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엘리야와 엘리사의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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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엘리야와 엘리사의 외투
5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7분
도입)
성서시대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겉옷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겉옷은 히브리어성경에 "케쑤르" "씸라" "메일" "아데레트"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된다만 큰 차이는 없다. 겉옷은 중동지방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인데 특히 여행시 낮과 밤에 급격한 온도차를 견디게 해주는 도구이며 밤에 잘 때 이불로 쓴다. 따라서 입는 옷이라고 하기 보다는 덮는 옷이다. 이 겉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왕과 선지자, 왕자등의 권위가 그들이 입는 겉옷을 통해 드러났다. 특히 자주색 겉옷은 왕이나 최상위 3% 상류층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는데 이는 당시 자주색 염색이 당시 두로(Tyre) 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독점기술이었으며 50센티미터 천을 자주색으로 염색하려면 1만마리의 뿔고등으로 불리는 달팽이 필요한 높은 비용의 옷이기 때문이었다. (겉옷 한벌에 지금 돈으로 1억원 정도의 가치라고 한다) 특히 겉옷 네 귀에 달린 술의 매듭은 사람마다 달라 지금의 인감도장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특히 돈을 빌릴 때 그 매듭을 진흙 토판에 찍은 후 돈과 양식을 빌렸다. 그리고 먹을게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이 옷을 전당을 잡혀 돈을 꾸기도 했다. 겉옷을 맡긴다라는 것은 그의 권위 앞에 나를 맡긴다 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심판 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를 돌이키지 말지어다" 라고 경고하신다. 사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모르고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겉옷은 당시 세상을 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기억절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연구 범위: 왕상 19:1~19, 삼하 10:3~4, 겔 16:15, 왕상 21:21~29, 왕하 2:1~18.
*교과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엘리야보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성경인물도 많지 않다. 그의 일생은 믿음과 시련과 세상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의 유대 사회에서도 그는 여전히 거목이다. 유대의 전승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성경 인물들보다 더 큰 영광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유월절마다 특별한 포도즙이 식탁에 준비되고,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문을 열어놓는데, 이는 선지자 엘리야가 들어와서 포도즙을 마시라는 의미이다. 할례를 행할 때에도 “엘리야의 의자”라고 불리는 의자를 곁에 놓는 전통이 있다. 또한 안식일이 끝날 무렵에 유대인들은 엘리야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그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러 속히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복음서에도 엘리야가 출현하리라는 유대인들의 사상이 나타난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마 16:14).
이번 주에 우리는 엘리야와 그의 외투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그로부터 어떤 영적 교훈들을 얻어야 할지 살펴볼 것이다.
결론: 성경시대에 옷을 찢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깊은 슬픔과 비애를 의미했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 그것은 그의 깊은 감정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막중한 책임을 짊어짐으로써 그의 삶에 임한 인생의 큰 변화를 상징하였다.
첫째날(일)
5월 1일 세미한 소리
도입)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을 보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이나 강한 지진이나 불 속에는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자신을 보이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감추거나 숨기고 계신가?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하나님이 늘 숨어 계신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엘리야가 낙담한 것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늘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는 정반대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를 좋아하시지만 사람들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예수께서도 바로 이런 기질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실 수 있었고, 천천만만 천사와 함께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이 세상에 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너무도 비천한 곳에 오셨고, 너무도 사람들이 관심을 쏟지 않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셨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는 것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발로이시다. 자신을 잘 부각시키지 않고 자주 자신을 숨기시는 이런 하나님의 기질이 바로 우리로 큰 시험과 시련으로 우리를 조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성취시키는 방법이, 언제나 최대의 시위운동을 하는 것만이 아님을 엘리야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왕상 19:12~13).
열왕기에는 담대하게 왕들을 대면하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는 엘리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 심술궂은 여왕의 위협에 두려워 도망가는 장면도 있다.
