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주의 날개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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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주의 날개 그늘
5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3분
도입)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학생에게는 연산의 법칙을 배우고 구구단을 초등학교 때 배워야 방정식을 풀 수 있고, 군인들은 훈련소를 거쳐야만 비로소 군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된다. 아무리 군복을 입고 있어도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군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성도들도 마찬 가지다. 성도들이 십자가의 경험 없다면 삽자가의 보혈의 앞에 나아간 적이 없다면 그는 모양은 교인이지만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교회일이 힘들다. 또한 재미가 없다. 자원하는 맘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열심으로 노력으로 하는 것이기에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의 샘에 자신의 욕심을 던져 버린 참 그리스도인들은 늘 행복하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참 쉼이요 안식이요 즐거움인 것이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온전히 다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있다. 온전히 다 내어 주셨다는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자리로 내 몰아야 했던 하나님의 사랑이 그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온전히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의 날개 그늘이라 함은 바로 십자가와 같은 위대한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시는 그 사랑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그런 쉼과 그런 은혜의 그늘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곳은 엄마 닭의 품과 같은 곳이요 어머니의 가슴과 같은 곳이다. 그곳이 참된 그늘이 된다.
기억절 :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 63:7).
연구 범위: 출 19:4, 삼하 11~12, 시 17:8, 31:7, 36:7, 51:2, 61:4, 63:7.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토의자료가 있습니다.
독수리는 살아있는 전투기와 같다. 날카로운 부리와 면도날같은 발톱으로 무장된 독수리는 전투기처럼 하강한다. 독수리는 큰 날개를 이용하여 바람을 타고 날며, 가벼운 뼈와 강한 힘줄로 먹이를 잡아챈다. 독수리는 청소부요, 낚시꾼이요, 도둑이다. 독수리는 먹이를 잡기 위해 구름 위로부터 물을 향하여 질풍과 같이 자신을 내던진다. 독수리는 새끼들이 다칠까봐 둥지 안에서는 발톱을 웅크리며 퍼덕거린다. 독수리는 위엄과 힘과 우아함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징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하게 보인다. 그래서 성경의 기자들이 비
행하는 독수리의 야생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번 주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지를 숙고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어떤 사건 때문에 다윗이 그러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 다음 우리도 그분의 날개 아래서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살펴볼 것
이다.
결론: 우리가 겸손히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 회복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날개 아래 우리를 안전하고 온전하게 감춰주십니다.
첫째날(일)
5월 8일 적나라한 진실
도입)
고대 시대에 전쟁이 나면 왕들은 군대를 이끌고 출전을 한다.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는 것은 왕의 일상적인 업무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들이 출전할 때, 다윗은 출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지휘권을 요압에게 맡긴다. 요즘 같으면 이런 모습을 권력이양이라고 좋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다윗은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한 것임에 틀림없다. 전쟁터에 있어야 할 다윗이 왕궁에 있다. 왜 다윗은 왕들이 출전할 때, 그대로 왕궁에 머물렀을까? 다윗은 승승장구했다.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더 이상 전쟁은 다윗의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는 이제 그 일을 직접 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하에게 맡겼다. 다윗은 나태함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평화 속에서 나태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다. 그런데 다윗을 넘어뜨리는 일이 그의 나태한 일상 속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다윗은 무료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었다. 그런데 마침 그의 눈을 사로잡는 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무료하던 다윗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순간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뱀의 유혹이 다윗을 덮쳤다. 그녀는 심히 “보암직”했다. 안목의 정욕이 다윗을 사로잡았다. 나태함에 빠진 다윗은 자신을 다시 긴장하게 만들고 자신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 그녀를 품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다윗은 그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다윗은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간음을 하게 된다. 다윗의 범죄는 일상의 나태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나태함을 경계해야 한다. 나태함은 인간을 동물적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거룩한 목적도 목표도 없이 그저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게 만든다.
독수리는 약 3,000 미터 이상의 고도까지 날아오를 수 있다. 다윗도 높이 날았다. 한때는 목동이었지만 그는 이전의 그 어떤 왕도 이르지 못한 위대함에 이르렀다. 그는 숱한 전쟁에서 승리의 옷을 입었으며 존경과 영광으로 옷 입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옷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잊었다. 그처럼 아름다운 왕의 옷도 사람의 죄, 심지어 왕의 죄는 숨겨줄 수 없었다.
