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과 바울과 로마서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 1과 바울과 로마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6.27 03:49 조회수 6,083
글씨크기

첨부파일

본문

제 1과 바울과 로마서

7월 3일
일몰: 오후 7시 57분


도입)
로마서는 흔히들 “복음의 노란자”라고 한다. 그만큼 복음에 관하여 아주 함축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신학자 칼바르트가 「로마서 강해」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과 같다”라는 표현을 했다. 실제로 로마서를 통해 구원 받은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어거스틴은 롬 13:13-14의 말씀을 읽고 회심하였고, 마틴 루터는 롬 1:17절을 통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으며 요한 웨슬러는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경청하다가 마음이 뜨거워져 회심을 체험했고, 존 번연은 로마서의 주제들을 벧포드 감옥에서 묵상하다 천로역정을 쓰게 되었다. 로마서가 그리스도인들이나 신학자들에게 이토록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로마서가 성경의 모든 책 가운데서 믿음의 본질을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에는 두 가지 초점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들이 또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과정에서 연구하는 연구를 통해 이젠 우리가 변화를 경험할 차례이다.


기억절: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 교사(리더)는 “교과에 밑줄 그어 오셨나요?”하고 꼭 물어보십시오.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행 28:17~31, 롬 1:7, 15:14, 20~27, 엡 1장, 빌 1:12.

로마서 연구의 가장 이상적 형태는 역사적 배경을 탐구한 후에 처음부터 한 절씩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전체를 연구하려면 일 년이 족히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3개월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로마서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핵심적인 기별을 담고 있는 주요 장들만 다룰 것이다.
로마서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이해 없이 바울의 말을 깨닫기는 힘들다. 바울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 집단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특정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따라서 되도록 그 이유를 충분히 파악 하는 것이 로마서 연구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의 로마로 자리를 옮겨 1세기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성령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완전히 다른 정황 속에서 기록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서의 기별은 오늘날 여러 지역의 다양한 상황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의미를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로마서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들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한다.

* 교과에 인용된 예언의 신의 증언들은 영문 페이지로 표기됨. 단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성경주석은 우리말 번역 페이지를 따르고, 주석 내 엘렌 G. 화잇의 언급은 화잇 주석이라고 하여 해당 성경절을 표기함.

일요일
6월 27일
연대와 장소

도입)
이 편지를 기록한 장소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때에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구제하고자 선물을 가져오는 이방인교회의 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헌금은 고전 고후 8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후에 사도가 최후의 예루살렘 방문을 한 것이 사도행전 24:17절에 나온다. 고린도의 항구 겐그리아의 집사 뵈뵈, 가이소, 형제디모데, 시의 회계 에라스도 등 편지의 끝에 기록된 사람들은 고린도와 분명히 관련 있는 자들이다. 이 편지와 같이 신중한 논리적 구성을 가진 편지는 바울이 상당히 장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된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글을 썼다고 생각된다. 역사가 누가의 증언에 의하면 (행20:30그는 고린도에 3개월 체류하였으나 이것은 저작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케 할 수 있었다. 집필의 시기를 결정하는 어떤 표징이 15장에 있다. 사도는 기금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을 가지고 팔레스틴을 향해 출범하려고 그리고 로마를 또는 원하기는 서반아에까지 가기를 원하였다. 이는 제 3차전도 여행의 종말과 최후의 예루살렘 방문의 시기는 A. D.56년에서 59년 사이로 신중하게 결정하고 있다. 이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장 빠른 연대와 늦은 연대이다.

롬 16:1~2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의 동쪽 항구도시인 고린도 인근의 겐그리아라는 곳에서 로마서를 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큰 도시 고린도의 시민이었던 뵈뵈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로마서의 기록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신약의 서신들이 기록된 장소를 확인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기록 연대를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가 특정 기간 머물렀던 장소는 기록연대를 측정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울은 주후 49~52년에 있었던 2차 선교여행 기간에 고린도교회를 세웠다(행 18:1~18 참조). 주후 53~58년에 있었던 3차 선교여행 기간에 그는 그리스 지역을 다시 방문하였고, 여정을 마칠 무렵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구호기금을 받았다(롬 15:23, 26). 따라서 로마서는 주후 58년 전반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❶ 3차 선교여행 기간에 바울은 어떤 교회들을 방문하였습니까? 행 18:23.

