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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가나안 접경에서의 부도덕(알기쉬운 교과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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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2.03 11:59 조회수 5,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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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1과 가나안 접경에서의 부도덕

12월 1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도입)

가나안은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넷째 아들로서 가나안 원주민의 선조이다. 가나안의 아비 함은 노아의 술 취함을 보고 그 수치를 발설함으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후에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멸망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진멸당하고 쫓겨난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그것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지시하셨다. 사람은 온 만물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중보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이러한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영적 무지 상태로 빠져 섬겨야 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대상인 피조물들을 섬기게 되었다.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이방 세계에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가나안 땅에 거하는 가나안 자손들은 온갖 우상 숭배를 두루 행하여 그 땅을 더럽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여 멸망을 자초했던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 숭배뿐 아니라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은 다른 모든 행위에서도 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다. 그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타락한 본성에 따라 죄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알고 좇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은 사단의 지시에 따라 죄악된 문화를 양산하고 그 속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묵과하실 수 없을 때가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하셨던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이 악행을 행함으로써 멸망 길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입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억절
: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전 10:8)

연구범위: 민 25, 31장, 신 21:10~14, 고전 10:1~14, 계 2:14.


안식일 오후

우리는 여기서 다시 민수기 전체를 관통하는 동일한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그렇게도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백성이 여전히 잘못된 선택을 하고, 여전히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며, 가장 무서운 불순종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거듭된 불순종과 그릇된 선택에 의해 그 목적은 점점 더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는 계속되었고 또한 계속 될 것이었다. 그분께서 옛날 언약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듯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목적을 방해하지 않고 그분과 협력하기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번 주에 우리는 구약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믿음의 실패 사건 즉 싯딤에서의 배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 일이 수천 년 전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일어났지만 약속의 땅의 변경에 와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여기서 귀중한 영적 경고를 받아야 한다.


일요일(12월 6일)

유혹에 빠짐(민 25:1~3)


도입)

민수기 24장까지는 발람이 꽤나 훌륭한 사람으로 보인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은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랴?”고 말하면서 발락의 요구와는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도리어 세 번 축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민수기 24장까지는 발람의 정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발람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모압왕 발락에게 재물과 명예를 얻고자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런데 저주하는 일에 실패해서 약속된 사례를 받지 못하자 그 마음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모압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전을 바꿔 직접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발락에게 사악한 계교를 일러 주었다. 그 계교는 바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려서 스스로 저주받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행음과 우상숭배였다. 발람은 발락에게 “발락이여, 모압과 미디안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바알의 제사에 참여하게 하십시오”라고 제안한다. 이 모압 백성들의 음행은 단순한 음행이 아니었다. 그들의 음행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종교행위였다. 땅에서 남자와 여자가 음행을 하면 하늘에서 남신인 바알과 여신인 아스다롯이 자극을 받아서 운우지정을 나누게 되고, 그러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땅이 비옥하게 되고 농사가 잘 된다는 종교의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압 여인들과 미디안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른 것은 단순히 음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까지 범하게 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계략을 통해 드디어 발람의 음모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민수기 25: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려주는 진술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쉬고 있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민 21:1~3)과 아모리 족속(21~31절)과 바산 왕 옥의 지배 아래 있던 자들(33~35절)을 정복하는 등 몇 번에 걸친 정복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참으로 편안하게 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이 보이는 요단 강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에 이제 일이 순조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군사적 위협을 쉽게 물리쳤으므로 당장은 전쟁의 위협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이다.

1. 민수기 25:1~3을 읽으십시오. 이들은 어떤 단계를 거쳐 배교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답:

이 모든 성적 문란함과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는 요단 강 이편에서 일어났다. 본문에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보면, 먼저 그들이 그 여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경계가 무너졌고, 그 다음에 이 여인들의 초대를 받아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마침내 그들은 이방 신들에게 절하고 그것들을 숭배하였다.

우리 생각으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히 그들이 잘 몰라서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처음에는 많이 섞이지 않았다가 점점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그들의 경계를 허물었고, 그들이 깨닫기도 전에 정욕의 덫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일단 그들이 올무에 걸리게 되자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속임을 당하게 되고 말 것이다.


교훈: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정욕의 덫에 걸려 타락하고 말았다. 하늘 가나안을 목전에 둔 우리에게 얼마나 엄숙한 교훈이 되는가?


