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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미리 계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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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0.29 00:50 조회수 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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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6과 미리 계획함

11월 7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28분)

 

도입)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스스로의 도덕성과 종교성으로서는 결단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허망한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초월적인 능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자라면, 더 이상 자행자지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뤄 가는 데 가장 큰 관심과 열심을 나타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확실한 약속으로 그곳에서의 제사규례를 주셨다(15장).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하나님은 한 번 더 제사의 규례를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 거민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 땅에서 종으로서 살아왔고 또한 그들의 풍습과 종교에 물들었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함을 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정한 제사를 통하여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셨다.

 

기억절: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겔 20:18~19)

 

연구범위: 민 15장, 고후 2:15~16, 갈 3:26~29, 엡 5:2, 골 3:11.

 

안식일 오후

민수기 15장이 시작되면 소동과 반역과 수치와 패배의 장면은 사라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순종이 가져온 고통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교훈을 얻었다.

군중은 이제 다시 광야로 되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민수기 15장은 바로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라.(2절)

뚜렷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여전히 확실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었다. 이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진 몇 가지 특별한 지시 사항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비록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특별한 명령이지만 영적인 교훈과 원칙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일요일(11월 1일)

감사(민 15:1~10, 18~21)

 

도입)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이다. 감사는 기독교의 본질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다른 종교도 기독교처럼 감사를 본질로 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모든 종교는 구원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니, 무엇을 감사하겠는가? 설령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 구원은 전적으로 내 노력으로 이루었으므로, 누구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반대이다. 기독교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데서 시작한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자격 없는 자가 거저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감사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질이며, 핵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와 허물로 광야에서 유리, 방황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기필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입성시키고자 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 바로 광야 생활 중에서의 율법 규례를 제시한 일이다. 즉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의 생활을 전제한 여러 규례들을 미리 제시해 주심으로써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실패로 광야에서 죽어 가야 하는 슬픈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높은 도덕률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와 거룩한 집념 때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1. 민수기 15:1~10, 18~21을 읽으십시오. 이 예물의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기름과 포도주와 곡식 가루를 가져온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소제(素祭)는 히브리어로 '민하'(minchah)라 하는데, '선물' 또는 '감사의 예물'이라는 뜻이다. 소제에는 밭의 소산에 내리신 하나님의 복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가루, 감람유, 포도주가 포함되어 있었다.(신 8:18)

민수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명령은 참으로 언젠가 그들이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와 다른 곡식을 밭에 파종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젊은 세대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포도원을 세우며, 감람나무나 무화과, 석류 같은 다른 과목을 재배할 과수원을 세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피 흘림이 없는 이 제물은 신실하기만 하다면 그들의 것이 될 물질적인 복을 상기시켜 주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예물 속에 이 모든 생각이 담겨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날마다 약속의 땅을 상기하고 고대할 수가 있었다.

 

2.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개념을 어떻게 적용했습니까?(롬 12:1, 고후 2:15~16, 엡 5:2).

답:

그 당시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행하신 지난날의 역사와 그들을 위한 장래의 약속에 대해 감사와 찬양의 자세를 갖게 하고자 하셨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담아 소제를 드리도록 지시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감사의 마음을 예물로 표시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참으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의 기초요, 동력이요, 근본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감사를 빼버린다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매정하게 다루시거나 혹은 무조건 학대하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아시고 그 약한 체질을 익히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릇 범죄한 일이 발생할 것을 염두에 두시고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던 것이다. 여기서 '그릇 범죄 한다'라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고의성이 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와 연약함으로 인한 비고의 적인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의 비고의적인 허물에 대해 하나님은 무조건 매도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속량하고 해결할 방도를 마련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다. 이러한 지극한 감사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정성이 예물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월요일(11월 2일)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민 15:14~16)

 

도입)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각종 규례와 법도와 그에 따른 축복은 단순히 순수한 혈통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영내에 거하는 모든 자들, 즉 이방인들까지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는 혈통적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아야 갈 수 있는 죄인이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야 할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든 지역, 모든 민족에게 이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가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고 한 것은 본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모두 법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외국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법 앞에서 동일한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동일한 권리도 갖는다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또 하나의 진보적인 개념은 타국인 즉 그들의 유업과 믿음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태도였다.