왕상 18장을 보면 그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도륙하며, 아합왕에게 비를 예고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옷으로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에 이르는 약 32 킬로미터 길을 아합보다 앞서 달려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에 이르면 그는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왕상 19:1~4을 읽어보라.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며 방금 큰 승리를 경험한 사람도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엘리야는 절망적이고 한심한 기도를 올렸지만 주님은 그의 기도대로 행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은 여전히 엘리야를 사랑하며 그의 생명을 돌보신다는 강력한 증거를 주셨다.
왕상 19:5~19을 읽어보라.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엘리야가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을 보고도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존경의 표현으로 얼굴을 가리게 만든 것은 오직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셨다. 엘리야는 강력한 움직임을 동반한 힘들도 하나님의 영의 모습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다. 대신 엘리야는 조용하고 세미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가 순종한 것은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었다.
교훈: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갈멜산 같은 큰 기적들!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것,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 이런 것들만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엘리야가 배우기를 원했다. 엘리야는 마음이 급한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자신이 보여준 그런 큰 능력을 아합이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한 이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이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한 엘리야는 낙담하게 된 것이다. 성질이 조급한 사람은 그 앞에서 당장 끝장을 보지 못하면 금방 낙심을 한다. 엘리야는 바로 그렇게 성미가 조급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엘리야가 조급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도망한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성급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셨다. 선지자와 왕168p 이 일을 통해 “엘리야의 급한 성미는 가라앉고 그의 정신은 부드럽게 되고 억제되었다."고 하였다. 마음이 조급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조용조용한 방법!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험을 한 엘리야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선지지와 왕 168p "그는 이제 하나님을 조용히 신뢰하고 굳게 의지하면 이 어려운 때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영혼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해박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웅변이나 논리가 아니요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는 조용하고 분명하게 성품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신다. 성령의 세미한 소리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요란하고 큰 소리로 전하는 웅변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바로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화잇부인의 말씀에는 “엘리야는 성질이 급했다”고 했다. 그의 불같은 이런 성격을 변화시키고 가라앉히는 데에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그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영감의 교훈 •
▶ 귀를 기울이라
“우리는 세미한 작은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안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건강한 체험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하며, 훨씬 더 활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345).
둘째날(월)
5월 2일 의복의 변화
도입)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소명기사"로 시작된다.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은 모두 그들이 처음 부름 받았던 감격적인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진다." "겉옷"은 엘리야가 수행하고 있던 예언자직의 표시(badge)였다. 엘리야의 겉옷은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일 뿐 아니라, 그가 입고 기도하고,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증거 하던 옷이었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하던지 그를 감싸고 있는 옷이었다. 영적인 관점에서 그의 "겉옷"은 성령의 능력을 상징해 준다. 구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리는 것을 "옷 입혔다"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대상 12:18-19; 대하 24:20; 삿6:34). 엘리사는 예언자의 직무를 시작하기 위해 엘리야처럼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이 후에 엘리야는 세상을 떠나면서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완전히 양도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집고, 그것으로 요단 강물을 치자 강을 둘로 나누어졌으며 길이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머문 것"을 알게 되었다(왕하2:15).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왕상 19:19).
성경에서 겉옷이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은 아니다(욥 1:20, 시 109:29, 유 22:23, 삼하 10:3~4, 겔 15:15~16). 그러나 엘리야의 겉옷은 헌신과 봉헌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후계자를 찾고 있던 엘리야는 엘리사가 갈고 있는 밭을 지나다가 그 젊은이의 어깨에 성별의 겉옷을 던졌다. 기근 동안 사밧의 가족들은 엘리야의 사업과 사명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엘리사의 마음에 선지자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부르셨다는 신호였다”(선지자와 왕, 219~220).
