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과 바룩: 세상이 무너질 때 유산을 남김 (예화로푸는 과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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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과 바룩: 세상이 무너질 때 유산을 남김
12월 25일 일몰:오후 5시 19분
도입)
프랑스 불세출의 영웅인 나폴레옹은 자신을 위해서 대사를 경영했던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이 가진 비전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그의 야망은 유럽전체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통일하여 단일국가로 만들고 자신이 황제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꿈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여러 나라를 차츰차츰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 과정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자신이 품고 있던 온유함과 겸손함이 사라지고 그 마음속에는 루시퍼가 가지고 있는 교만함이 가득 차게 되었다. 한 마디로 야망의 화신이 되었다.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누구라도 처형을 시켜버렸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사실은 현실에 보이는 야망에 집착하다가 정작 중요한 내세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서 ‘잃으면’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해치면’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영혼을 해치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어리석게도 나폴레옹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다가 그만 영혼을 해치고야 말았다. 결국에는 그 영혼이 멸망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대에 서고야 말았다.
기억절: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사 53:1~5, 렘 7:1~11, 28, 45, 마 6:25~34.
바룩은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때가 다해가고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을 이백 년 이상 지배했던 앗수르는 내전으로 말미암아 봉신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내분되었다. 바벨론은 새로운 막강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고, 그 틈에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야는 영토를 확장하고 참하나님에 대한 국가적 헌신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급변하는 기원 전 7세기 말의 정세 속에서 예루살렘을 위해 남은 때는 그리 길지 않았다. 요시야 왕은 애굽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9). 그의 아들들의 입지는 아버지 때만 못했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바벨론을 배신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결국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바룩은 그와 같이 급격한 변화와 상실의 시대를 살았다. 그의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룩은 어떤 왕이나 전쟁도 파괴할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배경인물로 선정된 바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일요일 12월 19일
바룩의 세계
도입)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사람은 바룩이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서기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비서라 할 수 있다. 그는 말씀을 받아 적었을 뿐 아니라, 갇힌 예레미야를 대신해 아나돗의 밭을 사는 일을 대행하기도 했다(참조 렘 37장). 그런가 하면 받아 적은 말씀을 가지고 가서 유다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도 했다. 예레미야와 바룩의 관계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서기가 명심해야 할 일은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적어야 했다. 그 말씀에 덧붙이거나 빼거나 왜곡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바룩은 정말 충실한 서기였다.
바룩이 살던 세계는 유다를 지배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정황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 유다는 바벨론의 굴레 아래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강한 민족주의 정서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바벨론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척하는 계급에게 경제적 여건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고대 유대 사회의 기초를 형성했던 종교 조직이 있었다.
1. 렘 7:1~11을 읽으십시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에 백성들이 책망을 받았습니까? 그 문제들은 오늘날 어떤 문제에 해당합니까? 특히 4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백성들은 어떤 권면을 듣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룩의 이름은 “복 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그의 삶은 이름과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직업은 서기관이었는데, 이는 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는 서기관 가문 출신으로 보이며,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바룩이 어떻게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위해 봉사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룩이 예레미야에게로 이끌린 것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충실한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설교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상은 온전히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이상을 통하여 예레미야는 유다가 의지하고 있는 사회 구조의 결함에 대해 독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이 그들의 행위를 돌이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지 경고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아마도 이런 사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룩으로 하여금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시대적 사명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를 찾고 계신다.
부가적용)
바룩은 당시(BC 605년)부터 예레미야의 서기관으로 사역을 시작했으며 항상 예레미야와 함께 동행하며 때때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결국 바룩은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에 대하여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유다 백성으로서 예레미야 개인의 서기관이 아닌 하나님의 예언 사역의 한 사역자라고 할 수 있다. 바룩은 자기가 예레미야의 명령으로 기록한 예언(36:1-8)으로 인하여 심각한 낙담에 빠져 있었다. 즉 자기 동족의 멸망과 고통을 미리 알고 나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예레미야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슬픔을 더해 주셨다고 느끼게 되었고,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신앙의 감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지으신 것을 참으로 파괴하고, 심으신 것을 뽑아버릴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은 범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권고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온 사방에 재앙이 있을지라도 바룩에게 피할 길을 내시며, 은혜로 보호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바룩은 동시대에 사람인 하박국 과 같이 모든 상황이 비관적으로 보일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참혹한 민족적인 심판이 온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부터 온 확고한 소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바룩의 신앙은 희망이 없는 재앙의 현실 속에서도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언약을 유지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가시적으로 엿보게 하는 좋은 실례이다.
