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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이야기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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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9.21 19:04 조회수 6,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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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이야기와 역사

10월 2일 일몰:오후 6시 15분

 

도입)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면서 왜 남의 나라 역사나 남의 나라 이야기까지 공부하려 하느냐?” “이스라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더 많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그저 교훈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역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나 이야기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나 이야기를 통해서 그분 자신의 경륜을 계시하기 때문이지, 교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나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경륜을 읽어내기 위해 우리는 그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교훈을 주목해서 보면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나타난 경륜이 정말 중요한 것이며, 교훈 그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즉, 교훈 자체에 중점을 두기 시작하면 일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예컨대 “살인(殺人)하지 말라(출 20:13)”는 하나님 말씀과 “살생(殺生)하지 말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놓고 본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선(善)을 가르치고 있는가? 또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말씀과 도교에서 가르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경건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기독교보다 불교나 도교가 훨씬 더 수준 높은 거룩함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으로 갈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교훈적인 측면으로 성경을 봐선 안 된다. 성경의 역사를 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와 역사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일컬어 “모순적인 책”이라 부르는 것이며, 실제로 성경을 읽은 가운데 있어서도 수많은 모순점들을 발견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기억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창 39:6~12, 수 3:9~17, 삼상 24:1~6, 왕상 12:1~16, 욥 1:1~12.

보통 사람들은 역사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재미있는 이야기는 즐긴다. 모든 문명은 그 문화에 대한 기원과 가치관, 관계와 구조를 설명해주는 풍부한 이야기 목록을 가지고 있다. 세대를 걸쳐 전래되는 이런 이야기들은 종종 삶의 지혜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경시되었다.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과 해답으로부터 삶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만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답을 얻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이제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는 이야기의 힘을 재발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성경은 현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전설도, “공교히 만든 이야기”(벧후 1:16)도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타락한 인류에 대한 그분의 반응을 보여주는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실존했던 인물, 그들이 씨름했던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해답을 제공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배경이 필요하다. 이번 주 우리는 이번 기 교과에서 연구할 인물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각각의 배경과 역사적 정황을 탐색하게 될 것이다.

 

일요일 9월 26일

인물과 줄거리

 

도입)

어떤 이들은 성경을 단순하게 종교적 가르침이나 옛 이야기들을 실어 놓은 책으로 생각하기도한다. 만약 성경이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책이었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상상력과 감성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 책들은 단순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쓰여 졌기 때문에 독자에게 흥미와 즐거움만을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책은 그와 다르다. 과학이나 수학에 관련된 서적, 아니면 역사서적과 같은 책들은 결코 작가의 임의적 느낌이나 상상력만으로는 절대 기술할 수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그런 서적들의 잘못된 내용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해를 입힐 것이며 원래 그런 목적으로도 쓰여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성경(Bible)'이라는 단어는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만든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알면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듯이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품성과 뜻을 알 수 있다. 성경의 문화와 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성경의 배경을 연구한다고 해서 성경의 원래의 의미를 전부 알게 된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제한된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와 그 깊으신 뜻은 모두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수 1:8; 시 1:2). 하지만 공부를 해야 할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매일 잡념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을 더 확실하게 알아갈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스스로 포기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줄거리란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인생 전체를 보면 이것이 삶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인생은 갈등과 긴장 속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줄거리를 본다는 것은 이야기와 관련된 모든 부분들을 연결시킴으로써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욥기에는 2개의 줄거리가 존재한다.

1. 욥기에서 전개되는 2가지 줄거리는 무엇입니까? 욥 1:1~12.

욥기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이중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성경은 단일 구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욥기 1장과 2장을 보면 우리는 마치 TV 채널을 돌려서 지상의 줄거리와 하늘의 줄거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야기는 줄거리 이상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인물들이다.

 

부가설명)

욥기의 서론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결코 사단과 협력하지는 않는 반면에,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내지 묵인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공중 권세를 사단더러 잡도록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풀어 놓으신 상태다. 이것은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하늘과 땅과 연결되어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하나님이 사탄을 세상에 당분간 군림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은 결국 인간은 당신과 사탄 둘 중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 회색 지대는 없다. 인간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사단 어느 쪽과도 영적 교통이 가능토록 영혼을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다. 또 자유의지는 그 교통을 스스로 판단하여 어느 쪽과 지속적 교제를 할지 선택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과 별도로 떨어져 자존(自存)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이 바로 하나님과 사단과의 이런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선지자 훌다에 대하여 최대한 자세히 묘사해 보십시오. 왕하 22:14.