교훈: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 부르심의 의미로써 자신의 겉옷으로 엘리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부가적용)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주자, 엘리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았다. 엘리야가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떻게 나 같은 농사꾼에게 선지자직을 주시는가?"라며 의아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모세나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현은 체험하지 못했지만, 엘리야를 통한 소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원문에 따르면, "그가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를 뒤따라 달려 왔다"고 말한다. 아마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후, 계속해서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엘리사는 "소를 버리며"('azab), "달려 왔다"(ruts).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소명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엘리사가 평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영적 갈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맥으로 볼 때에도 주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000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셨고"(19:18), 바로 이어 "엘리사 소명 기사"가 나타나므로, 엘리사는 남은 자 7000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조건을 달며 청원하고 있다. 그는 "청컨대 저로 저의 부모와 입맞추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한 후에 제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고 말한다. 엘리사는 먼저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기를 원했다. 그는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바로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정이 있었다. 아무리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인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엘리사의 간청을 생각해 보면, 문제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호렙 산에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영적 체험을 하였다.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받고 내려 왔다. 그의 얼굴은 빛났으며, 그의 가슴은 새로운 각오와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이런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엘리야를 즉각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떠나는 시점에 있어서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다. 엘리사가 그의 부모들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자 엘리야는 매우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돌아가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느냐?"(왕상 19:20). 엘리야는 갑자기 불쾌해졌는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엘리사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라고 생각하며 실망하였는가? 혹은 "의심할 시간을 주고 있는가?". 어떤 주석가는 "겉옷 수여"가 무엇을 뜻하는지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Walsh). 어쨌든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작은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엘리사는 더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더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도 억지나 무리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엘리사 쪽에서 더 자발적인 순종이 뒤따라야 했으며 엘리야 쪽에는 더깊은 인내가 필요하였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말을 허락으로 이해하고, 이어서 두 가지 행동을 취한다. 먼저 그는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는다." 여기에 "잡다"(zabakh)는 "제사 용어"이다. 그리고 그는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앞에서 엘리사가 작별시간을 달라며 주춤거리는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의 모호한 의도는 그의 행동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과거와의 단절을 완전히 만들 뿐 아니라, 백성들을 "먹이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모습은,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에 대한 전조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겉옷과 함께 사명을 걸침
“엘리사는 아버지의 종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을 때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인도로, 자기 후계자를 찾고 있던 엘리야가 이 젊은이의 어깨에 두루마기를 던졌을 때, 엘리사는 부르심을 깨닫고 이에 순종하였다”(교육, 58).
셋째날(화)
5월 3일 베옷을 입음
도입)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특별히 부르셨다. 그리고 아합을 주목하라고 말씀하셨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회개를 주목하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셨다. 아합에게 가서 내 메시지를 전하라. 그때 엘리야가 이런 자세를 가졌을 것이다. 하나님! 아합에게 전할 것 무엇이 있습니까? 당장에 요절을 내 버리시죠. 저런 인간에게 무슨 경고가 필요합니까? 말해 보아야 쓸 데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경고를 듣고 아합의 태도가 달라졌다. 비록 완벽한 회개에 이르지 는 못했다. 그래도 문제는 그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회개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급히 부르셨다. 하나님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분이시다. 아합 같은 인간을 용서하시다니. 그러나 하나님 과연 당신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감히 깨달을 수 없다. 그 분은 우리를 속속히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우리의 속생각까지 죄다 아신다. 그분이 우리를 아신다면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인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 21:27).
교훈: 저주와 책망의 기별을 들은 아합은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금식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나타냈다.
부가적용)
우리가 아합의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에게 무슨 경고가 필요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편견을 거두어야 한다. 아예 복음을 들을 자격도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아합 같이 타락하고 범죄한 영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진정한 심판을 뒤로 연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이다. 이것이 사람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다른 점인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악한 자라도 그 생명은 소중한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다. 안타까운 것은 아합의 회개가 진실하고 깊은 것 같지는 않다. 아합이 회개이후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참 놀랍다. 아합이 조금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다. 왕하 21:28-29절 을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 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의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다. 심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합의 회개가 철두철미한 회개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회개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영감의 교훈 •
▶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아합은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베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하나님 앞에 그의 참회개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한 행동은 왕이 통치 초기에 하나님께 돌아섰다면, 백성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흥의 불길을 전국에 번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화잇 주석, 왕상 21:29).
