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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우리아: 한 이방인의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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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우리아: 한 이방인의 신의

11월 6일 일몰:오후 5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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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넘어지게 만든 것은 외적 상황이 아니었다. 고난의 광야를 걸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유지했다. 그의 실패는 내면에서 비롯되었다. 왕권이 확립되고 주변국의 위협도 현저히 약화되자 점점 긴장을 풀게 된다. 영적 긴장이 늦춰지자 내제되어 있던 본능적 욕심이 통제하기 어려운 욕망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가 가진 뛰어난 지성과 엄격한 도덕성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밧세바는 다른 사람, 그것도 자신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은 신복의 아내였다. 다윗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범죄하고 말았다. 사람의 눈을 피해 은밀한 상황에서 뿌려진 죄의 씨앗은 밧세바의 몸 안에서 자라가기 시작했다. 다윗은 사건의 전모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후방으로 불러내어 밧세바와 동침할 기회를 만든다. 자신의 의도는 숨기고 마치 그를 특별히 총애하는 양 선물과 혜택을 베푼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의 고결한 신앙적 도의적 양심조차 부끄럽게 만들려고 했다. 다윗의 기만적인 행동은 우리아의 고결한 태도와 큰 대조를 보인다. 헷 족속 출신의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우리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보다 더 의로웠다. 범죄를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죄의 결과를 숨기거나 피하기 위해 시도되는 고도의 기만적 술책은 사람을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지게 만든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추한 결말이다.

 

기억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26:5~11, 삼하 11장, 에 8:17, 시 51편, 사 56:3~7, 엡 2:19.

열차표를 사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오랫동안 긴 줄에 서 있는 그대는 열차를 놓칠까봐 조마조마하다. 마침내 돈을 내고 표를 받아 기차를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가는 길에 봤더니 거스름돈을 너무 많이 받았다. 어떻게 할 건가? 열차를 놓치더라도 돈을 돌려주기 위해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갈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선과 악에 대한 그대의 이해에 달려있다. 윤리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오늘날 가장 유행하고 있는 윤리는 상황윤리인데, 이는 세상에 도덕적 절대성은 없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다윗 왕의 윤리와 우리아의 윤리를 철저하고 대조해 보려고 한다. 다윗의 행동은 너무 끔찍하였고, 우리아의 행동보다 훨씬 심각하게 보였다. 우리아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삶과 불운한 최후를 보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단지 말만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일요일 10월 31일 미끄러운 비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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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만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고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다윗처럼 살았는가 아니면 다윗처럼 살지 못했는가 하는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서 죄의 노예가 되었던 슬픈 기억이 있었다. 죄라는 것은 사람을 구분하여 오지 않는다.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다가온다. 다윗은 처음에 유다 한 지파의 왕에 불과했으나 사울이 죽은 후 이제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아람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의 위치는 확고해져가고 백성의 신뢰를 받고 나라의 힘은 강성하여 갔다. 예루살렘 성도 확장하였다. 자신이 직접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될 만큼 용맹스럽고 충성스런 부하들이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이젠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죄라는 것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는 말씀이 정확하다. 죄는 이렇게 다가온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에게, 이젠 평안하다 생각하는 순간 찾아온 것이다.

 

1. 삼하 11장을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자가 어떻게 그와 같이 죄에 깊이 빠질 수 있습니까? 이런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경고를 주고 있습니까?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우리아의 이야기는 다윗의 생애와 통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다윗은 점점 강해지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사무엘하 11장은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예를 들어 자신들의 죄에 대해 핑계를 댄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죄에는 결과가 따르며 하나의 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강조하고 있다. 다윗의 죄 때문에 고통 받은 첫 번째 인물은 우리아였고, 그 다음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다윗은 가족의 신뢰를 잃었고, 그 영향은 가족의 문제에서 국가적 문제로 확대되어 갔다. 다윗의 죄가 일으킨 연쇄 반응은 강간(삼하 13:14), 살인(삼하 13:28~29), 반란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손실(삼하 15장)로 이어졌다. 비록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나, 사무엘서의 저자는 죄에는 어두운 결과들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삼하 12:13~ 14).

성경의 기자는 우리아와 다윗의 행동을 비교하기 위해 “보내다”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 동사를 기초로 하여 이야기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윗이 암몬 족속과 싸우도록 요압을 보냈다(사무엘하 11장 1절).

·다윗이 밧세바에 대하여 묻고 그녀에게 사람을 보냈다(3~4절).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행했다(4절).

·밧세바가 그녀의 임신 소식을 보냈다(5절).

