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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모세와 아론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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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1.20 00:40 조회수 6,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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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모세와 아론의 죄
11월 28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5분)

도입)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다수결이란 제도는 민주주의의 맹점이다. 모세가 없을 때 아론은 회중을 인도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알아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결단하는 그 순간 그 백성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론은 군중들의 위협과 힘에 밀려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호와를 버리고 자신들의 신을 만드는 잘못을 범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생각에서부터이다. 모든 사건의 마지막에는 지도자의 책임이 들어 있다. 지도자는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의 결단에 달려 있다. 결정을 해야 하는 그 순간 내 안에서 묻게 된다. 일시적인 편안함에 설 것인가 아니면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 설 것인가? 지도자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내로 듣는 사람이다. 모세가 그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우리를 크게 놀라게 한다.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으로도 결코 약속의 땅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은 모세를 보호하는 것 이상으로 약속의 땅이 어떤 땅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었는데 지도자가 요단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당신이 지도자냐'라는 야유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들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론과 모세의 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고 철저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기억절: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3:27)


연구범위: 민 20~21장, 요 3:14~15, 약 4:4~15.


안식일 오후
수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약속의 땅 남방 경계선인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다. 이제 그들은 힘든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대담하게 반역을 일으킨 자들에게 내린 무서운 심판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히 여호와께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는 도구로 준비되었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준비되지 못했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불충성과 죄와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베푸시는 그분의 자비와 은혜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18)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승리와 믿음과 성결의 약속을 주장하는 데 그토록 자주 실패한 백성을 그분께서는 어떻게 계속해서 자비와 은혜로 대하셨는지를 보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비틀거리고 넘어지는 자들을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나, 연약한 순간에 교만을 나타내고 말았다. 그는 자기에게 그처럼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모세가 넘어질 수 있었고 은혜가 필요했다만 나머지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일요일(11월 22일)
믿음의 거인들이 넘어질 때(민 20:1~3)


도입)
성경에는 많은 예표가 나온다. 예표론에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며 지팡이는 율법의 힘과 권위를 대표한다. 물론,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 맞으셨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눈에 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의 손아래 고통당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세 시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힘에 의해 매 맞으심으로 고통당하셨다. 더 나아가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는 그 영을 예표하고 있다(요 7:37-39).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침과 생수가 흘러나옴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반석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과 피난처와 힘과 안식의 반석이시다.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능력에 의해 맞으심으로써 그분은 갈라져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수(영)가 흘러나왔다(요7:37-38, 고전12:13). 이 물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고, 우리를 완전히 만족케 한다. 민수기 20장 11절에서도 모세의 지팡이는 반석을 치는 데 사용되었다. 그곳에서 지팡이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의 손에 있었다(출17:6). 그리스도는 율법에게 매 맞으시고, 생명의 영께서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도록 갈라지셨다. 반석은 이미 매를 맞았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매 맞을 필요가 없었다. 반석으로 예표 되신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고전10:4).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모세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쳤다. 반석을 한 번 칠 필요도 없었는데 하물며 두번이랴. 그 반석은 이미 출애굽기 17장에서 침을 당했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을 다시 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단지 반석에게 명하라고만 말씀하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물이 떨어졌을 그 때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는데 이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와 해묵은 불평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1. 민수기 20:1~13을 읽으십시오. 모세는 여호와께서는 하라고 명령하신 것 대신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이 온유하고 신실하며 헌신적인 하나님의 종이 이와 같이 믿음의 부족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세의 좌절을 이해할 만도 하다. 첫째 그는 자기 누이를 막 장사지내어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백성이 쏟아 놓는 불평 곧 그들의 선조들이 수년 전에 하던 똑 같은 불평을 들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모세의 행동에 대한 변명의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물은 군중이 넉넉히 마실 만큼 많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모세는 큰 과오를 범했다. 모세는 분노한 감정으로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분과는 거리가 먼 인간적 격정의 표출이었다. … 모세가 백성을 비난하기 위해 분노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백성에게 해를 끼쳤다. 그는 인내심과 자제력의 결핍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백성은 그의 과거의 행로를 하나님이 지도하셨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고 자신들의 죄를 변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모세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들은 모세의 행위가 처음부터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통해 보내 주신 모든 책망을 거절할 구실을 발견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17). 가장 근실한 여호와의 종들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세는 그처럼 큰 특권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의 죄는 더 중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수없이 목격하였음에도 자신을 높이고 말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경고인가?


교훈: 하나님의 근실한 종 모세도 연약한 순간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경고가 되는가?