넷째날(수)
5월 4일 엘리야의 승천
도입)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갑절의 영감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이란 두 배의 능력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완전한 능력을 덧입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다.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깃을 강조한 표현이다.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들보다 장자가 받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한 계승자로서 충분한 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지 꼭 두 배를 달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 배의 능력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 실제로 엘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길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양이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꼭 두 배의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의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 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으로 한 표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왕하 2:9).
교훈: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의 갑절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고백하였다.
부가적용)
모세에게 있어서 그가 가진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했는데, 이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겨준 것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엘리사에게 이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엘리사의 선지자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이양 될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기고 간 것은 결국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을 진정한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이어 받은 후계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엘리야와 같이 요단을 물을 이리저리 치니 요단의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는 동일한 역사가 엘리사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 능력이 엘리사에게 나타난 것은 엘리사가 이제부터 엘리야를 이은 새로운 선지자로서의 공적인 인정인 셈이었다.
•영감의 교훈 •
▶ 그리스도께 도움을 구하라
“주께서 당신의 섭리로 지혜를 주셨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업에서 물러가게 하시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실 때에 그들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이 당신께 도우심을 구하고 당신의 길로 행한다면 주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고 힘을 주실 것이다”(선지자와 왕, 228).
다섯째날(목)
5월 5일 엘리사의 옷
도입)
엘리사도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이 나타났는데 이 사건은 엘리야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엘리사에게 왜 중요한가?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이나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3:13)에 비견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엘리사가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새로운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하신 사건이었다. 우리는 엘리사가 공식적으로 그의 사업의 첫 시작을 요단의 물을 치며 가르는 사건을 주목한다. 이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은 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침례 또한 생명의 탄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엘리사는 물을 치며 요단의 물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적인 인정의 자리였다. 요단은 엘리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정받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능력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일 때,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권능을 입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시기를 바란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왕하 2:14).
교훈: 엘리사가 행한 이적을 목격하고도 선지자의 무리는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엘리야를 찾아 헤맸다.
부가적용)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는 엘리야가 자신의 예언 사역을 중단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사표"를 낸 왕상 19:13-14절의 이야기와 바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사는 주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하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의 왕조를 무너뜨리는 사역을 하였다면,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연약한 자들을 살리고, 무너져 가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한 평생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무너진 야웨 신앙을 새롭게 세우는 복음의 사역을 하였다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아 전파하는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선지자의 사역을 신약성경의 유추를 사용한다면, "엘리야의 복음"과 "엘리사 행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 되게 하라"는 명백한 말씀을 주시며 엘리야는 "선지자직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으며, "엘리사는 엘리야를 뒤따라갔고, 그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끊임없이 연결됨
“매 순간 신령한 대리자와의 연결이 우리의 전진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어느 정도 모시고 있을 것이나, 기도와 믿음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더욱 성령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노력을 그치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508).
예비일(금)
5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88 “셋과 에녹”, 선지자와 왕, 155~189 “이스르엘에서 호렙까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변화되어 올라간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지상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 곧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고전 15:51~53)게 될 무리들을 상징하였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 두 번째’(히 9:28) 오실 때에 나타내실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늘의 빛을 입으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막 8:38)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42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세미한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로 하여금 “세미한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합니까?