·다윗이 우리아를 보냈다(6절).

·우리아가 밧세바와 자는 것을 거부했다(13절).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라는 서한을 보냈다(14~15절).

우리가 누군가를 파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보다 힘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은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대부분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는 출연자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일으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고대의 전형적인 군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으니 곧 죄였다. 그가 외적인 행위를 지배하는 듯 보였지만, 죄는 그의 선택과 동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훈: 죄는 여러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고 영향력이 많은 사람의 죄일수록 미치는 파장은 더욱 크다.

 

부가적용)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압살롬이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대적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다윗의 후궁, 즉 그의 양어머니들을 겁탈하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악한 패륜아라고 여겼을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다윗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자녀들에게 패륜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미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강간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이것은 이미 자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8명의 아내와 10명이 넘는 첩을 거느리고 있었고(삼하 3:2-5), 그의 아들의 수는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17명이다. 그의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결국 자녀들을 패륜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자녀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삶을 사는데 장애가 되고 있었다. 매사에 분명한 자세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히 진리에 대하여는 더욱 그렇다.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게 된다면 범사에 유혹이 있게 될 것이고,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매우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특별히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에 대하여 올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월요일 11월 1일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도입)

다윗을 보면 그의 생각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이다. 왕이라는 체면을 세우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왕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유지하기 위해 죄를 감추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아를 불러들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 했으나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동료들을 생각하는 우리아의 마음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리아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 방법은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14-15절)는 말씀처럼 우리아를 전투가 심한 지역으로 앞세워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 모두가 다윗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다윗에게서 이러한 생각이 나올 수가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은 이런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죄가 인간을 구별하여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죄가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즉 다윗이라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 역시 본질적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처음에는 우리아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패하자 우리아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아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죄를 감추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며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이러한 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다윗 얘기는 남 얘기가 아니며 지금 나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속에 숨겨진 죄를 고발하는 것이다.

 

다윗과 우리아의 이야기는 암몬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삼하 11:1을 천천히 읽어보라. 성경 기자는 다윗을 어떤 방식으로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가?

다윗은 궁에 머문 채 요압 휘하의 군대를 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는 자신이 부하들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위험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다. 가장 큰 위험은 밖이 아니라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권력이나 권위를 둘러 싼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자아 개념을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우리는 쉽게 자기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법과 규칙보다 우리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1. 삼상 26:5~11과 삼하 11장의 이야기에서 다윗이 행사하고 있는 지도력의 유형을 비교하십시오. 어떤 차이점을 발견했습니까?

사울의 생명을 보존하는 이야기에서 다윗은 모본을 통해 지도하고, 자원하는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하 11장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보호를 구하면서 군대와 함께 나아가는 대신, 뜨겁게 달궈진 습한 궁궐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 요새화 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궁궐에서는 예루살렘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다윗은 집들을 둘러보다 목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했다. 그는 그녀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내린 명령에 사용된 동사는 매우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단어는 다른 본문에서 강제적 의미를 띠고 있다(창 14:11 참조). 다윗은 욕망에 순종했다. 호르몬이 솟구치는 동안 그는 선악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의 활동을 완전히 중지시켰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얼마나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고려치 않았다. 고의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그는 밧세바와 우리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삶에,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훈: 아무리 작은 권한과 권위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통해 군림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 죄가 미칠 여러 결과들을 생각해야 한다.

 

부가적용)

다윗이 우리아가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처럼 혹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가?’라고 펄쩍 뛰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인간을 악하다고 선언하시고 또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써 모든 악이 노출되고 드러나는 것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말씀으로 인해서 죄가 드러나고 죄인 됨이 증거 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깊이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는지 아니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죄를 폭로하는 말씀을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아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죽인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죄를 감추고 나의 약점을 가리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곧 하나님의 원수이며 진노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다. 다윗의 권력의 정점에서 내리막길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백성을 돌보라고 주신 절대 권력으로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잘못을 감추고 은폐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지 모른다. 삼하10장까지 승승장구하던 다윗, 그 연전연승의 핵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바른 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윗과 함께하셔서 강성케 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던 다윗으로 인하여 모든 주변나라들과 민족들이 다윗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전쟁들은 끊이지 않았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도 이와 같다. 한번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이제는 평화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마다 믿는 성도들을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자와 같은 악한 어두움의 영들과의 영적 싸움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화요일 11월 2일 이스라엘 속의 이방인

 

도입)

