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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신앙과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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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4.30 01:30 조회수 6,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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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신앙과 치유

 

5월 8일

일몰: 오후 7시 28분

 

도입)

스트로우브릿지(Strawbridge)라는 의사가 연구한 논문이다. 그가 28년간이나 신앙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연구해 본 결과에 의하면, 매주 교회에 출석하면서 충실히 예배를 드렸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따로 나누어 건강상태를 면밀히 비교 분석해본 결과,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에 비해서 사망할 위험이 무려 28%나 줄어들 만큼 건강이 좋아졌더라 라고 보고하였으며, 또 열심히 예배를 보면서 교회생활을 잘 했던 여자들은,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어서 건강상태가 좋아지는 그 만큼 건강이 호전되더라 라고 보고하였다. 또 대상인원 4000명을 6년간이나 비교 관찰하여 분석해 본 또 다른 논문에서도 위와 비슷한 결과와 같이 건강상태가 많이 좋아졌더라 라고 하였으며, 대상연구인원 2만 명을 상대로 비교 연구한 대규모 논문에서도, 신앙생활을 잘했던 사람 중에서 백인들은 7년간, 흑인들은 14년간이나 더 오래 살았더라 라고 하였고 또, 사망할 수 있는 위험도도 50%나 줄어들더라 라고 보고하고 있다. 룻겐도르프(Lutgendorf)라는 의사는 대상인원 557명을 6년간을 관찰해보니,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은 인체의 면역을 높여주어 수명을 연장시킨다는 인터루킨-6 (IL-6)의 혈중치가 훨씬 높았고, 동시에 사망 할 확률도 무려 78%나 줄어들더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반듯이 건강이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소수에 불과하지만, 신앙생활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적으로 보고한 학자들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태리에서 출간된 논문 한편을 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은 강박증-편집증 환자들이 더 많았다든지,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여성들이 유방암이 더 많이 생기더라 라고 보고하였고, 또 영국에 사는 무슬림 교인들은 믿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당뇨병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더라 라는 보고도 있는가 하면, 미국 북캐로라이나에서 사는 사람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중병에 걸린 중한 환자가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에는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병을 극복하여 살려고 하는 의지가 더 약하더라 라는 보고가 있는 등등, 신앙생활이 어떤 특정한 부분에는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삶을 살게 되며, 사회적으로는 대인관계를 더 원만하게 하고, 술과 마약 등을 덜 하게 되는 등 건강행동을 더욱더 잘하고, 주님께서 주신 이 몸 된 성전을 될 수 있는 한 건강하게 잘 유지하도록 몸을 정하게 가지기 위해서 건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자연히 체내의 면역 및 호르몬활동이 더 활발해지고, 혈관계통이 더 건강해져 고혈압과 동맥경화증 등이 더 적게 생기게 되고, 수술 후 부작용이 덜 생기게 되며,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감과 동시에 낙관적이고 이타적인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보고하였다.

 

기 억 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8~10, 시 118:6, 잠 17:22, 마 6:27~34, 히 13:6, 요일 4:18.

| 중심 사상 |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건강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존의 질병과는 다른 증세를 가진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악령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의사는 환자 앞에 두 개의 시험관을 놓고 하나에는 과산화수소수를 다른 하나에는 순수한 물을 부었다. 의사는 환자의 피를 뽑아 과산화수소수에 넣었다. 그랬더니 거품이 일고 부글부글 소리가 났다. 환자는 그것이 악령의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단순한 염수를 주사하며, 이것이 악령을 물리칠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의사는 다시 환자의 피를 뽑아 이번에는 물이 담긴 시험관에 넣었다. 거품도 소리도 없었다. 악령이 사라진 증거처럼 보였다. 환자는 치료받은 느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이 신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이번 주 교과의 주제는 정신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일요일

5월 2일

두려움의 요인

 

도입)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해해야 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누구나 숨기고 싶어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삶의 일부다. 예전에 비해 대상도 다양해지고, 정도도 훨씬 강화된 두려움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의 안전장치가 되기도 하고 인생의 발목을 잡는 악령이 되기도 한다. 두려움은 하고 싶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며 기를 꺾는다. 두려움은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놀랍도록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한한다. 만날 수 있는 사람, 도전할 수 있는 일, 떠날 수 있는 여행,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의 폭을 좁히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반응일 수도 있고(적응반응) 삶의 패턴(부적응반응)일 수도 있다. 적응반응으로서의 두려움은 생기와 적당한 긴장감을 주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안전장치이다. 그러나 ‘경계’가 심성의 일부가 되어 항상 위험을 찾아 바짝 긴장하게 되면 두려움이 하나의 사고방식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두려움을 표출하는 유형은 다섯 가지로 나뉜다.