➋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계승됨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계승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회 내에서 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적합한 인물이 지도력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➌옷과 의복에 관한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많은 상징들을 다루었습니다. 상징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상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5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7분
도입)
성서시대 중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겉옷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겉옷은 히브리어성경에 "케쑤르" "씸라" "메일" "아데레트" 등 다양한 단어로 표현된다만 큰 차이는 없다. 겉옷은 중동지방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인데 특히 여행시 낮과 밤에 급격한 온도차를 견디게 해주는 도구이며 밤에 잘 때 이불로 쓴다. 따라서 입는 옷이라고 하기 보다는 덮는 옷이다. 이 겉옷은 그 사람의 사회적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왕과 선지자, 왕자등의 권위가 그들이 입는 겉옷을 통해 드러났다. 특히 자주색 겉옷은 왕이나 최상위 3% 상류층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는데 이는 당시 자주색 염색이 당시 두로(Tyre) 에 위치한 페니키아의 독점기술이었으며 50센티미터 천을 자주색으로 염색하려면 1만마리의 뿔고등으로 불리는 달팽이 필요한 높은 비용의 옷이기 때문이었다. (겉옷 한벌에 지금 돈으로 1억원 정도의 가치라고 한다) 특히 겉옷 네 귀에 달린 술의 매듭은 사람마다 달라 지금의 인감도장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특히 돈을 빌릴 때 그 매듭을 진흙 토판에 찍은 후 돈과 양식을 빌렸다. 그리고 먹을게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이 옷을 전당을 잡혀 돈을 꾸기도 했다. 겉옷을 맡긴다라는 것은 그의 권위 앞에 나를 맡긴다 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심판 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를 돌이키지 말지어다" 라고 경고하신다. 사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모르고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겉옷은 당시 세상을 사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건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기억절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연구 범위: 왕상 19:1~19, 삼하 10:3~4, 겔 16:15, 왕상 21:21~29, 왕하 2:1~18.
*교과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엘리야보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성경인물도 많지 않다. 그의 일생은 믿음과 시련과 세상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의 유대 사회에서도 그는 여전히 거목이다. 유대의 전승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성경 인물들보다 더 큰 영광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유월절마다 특별한 포도즙이 식탁에 준비되고,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문을 열어놓는데, 이는 선지자 엘리야가 들어와서 포도즙을 마시라는 의미이다. 할례를 행할 때에도 “엘리야의 의자”라고 불리는 의자를 곁에 놓는 전통이 있다. 또한 안식일이 끝날 무렵에 유대인들은 엘리야에 관한 노래를 부르며 그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러 속히 오기를 기원하고 있다.
복음서에도 엘리야가 출현하리라는 유대인들의 사상이 나타난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로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마 16:14).
이번 주에 우리는 엘리야와 그의 외투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그로부터 어떤 영적 교훈들을 얻어야 할지 살펴볼 것이다.
결론: 성경시대에 옷을 찢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깊은 슬픔과 비애를 의미했다. 그러나 엘리사의 경우 그것은 그의 깊은 감정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막중한 책임을 짊어짐으로써 그의 삶에 임한 인생의 큰 변화를 상징하였다.
첫째날(일)
5월 1일 세미한 소리
도입)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정한 품성을 보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이나 강한 지진이나 불 속에는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자신을 보이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감추거나 숨기고 계신가?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하나님이 늘 숨어 계신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엘리야가 낙담한 것도 어쩌면 하나님께서 늘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는 정반대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를 좋아하시지만 사람들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예수께서도 바로 이런 기질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실 수 있었고, 천천만만 천사와 함께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이 세상에 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너무도 비천한 곳에 오셨고, 너무도 사람들이 관심을 쏟지 않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셨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는 것은 능력이 부족하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겸손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발로이시다. 자신을 잘 부각시키지 않고 자주 자신을 숨기시는 이런 하나님의 기질이 바로 우리로 큰 시험과 시련으로 우리를 조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가장 성공적으로 성취시키는 방법이, 언제나 최대의 시위운동을 하는 것만이 아님을 엘리야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왕상 19:12~13).
열왕기에는 담대하게 왕들을 대면하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는 엘리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 심술궂은 여왕의 위협에 두려워 도망가는 장면도 있다.
왕상 18장을 보면 그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하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도륙하며, 아합왕에게 비를 예고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옷으로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에 이르는 약 32 킬로미터 길을 아합보다 앞서 달려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에 이르면 그는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난다. 왕상 19:1~4을 읽어보라.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우게 되는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며 방금 큰 승리를 경험한 사람도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엘리야는 절망적이고 한심한 기도를 올렸지만 주님은 그의 기도대로 행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분은 여전히 엘리야를 사랑하며 그의 생명을 돌보신다는 강력한 증거를 주셨다.
왕상 19:5~19을 읽어보라.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엘리야가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을 보고도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존경의 표현으로 얼굴을 가리게 만든 것은 오직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셨다. 엘리야는 강력한 움직임을 동반한 힘들도 하나님의 영의 모습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했다. 대신 엘리야는 조용하고 세미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가 순종한 것은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었다.