우리아는 가나안 족이나 그의 이름으로 보아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이미 개종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이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라는 경건한 뜻이다. 저자는 우리아를 헷 사람이라고 상기시킴으로 이방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왕보다 더 의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다윗의 궤계로 요압이 지시한 싸움에서 그렇게 전사했다. 아니 살인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다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말이다. 다윗과 요압과 우리아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선하고 진실 되게 나오는 자는 우리아뿐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리고 있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아의 죽음이다. 요압도 헷 사람 우리아가 죽었나이다(21절)라고 전했고 요압의 사자도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24절)라는 보고를 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다윗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진실이었다. 다윗은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안도와 함께 갑자기 위로자와 격려자로 변한다(25절). 다윗은 요압에게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다. 원문의 뜻을 살리면 네 눈에 이 일을 악으로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다윗은 이것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는 의미로 우리아의 죽음을 전쟁 탓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다. 전쟁에 달관한 여유 있는 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더욱 힘쓰라, 담대하라고 격려한다. 다윗은 우리아가 살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아가 살아있음으로 자신의 죄가 폭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우리아가 없는 세상은 자신이 죄가 감춰지고 계속해서 왕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우리아는 죽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신하가 몇몇 죽는 것쯤은 대수도 아니었다. 이것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까지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의 지독한 이기심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항상 위험하다. 방심하면 무너진다. 잘된 후, 성공 후, 은혜 후에 위기가 온다. 인생에 만세반석은 없는 것이다. 다윗은 이루고 완성하고 정상에서 힘없이 붕괴된다. 안일, 게으름, 나태에서 오는 무기력, 한가함에서 정욕이 발동한다. 긴장이 풀림, 기도 안함, 깨어있지 않음에서 육욕, 정욕이 발동한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그곳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삼하 11:2) 인간은 연약해서 안정과 승리 후에 망가진다. 인간은 연약해서 여유와 성공 후에 망가진다. 인간은 연약해서 능력과 권력을 남용하여 개인의 욕구를 무자비하게 이룬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이용해서 빼앗고, 죽이고, 짐승 이하가 되고 만다. 이것이 다윗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아는 줄곧 헷 사람 우리아로 불려진다. 헷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헷 부족들인데, 이들이 북쪽의 신(新)히타이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구약시대에 세계는 문화, 국적, 민족, 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구약은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 간의 통혼(intermarriage)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금지하였다. 신 7:3에 제시된 금지법은 이스라엘에서 신앙적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재차 강조되었다. 통혼을 금지했던 주된 이유는 종교였다. 하지만 구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접한 이방인들의 예로 가득하다. 성경도 그들의 귀화(歸化)를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아의 경우 귀화는 종교와 함께 결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1. 또 어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화했습니까? 수 6:25, 룻 1:1~16, 에 8:17, 사 56:3~7.

모압 여인 룻은 자신의 땅과 백성 그리고 종교를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에 왔다. 그녀는 귀화란 다른 민족이 되는 것뿐 아니라 그 민족의 신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모범적인 며느리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매춘부까지 포함되어 있다. 두명의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을 기억하는가?

다윗을 섬겼던 헷 사람으로 우리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상 26:6을 보면 헷 사람 아히멜렉도 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지도급 장교였다(대상 11:41). 만약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이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이라면 우리아는 명문가에 장가든 것이다. 그의 장인 역시 지도급 장교이자 다윗이 신망했던 모사의 아들이었다. 이는 우리아의 집이 어떻게 궁궐에 인접해 있었는지, 또 아히도벨이 왜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했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손녀 밧세바의 문제와 그녀의 남편 우리아의 죽음 때문에 다윗에게 원한을 가졌던 것 같다.

 

교훈: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들끼리의 통혼은 강력하게 금지되었지만, 하나님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얼마든지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되었다.

 

부가적용)

사무엘하에서, 다윗의 부하였던 우리아가 헷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헷사람은, 철기문명의 원류민족인 히타이트족을 지칭한다. (삼하 11:3)“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히타이트인인 우리아도, 유대인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브라함과의 혈연관계가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말과는 굉장히 다른 말이다. 유대교는 실제로, 개종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만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유대교'에 속하지 않는 것은 유대교는, 모세로부터 시작한 율법이 아직도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에 비해서 기독교에서의 율법의 기능은, 생활 규범이 아닌,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수단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전히 기독교적인 입장을 취하자면 기독교인이란, '유태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유대인' 이다. 유태인들도, 본래 개종을 받아들인다. 유대인들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틀린 시각인 것이다.

