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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사랑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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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9.09 10:35 조회수 5,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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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사랑과 율법

9월 18일

일몰: 오후 6시 36분

 

도입)

우리는 율법하면 경직이 된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혼난다, 벌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또 성경에 그렇게 기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의 참뜻을 모르고 보기 때문에 율법이 진정으로 하고 자 하는 일을 놓치고 있다. 율법을 보면 하라는 법보다 하지 말라는 법이 더 많고 축복 보다는 저주가 더 많이 가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위험한 지역에 경고문을 보았는가? 경고문에 좋은 말로 쓴 경우는 없다. 독극물 주의는 해골이 그려져 있지 않은가? 위험한 절벽이 있는 데 경고문에 ‘한번 떨어져 보실래요? 죽는지 사는지?’ 그러면 그 경고문을 본 사람이 “우리 심심한데 한번 떨어져 볼까? 절벽아래 바위가 혹이 나는 지 내 머리에 혹이 나는지” 하면서 떨어진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경고문을 써 가지고 누가 위험하다고 느끼겠는가? 율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은 우리를 지켜주는 법이다. 보호하는 보호법이다. 율법을 벗어나는 것은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죄악은 사망이요, 사망은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율법은 저주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망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겁을 주어 보호하고자 하는 큰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경고문을 무시하고 안전장치를 넘어가므로 온 인류는 죽은 자가 되었다. 율법을 지킬 때는 율법이 보호를 하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을 때는 죄 아래 놓이게 되고 죄의 삶은 사망인 것이다. (롬 6:23) 하나님께서 죄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리인 것을 아시고 율법으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 구원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는 법을 두셨던 것이다. 구약(율법) 전체가 예수님을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 반장은 친교와 선교를 위해 안교활동반을 꼭 실시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 12~13장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로마교인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높은 순종의 표준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서 비롯되며, 그런 변화는 오직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의 마음속에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는 이런 순종이 자동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의무가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고, 그런 의무들을 순종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능력 없이 순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일부이다. 바울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로마서 13~15장에서 바울은 행위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앞서 밝힌 믿음으로 얻는 의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행위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참된 표현방법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신약이 구약보다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른 도덕적 행위의 모본이 주어졌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일요일

9월 12일

산제사

 

도입)

산제사란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살아있는 제사라는 뜻이다. 흔히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비유로 정성 정도의 기준을 얘기하지만 정확하게는 산제사였는가, 아니었는가가 기준이다. 산제사를 드리는 데는 경건과 정성이 기본이지만 그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식이 핵심이다. 하나님은 예전에도 시방도 살아계신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는 의식이 확실하다면 경건과 정성은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냐에 초점을 맞춘 제사라야 산제사가 된다. 교회는 기쁨의 장소이고 예배는 기쁨의 행사다. 성경말씀도 “항상 기뻐하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 기쁨을 자기만 만족하는 기쁨이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건 일시적이고 덧없는 기쁨일 뿐이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고서 얻는 기쁨이다. 엄격히 말하면 나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항상 기뻐하셔야 한다. 내 기쁨의 원천이 하나님이어야 하고 그러한 기쁨에 항상 젖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산제사가 절실한 시점이다.

 

교리적인 내용은 로마서 11장에서 끝났다. 12장에서 16장까지는 실천적인 교훈과 개인적인 언급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장들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믿음은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믿음이 주님께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어느 정도 무효화시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명령은 여전히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신약에서조차 강조되고 있다. 이런 도덕적 명령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규범화되기 쉽다는 지적도 전혀 없다. 오히려 자아와 죄 사이의 투쟁이 항상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벧전 4: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속되어 있으며,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원수의 세상에 살며, 유혹에 대항하여 많은 투쟁을 치러야 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히 7:25).

 

❶ 롬 12:1을 읽으십시오. 여기에서 나오는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롬 12:2은 이런 개념에 얼마나 알맞습니까?