교훈: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갈멜산 같은 큰 기적들!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것,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기름, 이런 것들만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엘리야가 배우기를 원했다. 엘리야는 마음이 급한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자신이 보여준 그런 큰 능력을 아합이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한 이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이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한 엘리야는 낙담하게 된 것이다. 성질이 조급한 사람은 그 앞에서 당장 끝장을 보지 못하면 금방 낙심을 한다. 엘리야는 바로 그렇게 성미가 조급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엘리야가 조급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도망한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성급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셨다. 선지자와 왕168p 이 일을 통해 “엘리야의 급한 성미는 가라앉고 그의 정신은 부드럽게 되고 억제되었다."고 하였다. 마음이 조급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조용조용한 방법!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험을 한 엘리야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선지지와 왕 168p "그는 이제 하나님을 조용히 신뢰하고 굳게 의지하면 이 어려운 때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영혼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은 해박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웅변이나 논리가 아니요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는 조용하고 분명하게 성품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신다. 성령의 세미한 소리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요란하고 큰 소리로 전하는 웅변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바로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화잇부인의 말씀에는 “엘리야는 성질이 급했다”고 했다. 그의 불같은 이런 성격을 변화시키고 가라앉히는 데에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그의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하였다.
•영감의 교훈 •
▶ 귀를 기울이라
“우리는 세미한 작은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안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건강한 체험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하며, 훨씬 더 활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345).
둘째날(월)
5월 2일 의복의 변화
도입)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소명기사"로 시작된다.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은 모두 그들이 처음 부름 받았던 감격적인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진다." "겉옷"은 엘리야가 수행하고 있던 예언자직의 표시(badge)였다. 엘리야의 겉옷은 그가 입고 다니는 옷일 뿐 아니라, 그가 입고 기도하고, 병자를 고치며 말씀을 증거 하던 옷이었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하던지 그를 감싸고 있는 옷이었다. 영적인 관점에서 그의 "겉옷"은 성령의 능력을 상징해 준다. 구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붙들리는 것을 "옷 입혔다"는 말로 자주 표현한다(대상 12:18-19; 대하 24:20; 삿6:34). 엘리사는 예언자의 직무를 시작하기 위해 엘리야처럼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이 후에 엘리야는 세상을 떠나면서 엘리사에게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완전히 양도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집고, 그것으로 요단 강물을 치자 강을 둘로 나누어졌으며 길이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머문 것"을 알게 되었다(왕하2:15).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왕상 19:19).
성경에서 겉옷이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은 아니다(욥 1:20, 시 109:29, 유 22:23, 삼하 10:3~4, 겔 15:15~16). 그러나 엘리야의 겉옷은 헌신과 봉헌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후계자를 찾고 있던 엘리야는 엘리사가 갈고 있는 밭을 지나다가 그 젊은이의 어깨에 성별의 겉옷을 던졌다. 기근 동안 사밧의 가족들은 엘리야의 사업과 사명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하나님의 성령은 엘리사의 마음에 선지자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도록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부르셨다는 신호였다”(선지자와 왕, 219~220).