월요일 12월 20일
예레미야의 서기관
도입)
바룩은 예레미야의 서기로서 모든 것을 예레미야와 함께 나누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그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그 내용은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하는 입장이 너무도 괴로웠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핍박을 받고 고통을 받을 때 바룩도 같은 경험을 했다. 예레미야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듣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바라보는 좌절을 바룩도 함께 경험하였다. 바룩은 단지 일만 함께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과 슬픔도 함께 나누는 사람이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기뻐할 줄 알았다. 이러다 보니 3절의 말씀처럼 그는 탄식하면서 평안함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예레미야와 바룩에게서 고통 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요시야의 개혁에 참여했던 마세야의 손자요, 왕의 서기관이었던 바룩은 당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는 예레미야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유다의 백성과 고관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낭독하여 일시에 유명해지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명성을 따라 입신양명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는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보무도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을 읽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수치와 멸시를 당하였고, 예레미야와 함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바룩은 언젠가 그의 추적자들에게 붙잡히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라며, 여호와께서 그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다고 탄식했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통해 성경의 기록 과정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렘 36:4에서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백성들에게 보낼 기별을 받아 적게 한다. 바룩은 그것을 그대로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에 옮겨 적었다. 이것은 영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우선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신체를 지배해서 그의 손이 기별을 받아쓰도록 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상과 기별을 주신다. 그런 다음 보통 다른 선지자 같으면 기별을 문서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경우 직접 기별을 적지 않고 바룩에게 불러주어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바룩은 그 기별을 대중에게 알렸다. 예레미야는 왕궁의 눈 밖에 나 있었고, 성전에 출입할 수 없도록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성일이면 바룩이 성전에서 예언적 기별을 백성들에게 읽어주었다. 바룩은 그것이 자신이나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임을 주장하였다.
1. 예레미야 28장의 하나냐의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이 기사는 사 8:20에서 제시한 원칙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별은 인기를 얻기 위하여 백성들의 견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기별이 정치적 관점에서 항상 옳게 보이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되기도 드물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별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의 해석은 모순될 수 있으나, 기별 자체는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
렘 28:7~9에서 선지자는 이미 성취된 예언의 견고한 토대 위에 세워진 성경의 통일성을 언급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원칙은 생생하게 재확인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만 주시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감정을 거슬리는 부분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도 주신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어느 곳보다 성경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계시하셨다.
교훈: 우리는 듣기 좋은 말씀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말씀을 보내주신다.
부가적용)
세운 것을 헐기도 하시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육체에 재앙을 내리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바룩이 자신을 위하여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니 그 일을 중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대신 바룩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 보호하시리라 약속하신다.
화요일 12월 21일
좌절된 야망(렘 36장)
도입)
세상을 향하여 자신의 꿈을 한창 드러낼 젊은이였던 바룩은 자신을 위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레미야의 사역에 참여하는 일을 통해 그가 가졌던 야망을 펼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야망을 버리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은 그가 재난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참혹한 재앙을 당하게 되는 상황에서 그가 자신을 위한 야망을 품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를 묻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는 그 자신을 위한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야망만을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문학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까 자신들이 스타가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원대한 야망을 품고 그들이 작품을 써 내려간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떠 보니까 그동안 자신이 정성을 다하여 쓴 작품들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칭찬을 듣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성공은 이기적인 야망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서 날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인생의 성공이라는 문에 도달하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바룩 역시 그 자신에 대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얻을 수 있었던 축복들을 그의 마음속에는 헛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화로 푸는 과정공부)
인간의 야망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악한 죄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거룩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거룩함’과 ‘야망’은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사악한 탐심으로 뭉친 마음에다가 거룩함을 사탕처럼 달콤하게 발라 놓은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이것을 조심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이러한 헌신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틀림없이 좋은 복을 내려 주시겠지!”, “내가 이만큼 충성하고 봉사하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겠지!”라는 야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신앙의 기초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최후의 순간까지 달려가야만 하는 신앙생활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니다. 그 목적은 바로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
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복음을 들고 힘찬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 드리는 일이다. 이것은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요 당연한 도리인줄로 믿는다. 그러다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도 내려주시고, 이 세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허락하여 주시고, 갖가지 신령한 은혜와 은사들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축복하여 주시는 것이다.