인물들은 이야기의 줄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물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화자가 제공하는 정보에 상당히 좌우되는데 때로는 화자가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훌다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이야기의 주인공인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요시야 왕 시절에 발견된 율법책에 관한 것이다. 훌다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들은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훌다는 자녀를 가지고 있는가? 그녀는 노년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매우 함축적이며 때로는 생략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 하나하나를 매우 주의해서 살필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훌다는 존경받는 여호와의 선지자로 여겨졌다. 성경의 저자는 그녀의 남편의 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여자는 남편의 가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소도 알려주었다. 마치 한 인물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이름과 주소를 기재하는 오늘날의 공문서와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부가설명)

그 당시에 여선지자 훌다가 성전 가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마음에 가득한 왕은 훌다를 생각하였고 왕은 이 택하신 사자를 통하여 이제 바야흐로 멸망하려는 죄 많은 유다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여호와께 문의하기로 결심하였다”(선지, 398). 그러나 왕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까닭에 여호와께서는 용서와 은혜를 구한 그의 기민함을 인정하실 것이었다. 왕에게 기별이 전달되었다.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22:19, 20)(선지, 399).

 

교훈: 인생은 수많은 줄거리들이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며,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늘의 줄거리와 땅의 줄거리가 동시에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부가적용)

선과 악의 궁극적 기원이 따로 있다는 것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사실상 그 두 기원에서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선과 악이 흔히 세상에서 인식되듯이 인간 행동의 품질(Quality)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 두 근원 중 인생이 어느 쪽에 인간이 붙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사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행동의 품질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으니까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의 준행 여부로 인간이 속한 영역이 선과 악으로 확연히 나눠지는 법이다. 금령을 순종하고 있으면 하나님 쪽에 붙어 있는 것이고, 어기면 사단에게 붙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당연히 그 금령을 순종하게 되며 반대로 그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순종할 수 없게 되는 모습을 훌다의 경고를 통해 보여준다. 구원과 심판의 궁극적이며 절대적 주체는 누구인가? 단연코 하나님이시다. 사단이 절대 될 수 없다. 세상 모든 종교에서도, 사탄숭배교를 빼고는, 이 점에 대한 이견(異見)의 여지는 일절 없을 것이다

 

월요일 9월 27일

어디에서? 어떻게?

 

도입)

성경이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고 또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해석자로 하여금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성경이 유기적으로 영감 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내용이 그 당시의 배경과 무관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저자들은 자신이 살았던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배경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고 이 영향이 성경 기록 당시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역사와 무관하게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배경 연구의 중요성을 더 한층 명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해석자가 연구 결과 찾은 배경 이해는 그 당시 살았던 성경 저자의 경험과 거리가 멀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해석하는 성경의 내용과 배경 연구의 내용이 상충을 나타낼 때 항상 성경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배경연구는 성경의 내용을 밝히는데 참조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교정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배경은 이야기에 현실성을 불어넣고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룻 4:1~2에서 보아스는 자신의 법률적인 문제를 집이나 베들레헴 성주의 집이 아닌 성문으로 가져갔다. 왜일까? 그 이유는 고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공장소가 바로 성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하나의 중요한 법적인 요소를 덧붙이고 있다. 배경은 줄거리가 전개되는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이야기의 배경이 차량 안이나 공항이라면, 우리는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그 이야기가 다윗이나 마틴 루터 시대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 삼상 24:1~6과 창 39:6~12을 읽고 두 이야기의 배경을 비교해 보십시오. 각 배경은

이야기의 줄거리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습니까?

배경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울과 함께 있다. 배경은 다윗이라는 뛰어난 인물을 부각시킨다. 그는 자신이 사울에 의해 제거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다. 이런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지도자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셉 이야기의 배경 역시 하나의 기회를 그리고 있다. 요셉은 용모가 뛰어나고 힘 있는 위치에 있다. 주인의 아내는 그에게 빠져 있었고 그들은 단둘이 집안에 있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요셉도 이런 기회를 거부함으로써 순결한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배경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화자의 관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화자의 관점을 통해 전개되는데, 그것은 보통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지만 간혹 정보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특히 세속적인 이야기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성경 기사에도 관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성령에 의한 영감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

 

