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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요나단: 위대함이란 말이 제격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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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요나단: 위대함이란 말이 제격인 사람

10월 23일 일몰: 오후 5시 45분 04

 

도입)

중국 제(齊)나라에서 포숙아는 자금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기로 하여 함께 동업을 하였다. 하지만 관중이 포숙아 몰래 모든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 하였다.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져 사람들이 관중을 비난하자, 포숙아는 오히려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일 것’이라며 그를 감싸주었다. 그 뒤 함께 전쟁에 나아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아는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며 그를 위해 여러 사람에게 변명하여 주었다. 사실 포숙아의 생각대로 관중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포숙아는 관중을 재상으로 천거해 제나라를 패자국의 하나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려놓기에 이르렀다. 이때에도 포숙아는 스스로가 관중의 밑에 있으면서 늘 관중의 그늘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포숙아는 관중을 끝까지 믿고 그를 밀어 주었고, 관중도 일찍이 포숙아를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아 뿐이다.”라고 말하며 포숙아의 우정을 가슴에 담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둘 사이의 관계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진한 우정을 상징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 말은 <사기(史記)>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삼상18:3~4)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생명처럼 사랑하여’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요나단은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다. 사랑도 우정도 말로 앞세울 뿐, 막상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이 요즈음 세태이다. 하지만 요나단은 이 언약대로 아버지 사울이 죄 없는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 할 때, 그 정보를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이 무사히 도망가게 도왔다. 불의한 아버지를 배반할지언정, 의로운 친구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요나단은 언약을 맺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약을 굳게 지킬 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자이다. 왕자인 요나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 주었다. 옷은 신분의 상징이다. 그런 옷을 벗어준다는 것은 왕권도 양보하려는 고귀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요나단은 이미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우쳤던 것이다. 다윗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다. 신분도 막강한 권세도 그들의 우정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의지하여 아낌없이 양보하면서도 아쉬워하지 않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포지교(管鮑之交)와 같은 우정이 더욱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기억절: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14:6~13, 24~46, 18~19장, 31:1~7, 삼하 1:5~12, 왕하 6:8~17.

특혜를 누리는 자녀로서 요나단은 모든 것을 제 것이라고 믿는 버릇없고, 욕심 많은, 이기적인 소년일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의 아들이 아닌가?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공중 연설에도 능했고, 가장 훌륭한 전사이자 군대 지휘관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위대”했다.

그러나 하늘은 “위대함”에 대한 다른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나단은 세상이 생각하는 위대함을 뒤로 하고, 대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함”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요나단의 삶을 통하여 하늘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평가해야 함을 깨닫는다. 무엇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무엇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요나단의 이야기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출생과 신분과 부와 재능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그의 이야기는 말해 준다.

 

일요일 10월 17일

최고의 우정

 

도입)

다윗은 성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다. 다윗 없는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요나단 없는 다윗도 생각할 수 없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양을 치던 작은 소년이었다. 이에 비해 요나단은 이스라엘 왕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요나단은 모든 것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다윗과의 관계에서 조연이고 조력자였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것이 요나단의 위대함이다. 주연(主演)의 자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조연(助演)의 자리에 내려갈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요나단이다. 요나단이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사무엘상 20장 17절에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하는 마음이 세 번이나 강조 되었다. 또 18장 1절에도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의 마음을 말하고 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 하니라”

 

부모와 형제자매, 친족간의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법적으로 규정된 관계를 부여받는다.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배우자까지 선택해 준다.

그러나 우정은 법적으로 규정된 대부분의 인간관계와 같지 않다. 우리는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 우정은 국경을 넘기도 한다. 우정은 다른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 5:16은 우정이 결혼 관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친구사이가 매우 끈끈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우정은 완전히 자발적인 관계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정도 율법의 자구(字句)를 충족시키기보다 자신을 내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 삼상 18:1은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묘사하면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의 성경절들은 어떤 종류의 우정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까? 출 33:11, 욥 16:20, 잠 17:17, 27:9, 전 4:10, 요 15:13~15.