 

1.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제2세대에게 어떤 특별한 명령이 주어졌습니까?(민 15:14~16). 이와 같은 원칙이 신약에는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갈 3:26~29, 골 3:11)

답:

타국인이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우거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로서, 그들이 남자이면 할례를 받았다. 그들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취급하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민 15:16). '하나됨'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자들에 관하여 어떤 탄원을 올렸습니까?(왕상 8:41~43). 이사야는 성전에서 예배하기를 원하는 타국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사 56:6~7)

 

답: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목적을 숙고해 볼 때, 이 구절들은 참으로 합당한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와 같이 그들이 소유한 진리와 가르침에 있어서 이방 세계와 구별점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고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이방인들에 대해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여러 면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도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에 전파해야 할 특별한 진리를 가졌으며 보호하고 수호해야 할 기별을 위임 받았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하나님과 이 시대를 위한 그분의 기별을 알기 원하는 자들에 대해 넓은 포용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타국인을 포용하라고 명령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만 예속되어 있는 지방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친히 창조하시고 그 모든 질서를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신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 있는 자들도 사랑하시며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계신다. 만약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따라 참회의 자리에 선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자세하게 성명하신 후 오늘은 “부지중에 그릇 범죄하였거든” 이라고 하시며 안전장치를 알려주시고 계시다. 그리고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불문하고 누구든지 마지막 이 말씀까지 어기면 그는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로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 한 성령훼방으로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천국에서 온전히 실족한다는 것으로 바로 마태복음/12장과 마가복음/3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그리고 또한 이 말씀은 피조물인 우리 인생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 해결이 절대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생이 살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셨으며 그 길이 우리 인생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인 것이다.

 

화요일(11월 3일)

부지중에 지은 범죄(민 15:22~27)

 

도입)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셨지만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치한 자에게는 예외 없는 심판을 행하신다. 실로 하나님은 이러한 완악한 범죄자들을 준엄히 다루심으로써 당신의 영광과 거룩을 친히 보존해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민수기 15장에 언급된 이 세대들이 노예 시절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평생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살면서 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그들의 부모들뿐 아니라 이들 역시도 같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제거해야 할 나쁜 관습들과 새롭게 배워야 할 좋은 습관들이 많이 있었다.

 

1. 만약 회중이 집단적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범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그들이 부지중에 범한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여호와께 속죄제물을 가져왔다는 사실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민 15:22~27)

답:

그들의 죄가 속죄 제물을 통해 속(贖)하여졌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회중의 헌신이 새롭게 됨을 의미했다. 여호와께서 부지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지은 죄를 구분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나 부지중에 지은 범죄도 죄로 여겨졌으므로 속할 필요가 있었다.

 

 

2. 개인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이는 회중이 죄를 속하는 과정과 어떻게 달랐습니까?(민 15:27~29)

 

답: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자신의 품성이 불완전하고 생애에 결함이 많음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과연 성신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는지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에게 말하노니 '낙심하여 뒤로 물러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과실로 인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원수에게 패배를 당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배척을 당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정로의 계단, 64)

 

교훈: 이스라엘 백성은 고의로 범한 죄뿐 아니라, 부지중에 지은 죄까지도 속죄 제물을 드림으로 속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부가적용)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회중이나 개인이 모르고 범한 죄를 속하는 제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회중전체가 잘못 행하였을 때 드리는 속죄제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회중들이 함께 범한 죄라고 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으심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만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죄를 범하였다고 가볍게 여기거나 합리화 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범한 개인의 범죄에 대하여도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입장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그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수요일(11월 4일)

고의로 범한 죄(민 15:30~31)

 

도입)

이스라엘 백성이든 이방인이든 고의로 죄를 범한 경우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그들을 백성 중에서 끊어 버리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멸시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알면서 고의적으로 어겼기 때문이다. 고의로 범하는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에 대하여 공의로우신지를 알 수 있게 된다.

 

 

1. 민수기 15:30~31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왜 이처럼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습니까?

답:

'짐짓'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높이 든 손으로'(with a high hand)라는 뜻인데, 거만하고 반항적인 자세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가데스에서 여호와께 완고함의 죄를 범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형벌 대신 그들을 광야로 추방하셨다. 중요한 점은 여호와께서 죄를 심각하게 다루셨다는 것이다. 죄를 후회하는 자들은 흔히 그 죄를 들켰기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죄를 슬퍼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완고한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겠는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참으로 죄를 뉘우쳐야 한다.

