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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유대인과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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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7.01 13:24 조회수 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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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유대인과 이방인

 

7월 10일

일몰: 오후 7시 55분

 

도입)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대인의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별 탈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유무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들의 구원을 확증하여 주셨다(살전 1:5-6; 고전 2:1-5; 롬 15:18).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율법을 갖고 살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없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신앙했다. 함께 그의 아들의 강림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기다리면서....그러나 이런 밀월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율법은 언제고 한 번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한쪽은 율법대로 살고 또 한쪽은 율법을 모르는 채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긴장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 됨의 중요한 표징으로 율법을 선물로 받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된 것은 유대인 사역자들이 보기에는 이방이 주께로 나와 큰 의미의 이스라엘에 편입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기억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 활기찬 토의를 위해 ‘토의를 위한 질문’을 적극 활용합시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레 23장, 마 19:17, 행 15:1~29, 갈 1:1~12, 히 8:6, 계 12:17.

기독교의 첫 번째 회심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신약성경에는 그들이 할례를 포기했다든지 유대교 절기를 무시하도록 요구받았다는 어떤 암시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범위까지 유대 법을 지켜야 하는가?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가 소집되었다(행 15).

 

이방인들을 율법과 규례의 무거운 짐으로 괴롭게 하지 말자는 공회의 강력한 결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사들은 믿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행하고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형태만 다를 뿐이지 오늘날도 동일한 문제가 존재한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신자로서 십계명에 순종하며 안식일을 고수하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유대주의자나 율법주의자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가? 또한 이제 신약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과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고 있는가? 반면 더 많은 구약의 율법과 규범들을 준수하려는 자들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로마서는 당시의 교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하고 있다.

 

일요일

7월 4일

더 좋은 약속

 

도입)

바울은 로마서 15:16에서 자신의 소명의 성격을 언급하면서,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쓰고 있다. 이 말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방인의 구원은 예부터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이어져 오던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이 되는 것이었다. 이 접붙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성령의 선물로 확증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의 구원을 이스라엘로의 접붙임으로 본다면, 유대 그리스도인 중에서 율법에 특출 나게 열심을 내던 사람들 일부가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온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바울의 신학적 고민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그도 철저한 율법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있고 나서부터 그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영역인 이방인들의 세계에 율법과 할례를 요구하면서 ‘그리스도만의 복음’을 위협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갈 1:7; 2:4: 4, 12). 이제까지 문제가 없었던 그리스도와 율법 사이가 대립의 관계가 되며 내재해 있던 긴장이 전면에 드러나고 평화의 공존이 깨어지는 정황이 된 것이었다.

 

❶ 히 8:6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이 전하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더 좋은 약속”이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구약 종교와 신약 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마도 신약이 메시야, 즉 나사렛 예수의 출현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세상의 구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분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그가 베푸는 속죄를 통해서 인간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 오직 그의 완전한 삶의 전가를 통해서 인간은 정죄함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예수의 의가 아니면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구약의 성도들도 메시야 시대의 축복과 구원의 약속을 내다보았다.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또는 구세주로 영접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께 헌신한다면 값없이 주시는 의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함없이 유효하였다. 도덕적 율법에 대한 순종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❷ 다음 신약의 말씀들은 도덕적인 법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마 19:17, 계 12:17, 14:12, 약 2:10~11.

제사제도와 의식법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종교 문화였으며 옛 언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가리키고 있었던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대제사장으로서의 봉사를 통하여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 좋은 약속”에 기초한 새 질서가 소개되었다.

로마서의 주된 목적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돕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환을 위해서는 많은 이해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훈: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보다 더 좋은 약속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하지만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에는 변함이 없다.

 

부가적용)

옛 언약인 율법의 영향 아래 있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 판에 새겨진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 언약의 내용을 지켜야 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마음에 새기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피나는 보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시는 새 언약이 주어진 이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보전하기 위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영원히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이다(고후 3:3) 이제 성도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오직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의의 법을 실천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아래 놓여 있는 우리들은 옛 언약 아래 놓여 있던 이들보다 더 좋은 여건에서, 보다 확실한 보중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옛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노력의 하나를 덜은 만큼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따라 살도록 보다 충성을 다 해야 한다. 주님은 이러한 견지에서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우리가 다윗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시110:4)이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 다른 제사장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약속의 보증(히7:22)이 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고 대제사장으로 삼으셨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고 다시 완전히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계시며 다시 오실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며, 죄가 없기 때문에 완전한 대제사장이자 완전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었던 분,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마5:17) 더 좋은 약속의 보증이 되시는 분이다.

