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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하늘의 베틀(풍부한예화 및 부가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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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하늘의 베틀

4월 2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5분

 

도입)

4세기에 활동한 사막의 수도사 벨로스의 압바 미오스(Abba Mios of Belos)에게 한 군인이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이 정말 죄인을 용서하실까요?" 이 늙은 수사는 한참 동안 용서에 대해 설명한 뒤 그 젊은이에게 되물었다. "자네의 외투가 찢어졌을 때 자네는 그 옷을 금방 버리는가?" "아닙니다. 깁거나 꿰매서 다시 입지요." 이때 미오스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찢어진 옷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긴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자녀를 얼마나 아끼시겠는가?" 그렇다. 헤지거나 뚫어진 옷도 깁거나 꿰매어 다시 쓸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말해서 무엇하랴. 죄로 인해 일시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어코 용서하시고, 다시 귀중히 쓰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 3). 하늘의 베틀로 짠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기억절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롬 4:7).

연구 범위 사 64장, 롬 3:21~31, 4:1~7, 6:1~13, 빌 3:3~16.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속이요 보증이시다. 그분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분을 믿고, 모든 면에 있어서 그분에게까지 자라날 수 있고, 결국에는 그분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죄인들을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모든 불명예, 수치 그리고 징벌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죄를 짊어지셨지만 영원한 의를 이루시어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도록 하셨다. ‘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고 물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뿐이시다.’이다. 그분은 하늘 베틀에서 짠 흠 없는 의의 옷(죄 된 인간은 한 올의 실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을 가지고 계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자녀들에게 그분의 온전한 의의 옷을 입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 하나님의 왕국에 있을 구원받을 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찬양과 영광은 모두 구원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로만 돌려질 것이다”(엘렌 G. 화잇, 유스 인스트럭터, 1894. 12. 6.). 상징에 주목하라. 의의 옷. 죄 된 인간은 한 올의 실도 수놓지 않은 “하늘 베틀에서 짜여진” 의의 옷.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모든 자들에게 입혀질 예수님의 의에 대한 아주 멋진 상징이다.

 

첫째날(일)

3월 27일 거울을 바라봄

 

도입)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람이 죄가 더럽다는 것은 다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의(義)도 더럽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의(義)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엔 죄와 마찬가지로 더럽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선, 인간이 행하는 의로운 행동도 하나님 보실 때는 옷은 옷인데 더러운 옷이다. 그 더러운 옷으로는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사람 속에는 타락된 마음, 양심의 부끄러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등이 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면 죄에 대한 양심의 부끄러움과 가책감이 없어질 줄 알지만, 그것은 더러운 사람이 더러운 걸레 조각을 걸치고 자기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는 것과 같이 쓸 데 없는 짓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옷을 입지 않았다. 다만 에덴에서는 인간이 만든 옷 대신 빛과 사랑과 은혜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자마자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다. 옷은 수치를 가려주고 몸을 보호하며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는 결코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의 생명을 보호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하나님 앞에 수치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무엇인가 가리려는 행동이 다분하다. 구원 후에도 많은 자기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차단하고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 이것이 바로 종교이고 인간의 가식이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삶이며 주님이 없는 삶이 된다. 이는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 옷을 만들어 입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는 행동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옷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성령하나님께서 내안에 내주하고 계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의 신분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경찰차 3대가 한 여인이 운전하는 차를 추격하여 갓길에 세우게 했다. 경찰관들은 손에 권총을 들고 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인은 벌벌 떨면서 손을 올린 채 차에서 내렸다. “뭐 때문이죠?” 경찰들은 그녀에게 자동차 등록증을 요구하였다. 잠시 후 안심이 되었는지 경찰은 권총을 집어넣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우리는 당신이 난폭 운전을 하면서 다른 운전자들에게 손가락으로 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겨우 그것 때문에 권총까지 빼들고 나를 세운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 차 뒤에 ‘크리스천’이라는 문구가 적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차가 도난차량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웃지 못 할 이야기는 우리가 믿음이 요구하는 높은 도덕적 표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 물론 다른 이보다 조금 나은 사람도 있겠으나 오십보백보다. 거울 속에서 예수님의 품성을 완벽하게 반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있을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겉모습 아래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면서 자신만만해 할 그리스도인이 과연 있을까?

이사야 64장을 읽어보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더러운 옷”(filthy rags)이란 월경(月經)으로 오염된 옷을 말한다. 타락 이후 인간의 의를 묘사하기에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한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64장은 바로 우리의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로마서 3장의 선구자인 셈이다.