 

2. 민수기 15:32~36을 읽으십시오. 여호와께서는 왜 그를 돌로 치는 일에 온 회중이 참여하게 하셨습니까? 여기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이스라엘 회중이 그들의 동족 중 하나를 돌로 쳐 죽이는 일은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고자 그렇게 하신 것 같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그리고 그분께서는 공동체의 집단적 특징을 고려함으로 각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행한 일은 전체의 안녕에 영향을 미친다. 몇 사람의 불평이 온 회중으로 하여금 광야를 유리하게 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던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각자의 행위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악 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신정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적인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완고함의 죄로 인해 즉각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교훈: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대담하게 범한 사람에게 즉결 심판이 선고되었다. 그 사람의 죄는 모든 회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허물이라는 것은 고의적 범죄는 아니나 부지중에 지은 죄를 말한다. 레위기 4장에 보면 범죄 했을 때도 속죄제를 드리라 했고, 허물이 있을 때도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셨다. 그러기에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도 죄요, 부지중에 짓는 허물도 죄임을 가르친다. 그래서 죄와 허물이 꼭 같은 중량의 죄임을 알 수 있다.

 

목요일(11월 5일)

옷단 귀에 술과 함께 단 청색 끈(민 15:38~41)

 

도입)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구별된 선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자들과는 다른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온 마음과 온 생활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과 정결을 유지해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친 백성임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선민으로서의 자각은 자신을 죄악에 방임치 않으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뤄 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옷단의 술과 같은 규례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반영한 규례라 하겠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각할 수 있는 확실한 끈을 가지고 있는 자는 세속에 쉽게 물들지 않을 것이다.

 

정통 유대인들을 보면 그들이 입는 겉옷 테두리에 흰색 술이 달린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유래를 성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1.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의복에 무엇을 더하도록 지시하셨습니까?(민 15:38)

답: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에게는 옷단에 여러 가지 색깔의 술을 다는 일반적인 풍습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차용하셨다. 청색 끈을 술(fringe or tassel)과 함께 외투의 네 귀퉁이에 달게 하였다. 오늘날 기도용 방석 네 귀퉁이에 술을 다는 것은 흰색과 청색의 끈으로 매듭을 묶던 전통과 관련이 있다.

 

2. 술이 달린 옷을 입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어떤 특별한 것을 기억하게 하고자 하셨습니까?(민 15:39~41)

답:

'기억하다'라는 단어가 여기에 두 번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술을 볼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야 했다(민 15:40). 다른 신들을 섬기려는 유혹(영적 간음)이 들 때 술에 있는 청색 끈을 보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다짐할 것이었다.(41절)

분명히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명백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할 바를 즉시 기억할 수 있는 어떤 표시를 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비록 우리는 오늘날 술이 달린 옷을 입지 않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우리 죄의 대가와 구속의 값,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고 한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기억나게 하는 십자가를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옷단 귀에 술과 함께 청색 끈을 달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셨다. 우리는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그분의 구원을 상기해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옷단의 귀에 술을 달게 명령하신 이유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 육적 이스라엘 민족으로 국한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복에 술을 달아서,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백성들과 외모상 구별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으로의 충성의 의무를 의식하는 상징으로서 깊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술이란 털실 같은 것으로 긴 방울같이 달아 덜렁거리며 다니게 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겉옷 자락에 다는 옷술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기 위한 징표였다. 그것을 보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징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명령을 어기고 어긋나니까 그것이라도 보고 제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옷술을 달게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약시대와 와서 이 옷술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 막 6: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이제 바로 그 옷술,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구원하는 징표가 되었다. 온갖 병자들이 예수님의 겉옷에 매달린 옷술에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나았고,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경계의 징표였던 옷술이 신약에서는 구원의 징표로 변했다. 그것은 온전히 예수라는 분 때문이었다.

 

금요일(11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미쁘심을 선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방법이다. 우리는 그 옛날 성도들을 통해 알려진 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효력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 속에 있는 하늘의 능력의 역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각 개인은 모든 다른 개인과는 구별되는 생애를 살며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험과는 같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개성으로 특징지어진 찬송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밑받침이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귀중한 고백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는 강력한 능력이 된다.”(시대의 소망, 34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위에 인용한 엘렌 G. 화잇의 글에 나오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강력한 능력이 됩니까?

2.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대한 태도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동시에 그들에게 우월감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의 믿는 바를 전할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1세대는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어야 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고대하도록 격려하셨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희생제사에 관한 더 많은 지시와, 믿음으로 돌이킨 타국인에 대한 사랑의 태도와, 부지중에 범한 죄와, 대담하게 지은 죄와, 옷단에 청색 실을 술에 더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 참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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