 

월요일

7월 5일

유대인의 법과 규례

 

도입)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율법은 율법의 형식적 규례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율법 규례의 외형적 준수(안식일 준수, 정결 규례 준수 등)에만 치중하는 당시 종교관례를 무시하고 율법의 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 선생들과 회당의 지도자들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양심 있는 종교인들은 예수를 진정한 ‘랍비’로 생각하였다. 니고데모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산헤드린의 공회원인 니고데모란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❶ 시간이 있으면 레위기를 훑어보십시오. 특히 레 12장, 16장, 23장을 보십시오. 레위기 에 나오는 모든 규례와 의식들을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많은 것들이 신약 시대에 중 단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약의 율법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1) 도덕법, 2) 의식법, 3) 시민법, 4) 각종 규례와 법도, 5) 건강법.

이런 구분은 인위적인 면이 있다. 사실 각 범주는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중첩되어 있다. 구약 백성들은 그것이 분리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요약된다(출 20:1~17). 십계명에는 인간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의무들이 요약되어 있다. 이 열 개의 조항으로부터 모세오경의 수많은 규례와 법도들이 확대 적용되었다. 심지어 시민법조차 도덕법에 기초되어 있다. 시민법은 이웃과의 관계, 공적 권위에 대한 시민들의 의무들을 정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위반 사항에 대한 처벌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의식법은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에 관한 규정들과 여러 제사들 그리고 백성 개개인의 책임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정된 절기를 준수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건강법은 다른 법들과 함께 다뤄지고 있다. 부정과 관련된 여러 규례들은 제의적인 부정을 정의하고 있지만, 위생과 건강의 원칙까지 포함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고기에 관한 규정은 건강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체로 유대인들은 이 모든 율법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달된 하나의 꾸러미라고 인식하였지만, 개념적인 구분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직접 전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다른 율법들은 모세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제사제도는 성소가 운영되는 동안만 준수될 수 있었다. 시민법의 경우 유대인들이 독립성을 잃고 다른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은 이후로는 거의 적용될 수 없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제사법도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었으며, 메시야가 등장한 이후에 표상들이 원형을 만남으로써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교훈: 율법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그 가운데 어떤 율법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반면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 중요하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사상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적인 적용을 거부하고 그 동기와 내면성을 철저히 하는 방향으로 율법의 정신을 해석하였다. 예수께서는 손을 씻는 등 형식 의례적 정결 요구보다 내면적 순수성, 즉 내적 정결을 강조하였고. 안식일의 외면적 준수보다도 안식일의 제정의 참된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외적 정결법과 안식일 법과 관련하여 유대 장로들의 전통과 마찰과 긴장을 일으켰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외면적인 것(씻고 씻지 않음)이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것(음란, 탐욕, 살인 등)이며, 안식일에도 병든 자의 치유를 위하여 병 고치는 일, 가축을 위험에서 구출해 내는 일 등은 안식일 정신에 맞다고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는 당시 제도적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는 율법을 모독하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윤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 율법의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차원으로 고양시키셨던 것이다.

 

화요일

7월 6일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도입)

행 15:1-21은 할례 문제를 발단으로 처음 예루살렘 총회가 소집된 모습을 보여준다. 행 10-11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몇몇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교회의 공동체 일원이 된 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도를 통해 교회에서 할례도 받지 않은 이방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그러한 이방인의 수가 유대인들보다 많아지면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의 정통성과 도덕성이 흐려질 것으로 염려하였다. 특히 바리새파에 속한 강경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을 심하게 하였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파의 견해를 행 15:1절과 5절에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회 조직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그것은 할례 받은 유대인 기독교인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 전부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❶ 행 15:1을 읽으십시오. 어떤 문제 때문에 의견차이가 생겼습니까? 이것이 단지 유대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창 17:10 참조)

사도들이 안디옥에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과 협력하여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바리새인들의 분파로서 유대 지역에서 온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내부에 논쟁을 확산시키고 이방인 신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교사들은 할례와 구약의 모든 의식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확신하며 그것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의식들에 관하여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기독교로 개심한 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친히 제시하신 예배의 어떤 변화도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들이 기독교의 의식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들은 모든 희생 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예표 했으며, 표상이 원형을 만나면 율법시대의 제의들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분별하는 데 더뎠다.