 

교훈: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앞에서 더러운 옷과 같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부가적용)

세상에는 여러 가지 옷이 있다. 성경에서 옷은 그 사람, 신분, 인격을 뜻한다. 영적으로는 어둠의 옷과 빛의 옷으로 구분된다. 어둠의 옷은 밤의 옷이요, 방탕, 음란, 호색, 다툼의 옷이다. 빛의 옷은 낮의 옷, 생명의 옷, 그리스도의 옷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젊은 날에 어둠의 옷을 입었다. 그는 10대에 사생아를 낳았고 20대에는 입신양명의 길을 찾아 로마 거리를 누볐다. 한 때는 이단 신앙에 빠져들어 헛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방탕의 길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거둔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참여하러 가는 도중에 사건이 일어났다. 여행길에 지쳐 한 수도원의 정원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담장 밖에서 “책을 들고 열어라, 책을 들고 열어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의자에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성경을 펼치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이 말씀이 그의 영혼을 통째로 변화시켰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 있는 말씀이다.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고 빛의 옷을 입자. 밤의 옷을 벗어버리고 낮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입자.

 

•영감의 교훈 •

▶ 행함으로 증거함

“주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침착하고 인내하기를 바라신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동일한 환경 아래서 그리스도께서 행동하실 것처럼 행함으로 그분을 대표해야 한다”(교회증언 7권, 199).

 

둘째날(월)

3월 28일 입혀 주시는 의

 

도입)

복음은 단지 구속, 죄사함, 칭의, 화목, 정결케 함, 거듭남 등과 같은 문제들만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한 방면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아들의 명분이다. 이것은, 구속, 죄사함, 칭의 화목, 정결케 함, 거듭남 등의 모든 것이 그분의 표현이 되는 많은 아들들을 가지시려는 하나님의 갈망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영화롭게 된 아들로 조성된 한 몸을 통해 그분이 표현되시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에게는 다만 한 아들, 즉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많은 아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수백만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복음의 목적이 아들의 명분, 즉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의 산출임을 계시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

었느니라”(롬 4:3).

 

교훈: 우리가 믿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생애와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신다.

 

부가적용)

사람은 에덴동산 때부터 의복을 입었다. 그 이후 인류는 상황에 맞게 옷을 입고 살아간다. 예컨대 군인들은 군복을 입는다. 그 옷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고 소속 부대를 표시하는 마크도 있다. 의사는 흰 가운을 입다가 수술 시에는 소독된 초록색 수술복을 입는다. 이렇듯 상황마다, 입장마다 다른 옷들을 입는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마련하신 의와 구원과 생명의 옷을 영적으로 입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연약함을 다 덮어주셨고 주님 안에서 영원히 영화로운 존재가 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잘못을 다 덮어주시는 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심으로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27장에서는 로마 군사들이 우리 예수님의 홍포를 벗기며 주님을 모욕하며 수치를 주는 모습이 나온다. 주님은 우리가 당해야할 모욕과 수치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우리를 위한 영적 새 옷을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그 거룩한 의의 옷으로 우리를 입혀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로마서 13장 12절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우리는 이제는 옛 더러움의 옷이 아닌 주님 안에서 의의 새 옷을 입은 영광스런 존재가 되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 하나님의 자녀들은 저 영원한 날에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그 영원한 구원과 승리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요한계시록 7장 13절, 14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더러운 죄악의 옷들 대신에 의의 새 옷을 입혀주셨다.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면서 보배보다 귀중한 주님의 보혈의 값으로 만드신 영적 새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셨다.

 

•영감의 교훈 •

▶ 옷이 날개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세상에 대한 모든 충절을 버릴 것 같으면, 교회 앞에는 밝고 영광스러운 날이 밝아올 것이다”(교회증언 8권, 11).

 

셋째날(화)

3월 29일 율법 외에

 

도입)

어느 날 임금님이 궁궐 밖을 나가서 암행 시찰을 하게 되었다. 임금님은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다리 밑에서 한 거지 소년을 보게 되었다. 임금님이 보기에 그 소년의 모습은 너무나 더럽고 꾀죄죄해서 애처롭기가 그지없었다. 임금님은 그 소년을 궁궐로 데려가 모든 신하들 앞에서 왕자로 삼겠노라고 공포하였다. 이제 소년은 더 이상 거지 신분이 아니라 왕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 소년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누더기가 된 자기 옷을 벗어 던지고 화려한 장식과 좋은 옷감으로 만든 왕자의 옷을 걸쳤다. 식사도 예전처럼 구걸하지 않고도 너무나 맛있고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왕자는 자신이 이제 거지가 아니라 왕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환경이 소년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다. 아침이 되자 소년은 급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시중드는 신하가 당황하며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실은 저 다리 밑에 가면 제가 세수할 수 있는 곳이 있답니다”라고 왕자가 된 소년은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왕자는 아직도 자신의 신분이 거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왕자다운 생활을 하기에는 이미 거지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자가 진정한 왕자로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왕자다운 행동을 익히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보시기에 절대적으로 거룩하고 완벽해 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다. 그에 따르면 그분의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하고 순전하게 보신다는 것을 알므로 절대적인 평강과 기쁨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값없이 받는 은사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교훈: 우리가 만약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 덕분이다.

