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과 자존감(Self-esteem)[교훈과 풍부한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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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자존감(Self-esteem)
2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2분
도입)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했다. 이 충격적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자존감의 문제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나라 하루 평균 35명 정도가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2010. 3. 24, 보건복지부) 청소년 사망 원인 2위다.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400만명 가량이 자살한다. 40초마다 한 명씩이다. 자살의 모든 원인을 자존감의 문제와 연결할 수 없으나, 기독교인의 자존감이 필요한 때이다. 태어난 지 1년이 되도록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이가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태어난 지 2개월쯤 되었을 때 엄마의 지나친 애정이 아이를 망친다는 잘못된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때부터 가능한 한 아이와의 신체적인 접촉을 피한 채 젖을 먹이는 동안에만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러다보니 젖을 먹지 않는 시간에는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혼자 지내면서 자기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의욕도 없고 식욕도 잃은 아이로 변해버렸다. 병원을 찾았을 당시 생후 1년이 지난 이 아이의 몸무게는 4.5kg밖에 되지 않았고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할뿐더러 표정도 아주 어두웠다. 그러나 한 간호사의 집중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아이는 표정도 밝아지고 간호사를 엄마라고 부르면서 잘 먹고 잘 자더니 몸무게도 점점 늘고 몇 주 후에는 혼자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사랑은 항상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변치 않고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한다. 이 사랑만이 진정한 자존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절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결론 그리스도인들의 자아존중감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으며 주의 몸의 중요한 지체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요일 2월 20일
기원
도입)
교회가 성도에게 언제나 명시해야하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가치를 반복해서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이 가진 영혼의 가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진귀한 진주보다 값진 것이다. 그리고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이 자존감으로 초대되지 않는다면, 물질의 가치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손해 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물질에 있거나 소유에 있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오직 공짜로 받은 은혜에 있다. 이 은혜를 날마다 나누고 반복하고 격려하고 잊지 않도록 하는 곳이 교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교훈: 인간의 기원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부가적용)
인간의 자존감의 실체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형상이 깨지면서 인간은 자존감에 문제가 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 그 분 안에서 갖게 된 절대적인 가치감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과 복음만이 참된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진실한 견해를 준다. 자존감의 기반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의 자존감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 절대가치의 존재 혹은 상황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소망과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회복을 약속해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셨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귀한 존재이다. 자존감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존감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해결책도 인간에게 있지 않다. 우리에게 존재, 생명을 주신 분이 가지고 있다. 왜냐면 자존감을 그 분이 즉 창조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이것을 소유하고 느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감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 안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고, 이 자존감을 생명(자존)을 주신 그 분과 우리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 궁극적 생명을 주신 그 분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피부로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우리를 가치와 존엄성을 결코 논할 수 없다.
• 영감의 교훈 •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
“돈에 통치자의 화상과 글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창조되던 당시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죄의 영향으로 인하여 그러한 흔적이 손상되고 희미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각 영혼에게는 그것이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영혼을 회복시켜 그들에게 의롭고 거룩한 당신의 형상을 재생시키고자 하신다”(실물교훈, 194).
월요일 2월 21일
자기 인식
도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에 휩싸여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얼마나 답답하고 불쌍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 존재가 회복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은 모습인 채 회복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며, 감사치도 않는 병든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자신의 부정적인 면만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것인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내 안에서 갇혀 몸부림치는 동안, 우리는 주님을 저만치 멀리 세워놓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분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주님이 나와 관계가 없는 한 나는 회복될 여망이 없다. 그러므로 주님 앞으로 바짝 다가가자.. 아니, 주님의 품속에 들어가 그 품에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내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자. 그리하면 나의 영적 자존감이 점점 높아지고 이 세상에서 짓눌린 모든 압박감에서 해방될 것이다. 또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이웃이 보일 것이다.