 

수요일 11월 3일 이름 속에 담긴 의미

 

도입)

다윗이 사람을 보내 목욕하고 있던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다. 밧세바는 맹세의 딸이라는 의미이다. 부모가 맹세 후 얻은 딸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우리아는 삼십인 용사(23:39)중 한 명이었으며 그는 헷사람이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엘리암은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이며(삼하 23:34),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의 모사였으나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에 다윗을 배반한다(삼하 15:12,31). 밧세바의 아비와 할아비를 밝힌 것은 다윗이 측근이 아히도벨의 손녀까지도 배려하지 않는 다윗의 죄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다. 또한 후일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하고 반란자 압살롬의 편에 선 것은 다윗이 자신의 손녀를 범한 일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아의 아내는 예수님의 족보에 언급되어 있다(마 1:6). 학자들은 밧세바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다윗을 유혹했다고 한다. 그러나 3절을 보면 다윗은 밧세바가 누구인지 모르고 접근하게 된다.

 

성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문화적 유산과 신념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소원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삶의 방향과 신념이 바뀌면 종종 이름도 바뀌었다.

1. 다음의 성경 인물에게는 어떤 새 이름이 주어졌으며 이름이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창 17:5), 야곱(창 32:27~28), 다니엘(단 1:7).

하늘의 방문자와 씨름했던 밤, 야곱은 구속의 역사에게 가장 극적인 이름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속이는 자(야곱)”에서 “하나님께서 다투시리라(이스라엘)”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후손이라 일컬어졌다.

다니엘의 개명(改名)은 조금 다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어린 포로들이 누구의 지배하에 있는지 잊지 않도록 그들을 세뇌시키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의 다니엘은 “왕의 생명을 보호하라”는 의미의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은 다니엘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우리아는 성경에서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의 기별을 전했던 우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도 있었다(렘 26:20~23). 우리아는 “여호와는 나의 빛” 또는 “여호와의 불길”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이름이다. 만약 그가 헷 족속 태생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아의 민족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가족이거나 또는 위대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가문의 역사와 우리 개인의 과거사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사이에 있는 장벽들을 모두 무너뜨리셨다(갈 3:28).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에게 있어서 각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다. 경우에 따라 하나님께서 일단의 무리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시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였다.

 

교훈: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변화된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며 이런 이유 때문에 새 이름을 받게 된다.

 

부가적용)

사무엘하 23장 8절 이하를 보면 거기에는 다윗의 용사 37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혼자서 팔백 명과 더불어 싸워 이긴 요셉 밧세바의 이름도 나오고,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는 우물물을 길러 온 세 용사도 있었다. 이토록 다윗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마다하지 않고 싸운 충성된 용사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구축했던 다윗 왕의 이면에는 이렇듯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충성한 믿음의 용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하 23장 39절에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성경은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헷 사람 우리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의 아내가 욕보임을 당한지도 모르고 다윗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며 전쟁에 나갔던 우리아이다.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배반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이 이럴 수가 있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윗만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온 이스라엘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스라엘의 별이지 않은가? 남의 아내를 임신시키고 그 남편을 살해한 이스라엘의 왕! 이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이 사람이 다윗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지 않은? 우리가 이러한 사람을 존경하고 너도 나도 다윗이란 이름으로 영문이름을 짓는다. 우리아의 잘못이라면 왕을 진심으로 섬기려했고, 동료들과 함께하려했던 것 밖에 없는데, 그런데 그 왕(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우리아를 역사에서 지웠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다윗이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면 되지만 우리아는 뭐가 되는가? 왜 사람들은 다윗의 이야기만 하고 우리아의 경우는 말하지 않는가? 물으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우리아처럼 살면 개죽음 당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유사한 사건이 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아합과 왕비 이세벨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 있다. 그것은 나봇이라는 의로운 사람이 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유업을 귀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유업을 지키고자 했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이것이 남의 일일 때는 우리가 별 주의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아나 나봇처럼 억울하고, 설명이 잘 안 되는 삶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종종 나타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목요일 11월 4일 원칙의 사람

 

도입)