아기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머니가 죽고, 대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내가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강력히 결속된 이런 관계는 지극히 숭고하면서 보편적인 것으로써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한다. 심지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동물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정은 본능 그 이상이다. 진실한 우정은 대화를 통해 배양된다. 친구는 즐거운 순간뿐 아니라, 모든 어려운 순간들을 함께 하고 돕는다. 우리는 충고와 격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친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간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삼상 20장에서 요나단은 우정이란 단지 말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을 준다. 요나단은 자주 그의 아버지 사울 앞에서 다윗을 위해 중재하였다(삼상 19:4).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다윗을 찾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를 만나 여호와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삼상 23:6).

 

교훈: 진실한 우정이란 아무 조건 없이 고락을 함께 나누고, 친구의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다윗과 요나단은 도저히 우정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이였다. 요나단은 차기 왕위를 받을 왕자이었고,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며 왕실 음악치료사였다. 그런데 이들의 우정이 인류 역사상 멋진 우정이 모델이 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믿음에 의한 우정이기도 하지만,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고 반해 버렸다. 골리앗을 쳐부수는 다윗의 모습, 목동의 신분이지만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 있고 용기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정한 우정은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하고 참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무리 변치 말자고 다짐을 하고 혈맹을 했어도 인간적인 우정은 변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우정을 쌓아야 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우정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우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기초를 형성하고 다듬어지는 것은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어디에서나 믿음의 좋은 친구를 맺으시길 바란다.

 

월요일 10월 18일

위대한 승리

 

도입)

요나단은 그의 아비와 달리,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요나단도, 그의 아비 사울처럼, 백성들과 사무엘을 의지했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했던 요나단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요나단의 이런 작은 변화의 날갯짓에 제일 먼저, 그의 부관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블레셋 대군 앞에 사기가 떨어진 채 두려워하고 있었을 부관도, 요나단을 따르기도 결심한다. “병기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삼상 14:4) 이런 요나단과 부관의 변화가, 블레셋 군사 20명을 쓰러뜨리는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 작은 변화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600명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 왕을 변화시켰다. 잃어버렸던 사기를 되찾게 만들었다.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삼상 14:15절) 고작 20명 쓰러뜨린 날갯짓이, 백성들 가운데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진동을 가져왔다. 적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떨게 만들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땅이 흔들리는 큰 떨림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일시적이었다 하더라도)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를 찾게 만들고, 여호와를 의지하게 만들었다. 삼상 14:18절의 말씀이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변화의 날갯짓일지라도, 몇 단계, 몇 시간, 몇 사람을 거치게 되면, 세상을 떨게 만드는 거대한 변혁의 폭풍이 된다는 진리이다!

이스라엘은 매우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블레셋인들이 연합하여 병거와 군사들을 몰고 왔는데 그 수효가 바다모래처럼 많아 보였다. 이스라엘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무기도 변변치 못했다. 블레셋인들이 철기 산업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사울과 요나단만 겨우 철제 검과 방패를 쥘 수 있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도구나 연장을 고치거나 날을 세우기 위해서는 블레셋 대장장이에게 가야했다(삼상 13:19~ 22). 막대기와 도끼, 물매를 들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되어 있는 블레셋 대군을 맞이하고 있는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군대가 상상이 되는가? 사울의 군대는 어쩌면 가장 높은 탈영율을 기록했는지도 모른다.

 

1. 영적 싸움에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맡길 때, 형국이 어떻게 극적으로 전환될지 생각해 보십시오(왕하 6:8~17 참조). 이 기사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까?

다른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은 두려움이 요나단에게는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과 신뢰심이 없음을 한탄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무엇인가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요나단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스라엘이 직면한 문제보다 하나님께서 더 크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나단은 자신을 구원자나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 든 자를 사용하시자 그들에게 믿을 수 없는 큰 승리가 주어졌다.