롬 12:1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넌지시 언급한다. 이전에 동물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되 그분을 섬기기 위한 산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제사에 바쳐질 제물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단 하나의 흠이라도 발견되면 그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제물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 가운데 흠이 없는 자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능한 한 흠 없고 신실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부가적용)

산제사는 죽은 제사를 염두에 두고 권고하는 말씀이다. 율법 시대에는 짐승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젠 다른 의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지 않고도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을 수가 있다. 곧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거룩해야만 했다(참조,레 2:10). 때문에 자신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성도는 거룩한 생활, 거룩한 몸과 마음을 지탱함으로써 온전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다. 즉 하나님께 옳다 함을 인정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욕심을 죽이며,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여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산제사‘라는 말을 실천편(12-16장)의 초두에 기록함으로써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월요일

9월 13일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함

 

도입)

예수께서 가르치신 계명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그것은 율법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예수의 새 계명은 모세 율법에 대한 창조적 수정(修訂)이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었다. 모세가 준 율법은 무효화되지 않고 예수께서 주신 사랑의 새 계명 안에서 완성된다. 사랑의 계명 안에서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을 폐기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율법 폐기주의자가 아니셨다. 예수는 오히려 율법의 정신인 인자와 의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가르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눅 6:32-34).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사랑의 지고법의 관점에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된 표징은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복 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희생이다. 나의 이익 보다는 이웃과 친구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윤리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번 기 교과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이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로마서의 기별이 결코 믿음 때문에 십계명의 폐지나 폐기를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러나 로마서를 읽으면서 율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런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❶ 롬 12:3~21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다룬 후, 사랑을 드높였다. 사랑(아가페)은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이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품성을 묘사한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실제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겸손인데, 그것은 기꺼이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롬 12:3)을 품지 않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16절)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던 말씀은 겸손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며 타락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스스로 설 수조차 없는 자들이 아닌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의에 의지해야 하며, 변화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자랑할 것과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바울이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게 된다.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이신 그분 위에 깨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부가적용)

우리의 신앙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며, 나의 겉 사람과 속사람이 서로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나의 영으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바로 이 겉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속사람이 흘러나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의 겉 사람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푸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 주님은 우리의 속사람이 흘러나올 통로를 가지시기 위하여 우리의 겉 사람을 깨뜨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속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바깥껍질이 깨어져 열리느냐 않느냐가 문제되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이 땅위를 덮을 능력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우리들 속에 제한되어 있으므로 해서 흘러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화요일

9월 14일

정부와의 관계

 

도입)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한다면, 과연 공산정권, 일당 독재 정권등과 소위 뭇솔리니 정권, 히틀러 정권도 이 말씀에 의하면 나름대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인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에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이들이 항거할 명분도 없어지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 모순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그 역할"에 대한 문제는 그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교회는 국가의 박해 대상이 되기도 했고, 교회가 국가의 동반자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교회가 국가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역사적인 상황을 거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그 역할"에 대한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역시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계속해서 교회에 소속해 있으면서 세상의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시민권이 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천국의 시민권과 땅에 있는 국가의 시민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국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무조건 국가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국가가 그릇된 요구를 할 때에, 시정을 요구하거나 때로는 저항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우상에게 절하도록 요구하였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의 상위 계명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정부에게 교회가 하는 일(예배 복음 전파 등)을 금지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정부는 자기 권한을 벗어나서 교회가 하는 일을 방해하거나 금해서는 안된다(요즘은 재판부에서 기독교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개인의 인권을 해치는 일이라고 결정을 내려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하나님이 주신 힘을 국민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그 힘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사용하면 안된다.