마침내 유다 백성들에게 심각한 상황이 일어날 조심이 보이고 있었다. 렘 36:9에서 백성들은 금식일로 성전에 모였다. 바룩은 다른 서기관들과의 직업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성전 입구 쪽 그마랴 창에 있는 좋은 자리를 확보하였다. 거기에서 바룩은 예레미야의 기별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읽어 나아갔다. 바룩이 기별을 다 읽자, 성전 관원들이 말씀을 따로 읽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말씀의 기원에 대하여 질문한 뒤, 그들은 두루마리를 왕에게 가져가기로 결정하였다. 잠시 동안이지만 유다에 변화에 생길 것처럼 보였다.
바룩에게 이는 희망의 순간이었다. 상황이 반전되기만 한다면 예레미야를 위한 그의 조력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개혁의 과정에서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정부 내 요직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1. 왕의 반응은 바룩의 장래에, 특히 그의 경력에 어떤 의미였습니까? 렘 36장 참조.
두루마리는 파피루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쌌다. 게다가 일일이 손으로 복사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루마리는 희귀하고 값비싼 재산이었다. 바룩의 편으로 전달된 두루마리는 여호야김을 위한 하나님의 기별이었다. 왕과 그의 신하들은 두루마리를 갈기갈기 찢고 불태움으로써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다. 두루마리가 불탐으로써 바룩이 기울였던 장시간의 노고는 수포로 돌아갔다.
왕궁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희망했던 바룩은 자신이 지금까지 “엉뚱한” 사람을 돕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궁에서 서기관으로 일하겠다는 자신의 미래도 물 건너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분노케 만들었다. 이로써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치를 대가가 얼마나 큰지 분명해졌다.
바룩은 이제 예레미야와 함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왕궁 소속 정보원들이 “망국”을 바라는 이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도시를 샅샅이 뒤졌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겁쟁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이용해 출세하려는 자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야망에 의해 이끌린 삶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교훈: 우리는 신앙을 통해 지상에서 많은 복을 누리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드는 사람은 오직 천국의 보상만을 바란다.
부가적용)
바룩이 만일 자신을 위한 야망을 포기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전할 자로 삼으려 하셨다. 때가 되면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의 예언집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의 말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너희 가는 모든 곳”에서 생명은 부지하지만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를 괴롭히고 박해하는 이방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고난의 삶에서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보장 받으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그가 이 고난의 삶의 과정을 잘 이기고 극복하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그는 미래의 희망을 전달한 사명자이기 때문이다. 그 때와 같이 오늘 우리도 예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을 전할 사명자들로서 삶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슬픔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신다. 초년병들처럼 쉽게 좌절하는 자들이 되지 말라. 노년의 예레미야나 바울처럼 주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라. 그러면 주께서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나타내실 것이다.
(예화로 푸는 과정공부)
일본에는 아주 유명한 우동집이 있는데, 이 우동집의 사장은 원래는 동경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교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이 우동집을 창업하게 되었고, 자신의 아버지도 대를 이어서 우동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아들아, 이제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가업의 대를 잇기 위해서 네가 이 우동집을 운영하도록 하여라!”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업을 잇기 위해서 그날부로 교수직을 그만두고 우동집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우동집을 운영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자신은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아주 자유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이 우동집에 온 사람들이 맛있는 우동도 먹고 멋있는 그림을 보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손님들의 입 소문을 타서 그만 이 우동집의 일본 오사카에서 아주 유명한 음식점이 되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이 사장이 돈을 벌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처럼 유명한 우동집이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문의 기업을 잇기 위해서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일과 취미생활에 최선을 다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재물도 따라오고 명성도 얻은 유명한 사업가가 된 것이다. 무엇인가 헛된 야망에 집착하는 것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즐기다 보면 그의 삶에 큰 성과를 가져오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수요일 12월 22일
화로다!