영적인 면에서 다윗의 옷은 제사장과 왕의 옷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신정통치하의 수장(首長)이었다. 이런 그의 옷을 오염시킨 치명적인 죄가 시 32편과 51편에 나온다. 이 시편에 나타난 ‘죄의 덮개’, ‘하나님의 날개’라는 상징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다윗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사실 의복이 주는 영적 교훈의 부족에서 시작된다.
위대함의 꼭대기에서 다윗은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 전쟁은 피로 물든 랍바(Rabbah)의 전장이 아니라 다윗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마음 밭에서 발생했다. 사탄은 그의 ‘무기’를 잘 선택했다. 무시무시한 창으로 무장한 골리앗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옥상을 거니는 왕의 시야에 들어온 목욕하는 여인이 해냈다. 다윗은 그의 물매로부터 배웠던 교훈을 잊었음이 분명하다. 그때는 조그만 조약돌이었지만 지금은 한 번의 눈길로 ‘거인’이 쓰러졌다.
단 한 번의 잘못된 눈길이 살인과 전쟁으로 이어진다. 다윗의 이야기는 결과를 두려워한 연속적인 은폐의 이야기다. 한 가지 죄를 범하고도 자복과 용서가 없다면, 이전의 죄를 가리기 위하여 더 가증스러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 죄의 참혹한 진상이다. 다윗은 왕의 권한이라는 옷을 입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겉옷을 꿰뚫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신다.
교훈: 다윗이 믿었던 왕의 옷은 그의 믿음도 지켜주지 못했고, 그의 죄도 가려줄 수 없었다.
부가적용)
다윗은 주변에 있는 블레셋, 모압, 소바, 아람, 하맛, 에돔, 암몬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사무엘하 8:14절은 다윗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고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에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결코 성경은 승리의 전공을 다윗에게 돌리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히 지키신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다윗의 다윗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는 집안에서조차 왕따 받던 일개 목동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왕으로 기름 부으시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해 내시고, 사울의 집과 처들을 주시며,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맡기셨다. 그리고 만약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저것을 더 주셨을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목자 되신 하나님의 보호아래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의 메시지가 임했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또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0-11)” 다윗은 죄를 용서 받았지만 자신의 육욕적인 결과에 대한 죄 값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여전히 지켜주셨다. 인간적으로 보면 솔로몬은 죄의 씨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솔로몬을 사랑하셨고 후에 솔로몬을 다윗의 계승자로 세우셨다. 그런 일은 인간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윗 왕국이 다윗이라는 사람이 기초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라는 것이다. 만일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고 별다른 허물이 없이 나라가 계속 되었더라면 사람들 보기에 그 나라는 다윗이라는 한 완전한 인간 위에 세워진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범죄 했고 허물을 드러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의 범죄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을 사랑하시고 그를 계승자로 세우셨다. 이는 다윗 왕국이 사람의 의(義)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위에 세워진 나라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일방적 사랑이 다윗 왕국의 기초가 된 것이다. 우리가 주의 사랑의 날개의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영감의 교훈 •
▶ 무릎으로 이김
“마귀는 기도를 게을리 하는 자들을 어두움으로 가두어 놓는다. …끊임없는 기도와 늘 깨어있음이 없이는 우리는 부주의하게 되고 정도에서 탈선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정로의 계단, 94).