- 수줍음형(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하는 사람)

- 과다경계형(늘 경계심을 품고 세상에는 걱정거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 순응형(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매사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

- 마초형(완고하고 남과 자주 다투며 속으로는 자신의 두려움을 절대로 남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 통제형(남에게 이것저것 강요하고 정리정돈과 질서에 집착하는 사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바꿀 수 있는 패턴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구체적인 기술로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고방식의 업데이트’다. 생각하는 기술을 배우고 관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두려움은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관리에 따라 생각과 강박증이 구분되고, 하나의 상황이 여러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얼마 동안 미국 TV 시청자들은 “공포의 요인(Fear Factor)”이라는 TV 프로그램 에 빠져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는 다양한 공포 상황에 투입된다. 전갈이나 쥐로 가득 찬 구덩이에 앉는 것부터 불타는 건물을 통과하여 걷는 등 시청자들은 그 들이 공포에 어떻게 잘 대처하는지 보게 된다.

물론 누구도 억지로 공포를 조장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여러 가지 두려움의 요인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는 인간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주요 요인은 공포이며, 정부를 구성하는 주된 목적은 자신을 해할지 모르는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고, 스스로 얼마나 안전하게 느끼는 지 상관없이 누구나 두려움을 야기하는 문제에 부딪혀야 한다. 하지만 두려움 자체 가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1. 어떤 방식으로 두려움이 우리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은 인간이 위협에 대처하고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정서이다. 이런 정서와 본능은 사고, 범죄, 질병, 테러와 전쟁이 만연한 세상에서 필요 한 것이다.

2. 두려움을 처음 언급한 성경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창 3:8~10.

물론 이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만든 것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종종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두려움은 매우 긴장된 감정이기 때문에 우리 신체에 상당히 강력한 물리적 손상을 입힐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두려움은 단순히 정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신체 건강에도 매우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디에 살든 어떤 위험에 처해 있든지 두려움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교훈: 우리가 두려움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부가적용)

파스칼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유식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가장 위대한 산지식, 즉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을 찾기만 하는 사람이다. 많이 찾았기 때문에 그만큼 잘 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으로 얻은 것뿐이다. 셋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위대한 무기가 주어진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니.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믿음이 너무 강해서 어떤 두려움도 그를 짓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다윗은 하나님께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의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강한 대적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엘리사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아람 왕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성을 에워쌌다는 절망적 보고를 하였을 때에 엘리사는 사환에게 두려워하지 않도록 마음을 안정시킨 후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엘리사는 그의 군대들의 눈은 열어주시고 아람 군대들의 눈은 어둡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동시에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둡게 되어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두려움을 제거하는 해답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강한 성이요 방패가 되신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이시다.(시91: 2) 그리고 우리가 불안과 염려로 떨고 있을 때에 그것들을 몰아낼 영적군대를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월요일

5월 3일

우주에게 말하는 남자

 

도입)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우주(宇宙)’라는 말은 일체를 총괄하는 명사이다. 만사와 만물이 총체적으로 합해져 하나(一)가 되는 것을 우주(宇宙)라고 한다. 이 우주는 지극히 크고 밖이 없다. 『장자(壯者』「천하편(天下篇)」에서 혜시(惠施)가 말하기를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으니, 그것을 일러 큰 하나라고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고 했는데 여기서 큰 하나(大一)가 우주이다.” 라고 했다. 동양종교와 철학은 우주(宇宙)와 인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연구하면서 우주를 대우주(大宇宙)로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로 비교하고, 그 밀접한 관계를 통해 우주와 인체를 하나(one, 一)로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같은 사유의 궁극적인 결말은 만물의 ‘제 1시작’이 바로 이 우주로서, 이 우주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제 1의 시작’, 즉 자신들을 낳은 ‘큰 부모’로 보려고 한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인체와 우주는 소우주와 대우주로서 대비되며 매우 닮은 형상이 많고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이런 점들에 대하여는 우리가 신을 이해하고 동양종교를 연구하는데 더 깊이 연구하고 비교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우주와 인간이 하나 되는 “天一合一” 사상은 이 우주(宇宙)가 인간을 낳았다는 종교적 가설(假說)을 만들게 되어, 결국 우주를 자신들의 “큰 부모” 로 여겨, ‘하나(one, 一)’에 대한 저들의 개념이 결과적으로 동양종교와 동양철학, 그리고 동양의학마저 범신론적 토양이 되도록 이끌고 말았다.(필자의 목회학 박사 논문의 서론 일부 발췌)