부가적용)

민수기 25장을 보면서 다섯 가지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급속하게 죄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매우 짧은 기간에 죄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짧은 기간에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을 정도였으니까 죄가 퍼진 속도와 범위가 놀랍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우 쉽게 죄악에 넘어갔다는 점이다. 고기 냄새와 모압 여인의 미소에 그냥 넘어가버렸다. 네 번째는 이들이 비록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그 마음에 죄성이 매우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압과 미디안이 아주 쉬운 미끼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했다는 점이었다. 참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을 때, 아마 발람은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발락으로부터 얼마간의 사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5장에서 성공한 발람의 탐심은 결국 민수기 31장 8절에 가서 끝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 다섯 왕을 죽일 때에 발람도 잡아 칼로 죽였더라”고 했다. 독일 속담에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자라’는 말이 있는데, 발람은 최후에 웃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월요일(12월 7일)

이스라엘이 타락에 빠지게 된 배경(계 2:14)


도입)

발람의 계책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우상제물을 놓고 먹게 한 후 여인들과 간음하게 하는 것이었다. 모압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우리는 당신들과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몇 날 몇 일 큰 잔치를 베풀테니 오셔서 실컷 먹고 즐기고 가십시요"라고 유혹한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땅으로 건너갔다.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했던 진귀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 입에만 대면 넘어가는 포도주가 있었다. 게다가 옆에서 분위기를 돋구는 모압 여자들이 그들에게 육감적인 눈에 황홀한 서비스를 하였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것이 발람의 계교였다. 아데미 신전의 축제일이 되면 짐승을 잡고 우상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한풀이를 한다. 그리고 그 축제의 절정에 달하면 제사를 지내던 여자사제들이 남자 성기모습을 한 술 주전자를 들고 남자들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맺으면서 즐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축제일이 되면 1000명의 여자들이 활동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우상제물을 먹지 않는 것은 사회생활에 큰 부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었다. 성도들은 생업과 관련된 고객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수호신이 있다. 축제일 자기 거래처 사람들을 초대한다. 만약에 그 수호신의 축제 자리에 초청을 했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고객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나아가서 거래의 단절은 물론 따돌림을 받게 되어있었다. 만약 이들의 초청이 있을 때 그들의 청을 거부하게 되면 살아가는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사업상 거래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교인들이 그 제사에 어쩔 수 없이 한번 참석하게 되고 한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면서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무디어져서 우상제물을 먹게 되고 성적으로 방종 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버가모 교회의 일인가? 오늘날에도 자신의 직업과 사업과 관련되어서 이런 종류의 일이 벌어지지 않겠는가? 접대라는 차원에서 거래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행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일차가 이차되고 이차가 삼차가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당연히 성적인 타락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1. 요한계시록 2:14과 민수기 31:16을 읽으십시오. 이곳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이 구절들은 그들이 타락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모압과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실패하자 다른 방법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죄와 미혹과 파멸의 수많은 문들을 닫아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다음 일을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발람의 제의에 따라 모압 왕은 그의 신들을 높이는 대축제일을 정하고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참석을 권유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있었으므로 발람은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많은 백성이 그와 함께 축제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금지된 곳으로 나아가 사단의 올무에 걸렸다. 노래와 춤과 이교 축제의 현란함에 미혹되어 그들은 여호와께 대한 충절을 포기하였다. 환락과 축연에 가담하여 술을 마시며 방종할 때에 그들의 지각은 몽롱해져서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정욕이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음탕한 행위로 말미암아 양심을 더럽힌 그들은 우상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이교도의 제단에 희생 제물을 드리고 가장 비루한 의식에 참여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독소는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이스라엘 진영에 퍼졌다. 전쟁으로 원수를 정복해야 할 이들이 이방 여인의 간계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온 백성이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이 범죄하는 첫 무리에 속해 있었으며 너무나 많은 백성이 범죄하여 거족적(擧族的)으로 배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모세가 그 악을 감지했을 때에는 원수의 계획이 이미 큰 성공을 거두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올산에서 음탕한 예배에 참가할 뿐 아니라 이교도의 의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에서도 거행되고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454~455)


교훈: 이스라엘이 이교의 음란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배경에는 발람의 제안이 있었다. 가나안 접경에서 발람은 온 이스라엘을 배교에 빠지게 하였다.