둘째날(월)
5월 9일 나단이 모든 것을 밝히다
도입)
다윗이 육욕을 좇아 히브리인으로 귀화한 충성스런 신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 삼으면서 그의 집안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예언자 나단은 다윗의 육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하고 고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면서 유태인인 토마스만은 그의 대표작 선택된 인간에서 “죄라는 것은 결국 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죄를 가볍다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다. 죄가 쉽다는 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다. 죄를 회개할 때는 뼈를 깎는 아픔을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윗은 나단의 고발과 심문을 받고 자기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참회했다. 왕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다윗은 복된 사람이었으나, 육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의 다윗은 비극의 연속을 맛보았다. 그의 비극의 원인은 수많은 아내와 그의 소생들에게 비롯된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인 아멜렉을 도말하지 않은 것과, 제사장만이 드리는 예배를 자기가 드린 이유도 있었지만, 전리품을 나누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주변의 강력한 왕들이 하는 행위를 흠모하고 그대로 하여 주변의 왕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이 원인 중의 하나였다. 다윗 가정의 비극의 씨앗도, 하나님의 명령인 일부일처제를 택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강력한 왕들이 하는 것처럼 세상의 왕들이 하는 것처럼 육욕을 좇아 예쁜 여인들을 많이 아내로 들인 때문이었다. 육욕으로 얼룩진 다윗왕가는 비극의 연속으로 울부짖음과 쓸쓸함과 눈물로 얼룩진 집이 되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으나 이웃을 사랑하는데 실패했다. 다윗은 이웃을 사랑하긴 했으나 세상풍조를 따라 외모와 육욕으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는 저급한 사랑으로 몸이 불타 있었다.
“다윗이…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5~7).
한 동안 다윗은 속임수로 자신의 죄를 숨겼다. 그의 살인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죄는 다윗의 마음을 돌처럼 굳게 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하나님께서는 돌처럼 굳어진 그의 마음을 깨뜨리고자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의 죄를 직접적으로 들추어내는 대신 진실을 비유로 옷 입혔다(삼하 12:1~12).
짧은 몇 마디이지만 나단의 비유는 죄로 굳어진 마음을 감동시킬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었다. 첫째, 나단은 고소자로서 다윗에게 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겸손하고 지혜롭게 다윗의 도움을 간청했다. 다윗의 마음은 죄로 인하여 굳어졌으나 그의 정의감은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둘째, 진실을 비유로 옷 입혀서 다윗의 방어를 뚫었다. 셋째, 나단은 다윗으로 하여금 심판받고 있다는 느낌 없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하였다. 그 결과 다윗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였다.
다윗의 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죄 중에 잉태된 아이는 죽어갔다. 다윗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옷을 벗고 겸손과 슬픔의 옷을 입는다. 그는 회개하는 심령으로 아이의 생명을 위하여 탄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약 일 년 전, 어두움에 덮여 다윗은 밧세바를 향한 정욕 앞에 굴복했고, 바로 그날 지금 이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신복들을 당황케 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일어나 목욕을 한다. 그는 의복을 갈아입는다. 그는 기름을 바르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슬퍼하는 자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 보여준다. 다윗의 죄는 목욕으로 시작해서 목욕으로 마친다. 그러나
이 마지막 목욕은 또 다른 죄의 전주곡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의 상징이었다.
교훈: 선지자 나단이 지혜롭게 다윗의 죄를 밝히자 다윗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였다.
부가적용)
다윗은 나단의 심판과 정죄를 통해 자신의 육욕에 대해 철저하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눈물로 참회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과부가 되고 아들을 잃은 밧세바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회개한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인정받고 왕으로서 주변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나라에 풍요를 가져다준 영광스런 메시야의 표상이 되었다. 다윗이 육욕에 사로잡혀 밧세바를 범하듯이 그의 장남 암논은 그대로 육욕을 쫓아 다말을 욕보였다. 암논은 다말의 상처받은 인생을 거두어 보호하기를 거절하고 절규하는 다말의 울부짖음과 쓸쓸함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이로써 다윗 집안에는 비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고 솔로몬을 제외한 모든 자녀가 성경의 축복인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다윗 앞에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실수 할 수 있다. 육욕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경고와 도전 앞에 우리는 참회하고 돌아서야 한다. 나로 인해 상처 당해 울부짖고 쓸쓸한 인생이 없는 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울부짖고 쓸쓸한 인생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여호와 앞에서 떠는 자
“선지자의 견책은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양심을 일깨웠고 그의 죄는 흉악한 그대로 모두 나타났다. 그의 영혼은 굴복되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다. 떨리는 입술로 그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22).