 

❶ 롬 13:1~7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공적인 권력 기관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할지에 대하여 이 말씀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원칙은 무엇입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교 국가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바울이 이 글을 적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제국은 매우 잔인하고, 그 통치자들은 부패했으며,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수년 안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대거 박해할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정부의 착한 시민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정부라는 개념 자체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념과 통치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인간은 규칙과 제도, 그리고 기준이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무정부(anarchy)는 성서적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형태의 정부와 통치 방식을 승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잔인한 정권들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단지 바울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땅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충되지 않는 한 충성스럽게 국가에 협조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과 충돌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하며 다른 이들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예언을 통해서 언젠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 권력과 대립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계 13). 그 때까지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세운 정부를 하나님이 임명하신 규범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한 범 위 안에서 거기에 순종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치될 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법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 우리는 권력자들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나 글로 우리가 법과 질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우리의 길을 막는 그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사도행적, 69)

 

교훈: 미래의 국가가 하나님의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부가적용)

국가는 강제로 성도들에게 양심을 거스리는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다. 만일 국가가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이 일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하거나, 필요하면 불복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교회가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국가보다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이 준 음식을 먹는 일이 양심을 거스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음식을 먹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해 주셨다. 성도들은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양심의 판단에 대한 조명을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불신자보다 선악에 대해서 더 분명히 판단할 수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선한 양심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또한 성도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가 선한 길로 가도록 기도해야 하며, 선한 삶을 통해서 국가의 선을 증진시켜야 한다. 성도들은 각 분야에서 정부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할 수 있도록 돕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분명히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또한 바로가 산파에게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 명령하였을 때 산파들은 남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더 상위에 있음을 기억하되 하나님의 계명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국가에 충성을 하고 이 땅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수요일

9월 15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도입)

불교가 자비의 종교라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에 대한 주석이 시원하지 않다. 그러나 너희가 사랑 외에는 갚을 수 없는 다른 그 어떤 빚도 지지 말라는 것인데 이 사랑의 빚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랑을 사람이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사랑하면서 롬 13:8-10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또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주신 것이고 또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을 다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엡 5:1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❶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 입니까?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율법의 교훈을 확대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성이 무엇인지 말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곧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의 모호한 표준으로 율법의 구체적인 명령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덕적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누가 죄의 실재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율법은 오직 사랑이라는 동기 속에서만 준수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❷ 사랑이 율법 준수의 원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어떤 계명을 예로 들었습니까? 왜 이 계명들만 언급하였을까요? 롬 13:9~10.

흥미롭게도 사랑의 요소는 새롭게 소개된 원칙이 아니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사랑의 원칙이 구약에 있었던 요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계명만이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는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문맥을 살펴보라.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그가 개인적인 관계를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계명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계명을 폐했다고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게다가 신약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마 25:40, 요일 4:20~21).

 

교훈: 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지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준수할 수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만 지고 다니는 자가 되지 말고, 나도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이웃에게 사랑의 빚을 지워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사랑의 빚만 지고 다니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남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지워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거리이다”라는 말을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꼭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잘 알아도 사랑하지 않는 자일 수 있고 이웃을 오랫동안 잘 알고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사랑 안에는 모든 율법이 들어 있으므로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 다 갚을 수는 없지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랑의 빚이다. 혹시 이 빚을 잊어버리고 나는 관계없는 것처럼 살지는 않았는가? 이제 빚 갚는 자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 빚진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갚아 나갈 때 기쁘고 즐거운 것처럼 사랑의 빚도 갚으면 갚을수록 거기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게 될 것이다.

 

목요일

9월 16일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짐

 

도입)