부가설명)
"자존감이 낮으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없다. 주변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달라진다. 언제나 한 결 같이 자신을 존중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나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웃을 사랑하되 이웃을 자신과 동일시 하라는 것이다. 자타를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런 사랑의 사고를 가지게 되면 상대를 존중할 뿐 아니라 상대와 함께 존재한다. 이 교훈 앞에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자기만 사랑하므로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하거나, 또는 자기는 사랑하지 않고 이웃만 사랑하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님의 교훈에 어긋난다. 예수님은 자기와 이웃을 함께 사랑하라는 것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교훈: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기보다 건전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자존감은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인생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자존감으로 귀결된다. 자존감에 결함이 있다면 당신은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낮은 자존감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게 하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행복을 억누르고 삶의 풍요로움을 막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긍정적인 자아상 즉 높은 자존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일화 하나를 보자. 신체적 장애를 남과 다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영국의 살아있는 비너스, 앨리슨 래퍼’의 이야기다. 래퍼는 두 팔이 없고 기형적으로 짧은 다리를 지니고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19년 동안 복지시설에서 자랐다. 스물 한 살 때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 때문에 9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몸으로 혼자서 아들 패리스를 낳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불편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작품의 소재로 삼는 등 적극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극복했으며, 2003년에 스페인 ‘올해의 여성상’과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았다. 2005년에는 ‘세계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행복하다. 장애인을 일컫는 ‘disable’이란 말은 사회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앨리슨, 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녀가 힘주어 말한 얘기다. 래퍼는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장애인의 몸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다름이 내 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했으며, 나아가서 자부심마저 느꼈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그녀의 흔들림 없는 자존감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삶에서 이루길 바라는 성공 그리고 성취, 행복 등 모든 것은 높은 자존감으로부터 출발한다.
• 영감의 교훈 •
▶ 부작용 없는 약
“낙심한 자들을 위하여 확실한 치료제가 있다. 그것은 신앙과 기도와 사업이다. 신앙과 활동은 자신감과 만족을 줄 것이며 그것들은 날마다 증가하게 될 것이다”(그리스도인 선교봉사, 107).
화요일 2월 22일
다른 사람의 시선
도입)
“자존감과 열등감은 객관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관점을 바꾸면 열등감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벗고 밝은 세상을 볼 때처럼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자존감이란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이다. 자존감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자존감이야 말로 사람을 당당하고 건강하게 만든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마음이 병들며 자존감이 회복되면 마음이 건강해진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교훈: 다른 사람의 시선은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시선보다 하나님의 가치와 시선을 더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지불할 만한 것은 오직 한 가지만 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내어 주어야만, 우리를 구속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는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돈 많은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그리고 학력이 높은 사람을 위해서는 피를 더 흘리시고, 돈이 적은 사람이나 지위 낮은 사람을 위해서는 피를 덜 흘리셨는가? 또는 예수님이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만,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자나 가난한자, 높은 자 낮은 자에 상관없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의 가치 기준은 다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의 가치 기준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에 있다.
• 영감의 교훈 •
▶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김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천거할 수 없다. 품성과 품행에 나타난 지혜와 미덕은 그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우리에게 만군의 여호와의 가납하심을 입게 하는 것은 내적 가치, 즉 마음의 미덕이다”(부조와 선지자, 637).
수요일 2월 23일
하나님의 시선
도입)
숨을 쉴 수 없는 정도로 햇볕이 내려쬐는 사막 한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끌고 가던 한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힘들어 보이시는데, 타시죠!’ ‘고맙소. 젊은이!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 줄 수 있겠소?’ 젊은이와 노인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노인의 목적지인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노인이라고 생각한 젊은이는 헤어지면서 주머니를 뒤져 25센트를 노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영감님, 차비에 보태세요. 몸조심하시구요.’ ‘참 친절한 젊은이구먼. 명함 있으면 한 장 주게나.’ 젊은이는 무심코 명함을 건네주었다. ‘멜빈 다마! 이 신세는 꼭 갚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고 하네.’ 얼마의 세월이 지나 이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무렵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 이런 기사와 함께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하워드 휴즈가 남긴 유산의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멜빈 다마란 사람이 누구인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언장 이면에 멜빈 마다는 하워드 휴즈가 일생 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친절한 사람! 이것이 유산을 남겨 주는 유일한 이유였다. 하워드 휴즈의 유산 총액이 25억 달러 정도였다. 유산의 16분의 1은 최소한 1억 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1,400억이나 되었다. 무심코 베푼 25센트가 6억 배가 되어 되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은 가치를 보는 사람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원하는 바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를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포기해서라도 지키고 세워야할 위대한 가치를 보고 있는가? 최고의 가치는 성숙한 인격에 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4).