도입)
눈앞에 장애물에만 골똘하다보면 그 장애물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 눈을 들어 올릴 필요가 있다. 세상사 뜻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높은 곳에서, 혹은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 앞에 닥치 어려움이라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지금 비록 바벨론은 강대해 보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망해버린 것처럼 보여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을 것을 뽑기도 한다.(4절). 나찌의 폭압정치에 절망했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 말씀과 접하는 순간, 자기 속에 어떤 뜨거움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지금 비록 어둠이 지극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승리할 것이다. 함부로 절망하고 탄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대한 확신, 이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희망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예레미야 45장에서 여호와는 오직 바룩을 위한 특별 기별을 주셨다. 때가 그럴 만도 했다. 첫째, 렘 45:1에 “여호야김 사 년”이란 역사적 언급을 통해 우리는 예레미야 45장이 36장 이후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는 분명 옥중에 있었을 것이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부흥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둘째, 지상의 관점에서 바룩의 미래는 가장 암담해 보였다. 렘 45:3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바룩은 소위 “궂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슬픔, 우울함, 실의에 빠진 감정은 이 땅에서 자연스런 경험이다. 이런 감정을 유발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따라서 누구도 이런 감정을 죄로 여길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그런 감정을 느끼는 못한다면 거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성경 가운데 수많은 인물들이 절망의 순간을 경험했다(왕상 19:4, 욥 6:2~3, 시 55:4 참조). 우리 스스로 그런 감정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1. 사 53:1~5을 읽으십시오. 어떤 분위기와 정서가 묘사되어 있습니까? 이런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정서적인 고뇌와 슬픔을 겪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타락한 인성을 가진 우리가 이생에서 겪어야 할 고통일 뿐이다. 그 고통이 우리의 잘못 때문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 악한 자가 우리의 슬픔을 이용해 주님께로부터 우리를 돌아서게 만들거나, 회의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용서와 치유와 밝은 미래와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더 나은 경험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때로 이 땅의 속성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바라고 상상하는 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겪든지 끔찍한 죄와 고통과 죽음의 경험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위대한 소망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교훈: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란 전혀 슬픔이 없는 삶이라기보다는 소망을 잊지 않는 삶이다.
예화로 푸는 부가적용)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개인적인 야망이 가장 컸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바로 가롯 유다이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가롯 유다는 야망을 품었다.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적이 일어나자 신이 났다. 그는 조만간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평화가 올 줄로 믿었다. 예수님의 뒤만 따라다니면 자신에게도 정치적으로 큰 자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정치적인 분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곧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가롯 유다는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3년이다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자꾸만 가롯 유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로만 들어가셨다. 자신이 야망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롯 유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그
감정이 예수님을 향한 미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은 30냥에 그만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말았다. 결국에 가서는 가롯 유다는 스승을 판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마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이기적인 야망은 큰 불행을 초래한다는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란다. 오늘 교과에 등장하는 바룩이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룩의 개인적인 야망을 바라보면서 탄식을 하기 시작한다. “지금 하나님은 이 유대 땅을 심판하시고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로 작정을 하셨는데, 바룩아 너는 너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만을 먼저 생각하고 있느냐! 그것을 더 이상 경영하지 말라!” 바룩은 서기관이라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야망에 사로 잡혀 있었던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도 이기적인 야망이 거룩한 일을 통하여 다가올 수 있는 하나의 유혹이 될 수가 있다. 우리 신앙인들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소망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는가?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이다.(롬 8:24-25).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라.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소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 146:5). 사실 이 깊은 절망의 때는 우리에게 힘듦으로 다가오지만 다시 한 번 바라보면 그 안에는 감추어진 보물이 있다.
목요일 12월 23일
네게 무엇을 주시겠나이까?
도입)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대서한 사람이 바룩이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 적은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고자 애를 쓰고 말씀대로 살았다.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을 기록함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아픔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바룩에게도 똑같이 주신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고 읽으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룩은 민족의 현실과 어려움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는 의인의 안타까운 탄식이었다. 바룩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여 탄식하는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의 믿음과 태도를 보시고 뽑아버리기도 하시고 태워버리기도 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함부로 나태하게 보내면 안된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모든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동행해주신다. 바룩이 민족들 향하여 탄식할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의인의 간구를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불의가 가득하고 악이 가득하다하여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민족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생명과 목숨을 보존해주신다. 악의가 가득한 가운데서도 그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의로운 바된다고 여기시면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놀라우신 구원의 은혜를 약속해주시는 것이다.
1. 렘 45장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바룩은 어떤 인물입니까?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다. 그분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심고 가꾸어왔다. 고집 세고 반항적인 자녀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처럼 여호와는 천 년 이상 자기 백성을 훈계하기도 했고 달래기도 했다. 바룩의 고통과 슬픔은 하나님의 것에 비하면 희미한 투영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에 항상 쉽게 공감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실의에 빠진 서기관을 찾아오셔서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이스라엘에게 곧 임할 심판의 때에 바룩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보전해 주셨다.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5절)는 표현은 예레미야서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렘 21:9, 38:2, 39:18). 이는 전투에 패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하는 한 병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역설적이지만 구원은 “패배”로부터 비롯된다. 예수의 승리도 십자가의 수치과 패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기꺼이 투쟁을 멈추고 우리의 생명과 계획과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다.