 

어떤 남자가 우주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내가 여기 존재하오!” 그리고 우주에게 다시 대답했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안에 복종심을 만들지는 않았다오.” - 스티번 크레인

1. 위의 시를 읽으십시오. 어떤 내용의 시입니까? 우리는 재림신자로서 이런 생각과 어떻게 다른 우주관을 가져야 합니까? 관점의 차이가 생기는 주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잠시 동안 세상에 하나님이나 창조주, 또는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한 존재가 없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고도로 진보한 유인원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결국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전혀 걱정도 관심도 없는 비인격적인 힘에 의하여 우리의 운명이 좌우된다면 이 얼마나 허망한 세상인가?

2. 아래의 성경절을 찾아보십시오. 두려움이 몰려올지라도 이 말씀에서 그대는 어떤 희망 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까? 시 118:6, 잠 3:5~6, 눅 12:6~7, 롬 8:38~39, 히 13:6, 딤 후 1:7, 요일 4:18.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끔찍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주의 배경과 배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하여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마음속으로 희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대신 이 말은 우리가 그런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를 가 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으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부가적용)

한때 미국 시카고에서 악명 높았던 범죄 갱단 두목의 딸이 책을 썼는데, 그 딸이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살고,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지나가는 차를 보아도 경계하며 쳐다보고, 식당에 앉아서도 사방을 경계하며 앉아 있고, 잠시도 공포가 떠날 날이 없더니 결국은 갑자기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범죄의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 살게 되고,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음에 참 평안을 누리며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 그 신자가 참으로 거듭난 참 신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그의 말이나 행동, 또는 생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안하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아무리 믿음 있는 체하고 말을 잘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거짓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참 신앙이 없는 위선자이다.

 

화요일

5월 4일

믿음의 힘

 

도입)

언젠가 불의를 교통사고로 전신화상을 입고 20여 차례나 수술을 받았던 이지선 씨의 인터뷰가 신문에 소개되었다. 지금은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재활상담을 전공하고 있다는 그녀가 기자에게 전한 말은 이렇다. "내 고통은 분명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다" 누구나 그녀와 같은 시련을 겪게 된다면 감사보다는 원망과 분노가 앞설 것이다. 그러나 그녀도 말했듯이 그의 감사는 절망의 끝에서 나오는 체념도, 그 체념의 마지막에 오는 힘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녀의 감사는 분명 신앙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언젠가 그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세상이 줄 수 있는 믿음은 아니다. 세상에서는 오직 죽음만이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을 그 끝으로 말하지 않았다.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밝은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희망,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장 18절)는 고백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치일 것이다.

 

1.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이 성경 절은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어린 소년 마이클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교사가 그를 방문하여 학교 숙제를 내주었다. 교사는 “마이클, 여기 동사와 부사에 관한 수업 내용이 있다.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 교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인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아이 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소생할 가망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 후로 아이는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이전에는 경과가 좋지 않아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었는데, 상황이 급변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학교 숙제가 그에게 큰 변화를 준 것일까?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죽어가는 아이에게 동사와 부사에 관한 숙제를 내주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우리의 몸과 아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이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과학에서도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 둘이 서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인정받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우리의 건강 전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야 하 는 곳은 바로 마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진실로 알게 될 때, 우리 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해진 적이 있지 않은가! 종교적인 믿음이 건강에 도움을 준 사례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일반인들보다 장수하며, 우울증에 강하고, 충격 적인 사건에도 감정을 잘 조절한다는 사례를 조사해 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초자연 적인 치료의 능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믿음은 신자에게 평화와 확신과 소망을 줌으로 정신 적 태도에 변화를 일으키고 우리의 건강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쁜 마음 은 약보다 훨씬 좋다. 왜냐하면 약은 종종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교훈: 육체와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심으로 충만한 마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준다.