 

❷ 행 15:2~12을 읽으십시오. 이 논쟁은 어떻게 진정되었습니까?

“바울은 직접적인 지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향하는 반면, 항상 교회의 교제를 통해 연합을 이룬 신도들의 몸, 즉 교회에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는 자문이 필요함을 느꼈고,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것들을 교회 앞에 제출하여 형제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기를 기뻐하였다.”(사도행적, 200)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종종 자신의 선지자적 부르심과 예수님과의 만남과 사명에 대하여 언급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교회를 위해 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부르심이 어떠하든 그가 전체 교회의 일원이며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세계 교회와 협력하여 일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훈: 유대인 신자들의 주장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 교회를 통해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부가적용)

예루살렘 총회에서 강경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은 후 침례를 주어 교회의 일원으로 받자는 주장을 하였다. 저들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전하여진 율법을 지키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완전한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완전한 구원은 믿음과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해석을 하였다. 이러한 혼합주의 사상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바울의 신학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가르친다. 행 10:44-48에서 사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성결의 영인 성령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놀랐다(행 10:45).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증거다(행 11:17,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무할례자 이방인에게 침례 행한 것에 대해 변명하였다. 베드로가 변명하는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받을 수 있었다. 성령이 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다는 증거가 된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물침례를 훨씬 능가하는 신적인 권위로 확인되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사람이 거부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가 누구관대 능히 하나님을 막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수요일

7월 7일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도입)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였던 멍에란 할례로 대표되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이방인 중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 그것을 의논하였으나 바리새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도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사도와 장로들이 의논하여 많은 변론이 있었으나 베드로가 일어나 그 모든 문제들을 일단락 짓는다. 행 15:10절에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고 하면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구약의 율법과 할례를 베드로는 조상들도 능히 지지 못하던 멍에라고 표현한다. 이 말을 통해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만이 구원됨을 강조한다. 그렇다, 우리는 때때로 새신자들에게 자신들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지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구원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이시다. 율법의 전문가 바리새인이 그리스도의 전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면서 마음 속 저 구석에는 신학적 혼돈의 씨를 품고 다녔다. 그것은 결국 갈라디아의 상황에서 번뇌로 발아하면서 갈등으로 표면화 된다. 그러나 바울에게 갈라디아의 분노와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로마서의 평화가 파노라마처럼 밀려들어 왔다. 율법의 사도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율법과 그리스도가 공존하던 시간에서 그리스도만의 시간으로 그리고 다시 율법과 그리스도가 통합을 이루는 로마서의 꽃으로 바울은 숨가쁘게 그러나 천천히 옮겨지고 있다. 신약성서는 바로 바울의 삶에서 이루어진 그의 이러한 신앙의 전이(轉移)의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정경화된 문서이다.

 

❶ 행 15:5~29을 읽으십시오. 총회가 내린 결론은 무엇이며, 그 논리는 무엇이었습니까?

결론은 유대주의자들의 의견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든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이 그리스도교의 의식 속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사도행적, 189)

10절에서 베드로가 구약의 율법들을 짊어질 수 없는 “멍에”로 묘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주님께서 백성들의 멍에가 되도록 그러한 율법을 제정하셨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대신 오랜 세월 동안 종교 지도자들의 구전을 통해서 내려온 많은 율법들이 처음에는 축복이었지만 점차 짐으로 변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런 짐으로부터 이방인들을 보호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십계명 준수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를 멀리하라”고 말한 총회가 간음이나 살인을 금하는 계명의 폐기를 수용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❷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어떤 규칙들이 적용되었습니까? 행 15:20, 29. 특별히 이런 항목 들이 채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 신자들은 그들의 율례와 전통을 이방인들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이방인 신자들은 예수 안에서 함께 연합해야 할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행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사도와 장로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삼가고 간음과 목매여 죽은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교훈하는 데 동의하였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안식일 준수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짓말이나 살인을 금하는 계명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교훈: 왜곡된 종교적 의무들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율법의 사상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셨고 또 차별하지도 않으신 증거가 우리에게 주셨던 동일한 성령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셨음이다(행 15:8). 이는 이방인들의 죄를 씻어 마음을 깨끗이 하신 것은 저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 하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저들의 죄를 깨끗이 씻었다고 강조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바로 가르쳤다. 베드로에 의하면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 종교적 의무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종교적 의무)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이 율법만 지켜온 자기들의 조상이나 그들 자신들도 준수할 수 없었던 것인데 그것을 이방인 기독교인에게 요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종교적 의무인 모세의 율법을 폐하셨는데 다시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길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므로 구원의 방편으로서 그림자 역할을 하였던 구약 율법의 효력은 끝이 났으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도입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길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밝혔다. 또한 예루살렘 공회는 인간의 능력과 공로로는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수 없음을 입증하였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까지 폐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목요일