바울이 없는 동안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신자들로 하여금 할례와 모세의 법을 따르도록 미혹했던 일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일이 다른 곳에서 재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이르기 전에 원수들이 로마에 먼저 도착할까봐 염려하였다. 로마서는 갈라디아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갈라디아서도 3차 선교 여행기간 중 고린도에 도착하여 3개월 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가운데서 복음의 대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들을 소란스럽게 하는 문제들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진술하였으며 한때는 특별히 유대인에 속하였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제공된 소망과 약속들을 보여 주었다.”(사도행적, 373)
성경의 어느 책을 연구하든지, 그것의 기록목적, 즉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기록되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와 이방인이 공존했던 초기 기독교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음 주 교과는 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교훈: 바울이 로마서를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 속에서 기록했는지 아는 것은 전체 기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가적용)
바울이 본 서신을 쓰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서에서 때때로 신학적인 동기나 선교적인 동기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의 로마 방문 목적이나 로마서의 기록 목적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를 정정하는 문제와, 로마를 스페인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의도가 깃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의 개인적인 이유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울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개인적인 이유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고린도에 머물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목적을 하였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연보를 들고 간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이방인의 연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근심하였다. 곧 그는 예루살렘에 가기는 하였지만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아 로마여행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는 로마에 대한 염원을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로마서를 통하여 로마 교회에 전달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교회가 처한 입장을 고려하여 교리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하였다.

월요일
6월 28일
개인적인 접촉

도입)
바울은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그의 선교사역의 한 단계를 마친 후에 다음 단계로 로마교회와 스페인을 향한 그의 선교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먼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해야하는 사역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이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일을 신중하게 다루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또 다른 로마교회 밖의 바울과 예루살렘교회와의 긴장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서신과 개인적 방문은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보내는 서신을 쓰면서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방문 계획과 이유를 그들에게 알리기 원했다.

❶ 롬 15:20~27을 읽으십시오. 그가 이전에 로마를 방문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로 하여금 로마 방문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글에서 우리는 선교와 증거에 관한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27절에서 바울이 밝히고 있는 유대인 과 이방인에 관한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 바울은 복음이 이미 전해진 지역에는 일할 수 있는 자들을 남겨두고, 미개척지역에 먼저 복음을 가져가야 한다는 부담을 끊임없이 안고 있었다. 기독교가 연약하고 사역자들이 적었던 시대에 복음이 이미 들어간 지역에서 일 하는 것은 선교적 낭비라고 여겨졌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롬 15:20~21).
로마에 정착하는 것은 바울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의 최종 목적은 스페인을 복음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원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❷ 바울이 미개척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존 교회의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에서 우 리는 선교에 관한 어떤 중요한 원칙을 배울 수 있습니까?

교훈: 복음의 혜택을 이미 누리고 있는 우리는 미개척지 선교를 위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부가적용)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전달한 후에 스페인으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 선교에 대한 바울의 사역은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기도 하다. 이 문제를 빨리 마무리 한 후에야 스페인 선교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것은 곧 그 헌금을 드리는 교회들이 모교회로부터 인정받는 것 외에 바울의 개인적인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있었다. 바울의 메시지 가운데 “나로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 하게하고”라는 그의 표현에서 이 일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한 후에 스페인으로 가기 전 예루살렘교회에 헌금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의 예루살렘교회의 방문에도 두 가지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헌금을 전달하는 것과 그 헌금을 수납하는 것은 또 다른 바울이 세운 교회를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인정받는 것과 중첩되어진 문제였기 때문이다.

화요일
6월 29일
바울이 로마에 가다

도입)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계획들이 지연되거나 이루어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상황이 불편하게 되기도,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때로는 문이 막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들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모든 막혀진 문들이 나쁜 것도 아니다. 모든 일들이 미루어지는 것이 최악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기도 하신다. 또는 이루어 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고를 당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이 모두가 더 큰 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증거 하다가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경험한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성령이 허락하지 않았다. 문제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니아 지방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문제가 없었을까? 아니다. 마게도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바울은 더욱 더 큰 핍박과 박해를 경험한다. 마게도니아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그는 엄청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양으로 열었다. 저들의 고통의 문을 찬송으로 열게 만들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 28:16).