셋째날(화)
5월 10일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
도입)
세상은 죄의 질과 양에 따라 죄를 달리 본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의 수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다르다. 하나님께는 무거운 죄, 가벼운 죄가 없다. 비록 행동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에게 자리하고 있는 죄의 본질은 결코 다르거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죄가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의 본성인 탐심 역시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이들이 장난감을 탐내는 것과, 어른들이 돈을 탐내고 남을 속이고 부정을 저지르는 탐심이 다를까? 행동을 기준으로 보게 되면 아이들의 탐심은 어른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또한 탐심이 아이가 커가면서 함께 자라가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 다만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이고, 어른은 어른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이다. 결국 탐심은 동일한데 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는 죄의 질과 그 양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신자는 불신자보다 죄의 행위가 덜해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에 대한 생각일 뿐 하나님은 신자를 그런 원칙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혼이 떨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뼈와 영혼이 떨리다는 말을 하고 있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고 고백하는 말을 보면, 다윗이 죄에 대해 얼마나 애통해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다윗과 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다윗의 회개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 싶어 하는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의 회개를 단지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다윗은 우리야와 밧세바에게 죄를 지은 이후 일 년 동안 그의 죄에 대하여 자복하기를 거절했다. 시편 32편은 그때 그가 겪었던 마음의 고뇌와 몸서리치는 육체의 고통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시 32:3~5를 읽어보라. 다윗은 거짓과 살육으로 자신의 간음죄를 덮으려 하였으나, 죄의 무게는 그를 짓눌렀다. 시편 32편이 보여주듯 다윗은 참된 겸손과 회개로 하나님의 자비 앞에 그 자신을 내려놓았다. 용서의 부르짖음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 ⑴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았다. ⑵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⑶ 그는 자신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어떤 허점도 찾지 않았다. ⑷ 그는 그의 죄에 대하여 오직 자신만을 탓했다. ⑸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은 죄를 미워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덮으셨다.
다윗이 죄를 감추려고 했던 것과 하나님이 그것을 덮으신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시 32:1, 3~4)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덮으신다. 이는 죄인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 더 이상 죄인에게 죄의 책임을 묻지 않음을 의미한다. 회개가 없는 고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뉘우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덮으실 수 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죄인을 마치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받아주신다.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우리의 대속자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전가(轉嫁)된다.
교훈: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그의 죄를 덮어 마치 죄가 없었던 것처럼 그를 깨끗하게 하셨다.
부가적용)
우리에게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는가? 있다면 왜 죄에 대해 애통하게 되는가? 신자로서 죄에 대해 애통함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 단지 회개를 위한 것이라면 그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문제에서 죄를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로 인해서였다. 이것이 죽음의 상태이다. 단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영원한 사망이 죄로 인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회개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애통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애통해 하는 것은 나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것이 곧 영원한 사망에 머물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불신자는 자기 죄에 대해 그 질과 양을 따라 경중을 판단한다. 그래서 가벼운 죄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산다’라고 생각하면서 합리화하고 가볍게 지나쳐 버린다. 설령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양심의 반응일 뿐이다.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양심이 반응하여 후회와 자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즉 불신자는 그 어떤 죄를 두고도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망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행위로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않고 자기 속의 죄의 본질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였음을 보게 되고 죄의 무거움을 깨달으며 애통해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회개는 하되 애통은 없게 된다. 눈물을 흘리고 우는 애통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뼈와 영혼이 떨리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벌을 면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애통해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하기 때문에 은총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아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회개는 도덕적 죄책감이나 종교적인 의무감,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상실이나 징계에 대한 염려 등이 회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모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 경우 자식이 용서를 구하고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단지 자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자식의 잘못으로 인해 부모 자식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부모 자식의 관계이다.
•영감의 교훈 •
▶ 면하려고 하지 않고 변하려고 함
“만일 우리가 다시 회개할 것 없는 회개를 경험하지 아니하고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서 심령의 참된 겸비와 통회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지 아니하였을 것 같으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죄의 사유를 구한 것이 아니요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지 아니하였으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자이다”(정로의 계단, 37).