2. 적의 전초기지에 오르기 전에 요나단은 어떤 단계를 거쳤습니까? 삼상 14:6~13.

때로 믿음과 추측 사이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직관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른 이와 나누고 조언을 구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조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징표를 제안하였고,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대로 기꺼이 가거나 멈추고자 했다. 마침내 전진하라는 징표가 보이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도전에 뛰어들었다.

 

교훈: 승리는 무기를 가진 다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믿음의 나비효과’를 볼 수 있다. 요나단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일으킨 날갯짓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작은 헌신의 날갯짓 한번으로, 절망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기를 불어넣고, 도저히 적수도 되지 않던 블레셋과 싸워 대승을 거두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간 돌격대는, 오직 요나단과 그의 부관뿐이었다. 단지 2명이었다. 제대로 된 무기는, 철제 칼 한 자루 뿐이었다. 쉽게 말해, 작은 날갯짓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이 올라가 기적적으로 쓰러드린 적들의 숫자도, 사실 2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언해 주고 있다. 적어도 5만명이 넘는 대군중에 20명을 쓰러드린 사건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10만 대군도 죽는 마당에, 고작 20명 쓰러뜨린 것이, 얼마나 큰일이겠는가! 별일 아닐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냉철한 지휘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20명 쓰러진 일을 보고, 600명의 군사들이 ‘와’하고 일어나 전쟁을 시작한다고 한다면, 이는 신중치 못한 작전이요, 일순간에 600명 전원이 몰살할 수 있는 위기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식을 깨고, 요나단과 그의 부관이 보여준, 작은 날갯짓 한번이, 결국은 600명의 군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고,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일으켜, 블레셋 대군을 무찌르게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간부터, 그것은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 된다! 요나단의 작은 헌신이라는 날개짓 한번이, 600명을 변화시키고 전쟁에서 이기는 엄청난 일을 만들었듯이, 나의 변화의 날갯짓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한 번의 날갯짓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결국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화요일 10월 19일

부모와 자녀 사이

 

도입)

요나단은 무엇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누가 내 편인가를 따지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옳고 그름을 떠나 내편이면 무조건 옳다고 하고 내편이 아니면 비록 옳은 것이라도 무조건 반대한다. 그러나 요나단은 비록 왕이요 또 아버지이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하여는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판단력을 가지고 그는 부왕의 잘못에 대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진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부자의 연을 무시했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록 아버지의 잘못에 대하여는 눈물을 머금고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효자였다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같이 살면서 아버지 사울을 도와 전쟁에 나가 블레셋과 싸우다가 아버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삼하1:23) 요나단은 끝까지 신의를 지킨 사람이다.

 

1. 삼상 19:1~7을 읽으십시오. 그대는 사울과 요나단과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겠습니까? 요나단은 아버지와 친구 사이에서 어떤 고민에 빠졌습니까?

요나단이 어렸을 때 사울이 어떤 아버지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후에 그가 존경할 수 없는 인물이었음을 알고 있다. 사울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기복이 심하며, 질투심이 많고, 비이성적이며, 때로는 안절부절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출 20:12의 명령을 잘 실천하였다.

2. 삼상 14:24~46을 읽으십시오. 원한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요나단은 아버지를 더 이상 공경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단점 때문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요나단의 됨됨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단순히 선물이나 감사 카드를 드리는 그 이상이다. 요나단은 위기 때에도 아버지 곁을 지켰고, 아버지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모가 질병에 걸리거나 직장을 잃는 위기의 때에 우리도 그들 곁을 지킴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마음과 물질로 부모를 지원해야 할 성경적 의무가 있다(딤전 5:8).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마지못해 하는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다. 요나단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드리기도 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해서 우리 자신의 판단을 억제하고, 부모의 실수를 옹호해 주거나, 부모의 의견에 무작정 따르거나, 악한 것도 용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품을 가졌든지 그들에게 특별한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교훈: 요나단이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켰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특별한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부가적용)