교훈: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 부르심의 의미로써 자신의 겉옷으로 엘리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부가적용)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주자, 엘리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았다. 엘리야가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떻게 나 같은 농사꾼에게 선지자직을 주시는가?"라며 의아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모세나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현은 체험하지 못했지만, 엘리야를 통한 소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원문에 따르면, "그가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를 뒤따라 달려 왔다"고 말한다. 아마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후, 계속해서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엘리사는 "소를 버리며"('azab), "달려 왔다"(ruts).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소명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엘리사가 평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영적 갈증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문맥으로 볼 때에도 주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000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셨고"(19:18), 바로 이어 "엘리사 소명 기사"가 나타나므로, 엘리사는 남은 자 7000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조건을 달며 청원하고 있다. 그는 "청컨대 저로 저의 부모와 입맞추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한 후에 제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고 말한다. 엘리사는 먼저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기를 원했다. 그는 즉각적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바로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정이 있었다. 아무리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인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엘리사의 간청을 생각해 보면, 문제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호렙 산에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영적 체험을 하였다.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받고 내려 왔다. 그의 얼굴은 빛났으며, 그의 가슴은 새로운 각오와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가고 있었다. 엘리사는 이런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엘리야를 즉각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부모님에게 작별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떠나는 시점에 있어서 엘리야와 엘리사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다. 엘리사가 그의 부모들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자 엘리야는 매우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돌아가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느냐?"(왕상 19:20). 엘리야는 갑자기 불쾌해졌는가?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엘리사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가?"라고 생각하며 실망하였는가? 혹은 "의심할 시간을 주고 있는가?". 어떤 주석가는 "겉옷 수여"가 무엇을 뜻하는지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Walsh). 어쨌든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작은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엘리사는 더 깊이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더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도 억지나 무리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엘리사 쪽에서 더 자발적인 순종이 뒤따라야 했으며 엘리야 쪽에는 더깊은 인내가 필요하였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말을 허락으로 이해하고, 이어서 두 가지 행동을 취한다. 먼저 그는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는다." 여기에 "잡다"(zabakh)는 "제사 용어"이다. 그리고 그는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고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앞에서 엘리사가 작별시간을 달라며 주춤거리는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의 모호한 의도는 그의 행동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과거와의 단절을 완전히 만들 뿐 아니라, 백성들을 "먹이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모습은,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에 대한 전조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겉옷과 함께 사명을 걸침
“엘리사는 아버지의 종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을 때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인도로, 자기 후계자를 찾고 있던 엘리야가 이 젊은이의 어깨에 두루마기를 던졌을 때, 엘리사는 부르심을 깨닫고 이에 순종하였다”(교육, 58).
셋째날(화)
5월 3일 베옷을 입음
도입)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특별히 부르셨다. 그리고 아합을 주목하라고 말씀하셨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왜?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회개를 주목하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셨다. 아합에게 가서 내 메시지를 전하라. 그때 엘리야가 이런 자세를 가졌을 것이다. 하나님! 아합에게 전할 것 무엇이 있습니까? 당장에 요절을 내 버리시죠. 저런 인간에게 무슨 경고가 필요합니까? 말해 보아야 쓸 데 없는 일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경고를 듣고 아합의 태도가 달라졌다. 비록 완벽한 회개에 이르지 는 못했다. 그래도 문제는 그가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회개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급히 부르셨다. 하나님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분이시다. 아합 같은 인간을 용서하시다니. 그러나 하나님 과연 당신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은 감히 깨달을 수 없다. 그 분은 우리를 속속히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우리의 속생각까지 죄다 아신다. 그분이 우리를 아신다면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인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 21:27).
교훈: 저주와 책망의 기별을 들은 아합은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금식함으로 회개의 진정성을 나타냈다.
부가적용)
우리가 아합의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에게 무슨 경고가 필요할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편견을 거두어야 한다. 아예 복음을 들을 자격도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아합 같이 타락하고 범죄한 영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진정한 심판을 뒤로 연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이다. 이것이 사람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다른 점인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악한 자라도 그 생명은 소중한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셨다. 안타까운 것은 아합의 회개가 진실하고 깊은 것 같지는 않다. 아합이 회개이후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반응을 보면 참 놀랍다. 아합이 조금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다. 왕하 21:28-29절 을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 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의 회개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되었다. 심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합의 회개가 철두철미한 회개가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회개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영감의 교훈 •
▶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아합은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베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하나님 앞에 그의 참회개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한 행동은 왕이 통치 초기에 하나님께 돌아섰다면, 백성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흥의 불길을 전국에 번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화잇 주석, 왕상 21:29).