넷째날(수)
5월 11일 눈보다 희게
도입)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반성을 한다. 하지만 고아들은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을 받아줄 대상이 없다. 고아원 원장이 반성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아이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방법적 차원일 뿐이지 부모 자식의 관계회복은 아니다. 이렇게 비유해 보자면 불신자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를 받아줄 대상이 없는 단순한 자기 양심에 의한 반성으로 그치는 것이라면, 신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부모와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것이 다르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이 내용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음부에 가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이다. 음부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윗은 음부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에 머물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의 회개에는 죄에 대한 용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거룩한 교제를 소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시편 32편이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조명하기 위하여 옷을 소재로 삼은 것같이 시 51편 역시 의복을 죄를 덮는 은혜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은 그의 “더러운 옷”을 씻고 희게 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씻다”는 말은 성경에서 옷을 빨 때 사용되었다(창 49:11, 출 19:10). “정결케 하소서”라는 말은 속죄의 의미가 있다. 우슬초는 음식의 향신료나 약재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오래전부터 우슬초를 유월절 의식이나 문둥병자나 집을 정결케 하는 일, 또는 죽은 자를 만지거나 접촉하여 부정한 자나 물건들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 사용하였다(출 12:22, 레 14:6, 9, 민 19:18). 모세도 언약의 피뿌림 의식에 우슬초를 사용하였다(히 9:19∼20).
위의 모든 용례들은 우슬초가 정결케 하는 효능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윗이 우슬초를 언급한 것은 강력한 정결 효능이 있는 치유책만이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그를 깨끗케 할 수 있음을 이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구주의 속죄하는 피가 바로 그 치유책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죄악으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의 용서받은 자녀에게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신다. 새롭게 창조된 마음은 새로운 정신이다. 바울은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한다(딛 3:5~6, 롬 12:2). 용서를 비는 기도는 언제나 심령의 새로움과 거룩한 삶을 위한 기도와 함께 드려져야 한다. 다윗은 완전히 새로운 정신적, 도덕적 본성을 덧입기 원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변함없이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교훈: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며,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성령께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부가적용)
신자의 회개는 분명 십자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십자가에는 죄에 대한 용서, 심판에서의 구출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에게 화목의 손길을 내미시고 거룩한 교제를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초청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단절된 교제의 회복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놓으신 것이다.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아직도 고아원에 있는 고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회개하고, 상 받으려고 열심을 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 없는 고아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인생의 가장 큰 목적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기에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기도, 자신의 회개, 자기 행위를 믿는 자가 아니다. 신자가 믿을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의심과 낙심이 없이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회복된 긍휼의 관계에 있는 신자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영감의 교훈 •
▶ 회개하는 자를 눈여겨보심
“믿음을 간직하고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간절히 바라며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다. 또한 그가 믿음으로 전진하려고 힘쓸 때에 섬기는 천사들은 그를 도울 것이다”(복음전도, 287).
다섯째날(목)
5월 12일 주의 날개 밑에
도입)
영국에서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무디는 1892년에 가정과 사역에 복귀한다는 부푼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많은 작별 인사 곳에서 무디를 실은 배는 사우스햄프턴을 떠났다. 출항한지 사흘 쯤 지나 배는 축이 부러지면서 멈춰 서고 말았다. 배 안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선원들과 승객들은 절망했다. 배가 가라앉을지 말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인근에 구조선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한 이틀을 보낸 후 무디는 집회를 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놀랍게도 승객 전원이 참석했다. 그는 넘어지지 않게 기둥을 붙잡고 성경을 펴서 읽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91:1) 나중에 무디는 이렇게 썼다. "내 삶의 가장 어둔 시간이었다. ...기도 중에 평안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영혼 깊은 곳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게 하셨다. '주의 뜻이 이뤄지이다.' 나는 자리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배를 구조하셨다. 다른 배를 보내 항구로 예인하게 하신 것이다. 무디에게 시편 말씀은 살아 있는 새로운 말씀이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곧 '그분의 날개 아래' 임을 깨달았다. 당신과 나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의 날개 아래 곧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삶의 풍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시 61:4).