부가적용)

민 22장을 보면, "모압 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중다함 때문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초청"한다. 이유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 22: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말씀하셨다. 발람은 이 말씀에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모압 왕이 "더 높은 귀족을 보내자 발람은 그들과 동행"하고 말았다. 가는 도중에 "짐승인 나귀가 말할 정도로 막았지만, 발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과 반대"로 갔다. 결국 발람은 모압왕의 부탁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 2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발람의 계교로 이스라엘이 패역하게 된 것"이다. 발람의 악함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이처럼 패역함"에 있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싶으면 속히 그곳을 떠나야 한다.


화요일(12월 8일)

죄와 벌(민 25:4~5)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죄악에 빠졌다. 죄악의 내용은 음행과 우상숭배 두 가지였다.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을 섬기게 되었다. 바알브올은 ‘브올에서 섬기는 바알’이라는 뜻인데, 바알신의 지역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알브올에 예속되고 음행한 이 두 가지 죄 때문에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무려 24,000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죽임을 당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서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23,000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 9절에서는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고 했다. 바울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다고 했고 민수기에서는 전체적으로 24,000명이 죽었다고 했으니까 아마 첫날에 천명이 죽고 이튿날에 23,000명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날 1,000명이 죽었는데 다음 날 23,000명이 죽었으니 이백만명이 모두 죽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염병이 내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주 엄중한 명령까지 내리셨다. 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고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지도자 전체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하셨을까? 이스라엘의 지도자 전체가 죄악에 빠졌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죄는 백성들의 죄악을 방관하고 그들의 행위에 무관심한 것이었다. 14절을 보면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인의 종족 중 한 족장이며”라고 기록되었다. 지도자 살루의 아들이었던 시므리조차도 모세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음행을 저질렀다. 지도자들은 백성과 자녀들이 잘못하면 꾸짖어서 바로 잡아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으시고 지도자 전체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억울하게 함정에 빠졌다고 자신들의 죄를 변명할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여호와께 순종했더라면, 만약 그들이 그분의 계명들을 지켰더라면, 만약 그들이 알고 있는바 옳은 일을 행하고 서서히 유혹에 대해 문을 열지 않았더라면, 이 두려운 배교와 고통은 결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멀리 가리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들의 축제에만 참석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의 선지자인 발람이 그들을 초청했는데 무엇이 잘못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아주 신속히 제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1. 성경에서 사람들이 죄에 대해 조금씩 문을 열다가 마침내 상상도 못했던 무서운 결과에 이르게 된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까?

답: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와 유사한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 것을 보게 된다. 에덴동산의 하와로부터 예루살렘의 가룟 유다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었고, 경고를 받았으며, 더 큰 빛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그 빛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파멸을 가져오는 죄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 자신들도 살아오면서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이는 그분이 독재자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지를 아시기 때문이다.

2. 민수기 25:4~5을 읽으십시오. 왜 그렇게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습니까?(참조 8~9절).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답: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생각해 보라. 각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배교에 가담한 그들의 두령을 처형할 책임을 맡아야 했다. 따라서 그 두령의 가족들도 처형하는 일에 가담해야만 했다! 그리고 대낮에(문자적으로 태양 앞에서) 그렇게 해야 했다. 그것은 진영 전체에 큰 고통을 자아내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교훈: 가나안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이스라엘에 큰 배교가 일어났다. 각 지파의 두령들과 배교에 가담한 자들을 죽일 때에 온 백성은 큰 고통을 겪었다.


부가적용)

발람은 배후에서 도모한 자기의 악한 궤계가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아마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발람의 궤계처럼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마치 망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도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고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발람의 생각은 틀렸다. 유다서 1장 11절에 보면 발람의 길을 ‘어그러진 길’이라고 평했다. 발람은 어그러진 길을 통해 결정적인 오류(error)를 범했는데 하나님이 백성이 망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조금 징계를 받고 다시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부패시킨 발람은 31장 8절에 가서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도 때로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고 죄악에 빠져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결코 망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열심 있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하고, 다시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다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영원한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마치 비느하스가 열심을 가졌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열심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는 평화의 사신이 될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을 우리에게도 선포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수요일(12월 9일)

대담한 죄(민 25:6~18)