넷째날(수)
5월 4일 엘리야의 승천
도입)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갑절의 영감을 구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이란 두 배의 능력이 아니라 엘리야처럼 완전한 능력을 덧입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다. '갑절'이라는 말은 신 21:17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용어로서 맏아들의 분깃을 강조한 표현이다. 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즉 이 말은 일반의 형제들보다 장자가 받는 두 몫의 유산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엘리사는 엘리야의 합법한 계승자로서 충분한 지도자의 역량을 엘리야에게 요구한 것이지 꼭 두 배를 달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이 엘리야보다 두 배의 능력을 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때는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긴다. 실제로 엘리사가 받은 능력은 엘리야의 두 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산 생애의 길이나 그가 나타낸 기적의 수나 양이 엘리야가 행한 것보다 꼭 두 배의 능력을 가지지는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의 열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엘리야 같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으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으로 한 표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왕하 2:9).
교훈: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의 갑절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고백하였다.
부가적용)
모세에게 있어서 그가 가진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엘리야의 겉옷은 선지자의 직분을 상징했는데, 이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겨준 것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엘리사에게 이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엘리사의 선지자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이양 될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리들 앞에서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남기고 간 것은 결국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을 진정한 후계자임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엘리사가 엘리야의 능력을 그대로 이어 받은 후계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엘리야와 같이 요단을 물을 이리저리 치니 요단의 강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는 동일한 역사가 엘리사에게 나타난 것이다. 이 능력이 엘리사에게 나타난 것은 엘리사가 이제부터 엘리야를 이은 새로운 선지자로서의 공적인 인정인 셈이었다.
•영감의 교훈 •
▶ 그리스도께 도움을 구하라
“주께서 당신의 섭리로 지혜를 주셨던 사람들을 당신의 사업에서 물러가게 하시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실 때에 그들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이 당신께 도우심을 구하고 당신의 길로 행한다면 주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고 힘을 주실 것이다”(선지자와 왕, 228).
다섯째날(목)
5월 5일 엘리사의 옷
도입)
엘리사도 엘리야와 동일한 능력이 나타났는데 이 사건은 엘리야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엘리사에게 왜 중요한가?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출 14:16,21)이나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가른 사건(수3:13)에 비견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본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을 지켜보는 생도들에게 엘리사가 하나님의 권능을 입은 새로운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하신 사건이었다. 우리는 엘리사가 공식적으로 그의 사업의 첫 시작을 요단의 물을 치며 가르는 사건을 주목한다. 이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은 새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다. 침례 또한 생명의 탄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엘리사는 물을 치며 요단의 물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적인 인정의 자리였다. 요단은 엘리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정받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능력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일 때,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권능을 입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경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그것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시기를 바란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왕하 2:14).
교훈: 엘리사가 행한 이적을 목격하고도 선지자의 무리는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엘리야를 찾아 헤맸다.
부가적용)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는 엘리야가 자신의 예언 사역을 중단하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사표"를 낸 왕상 19:13-14절의 이야기와 바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사는 주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하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의 왕조를 무너뜨리는 사역을 하였다면,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연약한 자들을 살리고, 무너져 가는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한 평생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야는 무너진 야웨 신앙을 새롭게 세우는 복음의 사역을 하였다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아 전파하는 사역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선지자의 사역을 신약성경의 유추를 사용한다면, "엘리야의 복음"과 "엘리사 행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선지자 되게 하라"는 명백한 말씀을 주시며 엘리야는 "선지자직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으며, "엘리사는 엘리야를 뒤따라갔고, 그의 종이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끊임없이 연결됨
“매 순간 신령한 대리자와의 연결이 우리의 전진에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어느 정도 모시고 있을 것이나, 기도와 믿음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더욱 성령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노력을 그치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508).
예비일(금)
5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88 “셋과 에녹”, 선지자와 왕, 155~189 “이스르엘에서 호렙까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변화되어 올라간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지상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 곧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고전 15:51~53)게 될 무리들을 상징하였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 두 번째’(히 9:28) 오실 때에 나타내실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늘의 빛을 입으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막 8:38)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42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세미한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우리로 하여금 “세미한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합니까?
➋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사역이 엘리사에게 계승됨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계승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회 내에서 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적합한 인물이 지도력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➌옷과 의복에 관한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많은 상징들을 다루었습니다. 상징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상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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