어떤 독수리는 그 날개의 길이가 무려 3미터나 되는데, 그 날개로 새끼들을 보호하고 안식처를 제공한다. 독수리의 날개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버린 자들에게 안식처가 된다. 이미 정결케 된 죄책(罪責)과는 달리, 죄의 결과들은 종종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그의 세 아들의 죽음과 암논에게 강간을 당한 다말의 일을 통해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무엇을 구하였는가? 하나님의 날개는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시 17:8, 36:7, 57:1)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는 사랑과 자비와 피난처가 있다. 독수리의 날개는 이 같은 사실을 시각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준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를 등에 업고 높이 날아오른다. 그리고는 그의 날개를 뒤집어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린다. 새끼 독수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추락한다. 새끼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 바로 직전, 어미 독수리는 신속히 하강하여 그의 날개로 새끼를 받아낸다. 그리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가 얼마나 추락하는지 상관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빨리 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추락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더 높이 날아오르는 법을 가르치신다. 만약 다윗과 같이 회개한다면, 우리는 실패하기 전보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아마도 독수리에 관한 지식이 다윗으로 하여금 시 61편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날개에 대하여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이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유랑하는 동안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편이 언급하고 있는 은혜의 날개 밑은 성소의 시은좌를 말할 가능성이 있다. 언약궤를 덮고 있는 시은좌 위에는 날개로 하나님의 품성(사랑)의 사본인 율법을 덮고 있는 그룹 천사들이 있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사랑의 빛으로 옷을 입는 영혼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성소 안에 거하고 싶은 믿음과 소원을 표현하고 있다.
교훈: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 아래 살 수 있도록 지극히 거룩한 처소로 초청하신다.
부가적용)
고대 그리스철학자인 탈레스(Thales)란 사람이 있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제일의 지혜자인 탈레스가 세상에서 제일의 부자인 크로이소스(Croesus)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말미를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사색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하루 내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어떠한 답변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고 철학자 탈레스는 솔직히 고백을 하였다. 이 세상 제일의 지혜자인 탈레스는 세상 제일의 부자를 만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오래 생각을 하면 생각을 할수록, 그는 해답을 만들기가 더욱더 어려웠노라” 고 하였다. 초대교회교부인 터툴리안은 탈레스의 사례를 직접 거론하며, 그를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세상의 제일의 지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했던 제일의 무식쟁이의 대표적 인물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의 제일의 지혜자가 있는데,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공장의 공원도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할 수 있다.”라고 외쳤다. 그렇다. 우리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다. 시골에 가면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며 모이를 주워 먹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암탉은 병아리를 모두 날개 아래로 숨기고 결사적으로 대항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랑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주의 변치 않는 사랑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할 수 있다. 닭이 날개로 병아리를 보호한다.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른다. 우리는 주님의 날개 아래서 쉼을 얻고 보호를 받는다. 주의 날개 그늘은 온 세계에 가득 차 있다. 공기처럼 온 세상을 감싸고 있다. 주의 변치 않는 사랑을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지내자. 주님으로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살아간다.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 상처받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날개 그늘로 보호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개 그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정한 날개 그늘이다. 죄의 결과로 인해 죽음의 공포로 떠는 인생들을 감싸주는 아버지의 사랑의 그늘이다. 우리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날개 그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교회에서 십자가 속에서 참된 안식을 얻어야한다.
•영감의 교훈 •
▶ 회개를 포기하지 말라
“범죄하고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려던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윗이 자기의 범죄로 고통을 당했다 할지라도 성실히 회개하고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았던 일을 기억하고 그들도 역시 회개할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행하려고 노력하였다”(부조와 선지자, 726).
예비일(금)
5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717~726 “다윗의 범죄와 회개”, 교육, 157 “성경의 전기.”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다. 자기의 죄악을 변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는 경고된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이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죄의 흉악함과 자기 영혼의 더러움을 보고 죄를 미워하였다. 그가 기도한 것은 용서만을 얻고자 함이 아니요 마음의 정결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절망 중에 투쟁을 포기하지 아니하였다. 회개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가납하심의 증거를 보았다.…누구든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다윗처럼 겸비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허락들을 받아들인 자는 용서를 받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은 약속을 주셨다.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부조와 선지자, 725~72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죄를 숨기려는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무익한지 토의하십시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무엇을 제공하십니까? 왜 그것만이 죄를 치료하고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해결책입니까?
➋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시를 지어 보십시오. 다윗처럼 여러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지어 보십시오. 그것을 교과반에서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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