부가적용)
비록 모세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할지라도 민수기 20장에서 그는 약속 된 좋은 땅에 들어갈 권리를 상실하게 만드는 실수를 범했다. 이 메시지에서 단지 물을 인하여 백성들이 다투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모세의 실패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는 중요한 공과가 있다. 민수기 20장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변호하시기 위해 개입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의 백성들을 변호하시러 오셨다. 이것은 모세에게는 큰 놀라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반역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변호하시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은 행하셨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야, 네가 나의 말을 거스려 반역했다. 나의 백성들은 그릇되지 않았다. 네가 그릇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민수기 20장을 연구해 봄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이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와 다툴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어디에서 우리가 물을 찾을 수 있는가? 왜 당신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와 같은 곳으로 인도하였는가? 여기는 종자나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나 석류나무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이런 식으로 모세와 다툰 후에 그는 주님께로 가서 『주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필요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어야 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막대기를 들고 반석에게로 가서 내 백성과 가축들이 마실 수 있도록 물을 흘러내라고 반석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모세는 그 때 주님께 찬양하고 단지 반석에게 말하여 물을 내라고 했어야 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툼을 대한다면, 교회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월요일(11월 23일)
아론의 죽음(민 20:23~29)


도입)
모세는 정중하게 에돔왕에게 통과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이 에돔 땅을 통과할 때 에돔 백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여러 가지 약속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에돔 군사가 막은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되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돔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막는다. 여기서 때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의 때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준비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되었다면 그들은 에돔땅을 뚫고 가나안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장애물을 뚫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아직 그들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되어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론의 죽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호르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아론의 죽음을 말씀하셨다. 왜 아론이 이 시점에서 죽어야 하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늙어서 죽었다. 그러나 아론의 죽음은 분명히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께 거역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거역 때문에 광야에서 죽을 것을 말씀하셨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론의 죽음은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론의 죽음은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땅을 통과할 수 없었는가? 왜 아론은 광야에서 죽어야 했는가? 그가 얼마나 가나안 땅을 사모했겠는가?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민수기 20:23~29을 읽으십시오. 아론의 죽음에서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간에 이 이야기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민수기 20장은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아론의 죽음으로 마친다. 나이든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본다.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일어나 지도자가 된다. 중요한 질문은, 과연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의 실패와 성공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느냐 하는 것이다.
미리암의 죽음과 아론의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주목해 보라. 미리암의 죽음은 짧은 한 절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마치 그녀의 죽음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닥친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아론의 죽음은 분명히 미리 예고되었다.
아론이 죽기 전에 아론과 모세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호르산 꼭대기로 올라가 거기서 회중이 보는 가운데, 모세는 형의 제사장 의복을 벗겨 그의 조카 엘르아살에게 입혔는데, 이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권한이 위임되는 것을 상징하였다. 비록 아론은 곧 "열조에게로 돌아갈" 것이지만 대제사장의 직무는 계속되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사업과 사명은 어떤 개인보다 크고 위대하다. 우리는 신실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조만간 우리는 무대 뒤로 사라질 것이고 다른 이들이 우리가 떠난 자리를 이어갈 것이다.
아론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모세는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형의 몸에서 거룩한 의복을 벗겨 자신의 조카인 아론의 아들에게 입혔다. 아론은 아마도 자신의 몇 가지 과오에 대해 몹시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았다. 그의 앞에는 엘르아살이 서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대제사장의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전개되는 모든 일들을 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교훈: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을 때에 모세는 형 아론의 대제사장 의복을 벗겨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 주었다. 아론의 죽음은 세대교체를 의미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후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키라고 한 언약을 지키지 않아 대부분의 1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 입성이라는 성공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저들 아론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이 아니라 애굽의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세상의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땅과 새로운 시대에서는 그들을 통해서 일할 수가 없었다. 저들이 불평과 불신을 일삼는 저들의 태도를 가지고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약시대를 지나 새로운 세대인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려면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교회전반에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이 충만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해서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


화요일(11월 24일)
배은망덕의 죄(민 21:1~5)