여기서 자다가 깰 때란 무슨 말씀인가? 바울이 살고 있었던 사회에서는 시계 같은 것이 없었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태양으로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동틀녁(새벽)에 일어났다. 새벽 일찍이 일어나는 것은 바울 당시 근동에서는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정오의 뜨거움이 있기 전에 대량의 일들을 끝내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편지 수신자들에게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으니 태만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게으르게 믿음 생활하지 말 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다’(sleep)란 말의 의미는 ‘영적 무관심과 무기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떠한 것들에 대한 무반응 (여기선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무반응) (MacArthur)을 의미한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는데,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이미 가까왔는데 영적으로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삶을 더 이상 살지 말 것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반응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영적으로 깨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수신자들에게 간절히 원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이번 기에 줄곧 말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 교회, 특히 그 가운데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한 가지 매우 특정한 주제, 즉 신약 시대의 믿음과 행위의 기능에 대하여 분명히 해 두기를 원했다. 문제는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율법을 강조했던 자들을 돕기 위해 바울은 구원의 과정 속에서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였다. 원래 구약 시대의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였지만 율법주의가 일어나 본질이 많이 훼손되었다. 우리도 같은 실수를 범치 않기 위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❶ 롬 13:11~14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일을 고대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다시 오시니 깨어서 맞이할 준비를 하자는 바울의 설교가 정말 아름답다. 이것이 2천 년 전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재림은 우리의 죽음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다음 주가 됐든, 40년 후가 됐든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죽은 상태로 4일 동안 잠을 자든, 400년 동안 잠을 자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잠들어있던 우리가 눈을 뜨고 처음 바라보게 될 일이 예수님의 재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인생은 정말 짧고,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다.

재림이 로마서에서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서나 고린도서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재림은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재림이 없다면, 소망도 믿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재림이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 놀라운 진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재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우리가 죽더라도 경험의 시간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은 정말 가깝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완성을 바라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한다.

 

부가적용)

“밤”과 “낮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밤”이란 ‘현재 악한 시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낮”은 “주님의 날” 곧 영광스럽게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의 날로서 우리의 완전한 구속의 날을 가리킨다. 즉, 현재의 악한 시대는 거의 다 끝나가고 주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왔으니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할 것을 바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어두움의 일”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어두움의 일”이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쟁투와 시기’이다(13절 -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여기서 “방탕”(carousing)이란 말의 원래 의미는 Dionysus 신을 숭배함에 있어서 축제 행렬을 가리킴으로써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구속되지 않은(자유로운) 도를 지나치게 흥청망청 떠들고 노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절제 안되게 흥청망청 떠들고 놀 수 있겠는가? 술 취하면서 가능한 것이다. 바울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밤에는 모든 것이 허락이 됐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밤에 마음 것 마시고 흥청망청 떠들고 노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다. “음란과 호색”, 즉 ”방탕한 성적 과도 (갈5:19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과 “쟁투와 시기”, 즉 “대립(관계)과 정당부착”의 일을 다 벗어 버려야 할 것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골로새서 3장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우리를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죄악된 옛 습관들을 다 벗어 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이제 우리의 구원의 처음 믿을 때보다 1년 더 가까와 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바울이 에베소서 5장11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처럼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expose)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금요일

9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66~69 “초기 증언들에게 대한 설명”, 교회증언 5 권, 540~541 “실제적 경건”, 교회증언 6권, 394~395 “정부 권위에 대한 우리의 자세”, 부조와 선지자, 352~353 “성막과 그 봉사.”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성경의 진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말씀이다. 이런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자는 모든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에게 새로운 지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죄로 이해를 가렸던 어두움이 제거되는 것이다.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생각”을 주신다는 뜻이다. 심령의 변화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진리의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는 자는 하나님께 의지함에 따라 지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이른 것처럼 명철한 이해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얻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마이 라이프 투데이, 402)

“주님은 곧 오신다. . . .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의 구속받은 자로 영접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영광 중에 계신 왕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본향을 향하여!”라고 소리쳐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을 영원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교회증언 8권, 2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목요일 교과 끝부분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2. 착한 시민이 되는 것과 동시에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 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뜻이라 확신하고 정부와 대립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그대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해주겠습니까? 그대는 어떤 원칙을 따르겠습니까? 이런 상담은 오직 극도의 신중함과 기도, 그리고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대의 생각에 무엇이 더욱 어려울까요?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철저하게 고수하고 지키는 것,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혹시 그대는 이것을 이분법적인 오류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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