교 훈: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배경을 통해서 인물들의 행동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부가적용)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그 당시의 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성경이 저술된 시대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은 성경 본문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이방 문화에서는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의 상징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다”는 구절처럼 성경은 십자가를 언급할 때 고통보다는 수치를 더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연상하면 수치보다는 고통을 더 생각한다. 우리 문화를 토대로 십자가는 고통이라는 점만 강조됐기 때문이다. 고통과 수치가 함께 있을 때 진정한 형벌이 된다. 모든 벌의 시작은 수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마가복음 2장 중풍 환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냈다는 구절은 우리 문화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들다. 기왓장을 뚫는 일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갈릴리 지방의 주거문화를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북쪽 갈릴리 지방은 여름에 너무 더워 주민들은 지붕 한 가운데를 뚫어 구멍을 낸 뒤 더우면 지붕 뚜껑을 열 수 있도록 했다. 중풍 환자의 친구들은 지붕 뚜껑을 열고 환자를 예수님께 인도했던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유대의 배경을 알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화요일 9월 28일

승리에서 “암흑기”로

 

도입)

구약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히브리 민족과 가나안 민족의 전쟁사이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며 가나안 땅을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로부터 104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가나안의 여신 아스다롯을 섬겼기 때문에(삼하 11:5) 그의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양쪽이 모두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다가 북은 BC 722년 앗수르에 남은 BC 586년 바벨론에 멸망됐다. 즉 그들은 무력 전쟁에서 가나안 민족을 이겼으나 문화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들은 가나안의 신들에게 정복돼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부터 목요일까지 우리는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의 배경 역할을 하게 될 이스라엘 역사를 대략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진입했던 시대부터 시작해보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과 광야의 순례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경계에 두 번째 이르게 되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그들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기 직전이었다(수 3:16~17). 그 기적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넜던 역사의 재현이었다(출 14장).

1. 수 3:9~17을 읽으십시오. 이 기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의 군사 전략이나 이스라엘의 각고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가나안 도시 국가 거주민들에 대한 승리는 단지 하나님의 권능의 개입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스라엘이 순종하면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고,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에 의지하면 그들은 영락없이 실패하였다.

여호수아와 원로들이 죽은 이후에 약속의 땅의 일부는 여전히 가나안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삿 1:27~28). 그러나 이스라엘의 비전이 위축되자 그들의 믿음도 축소됐던 것처럼 보인다. 약속의 땅 전체를 그들의 소유로 바라보는 대신에 그들은 생계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품고 있는 큰 비전과 이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그 이후의 몇 백 년을 이스라엘의 “암흑기”라고 부르고 있다.

2. 삿 17:6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어떤 종류의 도덕적 경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염두에 두고 계신 큰 그림을 잃을 경우 작은 것이 큰 것을 대신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관점을 잃고 부족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사사기를 보면 부족과 씨족들이 심심치 않게 대립한다. 종교적 행위들은 개인의 편의에 융화되고, 주변 문화와 타협해 갔다. 사사기의 저자에 따르면 이런 현상의 원인은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족속과의 통혼 때문이었다(삿 3:3~7). 이런 영적 쇠퇴의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의 식민지배 → 해방 → 우상숭배 그리고 다시 식민지배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교훈: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비전을 바라볼 때는 승리하지만, 비전을 놓치고

자신의 힘에 의지할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부가적용)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의 역사는 우리 성도들 에게 참으로 값진 교훈으로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 국가의 멸망 전 50년사를 보면 북 이스라엘은 스가랴왕 이후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등 6명의 왕이 겨우 50년만을 통치했다. 한 왕이 10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살해를 당하거나 체포되는 비극을 초래하였고 남유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몬, 요시아,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을 거치면서 바벨론과 애굽의 끊임없는 침략전쟁으로 전사하거나 살해 그리고 타국에 끌려가 눈이 빼이고 끌려 다녀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왕들의 말년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3가지로 교훈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난 정치의 마지막 결과를 통해 역사의 주관자와 군사의 주관자 승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둘 째, 자신의 힘, 즉 육신의 생각으로 처리한 왕들의 삶의 결과는 언제나 처참한 실패였다. 육신의 자리 중 최고의 자리는 왕이다. 이 자리에 앉았을 때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겸손인데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육신의 생각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육신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에 의지한 왕들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삶은 결국 그 마지막 결과가 허무한 것임을 보여준다. 셋째, 남쪽으로는 거대한 애굽이 있고 위로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틈바구니에서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인데 사람의 눈치만 살피는데 급급한 나머지 외교정책은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갈대같이 흔들리는 한 인간일 뿐 하나님을 떠난 그들은 초라한 한 송이 꽃이나 무지한 돌일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수요일