❶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상황을 이 본문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맞이하게 될 예기치 못한, 원치 않는 일들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인생은 어떻게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 얼마나 자주 우리의 계획들, 특히 주도면밀하게 세워진 계획들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 역시 로마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그건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유럽과 소아시아의 교회들로부터 받은 구호기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불길한 사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가이샤라에서 2년 동안 복역한 뒤에 그는 가이사에게 호소했다. 구속된 지 3년쯤 뒤에 그는 로마에 도착했다. 이는 그가 전에 서신(로마서)에서 밝혔던 자신의 방문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❷ 로마에서 바울은 어떻게 생활하였습니까?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행 28:17~31.

“궁정의 관심을 그리스도교로 이끈 것은 바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속박이었다. 그가 매우 많은 영혼들에게서 죄악의 노예 생활 가운데 붙들어 매여 있는 속박을 끊어 준 것은 그가 포로 되어 있을 때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빌 1:14).”(사도행적, 464)

교훈: 바울의 로마 방문은 그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변수도 그의 사명감을 꺾지 못했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은 회심한 직후부터 로마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비전은 그가 에베소에서 목회하면서 받은 비전이었다(행 19:21).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고 그는 다메석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그를 배신자로 여겨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한밤중에 그곳을 빠져나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홀로 “3년 동안”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바울은 회심의 경험을 하고 나서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바로 로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아가보 선지자의 핍박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유대인들의 죽음에의 핍박, 로마 총독의 심문을 받은 후, 유라굴로 광풍을 거쳐 결국 로마에 가게 되었다. 로마에 가서 세계복음화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만약 바울이 회심한 직후부터 로마 복음화라는 사역을 했다면 그의 문서 사역, 그의 인격, 그의 선교의 열매 등은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 우리에게 역경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전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시간이 걸려도, 또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만을 우리 인생의 소망으로 삼고 그분의 비전을 위하여 전진해야 한다.

수요일
6월 30일
성도로 부르심을 입음

도입)
성도(聖徒)는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거룩은 죄로 타락한 세상과는 구별되는 단어이다. 세상 가운데서 부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성도이다. 믿음의 특징인 거룩함을 상실한 자를 우리는 더 이상 성도라 부를 수 없다. 성도는 끝까지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라는 단어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빌 4:21절 상반절). 성도에게는 삶의 테두리가 제한되어 있다. 즉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을 경우만 성도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성도에 걸맞은 생활이다. 바울이 성도를 예수 안에 있는 자라고 표현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가 성도라 부를 때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전제로 한 것이다. 성도라 불려지는 일은 대단한 특권이다. 아무나 성도가 아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 계속 예수 안에 머물러 있기를 우직스럽게 고집을 피우는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반열에 설 수 있다.

❶ 여기 로마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인사말을 보십시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 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와 믿음에 대한 신학적 원칙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음. 하나님께서 진실로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그분을 선택하고 그분에게 반응하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특별하다. 이런 모습은 인간 사이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상호 애정이 오가는 자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한다. 사랑에는 반응이 필요하다.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사랑은 충분히 표현 될 수 없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음. 어떤 번역 성경은 ‘성도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읽고 있지만 그것은 번역자의 첨언에 의한 것임으로 원문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원문에 따르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즉 성도로 임명되었다.
‘성도’로 번역된 헬라어 하기오이의 문자적 의미는 ‘거룩한 자들’이다. 여기서 ‘거룩한’의 의미는 ‘바쳐진’이라는 뜻이다. 성도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그가 걸어야 할 성화의 길은 많이 남아있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성경이 의미하는 바, 성도로 임명된 것이다.

❷ 바울은 그들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까? 엡 1:4, 히 2:9, 벧후 3:9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 떤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복음의 위대함이 여기 있다. 이미 창조 이전에 그분 안에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도록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모든 인류가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불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마 25:41).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선물의 가치를 잊게 만들 수는 없다.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부가적용)
성도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르고 선택하셔서 불러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을 때 세상의 어떤 자에게 속하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구속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에게 속하였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으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어떤 자에게 속하였는가를 놓고 판단하시지 않고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는가 아니냐를 놓고 보신다. 성도는 예수에게 속하며 예수 안에 사는 자들에게 합당한 명칭이다.