천국에 가면 다윗과 우리아가 만날 터인데 그들의 만남은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 다윗은 뭇 백성들로부터 성군이요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과 칭찬을 받겠지만, 우리아 앞에만 가면 간음자요 살인자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우리아라는 이름 앞에만 서면 다윗은 움츠려 들고 꼼짝 못할 것이다. 그 이름은 다윗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이름이요, 다윗의 사악함과 수치스러움을 떠올리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에 우리아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다윗을 단지 인간적인 영웅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성경에 우리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아의 이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윗같이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죄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이는 아무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우리아를 언급한 것은 다윗을 비난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5)고 했다. 우리아의 이름을 읽을 때, 우리 모두는 숙연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안에 우리아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보다 더 사악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고전 15:11)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아의 사건은 다윗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아픔이지만, 역설적으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족보를 보게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죄인된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성경 이야기에서 밧세바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성경 기자도 그녀의 책임이나 행적에 대한 어떤 설명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수동적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그녀 역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의 아이가 죽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는 장면은 임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윗에게 기별을 전할 때가 유일하다(삼하 11:5). 다윗은 우리아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윗은 약 6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아를 예루살렘에 불러들였다. 가벼운 담화를 나눈 뒤, 다윗은 은근히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자라고 명한다(삼하 11:8). 관대한 척 노력하면서 모든 일들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는 우리아의 집에 선물까지 보냈다. 그러나 원칙의 사람 우리아는 흔들리 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윗은 우리아가 왕의 신복들과 함께 성문에서 밤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황이 다윗의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들였다. 그는 흥분하였다. 우리아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한때 충직한 사람이었던 다윗이 이제는 우리아의 충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1. 삼하 11:10~13을 보면 우리아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충직함을 보인 성경 인물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아의 대답은 그가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자신의 전우들에게 대하여 완전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아는 자신의 현 상황을 개인적 안위나 이익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때 사울 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보였던 다윗이 이제는 우리아의 충성과 충직함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다윗은 야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의도적으로 우리아의 원칙을 무너뜨리고자 술에 취하게 만들었다. 롯의 두 딸도 이와 같은 술책을 사용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압과 암몬 족속이 유래되었었다(창 19:30~ 38). 그러나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아는 타협하지 않고 다시 왕의 신복들과 함께 밤을 보냈다.

 

교훈: 하나님은 나침반의 바늘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에 굳게

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부가적용)

충직한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궁중 문 병사들의 숙영지로 갔다. 우리아는 언약궤가 전쟁 중에 있는데 자신이 어찌 휴가를 즐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호와의 전쟁과 관련된 정결 유지법에 의하면 여자와 잠자리를 한 사람은 거룩한 진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신 23:9-14). 만일 우리아가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게 되면 그는 여호와의 거룩한 현존이 머무는 진으로 즉각 되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궁중 근위병의 숙영지에서 잠을 자려고 했을 것이다. (12)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13)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 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확고부동한 의지를 확인한 후 우리아를 하루 더 궁궐에 머물게 했다. 다윗은 다음날 귀대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아는 그날에도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날 밤 다윗은 우리아를 그의 식탁에 불러 먹고 마시고 취하게 했으나 이번에도 저녁 때 그는 집에 가지 않고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수문 부대에서 잠을 잤다. 우리아는 그의 왕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으며 집으로 가기를 거절하였다! 삼하 11:1-2절에 나오는 다윗의 방종과 삼하 11:11절에 나오는 우리아의 훈련된 생활을 비교해 보라. 그의 계획이 실패하자 다윗은 새로운 속임수를 시도하였으며 그 사람을 술 취하게 하였다! 술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우리아는 술 취하지 않은 다윗보다 더욱 훈련된 면과 원칙을 보여 주었다!

 

금요일 11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에는 사람들을 칭찬하여 말한 데가 거의 없다. 일찍이 세상에 산 가장 선한 사람들의 미덕까지도 자세하게 말해 주는 지면이 거의 없다. 이러한 침묵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이 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좋은 자질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덕인 이상 그들의 위인(爲人)됨이 어떠하든지 무엇을 성취했든지 간에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성경 역사의 교훈이 가르쳐 주는 것처럼 사람을 칭찬하거나 높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 결국에 가서는 타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싸움을 계속하기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고 우리로 자고하게 하거나 자신을 의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분명히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성경의 취지는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다윗에게 범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자신을 의뢰하는 정신과 자기를 높이는 정신이었다. 아첨과 권세와 사치의 미묘한 유혹이 다윗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위의 민족과의 교제도 역시 악한 감화를 끼쳤다. 동방의 통치자들 사이에 성행하던 풍습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왕이 행했을 때에는 정죄하지 않았으며 왕은 신하가 행하는 그런 자제를 행할 의무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죄의 흉악성에 대한 다윗의 생각을 무디게 했다. 그리하여 다윗은 겸손히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기 시작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과반에서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보십시오. 그런 지위에서 권한 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지책은 무엇인지 토론하십시오. 권한과 영향력을 남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2. 교과반원들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십시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또는 비교인들이 그대의 교과반에 왔을 때 어떻게 환영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합니까?

3. 시편 51편을 읽고 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용서란 무엇인지 토론하십시오. 우리가 다윗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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