세자(世子)로 태어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기가 제쳐진 바 된 것을 알고도 경쟁자에게 친구로서 가장 친절하게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세력이 쇠하여 가는 음울한 시기 내내 그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결국 그 옆에서 죽었다. 요나단의 이름은 하늘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으며, 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이타적인 사랑의 존재와 힘에 대한 증인으로 서 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애를 끝까지 지킨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정의와 다윗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요나단은 우리에게 신앙의 절개가 필요함을 일깨워준다. 아버지였던 불의와 타협할 수 없어 아버지에게서 잠시 등을 돌린 요나단의 결단은 정의보다는 혈연, 이익관계를 더 선택하는 오늘의 모든 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그의 신의와 정의감은 다윗을 감동시켰고 후에 자기 자녀를 다윗에 의해 보호받게 하는 기회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요나단은 아버지를 떠나지 아니하고 공대하였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에 다윗은 이 두 사람을 위한 애가를 지어 불렀을 때, 사울과 요나단이 …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23)고 사울과 요나단이 함께 죽은 사실을 언급한다. 요나단은 비록 부친 사울의 잘못을 알았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가 기름 부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또한 다윗의 길을 돕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요일 10월 20일

이인자의 위치

 

도입)

제1 바이올린보다 제2 바이올린을 뽑는 것이 더 어렵다. 가장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제2 바이올린의 능력이 제1바이올린을 받쳐 줄 만큼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실력이 비슷한 제2 바이올린 연주자가 제1 바이올린을 받쳐줄 수 있는 겸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주변에는 점점 헬퍼들이 사라지고 있다. 실제로 조직에서 헬퍼가 되는 것은 어렵다. 모두 1인자의 권력과 그늘에 있기를 원하고 혹 2인자로서 자격과 역할이 생기면 항상 1인자에게 경계와 견제를 받아서 결국 숙청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는 전통적인 리더십의 개념에서의 군림하는 지배자와 봉사자로서의 1인자와 2인자가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이루는 협력하는 팀으로서의 리더와 헬퍼의 관계로 자리매김 되어야 하고 조직에서의 헬퍼는 '권력의 계승'이 아닌 '역할분담'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튼튼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인정하고 그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그다음의 이인자의 자리로 만족했다 아무리 친구사이라도 힘든 결정을 했다. 이 결정에는 요나단의 성품도 있지만 자신에 대하여도 다윗에 대하여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인자의 기질은 첫째, “너 자신을 알라 에 있다.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 타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강한 자아가 있는 사람이다. 순종과 섬김의 열매가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자신을 비우는 믿음의 자존심과 긍정적인 의지력. 하나님을 향한 창조적인 긍지가 이인자의 힘이 될 수가 있다. 둘째, 리더를 알라 과연 내가 함께할 수 있는 리더인지를 알아야한다.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중국. 주은래)의 예를 들면 이는 지식인으로서 모든 면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모택동이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지도자로 인정을 하고 자기는 이인자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잘 알고 상대를 알았기 때문에 멋진 팀웍을 이루었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잘 알아야한다. 이인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위가 아니라 역할이다. 그들은 명성과 성공을 혼동하지 않는다. 지도자를 돕는 일에 헌신을 한다. 리더는 비전을 보여주고 이인자는 그것을 현실화한다. 이인자가 될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역할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기술적인 업무내용이 일차적이며 총괄적인 책임은 이차적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인자가 될 수가 없다.

 

여러 문제에 대하여 부모를 탓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주된 경향이다. 물론 지나치게 무거운 정서적 짐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실까지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런 불행한 경향이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부모를 원망할 뿐 아니라, 때로는 형제자매, 스승, 여건을 탓한다. 자신이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아닌 다른 데에서 찾으려 한다.