 

부가적용)

만약 육체와 정신의 상호연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의식 상태를 조율할 수 있고 생활을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질병의 치유가 가능하다. 최소한 치유에 일조를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고전에서 말하는 양생(養生)이란 것도 그런 것일 것이다. '마음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것, 그냥 무심코 흘려들을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바로 쓴다' '마음을 곱게 쓴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을 바로 쓰고 마음을 곱게 쓴다면 생활로 드러나야 한다. 바른 생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의 정의는 아주 간명한 것인데, 마음과 몸이 따로 놀면 그것이 타락이다. 마음에 없는 짓을 하면 그것이 타락이다. 그때 우리의 몸도 마음도 병이 드는 것이다.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마음을 잘 쓰고 있는지 아닌지는, 생활이 말해주는 것이다.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정말 마음을 고쳐먹었는가는 생활이 말해주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관념이 아니다.

 

수요일

5월 5일

스트레스 풀기

 

도입)

인간의 수명을 연구하는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동물들을 대상으로 오랜 기간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 그룹의 동물들에게는 풍성한 음식과 상쾌한 공기와 안락한 환경을 주어 이상적인 생활환경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 안에는 동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전혀 없었고, 동물들은 초원을 뛰놀다가 지치면 그대로 나뒹굴었다고 한다. 몇 개월 지나자 동물들의 털에는 윤기가 흐르고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걱정과 기쁨이 공존하는 공간을 주었다고 한다. 초원에서 한가롭게 놀다가 가끔 맹수의 습격을 받게 하고, 먹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며, 항상 긴장하게 했다고 한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두 집단의 연구 결과를 이렇게 발표했다고 한다. "안락한 환경에서 살던 동물들이 훨씬 먼저 병들어 죽어 갔다. 약간의 긴장과 노력이 건강과 장수를 보장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땀과 역경이 없는 인생은 무미건조할 뿐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삶을 더 건강하게 하는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 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어떻게 하면 이런 약속들을 주장하는 방 법을 배울 수 있습니까? 어떤 태도나 행동들이 그대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듭니까?

우리에게 당면한 가장 큰 건강의 문제는 스트레스이다. 정신적 충격은 삶의 내부 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삶의 주변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매일의 압박 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의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이 진료하는 환자들의 90%가 스트레스 때문에 병원을 찾는다. 과학도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특정 호르몬이 분비되어 인체의 여러 기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장기간 동안 이런 호르몬의 영향으로 기관들이 약화되면, 질병에 더욱 취약하게 된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는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켜, 심박동을 강하고 빠르게 만들어서 심계항진증(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스트레스 호르몬은 혈관을 수축시켜 고혈압의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는 과호흡증후군과 같은 짧고 빠른 호흡을 야기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는 위의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위장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혈당을 증가시키는데, 그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당뇨병에 걸릴 수도 있다. 스트레스 는 또한 숙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전반적인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최전방에서 질병을 막아주는 면역체계에도 부정 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록은 끝이 없지만,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그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개인적으로 알고 경험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고 스트레스와 그 것으로 비롯된 나쁜 결과들이 상당히 해소되기 때문이다.

 

교훈: 스트레스는 건강에 가장 위험한 요소이며, 신앙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부가적용)

BBC뉴스는 "신앙생활하면 오래 산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정기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수명이 긴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규칙적으로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혈압이 낮았으며 우울 불안증 등이 적었고 면역력이 강했으며, 때문에 의료보험에서 보험금을 적게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이 조사는 <북캐롤라이나주>의 노인 4000명을 대상으로 했으며 최근 6년간 사망한 1777명 중 22.9%가 정기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노인이었고 37.4%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며, 캘리포니아대가 21∼65세의 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에서도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향후 28년간 사망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23%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듀크대>의 <헤럴드 쾨닉>박사는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건강하게 생활하는데다 같은 종교인들끼리 형성하는 안정된 인간관계가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목요일

5월 6일

믿음과 기적적인 치유

 

도입)

