상하고 행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들과 교제함으로 그는 타락하였다. 소라(zorah)가 블레셋 나라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삼손은 그들과 다정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젊은 시절에 정교(情交)의 싹이 터서 그 영향은 삼손의 전 생애를 어둡게 하였다. 딤나라고 불리는 블레셋인의 마을에 사는 한 젊은 여인이 삼손의 애정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삼손은 그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가 삼손의 목적을 단념시키려고 노력하자 삼손은 부모에게 다만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참조 삿 14-16장)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부모는 마침내 그 소원을 허락하여 결혼식을 거행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사람들은 영적인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절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2. 절제가 너무 지나친 경우도 있습니까? 절제가 율법주의로 흘러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3.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요셉과 같은 절제를 나타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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