도입)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하나님은 그모스 신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색출해 죽이라고 명령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염병을 보냈다. 백성들은 회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침울하고 암담한 분위기에서 또 다시 놀라운 일이 생긴다.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장막으로 들어갔다. 6절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개의치 않고 당당한 모습이다. 그는 여전히 음란한 죄에 빠져 있다. 지금 이스라엘 내에 흐르는 영적 분위기를 모르고 있다. 성경은 이들의 죄를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나중에 처리된 후에 이 사람의 이름이 만천하에 공개한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시므리의 죄는 결코 용서될 수 없었다. 회개하면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했을 혼란과 고통은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었다(민 25:6)는 구절에서 암시를 얻게 된다. 아마도 그들은 배교 때문에 울었고, 괴로움 때문에 울었으며, 동족의 죽음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또한 염병이 진영을 휩쓸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과 가족들을 위해 울었으며,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회막문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더 이상의 파멸을 막기 위해 여호와께 애원했음을 가리킨다.

1. 민수기 25:6~18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이야기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입니까?

답:

비록 본문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비느하스가 장막으로 들어가 창으로 두 사람을 꿰뚫어 죽였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 시므리는 그 여인과 음행 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죽이는 일이 가혹한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상황을 생각해 보라. 온 진영이 그들에게 닥친 재난으로 인해 울며 여호와께 탄원하고 있을 때에 이 사람은 대담하고 뻔뻔스럽게도 미디안 여인을 진으로 데리고 왔고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그녀를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 음행을 범하고 있었다. 온 진영에 염병이 퍼지고 있는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므리가 족장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귀족 계층에 속하였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깊이 유혹에 빠지고 정욕에 사로잡혀 온 백성이 성막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분별한 행동을 하게 한 사례들을 무수히 보게 된다. 가인, 다윗과 밧세바,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를 생각해 보라. 이렇게 이성이 마비된 자들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너무나도 철저히 그들을 감싸서 죄를 더 이상 죄로 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교훈: 족장 중 하나였던 시므리의 공공연한 죄는 사람이 일단 죄의 유혹에 깊이 빠져서 이성이 마비되면 어떤 죄라도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명령에 모세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5절 말씀을 보니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사사들은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사사들이 죽어야 할 사람들인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들 꾸짖으시니까 너희 족속 중에 바알 브올에 속한 사람들이 있으면 죽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꾸고 나니까 어떤 결과가 오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명령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징계를 내리셔서 24,000명이 죽게 된 것이다. 무려 24,000명이 죽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문에 모여서 울기 시작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얼마나 많은 장례가 치러졌겠는가? 6절을 보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라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울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서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왔다. 모세와 모든 백성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하는 판국에 심판의 원흉이었던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오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 사람이 바로 지도자 살루의 아들이었던 시므리였다. 이 시므리가 고스비라고 하는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장막으로 들어갔는데 모든 형제들이 다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으니 이 얼마나 부패한 집안인가?


목요일(12월 10일)

미디안 족속의 멸망(민 31:1~24)


도입)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재물을 해하면 해한 원수로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재물을 해하는 것보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도덕을 해친 그 해가 더 큰 해이다. 왜 그 영향이 크기 때문에. 또 도덕의 해보다 윤리의 해, 윤리의 해를 끼친 것이 더 우리에게 큰 원수가 되겠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을 향해 가는 거룩한 전쟁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특별히 미디안과의 전쟁은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하셨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유혹한 민족이다. 광야에서 돌아 와 이제 겨우 몇 번의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이를 분리시키려고 했던 미디안의 죄질은 매우 나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 전쟁을 원수 갚는 일로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거룩은 미디안의 완전한 제거를 말한다. 그들을 단순히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진멸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을 보호하시고자 했다. 사람의 눈에는 냉혹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을 보호하셔야 했다. 구원의 길로 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옛 습관, 특별히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우상숭배, 물질숭배, 사람숭배. 이방신에 대한 호기심 등의 거룩을 위협하는 것들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 사람의 정과 판단으로 남겨 두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거룩은 온전한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남겨 두어서는 안된다. 큰 오점이나 작은 티끌이나 모두 거룩(정결)을 해치는 것이다. 가나안 땅 입구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상숭배를 얼마나 중요한 죄로 다스리시는가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에서의 배교로 무서운 파멸을 경험하였으나 그들을 속여 고통을 가져다 준 미디안 족속은 아직 심판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공의는 실행될 것이었다. 특히 이 미디안 족속은 열렬한 우상숭배자들이었고 그에 따른 악을 행하였다. 아모리 족속처럼 미디안 족속도 "그들의 죄악의 잔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엘렌 G. 화잇, 리뷰 앤드 헤럴드, 1893년 5월 2일자).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들의 멸망을 선고하셨다.