제임스 칼라스(James Kallas)는 ‘예수님의 비유와 설교가 하나님이 나라에 대한 언어적인 선포였다면 기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적들은 결코 겉치레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것들 자체와는 전혀 무관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도 아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것이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악한 세력을 패주시키는 것이다. 치유와 귀신 축출의 기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 하나님이 도난당했던 그의 세상을 재창조하고 회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표적들이다”라고 했다. 칼라스가 지적한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귀신 축출과 기적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나라의 임재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이 곧 믿음의 증거로 등장한 적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기적이 믿음의 증거로 사용된 것은 없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서 기적이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서 기적이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과 기적이 믿음의 증거라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적으로 믿음을 증명하려 해서는 안된다. 믿음에 기적이 따르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감독 트렌취(R.C. Trench)는 말했다. “이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마치 이적을 행하지 못하면 성자가 아니고, 이적이 없으면 불완전한 그리스도이며, 교회에 이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영적으로 빈곤한 것으로 여겨 이적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은혜의 이적은 형편없는 것 같이 여기고 능력의 이적만이 매력적인 것으로 여길 때는 은혜의 이적을 거의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건강에 이르는 열쇠는 믿음이다. 믿음은 그것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우리가 마음속에 창조하는 회로와 확신감을 활성화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삶이라 체험하는 진동패턴 속으로 의식을 고정화시킨다.

 

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상당부분 기적적인 치유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병든 자, 눈먼 자, 죽어가는 자, 심지어 이미 죽은 자까지 주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치유를 받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치유의 전제조건은 믿음이었다(마 9:2, 22, 28~29, 15:28).

나사렛에서는 불신이 치료의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마 13:58, 막 6:5~6). 한번은 제자들이 치유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 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14~20).

믿음이 기적적인 치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기도로 치유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때, 그것을 환자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려 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믿음과 치유에 관하여 지극히 표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❶ 아래 성경절에서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고친 사건들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들 은 치유를 받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런 예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 12:9~13, 눅 13:11~13, 14:2~4, 22:47~52.

위에 제시된 본문 가운데 치유된 자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기적적인 치유를 불러오는 믿음의 역할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공표된 믿음이 항상 절대적인 요소가 아님을 보여 줄 뿐이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주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에 의해 치유가 일어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치유가 된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손이 이런 과정들을 통해 병자에게 임하셨음을 믿게 된다. 한편 우리가 간절히 기도 하고 염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끝없이 발생하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들은 타락한 세계의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신도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선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 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교훈: 믿음은 치유의 조건이 아니라 목적이다. 우리의 질병이 치료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 속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부가적용)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질병에 걸리게 되면 하나님께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런데, 질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는 하면서도 반드시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질병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다. 우리들의 영혼이 질병에 걸렸을 때 고침 받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면 질병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질병을 고침 받으려고만 할 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깨달을 수가 없다. 즉, 우리들이 질병을 통해 바라보는 포커스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질병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포커스에 맞추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질병을 치유 받고자 하는 우리들의 소망보다는 질병을 통해 말씀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질병을 치유 받아 우리들의 몸이 회복될 수는 있어도 질병을 치유 받는 것에만 만족하고 말뿐 질병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무관심해져 버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은 질병에 우리들의 소망과 포커스를 맞추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우리들의 눈과 마음과 영혼을 모두어 포커스를 맞출 때 허락하신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보다는 질병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올바른 자세와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금요일

5월 7일

“참과학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 전혀 있을 수가 없다. 그 둘은 다 같이 창시자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 이 언제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이 판명될 것이다. 천연계에서나 계시에서나 간에 진리는 그 모든 표현에 있어서 그 자체가 조화를 이룬다.”(교회증언 8권, 258, 참고자 료: 치료봉사, 462,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신학요람 12권, 751~783)

“정신과 육체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한쪽이 영향을 받으면 다른 편이 반응을 일으킨다. 정신의 상태는 신체 조직의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옳은 일을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함으로 마음에 자유와 행복감이 넘칠 때 이것은 온 신체 조직 에 즐거움을 창조하여 혈액 순환을 더욱 활발하게 하며 몸 전체를 강하게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치료제이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많이 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과 생애에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34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치료에 의학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우리가 의술을 통해 건강과 치유를 얻고자 한다면 믿음이 없다는 의미입니까?

2.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건강이 회복된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봅시다.

3, 그대의 교회에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대는 개인적으로 혹은 같은 교과반 원으로서 어떻게 그의 치유를 도울 수 있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 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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