9월 29일

왕들에 대하여

 

도입)

세계 역사를 보면, 하찮은 사건이 빌미가 되어 큰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가끔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대표적인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갔다. 세르비아 왕국 출신의 한 청년이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인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도 하찮은 사건이 빌미가 되어 400여년 동안 지속된 사사 중심의 신정통치가 왕정 통치로 바뀌게 되었다.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늙어서 사사 역할을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두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는데, “그 아들들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했기 때문에(삼상 8:3) 그렇게 된 것이다. 문제는 자 식들을 잘못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신정정치 체제로 운영되던 이스라엘이 왕정으로 바뀐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 되며, 이는 곧 이스라엘을 부패하게 하는 죄의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께 그토록 많은 은혜를 받고, 계속 순종하면 더 많은 것이 약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문화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그들은 주변 국가들로부터 매우 낯선 통치 체제를 보았다. 모든 나라에 왕이 있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행위와 지도력을 계승하지 못하고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삼상 8:3)한 사실과 결부시켜 이스라엘의 부족장들은 한 왕을 세울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4~5절). 사무엘은 이런 결정을 기뻐할 수 없었지만 여호와께서 그 일을 승인하라고 말씀하셨다(7절).

사무엘은 베냐민 사람 사울을 왕으로 기름부었다(삼상 10:1). 사울은 기브아에서 통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견하신대로 왕의 일이 순탄치는 않았다. 부족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고, 주변 국가들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존재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처지였다. 게다가 새로운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삼상 15:3, 8~9). 그 결과 하나님은 마침내 사울을 포기하셨다.

그 뒤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상대로 사울은 전쟁 영웅 다윗에게 권력을 순수히 넘겨주지 않았다. 이후 20년 동안 다윗은 언제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때, 이스라엘 역사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삼상 31:1~6). 다윗은 우선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7년 후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에 올랐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통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그의 군사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생을 마감했다(삼하 5:4, 왕상 2:10~ 11). 다윗의 통치는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게 큰 승리와 잘못된 선택, 그리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뒤섞여 있는 역사였다.

다윗의 왕위는 솔로몬이 이어받았으며 그 역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왕상 11:42). 솔로몬은 용사나 정복자는 아니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다(왕상 3:3~ 13). 그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고, 효율적인 행정 구조로 이스라엘을 조직하고 다스렸다. 하지만 말년에 여호와를 배반하고 후궁들의 이교적인 관습을 좇았다(왕상 11:1 ~8).

 

교훈: 이스라엘은 왕이 통치하는 이방 국가들을 부러워했다. 왕 중에 왕이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부가적용)

사무엘 아들들의 타락상과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이 식어지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와서 자기들도 왕을 세워 이방과 같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져서 일선 직무를 감다하기 어려워졌고, 그래서 아들들에게 그 직무들을 위임하였으나, 그 아들들이 바로 일을 하지 않고 악행에 빠짐으로 이스라엘의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에 백성들은 왕정제도의 도입을 요구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같은 요구는 단순히 사무엘 아들들의 악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방 국가들 같은 정치 제도를 부러워한 것에서 연유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내면적으로는 이들이 하나님과 사무엘의 은혜를 모르고, 사무엘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에 의한 신정 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사악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왕정의 요구에 대하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부흥을 가져오게 하였고, 블레셋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뺏긴 성읍들도 다 찾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으로 왕을 세워줄 것을 말할 때 인간적으로 보면 섭섭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무엘의 중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신정정치이다. 선지자, 사사들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지금 스스로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왕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이들이 지금 스스로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정정치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정부를 골자로 하는 왕정제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목요일 9월 30일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도입)

한 인간의 일생을 돌아보면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나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시작은 아주 그럴듯하게 했지만 나중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작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는데 나중이 아주 좋은 사람도 있다. 다윗과 솔로몬이 80년 동안 다스리면서 강대국이 되었던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이 3일 만에 내린 잘못된 결정 때문에 순식간에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열왕기상 12장은 이렇게 다윗과 솔로몬 때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던 이스라엘이 르호보암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둘로 분열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열왕기상 12장에서는 르호보암이 내린 잘못된 결정을 내린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솔로몬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시대에 있었던 완력에 가까운 행정적 접근, 강제노역, 실험적인 종교다원주의는 아들 르호보암의 통치 초기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 주었다.