교훈: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잃어버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부가적용)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구입한 값어치와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의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전부와도 같다. 그 전부를 드린 피 값으로 나를 샀기에 피조물에 불과한 내가 존귀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 그 분의 가치만큼 나는 존귀한 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평범함 속에서 파멸을 향하여 달리는 무리의 하나가 아니다. 나는 매우 존귀한 존재이다. 성서속의 인물들 외에도 역사상 에디슨, 아인슈타인, 콜럼버스, 아브라함 링컨 등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 있다. 우리 자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인 것을 아는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직접 만드셨고, 65억의 세계 인구 중에서 나나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은 없다. 앞으로 세상 끝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특함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는 가장 소중하고 위대한 창조물이다. 정신과 언어와 행동과 외모와 동작을 갖고 있으며, 전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참으로 귀중한 하나님의 보물이다. 우리는 왕자(공주)처럼 값있는 존재인데도 왜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형편없이 떨어뜨리려는 자에게 귀를 기울이며, 더욱이 안 좋은 것은 왜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는가? 당신의 존귀함을 더 이상 어둠 속에 파묻어 놓지 말라!
• 영감의 교훈 •
▶ 판단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결국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웃사람들의 생각에 전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같이 보이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고 판단하신다”(실물교훈, 71).
목요일 2월 24일
새로운 자아
도입)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의 프리드 브라이언트 교수는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심리건강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매일 20분씩 일주일간 산책을 시켜서 첫째 그룹에게는 무엇이든지 마음에 기쁨과 희망을 주는 대상을 찾아서 기록해 오라는 숙제를 주었다. 다시 말하면 똑같은 길거리를 걸어가면서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는 대상을 기록해 오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 그룹에게는 낙서, 쓰레기, 찌푸린 사람들 고통을 가져오는 절망을 가져오는 상황을 기록해 오라고 했다. 셋째 그룹에게는 아무것이나 그냥 되는대로 걷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걷다가 오너라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들의 행복 지수를 조사해 보니까, 행복하고 좋은 것을 기록해 온 사람은 그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 그냥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 좋아하는 것을 보았는데 같이 좋아하게 되어서 훨씬 행복하게 되었고, 두 번째 그룹은 불행한 것을 보고 잘못된 것을 본 사람은 엄청나게 불행하게 되어 버리고 세 번째 그룹 그저 그렇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은 아무것도 이판저판 무판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생각은 이처럼 우리 삶을 한없는 기쁨이나 절망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희망찬 생각으로 바꿔 놓으면 그대로 우리 생애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교훈: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돌보는 데서 큰 성취감을 얻는다.
부가적용)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자존심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신을 귀히 여기는 것으로써 겸손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만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이 낮은 것이다. 열등감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이 낮은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를 귀히 여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귀히 여긴다. 자기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사랑한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것으로써, 강한 자가 자기를 낮추어 남을 높일 수 있다. 그만큼 자존감이 높다는 것을 말해 준다.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서 생겨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승리하시기를 기도한다.
• 영감의 교훈 •
▶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치장하라
“그대의 품성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매일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나타나시게 하라”(그리스도인선교봉사, 241).
금요일 2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신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산 자들은 어떻게 돌보시겠는가? 한 영혼은 온 세상보다 귀하다. 그의 나라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단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예수께서는 갈보리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엘렌 G. 화잇 언급, 더 리뷰 앤드 헤럴드, 1892. 5. 3.).
“
우리는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께 구하는 일을 게을리함으로 여러 풍족한 복을 잃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우리의 잘못을 밝혀 주도록 그분께 구하면, 그분은 그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 자아에 대한 참모습을 보여 주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보았다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잊지 말도록 하자. 흠이 많은 우리 품성의 상태를 철저하게 살피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제시된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도록 은혜를 구하자”(엘렌 G. 화잇 언급, 더 레이크 유니온 헤럴드, 1909. 11. 3.).
위의 두 인용문은 열등감과 자만심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우리에게 추가적인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의 내용을 기초로 롬 12:2~3을 읽어보라. 균형 잡힌 자아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화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한 사람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건강한 자존감을 갖도록 돕고자 할지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는 길로 그들의 자아를 키우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과정에서 그들을 해하는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올바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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