 

부가적용)

인류는 구원의 길을 모색하면서 살아 왔다. 고해를 살아가는 인생이 어떻게 해서든지 평안하기를 바랬고, 죽어야만 하는 인생이기에 죽음을 초월하는 방법은 없을런지, 죽더라도 죽은 후에도 영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등 현실에 만족치 못하고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이기고 만족과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인간은 여러 가지 방도를 고안해 냈다. 의술을 통해 오래 살고, 앓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고, 여러 철학과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의 방도를 제시했다. 그 중에는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지켜 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들도 있었다. 몰록 신을 섬기는 자들은 자기들의 아기를 빨갛게 단 몰록신상의 팔에다 안겨주면 복을 얻는다고 하는 법을 지키려고 사랑하는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선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여 준 것뿐인데, 그들은 그 법을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법에 더하여 많은 법을 만들어서 거기에 얽매였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공로로 구원을 얻는 줄 알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법을 다 지키거나 완전히 지키는 자는 없었다. 그들도 남들과 같이 타락한 인간인지라 법을 가졌지만 범죄는 똑같이 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인간이 만든 법이나, 어떤 법이라도 그것을 행하는 인간의 노력이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그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해 낼 재간이 결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의 인간은 한마디로 율법을 의지하여 구원 얻으려고 노력을 하던 인간으로 규정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 길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1-24절) 이것이 복음이고 성도가 입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넷째날(수)

3월 30일 옷이 사람을 만든다

 

도입)

어떤 학자가 있었다. 그는 늘 검소하게 살기 때문에 화려한 옷이 없었다. 어느 날 그에게 초청장이 하나 날라 왔는데 높은 장관들이 주최하는 파티였다. 그는 파티가 열리는 날에 평소에 즐겨 입던 수수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파티장에 갔는데 입구에 가자마자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저지를 당하고 말았다. 옷이 너무 초라해서 거지가 온 줄 안 것이다. 초청을 받고 왔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멋진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실갱이를 하지만 들여 보내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파티에 온 사람들 중에 다행히 아는 사람이 있어서 문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자 그를 아는 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혼자 테이블에 꾸어다 놓은 보리쌀 자루마냥 앉아 있다가 나왔다. 그는 곧장 집으로 가서 가장 좋은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다시 똑 같은 파티 장소로 갔다. 그런데 바로 전에는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던 문 지키던 사람이 깍듯이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한 안에 들어갔더니 장관이며 아는 사람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하며 좋은 자리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좋은 음식이 나오고 비싼 술이 나와서 그를 대접하는 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이렇게 다르게 대우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옷에게 이렇게 말했다. “옷아, 이것들은 네가 먹어라. 이것들은 나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너를 보고 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옷이란 이렇게 사람들에게 대단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교훈: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는 그분의 의의 옷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부가적용)

바다에 가면 소라게가 있다. 세계적으로 소라게는 한 백여 종 되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것은 날 때부터 자기가 살 수 있는 껍데기를 가지고 나오는 소라게도 있고. 어떤 것은 날 때부터 자기 껍데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소라게가 있다. 그런데 집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집을 못 가진 놈은 자기 눈에 들면 아무 데나 들어가서 제 집처럼 산다. 기어 다니다가 빈 소라껍질 가운데 하나를 고른 다음에, 집게발을 벌려 그 소라껍데기 입구를 재어 본다. 재어 보고는 그 집이 자기 몸에 맞겠구나 하면 지체 않고 배부터 밀어 넣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산다. 살다가 나중에 소라가 몸이 커져 불편하게 되거나 살다가 좀 싫증이 나면 금방 껍데기를 획 벗어버리고 다른 소라 껍데기를 찾아 나선다.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들어가 살다가 싫으면 또 집어던진다. 이것이 소라게의 생활 습성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서 부족한 사람은 소라게처럼 자주 자기 집을 바꾸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 행세를 할 수 있는 껍데기를 가지고 살 때가 있다. 그러나 참된 신자의 옷은 하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 그것뿐이다. 그 옷을 입고 어디든지 다녀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육신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 현세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 자기중심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마음이 바뀌어야만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 영광 위해 살 수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

 

•영감의 교훈 •

▶ 갈아입음

“그대의 그릇된 사상, 그대의 품성 속에 있는 불쾌한 면은 포기되어야 하며, 그대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교회에 이것이 얼마나 부족한가! 하늘 상인께서 그대에게 충고하신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149).