2. 렘 45:1~5과 마 6:25~34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렘 45장에서 하나님은 바룩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상기시키셨다. 예수님도 지상의 소유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셨다(마 6장). 재난의 때에 중요한 것은 큰일을 하는 것보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의 밝은 미래는 놓쳤지만, 역설적으로 그와의 인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꿈꿔왔던 것보다 훨씬 위대한 유산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난 13주 동안 구약의 배경 인물을 연구하면서 살폈던 것이 바로 이 유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인물들은 대부분은 자기 시대의 주역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성경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남겨 주었다.
교훈: 세상을 다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지만, 모든 것을 다 잃고 영생을 얻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예화로 푸는 부가적용)
인간의 야망은 영원히 달성되지 않는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B.C.333년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위대한 정복자였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된 알렉산더는 불과 10년 만에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하는 대 위업을 달성한 왕이 되었다. 30세가 되자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게 된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더 이상 내가 정복할 나라가 없으니 이제 나는 심심해서 어찌할고!” 이처럼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달성하였으나 더 큰 야망을 품고 괴로워하다가 그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인간의 야망은 달성한 순간에 변질되는 특성이 있다. 인간의 야망은 한도 끝도 없다. 한 사람이 자신의 야망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야망은 변종 바이러스처럼 새로운 야망으로 순식간에 변질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죄성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야망은 달성되는 순간에 또 다른 야망을 낳고, 계속해서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한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은행 통장에 1억원을 저축하기 위해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였다. 수년 동안 남들 놀 때에도 놀지 아니하고 먹을 것 안 먹고, 좋은 옷도 사지 않고 저축을 하여서 드디어 1억원이라는 큰 돈을 모으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통장을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1억원이라는 돈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 야망은 10억원이라는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남들 결혼할 때에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따뜻한 가정의 소중함도 느끼지 못한 채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나이 40이 되어서 드디어 목표한 10억원의 돈을 모으게 되었다. 하지만 야망을 달성한 기쁨도 잠시 잠깐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10억원도 그렇게 큰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세금을 떼고 한 달에 나오는 이자를 계산해 보니까 그 동안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비하여 큰 돈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 새로운 야망을 품었다. 이번에는 100억원의 돈을 목표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을 해 나갔다. 드디어 나이 60이 되어서 자신이 품은 야망을 달성하였다. 100억원을 모은 이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제안을 한다. 지금 200억원만 있으면 큰 사업을 할 수가 있는데, 혹시 200억원이 있으면 투자를 한 번 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100억원을 모은 사람이 이렇게 땅을 치면서 탄식하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지금 내가 200억원이 있으면 큰 사업을 할 수가 있는데, 나에게는 돈이 100억원밖에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의 야망은 한도 끝도 없다. 이기적인 야망을 품고 부와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너는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감추어진 욕망과 보상으로 인하여 피곤하여진다. 더 유명해지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할 때가 있다. 경쟁하는 마음보다 쓰임 받는 자체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주의 일을 하지 말고 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금요일 12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하여 바룩에게 주니 ‘그가 유다 왕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렘 36:28, 32)다.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선지자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호야김이 여호와의 종의 감화를 막는 데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 더욱더 하나님의 요구를 밝힐 기회를 주었다.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투옥했던 정신 곧 견책에 반대하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되풀이해서 주어지는 경고를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그들의 허영심을 칭찬하고 그들의 행동을 너그럽게 보는 거짓 교사들에게 듣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환난 날에 안전한 피난처를 얻지 못하고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종들은 비난과 무시와 허위 진술을 통하여 그들에게 이르러 온 시련과 고통에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직면하여야 한다. 그들은 항상 옛 선지자들과 인류의 구주와 그의 사도들이 말씀을 인하여 학대와 핍박을 참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사업을 계속 충실히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선지자와 왕, 4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대는 영감이 주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사역은 이런 중요한 주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2.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함으로 개인적 야망이 좌절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3. 주님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각자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서로의 이야기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섬긴 대가로 돌려받은 것이 가치 없는 것이었는지 물어보십시오.
4. 잘못된 행동 때문에 견책을 받을 때 그대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대는 무릎을 꿇고 회개하겠습니까? 아니면 유다의 왕처럼 견책의 말씀을 불에 던지고 여호와의 사자를 감옥에 가두겠습니까? 그대의 반응에 따르면 그대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변화될 필요가 있습니까?
5. 우리의 고난이 직접적으로 우리의 죄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증거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극심한 고통이 따를 때에도 믿음을 굳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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