1. 왕상 12:1~16을 읽으십시오.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르호보암의 지도력을 보면 우리에게 권한이 있을지라도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까?

부가설명)

우선 1절을 보면 르호보암은 세겜으로 갔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기 위하여 세겜에 모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세겜은 믿음의 유산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제일 먼저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세겜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서 하나님과 다시 한 번 언약을 맺게 한 곳도 세겜이다. 하지만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언약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그러니까 다윗 이후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은 모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솔로몬도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으로 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세겜에 모인 백성들은 나중에 북 이스라엘에 속하게 되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솔로몬 때 겪은 힘든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북 이스라엘에 있는 유서 깊은 믿음의 도시 세겜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르호보암은 왕이면서도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세겜을 찾게 된 것이다.

단일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된 이후에 각자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예배와 희생과 찬송의 중심이 유다에 있음을 보고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1세는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고 벧엘과 단에 각각 하나씩 제단을 세워 예배의 장소로 삼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이후 2백 년 간 이스라엘은 극도로 불안한 경험을 하게 된다. 비록 온전한 심령은 아니었을지라도 일부 왕들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왕들은 완고하게 선지자의 음성을 거절하였다. 왕조가 수시로 바뀌고, 정치적 암살이 자행되었다.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여로보암 1세로부터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마지막으로 다스렸던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는 앗시리아 군대에 포위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다.

그러나 국경 아래의 사정이 더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다윗 왕조는 유지되었지만, 그의 후손들이 모두 조상의 믿음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아와 같은 왕들은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유다 전체에 회개가 이르러왔다. 왕들의 노력에는 유다의 특별한 사회적 영적 필요와 정황에 따라 권면하는 선지자들의 지원이 있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지도자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성전은 파괴되었고, 군주제 “실험”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교훈: 이스라엘이 원했던 왕조는 몇 백 년을 못 버티고 모두 멸망하였다. 이런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나라와 메시야를 소망하게 되었다.

 

부가적용)

사실 왕이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섬김을 받는 것부터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뭐라고 했는가? 왕이지만 백성을 섬기라고 했다. 백성의 필요를 살피고 채워주라는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백성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좋은 말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 자연히 백성들은 왕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한 말은 한마디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것이었다. 르호보암으로서는 듣기는 껄끄러울지 모르지만 얼마나 유익하고 적절한 조언을 들었는가? 그런데 르호보암은 이들에게만 조언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남북 왕국 분열의 절대적인 책임은 솔로몬에게 있지만, 그러나 르호보암의 어리석음도 가일조(加一助) 되었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음은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헛된 권력만을 추구하는 결과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상처를 안긴다. 북왕국 역시 남왕국의 견제 세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본보기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범죄하여서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고 한다. 특별히 북왕국의 경우는 영원한 언약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기에 자신이 위치를 알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역을 함으로 이미 초대왕 때에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터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을 저지르게 된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 되심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금요일 10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여호와께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모세에 의해 기록된 거룩한 역사의 철학을 연구하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 지상에 세워진 첫 번째 가족은 말세에 이르기까지 존재할 모든 가족들의 모본이다. 역사 속에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기위해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 계획은 쉽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성화된 영혼은 지구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를 배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모든 과정을 이끄는 동인(動因)이시고, 인류의 모든 정결과 향상의 기원이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원고, 184)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여기까지 전진한 모든 발자국을 따라 여행해 온 우리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에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인도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찬다. 우리는 주님이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방법과 그분의 가르침을 잊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뢰를 주님께 둔다면 우리는 지금 강한 백성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진리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 감사할 것 뿐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능동적인 개입은 성경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단 2:21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과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상호 반응하고 있습니까? 역사의 종말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2. 성경의 이야기에 우리는 쉽게 공감하게 됩니다.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이야기가 어떻게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대가 좋아하는 이야기꾼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고대 이스라엘은 온 세상에 참하나님과 은혜 받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적 투쟁이 어떻게 고대 이스라엘을 약화시켰는지 보십시오. 그런

슬픈 역사적 사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4. 배경은 어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많은 정보들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중요한 배경을 알기 전에 그를 심하게 정죄하지 않습니까? 혹은 그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정죄를 받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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