7월 8일

갈라디아의 이설

 

도입)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한쪽은 모세의 율법대로 살고 또 한쪽은 율법을 모르는 채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긴장이었다. 갈라디아서에 율법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심하게 기운다. 그러나 율법은 언제고 한 번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방인들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갈 1:6; 3:3). 바울은 일단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율법을 공격해야만 했다. 율법이 아무리 선한 것일지라도 계시의 그리스도와 대립관계에 들어가면 율법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런 흥분 속에서 쓰여진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한 통렬한 독립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열정 속에서 튀어나온 바울의 분노와 흥분은 그대로 신학적 가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체의 인간 전통과 문화는 한 번쯤 매를 맞아도 좋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희자된 적이 있다. 갈라디아의 상황은 율법이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한 때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영원히 죽일 리가 없었다. 갈라디아의 흥분이 가라않고 적당한 세월이 흐르면서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묵상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율법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의 상징이었다. 자신이 무작정 몰아붙였던 것처럼 율법이 마냥 골칫거리라면 율법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도 문제가 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귀결된다(롬 3:5, 26; 9:14).

 

총회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순수한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가볍게 다룰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❶ 갈 1:1~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갈리디아에서 직면한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 문제의 중요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훨씬 이전의 상황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주제를 더욱 발전시켜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으며 이방인 신자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진정한 위치와 기능을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에서 했던 것처럼 로마에서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의식법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도덕법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묻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쟁점은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의무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결정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읽고 어떤 이들은 도덕적 법과 십계명(특별히 제4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유효 하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신의 핵심과 역사적 정황 그리고 바울이 다루고자 했던 문제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지 율법 심지어 도덕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도덕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십계명에 대한 순종은 다뤄지지 않았다. 문제를 그렇게 끌고 가려는 자들은 바울이 다루지 않은 현안을 본문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교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부가적용)

자신이 개척하지 않은 로마교회에 가기를 원하는 바울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로마서에 담아야 했다. 로마서는 자신의 존재와 사역과 신학을 소개하는 자천서와 같다. 갈라디아서의 긴장은 바울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사역의 말년에 접어들어 정리된 바울의 산학은 로마서에서 꽃을 피운다. 갈라디아서에서 보였던 율법에 대한 과격성도 완화되어 좀 더 침착한 논리로 정착한다. 당연히 율법도 좀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갖는 관계가 좀 더 통합적으로 구상되고 있다. 이제는 율법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 없는 이방인도 사실 율법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한다.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도 양심이 율법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롬 2:14-15). 이유 없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논증코자 할 때, 율법의 필요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양심은 율법이며, 율법은 곧 양심이 된다. 율법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율법의 교훈은 ‘지극히 선한 것이며 율법에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롬 2:18-19).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알면서 행하지 않는 인간이다(2:21-24).

 

금요일

7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188~192, 194~197 “유대인과 이방인”, 383~388 “갈라디아에서의 배교”, 부조와 선지자, 310~312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시대의 소망, 27~30 “선택된 백성”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었다면 왜 시내산에서 다른 언약을 세우셨을까?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 . .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더 큰 진리가 있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예루살렘 신자들 중에서 일어난 거짓 교사들의 감화로 갈라디아 신자들 중에는 분열과 이단과 육욕주의가 신속히 유행하고 있었다. 이 거짓 교사들은 복음의 진리를 유대인의 유전과 혼합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의문의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였다.”(사도행적, 38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는 어떤 방식으로 교회나 가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멍 에”를 짊어지게 합니까?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 할 높은 부르심과 관계없이 우리의 생활 방식과 표준에 대하여 지나치게 느슨한 것은 아닙니까?

2. 십계명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그런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그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 잘못됐습니까? 그들이 실제 십계명을 완전히 무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십계명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갈 1:1~12을 다시 읽고 복음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바울의 열정을 보십시오. 본문의 말씀은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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