1. 민수기 31장에서 미디안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이 기사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무엇입니까?

답:

어린 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계시를 신뢰해야 하며, 우리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은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민수기 31:13~18을 읽고 혼란에 빠지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많은 미디안 여인들은 수천수만 명을 죽게 한 유혹에 직접 가담한 여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여아들과 처녀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돌보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 연약한 여자들은 부모도 죽고, 사회 모든 구조가 파괴되어 버린 가운데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었다. 그 당시의 가혹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하여 이 여인들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취해짐으로써 그들은 홀로 남겨지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처사는 결국 이스라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와 조화를 이루었다.


교훈: 미디안 족속이 멸망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남겨진 여아들과 처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도록 모세를 통해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다.


부가적용)

미디안의 아이들과 여자들을 살려둔 것에 대해서 모세는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만을 남기고 남자아이들과 여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그의 명령은 잔인하지 않은가? 어떻게 온유한 자라고 알려진 모세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나? 그러나 나의 이런 질문에도 모순이 있는 것은, '왜 남자들을 다 죽인 것은 잔인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남자들'은 다 죽여도 별반 이의가 없다가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우리 안에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한 관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휴머니즘'의 관점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휴머니즘'은 가치 기준을 판단하는 데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내 안도 있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 중심의 판단 기준,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그러나 남자들을 다 죽인 것에 대해서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고 읽어 내려간 것은 휴머니즘적인가?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인다고 하니까 그제야 동정심이 일어나는 것은 왜인가? 휴머니즘의 불완전함과 이중 기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휴머니즘'이 모든 성경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휴머니즘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기준은 아니다.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성경 안에서 발견한다 해도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휴머니즘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속한 것이지, 사람들 자체가 선하고 존귀해서가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 본문과 같이 휴머니즘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대할 때에 내가 가져야 할 자세는, 성경은 우리 시대와 다르다느니 혹 하나님은 잔인하다느니 따위의 '오늘날의 문화로 형성된 내 판단 기준'으로 섣부를 비판을 하기보다 나의 모든 판단 기준을 내려놓고 과연 '하나님이 가지신 관점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할 때 보이는 것은 '인간의 죄'이다. 휴머니즘은 인간을 '선(善)'으로 포장하기에 여자들과 아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범죄케 한 '죄의 뿌리' 곧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최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만든 '사내를 안 미디안의 여인들'을 보시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앞으로 '필연적으로' 죄의 싹으로 자라나서 하나님 백성들의 원수가 될 아이들을 보시고 그들을 죽이신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는 감추고 오직 '인간 자체를 존귀하게 높여 평가하는 오늘날의 가치문화의 눈'에 하나님의 행동이 합리적으로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정함과 부정함'을 철저히 다루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판단 기준은 결코 '휴머니즘'이 될 수 없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금요일(12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41장 '요단에서의 배도'(453–461).

“이스라엘 백성이 죄에 빠진 것은 저희가 표면상으로 안락한 상태에 있을 때였다. …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자기 자신을 믿는 정신을 품었다. … 그리스도인이 공공연하게 죄를 범하기 전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준비 과정이 진행된다. 사람의 마음이 단번에 순결과 거룩함에서 부패와 타락과 범죄로 전락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 금수와 악마처럼 타락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바라봄으로 우리는 변화를 받는다. 불순한 생각들을 품음으로 인간은 한때 그가 미워하던 죄를 좋아하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5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성(性)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오용되기 쉬우며, 신자들까지 파멸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분야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2. 죄로 인해 이스라엘 진영을 휩쓸었던 재앙을 생각해 보십시오. 온 백성이 겪은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3. 이스라엘은 하룻밤 사이에 타락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단이 파놓은 함정으로 이끄는 죄에 대해 조금씩 문을 열고 있지는 않습니까? 표준을 높이는 것은 이러한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가나안 접경에서 이스라엘이 빠졌던 도덕적 타락은 마지막 때에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떤 방법으로 배교에 빠뜨릴지를 예고해 준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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