 

상황이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굴복하게 되며, 때로는 그것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나단의 생애는 오히려 그런 상황을 통해 여전히 일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나단에게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의 대부분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었는지 모른다. 사울이 신실한 왕이었다면 요나단이 왕위를 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요나단은 부모를 탓할 마음이 없었다. 대신 요나단에게는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 후회와 한탄으로 생을 소모하기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아마도 쉽지 않았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다윗을 다음 왕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이런 믿음과 신뢰심을 유지하였다.

 

1. 자신을 대신하여 다윗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요나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삼상 23:17. 다음의 성경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요나단을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사 14:13~14, 왕상 1:5, 막 10:35~37.

하나님 안에 우리의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비난과 반대를 당하여도 자존감을 잃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신분이 보장됨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말이다. 삼상 14장에서 블레셋 군대를 무찌른 사건을 통하여 요나단은 하나님과 극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갖게 되었다.

다윗가의 후대 이야기는 반역과 내분으로 장식되어 있다.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둘 다 아버지 다윗에게서 왕좌를 물려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권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요나단의 태도는 이렇게 “나”를 앞세우는 정신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기꺼이 이인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와 친구 다윗 사이에서 조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 애썼다.

 

교훈: 요나단은 주변 인물이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찾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선택하였다.

 

부가적용)

사실 침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 그리고 사역도 예수님 보다 침례 요한이 먼저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며 인기 절정에 있는 사람이다. 현재 상태에서 보면, 어느 면에서 보나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있다. 한국인, 한국문화에 관한 글을 많이 쓰신 이규태라는 분이 있다. 그 분은 한국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로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을 따지는 '서열의식'을 손꼽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고 나면 곧바로 "올해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는 식으로 나이를 묻는다. 출신학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학번이 어떻게 됩니까" 라고 입학 년도를 묻는다.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하다가 "언제 제대했습니까" 라는 군대 제대 날짜를 묻는다. 또 미국에서나 독일에서는 "미국(독일)에는 언제 왔습니까?"하며 입국한 날짜를 묻는다. 그리고 나서 본인이 한 달이든지, 두 달이든지 상대방 보다 조금이라도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갑자기 목소리와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 한다. 선배 대접, 고참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데도, 철저하게 제2인자가 되고자 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높이면서, 그 분을 증거 하고자 했다. 요나단은 침례요한과 같은 품성을 가진 자다. 자신을 철저히 배제한 채 다윗을 위해 희생하는 그의 이 같은 정신은 침례요한 정신과 흡사하다 할 수 있다.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라진 침례요한처럼, 왕위에 오를 다윗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요나단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하여야 할 우리의 헌신의 참된 모본이다.

 

목요일 10월 21일

세상이 공평하지 않을 때에

 

도입)

다니엘 친구처럼 불꽃 가운데서도 살아나는 이도 있지만 화형주에서 비틀리며 타죽은 사람들이 더 많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어려움 속에서 울부짖고 돌아갔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을 숱하게 우리 앞에 전시하셨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이겨냈던 그 사람들을 우리 앞에 세우심으로 우리로 그렇게 이기게 하실 것이다. 너처럼 외로운 사람들을 보라고 너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보라고 너처럼 아픈 사람들을 보라고 그리고, 너도 그들 앞에 그렇게 서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너 때문에 그렇게 아픈 아버지를 보라고...손수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달리신 아버지를 바라보라 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대우를 받으셨는지 나를 보라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7)

 

1. 삼상 31:1 ~7과 삼하 1:5~12을 읽으십시오. 요나단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언제나 선이 이기며, 뭐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배웠다. 또 선한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 살며, 악인은 불행하게 살다 단명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상 선인이라고 꼭 잘 되고, 악인이라고 항상 잘못 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옳은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자녀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며 보호하시지만, 그렇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2. 신실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창 39:10~20, 욥 1~2장.