 

다섯째날(목)

3월 31일 값싼 은혜와 율법주의

 

도입)

옛날의 크리스천들은 행동하는 크리스천들이었다. 때문에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우선 정직하고 성실하고 바르며 착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었다. 저는 그와 같은 선입견이 우리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엔진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인식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여 얻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값싼 은혜주의로 빠지면서부터 더 이상 기독교인들은 행함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게 되었다. 믿는다고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하나님의 법과 식과 길에 관심이 없음으로 사는 식은 기독교식이 되지 아니하고 세상 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크리스천이란 본래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는 예수님을 본 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본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 덕분으로 개신교 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는 율법주의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성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율법주의의 족쇄에 매여 신음하게 된 것 같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자신 안의 율법주의적 성향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춘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는 고행과 금욕으로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그럴수록 자신 안에 번민과 두려움과 좌절만이 깊어가는 영적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려는 헛된 수고에서 벗어났다.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가 대신 치룬 영적 홍역 덕분에 그 곤욕을 되풀이하지 않고 무사히 칭의의 관문을 통과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율법주의의 망혼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개혁이 칭의의 복음을 밝혀준 공헌을 남겼다면, 지금 우리는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거스르는 신율법주의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화의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면 그런 성화의 복음은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지만 잘 안되는 것이 주님께 대한 순종이다. 주님을 위해 열심을 내면서 봉사를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잘되질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주님 앞에 열심을 내는데 문제가 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 열심이 오히려 우리가 주님 앞에 순종하는데 방해가 된다. 주님의 듯을 구하기보다는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자기의 판단과 다른 것을 요구하실 때는 'No'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변명을 하거나 때로는 항변마저 한다. 순종은 열심을 내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이다. 십자가는 죽님이 죽으신 곳이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이 죽으신 곳으로 자신도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교훈: 순종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절대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부가적용)

소설가 중에 김성일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릴 때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머리가 커 가면서 믿음을 버렸다. 예수님을 멀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사르트르라는 사람이 쓴 “자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의 사상에 동감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은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그러다 잘못을 저지르면 자기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인이라면 적어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김성일씨는 이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았다. 그래서 시시하게 하나님께 애걸복걸하며 사는 인생이 되지 말자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마음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그는 해방감과 자유를 누리며 수십 년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위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받게 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란 아무 것도 아니며, 어떤 것도 책임 질 수 없는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기 아내가 이렇게 병들게 된 것도 사실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마다 술 마시고 아내를 들볶았고 외박을 해서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위 벽이 헐게 되었고 나중에는 암이 생기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아내를 병들게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지만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발견한 것이다. 자기의 잘못은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하며 자유의 길을 걸어왔지만 아내가 병들자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매력적이던 사르트르의 말도 아내의 병 앞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처럼 목메어 죽는다 한들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찾아오신 분은 중학교 3학년 때 필요 없다고 발로 차 버렸던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고독 속에 뼈아프게 몸부림치고 있던 그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같이 울어주시고 마음 아파하셨던 것이다. 사르트르가 도망간 그 빈자리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신음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는 결심하고 새벽 기도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어느 새벽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라”는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병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그는 완전히 고침 받은 아내와 함께 15년이 넘도록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죽음 앞에 설 때 우리 자신을 올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옷을 입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함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값비싼 그리스도인이 되라

“나의 형제들이여, 믿음과 행함의 문제들을 신자들에게 증거할 때에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신자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도록 권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저들은 믿음으로 성공하는 방법, 순결하게 되는 방법 및 저들의 헌물이 하나님께 향기가 되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써만 가능한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80).

 

예비일(금)

4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교회증언 4권, 88~89 “시험하는 과정”, 복음 교역자, 16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정로의 계단, 49~55 “믿음과 받으심.”

“율법은 의, 즉 의로운 생애,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류는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사람들의 생명을 대신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관용하심을 통하여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신다. 그분은 인간의 품성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영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훌륭한 구조가 되도록 지으신다. 그리하여 바로 이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롬 3:26)실 수 있으시다”(시대의 소망, 7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을 때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후 3:18).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➋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신 일(즉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일)과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시는 일을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약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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