도입)
이삭이 나은 쌍둥이 아들 중 큰아들인 에서의 후손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이라 촌수로는 사촌이요 서로 형제지간이었다. 당연히 길의 인도를 해주어야 마땅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서서 비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앞에 두고 부득이 행군방향을 가나안과는 다른 홍해 길로 바꾸게 되자 그동안 38년동안 광야생활에 시달린(신2:14) 백성들은 심신이 지친 나머지 그만 마음의 화를 참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5절)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모세가 인도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이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길은 자기들이 가기에 편안한 길이었다. 즉 그들은 조급한 마음에 쉽고 빠른 길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영적인 측면에서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야 할 고난을 회피하고 편하고 안일하게 살아가려는 인간적인 자기중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길로 인하여 마음이 맞지 않아 불평이 생기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5절)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그토록 찬양하고 영광 돌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황량한 광야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기들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을 에돔왕의 반대로 갈수 없게 되고 다시금 되돌아서서 홍해 길로 바꾸게 되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이 되어버렸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자기 소리를 내는 불신앙의 대적을 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내는 자기 소리는 무엇인가? 그들은 오랜 광야 생활을 지나오면서 가나안이라는 마지막 고지를 눈앞에 둔 그 시점이었다. 그러나 에돔의 반대로 지칠 대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광야로 되돌아서서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이 이제는 싫었던 것이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멀리 돌아가야만 했다(참조 민 20:14~21). 에돔 사람들은 사해에서 남쪽으로 아카바 만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1. 사람들은 또 무엇을 불평했습니까?(민 21:1~5).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불평은 정당한 것이었습니까?
답:
그들이 아무리 많은 불평의 이유를 댄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날마다의 여행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의 기적으로 보호를 받아왔다. 그들은 사막에서도 필요한 물을 공급받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곧 “천사의 양식”(시 78:25)을 먹었으며, 낮에 그늘을 제공하는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 덕분에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내왔다. 백성 중에는 아무도 몸이 약한 사람이 없었으며, 기나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은 부르트지 않았고 그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다(민 8:3~4, 시 105:37). 의심할 바 없이 물론 그들도 우리처럼 문제와 시련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오랫동안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선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의례히 베풀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감사함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너무나 쉽게 은혜를 망각하게 되었다.


2. 우리의 삶에서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왜 어리석은 일입니까?

답:
배은망덕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은 날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찬양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에 목말라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는 만큼 그것을 통해 그분의 고마우심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께서 지난 날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표현할 때에 우리의 입술에는 불평이 사라지고 더 많은 감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부가적용)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말씀이 430여년이 지난 그때에 이루고자 했을 때 택한 백성들은 모두 애굽의 문화와 정신에 길들여져 있었다. 비록 몸은 천한신분으로 고된 노역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힘든 삶을 살았지만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자신을 끌어들여 백성이 원하는 그러한 세계제일의 이상 국가를 꿈꾸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속에 우선적으로 애굽의 사상 애굽의 문화 애굽의 종교 애굽의 생활을 완전히 빼어 버리는게 우선이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애굽 왕자에서 쫓겨나 40년이 지나자 애굽의 모든 것을 다 버렸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년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가 광야 40여년 동안 훈련받고 연단 받은 년수와 너무도 같다.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이스라엘) 원함에 가득찬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께서 그분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나타나시고 말씀으로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믿음을 갖기를 원했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만 할 줄 알았지 이러한 언약을 이루기까지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은혜의 믿음을 가질 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믿음의 은혜로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해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자기중심적 모든 것들을 다 벗겨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4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애굽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벗겨내기 위해 훈련과 연단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셨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애굽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과의 단절이다. 백성들이 원하는 행복은 출애굽하여 애굽보다는 나은 생활을 원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 질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을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모세조차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인내가 한순간 백성들에 대한 분노로 지팡이를 땅에 두 번씩이나 내리쳐 하나님이 원치 않는 혈기를 부림으로 그 역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운을 맛보지 않았는가?


수요일(11월 25일)
불뱀(요 3:14~15)


도입)
하나님께서 불뱀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성경에서 보면 뱀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한 동물이다. 창세기 3장에 여자를 유혹한 사단의 모습이 뱀으로 등장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어 보인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패배가 선포되었으나, 여인의 발꿈치를 무는 역할을 사단은 계속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인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머리가 상하게 되는 패배가 선언되었다. 광야에서 반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는데 불뱀을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징벌 원리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보인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중심적으로 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중심적 세계의 주권자인 사단을 통하여 징벌하시는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확실한 불평의 이유를 가졌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불평에 동조하지 않으셨다. 광야를 배회하는 그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았으나 그들은 반복하여 자기들을 광야로 끌고 와서 죽이려 한다고 해묵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호와께서 동조하지 않으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불평이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방금 가나안 사람들에 대해 큰 승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1. 민수기 21:5~9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특히 이제 이 백성은 왜 중재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까?
답:
팔레스틴에는 약 35종의 뱀들이 서식하고 있다. 어떤 뱀은 독이 아주 강한데, 떼 지어 몰려다니는 독뱀에 물리면 고통이 지독하기 때문에 '불뱀'이라고도 불렸다.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이스라엘에게서 거두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독 있는 생물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분의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자 그 결과로 그들이 고통을 당한 것이다.

2. 예수께서는 이 불뱀의 사건과 구원의 계획을 어떻게 연결시키셨습니까?(요 3:14~15). 우리도 불뱀에 물린 존재들입니까?

답:
놋뱀을 장대 위에 다는 것만으로는 뱀에 물려 죽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그들은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그들을 위해 제공된 유일한 해결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죽음이 구원의 수단으로 제공되었으나 광야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값없는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믿어야 한다.


교훈: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 우리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아야만 살 수 있다.