요나단은 다윗에게 진실하고 신실한 친구였다. 그는 중재자로서 다윗과 사울 사이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으며, 왕위에 오를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전에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한 나라의 군대 전체를 내쫓으셨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군대와 다시 마주쳤다. 아마도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기적을 행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삼상 31:2).

그러나 침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요나단도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한 인물들 가운데 들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잦은 고난에 시달렸고, 명예로운 지위를 잃었으며, 때론 그들의 임지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우리 눈에 그들의 삶과 희생이 어쩌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동기를 얻었고, 그분의 동행하심으로 인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인생을 살았다. 그들의 위대함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이해와 기대를 초월한 것이었다.

우리 생각에 이해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많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고, 납득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될 날이 꼭 올 것이다.

 

교훈: 의인은 간혹 세상 무대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지지만 하늘에서는 빛나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부가적용)

요나단은 훌륭한 인품과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죽음을 맞아 충격을 준다. 요나단은 반쯤 미쳐 있는 부친 밑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미덕을 다 발휘했다. 그런데도 그는 사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결국을 맞이했다. 요나단은 영적인 눈도 갖추고 있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을 알아보았다. 왕자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고, 아버지께 효성을 다윗에게는 우정을 지킨 균형 잡힌 사람이다. 사무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요나단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의인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과연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의인을 지키시고 악인을 벌하시는가, 어째서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벌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 역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서에는 나타나지 않은 요나단의 한 명 남은 아들 므립바알(므비보셋)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역대기에 있다. 므립바알 역시 아들 미가 한 명밖에 얻지 못했으나, 그 미가는 네 명의 아들을 얻었고, 그 후손들이 계속 번창하여 그 후손 중 울람의 아들과 손자들은 150명에 달했고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들이 되었다고 역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요나단의 최후가 비록 비참했지만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어떻게 평가하셨고, 하늘에서 그에게 어떠한 지위를 주셨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요나단을 잊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신 것처럼 요나단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용맹하고 빼어난 자들이 되게 하셨다. 이 세상에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지며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마치 요나단이 당한 일처럼 의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며, 언젠가 더 큰 복이 그에게 주어질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요나단이 비록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 후손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 비록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시고 온 땅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고난을 잊지 않으시고 갚으시며 언젠가는 그를 높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하겠다.

 

금요일 10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자기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의 기록에 구약에 한 사람, 신약에 한 사람의 이름 곧 요나단과 침례 요한의 이름이 있다. 세자(世子)로 태어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에서 자기가 제외된 것을 알고는 경쟁자에게 친구로서 가장 친절하게 충실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였고, 자기 아버지의 세력이 쇠하여 가는 음울한 시기 내내 그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결국 그 옆에서 죽었다. 요나단의 이름은 하늘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으며, 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이타적인 사랑의 존재와 힘에 대한 증인으로 서 있다. 침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나타나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큰 무리가 그를 좇았다. 그러나 그가 증거해 왔던 분께서 등장하시자 모든 것이 일변하였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며, 요한의 일은 신속히 그 종말을 고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하였다.”(교육, 156~15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믿음과 추측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표적을 구하게 됩니까?

2. 어떤 문화에서는 나서지 않는 태도를 미덕으로 여기는 반면 어떤 문화에서는 그런 자세를 바람직하지 않게 취급합니다. 요나단은 스스로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는 너무 소극적인 태도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소극적이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그래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인들도 병에 걸리고,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이들과 사별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질문하는 비그리스도인 친구에게 신앙의 유익을 설명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4. 히 11:32~40을 읽고 요나단의 생애에 대하여 토론하십시오. 그대가 암담한 상황에 있거나 그런 전망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씀에서 어떤 도움을 얻습니까?

5.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인도 아버지를 공경해야 합니까? 육체적으로 학대를 가한 부모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떻게 따라야 합니까?

6. 세상에서 추구하는 위대함과 하나님이 보시는 위대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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