목요일
7월 1일
세상에 전파된 명성

도입)
바울의 마음속에는 한 번도 본 적도 없었지만 로마의 성도들이 항상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남다른 믿음의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가고 싶었다. 그들을 만나서 교제하고 싶었다. 그들의 믿음이 더 굳게 세워지고 그 믿음의 능력이 로마를 바꿔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한시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어떠했는가? 그들은 소수의 무리들이었고, 유명하거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생각하고 가슴이 벅찬 것이다. 아직 로마를 가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소문이 자기의 귀에까지 들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신실했던지 결국 이 소수 믿음의 사람들의 영향으로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교회의 권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 로마가 그 소수의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면 우리 교회도 바로 우리들 때문에 변화될 수 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

로마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드로나 바울에 의해서 설립되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다. 아마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회심 했던 자들 가운데 로마로 간 평신도들에 의하여 세워졌든지, 아니면 몇 년이 지난 후에 로마로 간 회심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제국의 수도에 증거했을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사도들의 방문과 도움 없이 로마 교회가 오순절이 지난 지 십 여 년 만에 온 세계에 유명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❶ 롬 15:14에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 교인들의 경험 가운데 주목할 만한 3가지 요소를 언급했다.
1.“선함이 가득하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우리의 선량함은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가?
2.“모든 지식이 차서” 성경은 반복적으로 깨우침과 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며 그 교훈을 익혀야 한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겠다는 말씀은 ‘새로운 정신’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마음의 변화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이해를 통해 일어난다.”(엘렌 G. 화잇, 마이 라이프 투데이, 24)
3.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동료 신자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 격려함과 동시에 격려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에 넘치며, 서로를 권하고 사랑함으로 그 명성이 널리 퍼진다.

부가적용)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에서부터 전 세계를 향해 로마의 도로가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길들을 따라서 로마에 있는 교우들의 믿음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로마의 교우들은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의 역사의 주연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 성령님이시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차지할 수도 없다. 단지 보잘 것 없는 우리가 그분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의 동역자로 불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해야 한다.

금요일
7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교회증언 5권, 706 “성경의 오묘”, 사도행적, 372~374 “구원이 유대 인에게”
“이리하여 표면상으로는 활동적인 사업에서 차단된 것처럼 보였으나 바울은 이전처럼 교회 사이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던 때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지속적인 감화를 끼쳤다. 주님의 죄수로서 그는 형제들의 애정을 더욱 굳게 붙잡을 수 있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속박되어 있는 동안 기록한 그의 말은 그가 직접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보다 그들로부터 더욱 큰 주의와 경의를 받았다.”(사도행적, 454)
“알려진 세계의 대 중심지에 그리스도교가 확고하게 세워지는 것을 보는 일이 그의 최대의 소망이요 가장 소중히 여겨 온 계획 중의 하나였다. 한 교회가 이미 로마에 세워졌으므로 사도는 이탈리아와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야 할 사업에 그곳 신자들의 협력을 얻고자 갈망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에게는 생소한 이들 형제들 가운데서 일할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는 편지를 그들에게 보내어 로마를 방문하는 목적과 스페인에 십자가의 깃발을 세우고자 하는 소망을 알렸다.”(사도행적, 373)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죄인, 회개한 자와 회개하지 아니한 자를 구별하는 선을 그으신다. 이 두 계급은 무지개의 빛과 같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섞이지 않고 한낮[正午]과 한밤이 확연히 다른 것처럼 서로 구분된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39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목요일 교과의 마지막 질문을 보십시오. 그대의 교과반은 교회의 명성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2. 처음에는 상황이 안 좋았지만 전화위복이 되었던 경험을 나눠봅시다. 그런 경험들을 활용하여 예기치 못한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3.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구원을 얻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묵상하십 시오(딛 1:1~2, 딤후 1:8~9 참조).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큰 소망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은혜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