부가적용)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께서는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사는 길을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놓았을 때 그것을 보면 살리라 말씀하셨고, 그대로 순종한 자들을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 방법의 의미는 무엇일까? 범죄의 근원을 상징하는 뱀을 달아서 그것을 보는 자가 치료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는 ‘뱀들을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고 다른 방법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반란은 뱀에게 물려서 온몸에 퍼진 독소와 같아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고 그들의 새로운 존재와 신분에 독을 뿌리는 뱀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뱀에게서 물린 것에서 회복하려면 그들의 존재를 위협한 “영적인 뱀”이 죽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지시에 대한 믿음, 즉 순종으로 장대에 매달린 뱀을 쳐다보게 함으로써 회복되게 하셨다.


목요일(11월 26일)
초기 정복(민 21:10~35)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요단강 동편 비스가산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스라엘이 진격하는 방향은 북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러나 그 길 역시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먼저 헤스본 왕 시혼에게 그 땅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멸망의 전조로서 헤스본 왕 시혼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멸망케 하였다. 이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언제나 승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전진하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산 길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바산 왕 옥이 버티고 있었다. 바산 왕 옥은 장대하였고 그들의 성읍은 크고 요새화되어 있었다. 강력한 군대를 지닌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헤스본과의 전쟁과 같이 동일한 믿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갔을 때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 이스라엘의 대승이었다. 아무리 장대한 군사라 할지라도, 크고 견고한 성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한다. 오늘 우리의 영적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


약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지역에서 가나안 족속을 공격하려 했을 때는 크게 패배했었다(민 14:40~45). 그 세대는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다 죽었고, 이제 새로운 세대가 선조들이 떠난 자리를 이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1. 민수기 21:10~35에서 히브리인들은 이방 왕 시혼에게 어떤 약속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이 약속에서 무엇을 제안하였습니까? 그러자 누가 누구를 공격했습니까?(23절)
답:

2. 이스라엘 백성이 시혼 왕을 대한 것과 옥 왕에게 한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
“가나안 국경에 있는 이 민족들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여 이스라엘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멸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 원래 아모리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었으며 큰 죄를 범하였으므로 전멸되는 것이 당연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4백 년 동안이나 자비를 베푸셨다.  …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434)
이 두 족속에 대한 전략의 차이점을 주목해 보라. 옥 왕에게는 그의 땅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해 달라는 예의바른 요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높은 성벽이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한(신 3:5) 그 성으로부터 그 왕과 그의 군대를 이끌어 내셨다. 그들이 요새를 떠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인도와 약속을 따라 옥 왕과 그 군대를 들에서 진멸하였다.
요단 건너편에 있던 아모리 족속의 왕들인 시혼과 옥을 이긴 승리는 노래로 불려지고(시 135:10~12) 민족적인 기념이 되었다.(삿 11:18~22)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아모리 족속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첫 번째 승리였다.


부가적용)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가나안 땅을 향해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방해까지 하고 공격까지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쳐서 이기고 그들의 모든 성읍을 빼앗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붙이셨기 때문이다. 정치와 국제관계에서 외교력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모리 왕은 이렇게 볼 때 지혜롭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떠도는 정도의 이스라엘을 보았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 선처를 바랐지만 오히려 강하게 나오다가 그것이 자신을 멸망케 하는 길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60만명의 장정이 있다고는 하였지만 군사훈련을 받은 병사라기보다는 힘 있는 장정들이고 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나가 써워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고 계심을 짐작 하게 된다.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시면서 그 땅을 점령해 들어가도록 하셨다. 우리가 과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가나안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나안이다. 불평할 것 없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을 만족할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장소로 인도하실 것이다. 가나안은 어떤 특정한 땅이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이어야 한다. 그곳에 승리가 있고 그곳에 바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11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37장 '침을 당한 반석'(411~421), 제38장 '에돔을 돌아서'(422~432), 제39장 '바산을 정복함'(433~437).

“구주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였을 때에 그는 이 변화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다.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서 회중 가운데 높이 달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진중에서 놋 뱀을 쳐다보는 자는 모두 살 것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나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이는 것 외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174~17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불뱀의 이야기에서 믿음에 관해 생각해 보십시오. 즉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이 초자연적인 활동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구속의 계획과 어떤 면에서 유사점을 가집니까?

2.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혹은 교회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영적인 취약점을 직시하기가 왜 그렇게도 어렵습니까?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민수기의 이 부분은 40년간의 방황이 끝나는 시점에 해당한다. 모세와 아론은 그들의 누이 미리암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여호와께 대한 반역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 후에 불평하던 회중은 불뱀에게 물리게 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세우게 하신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볼 때에 그들에게 육체적 및 영적인 치유가 일어났다. 이 겸비케 하는 경험 후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아모리 족속을 정복하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있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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