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안교해설(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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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범 목사의 2011년 제 3기 장년과정교과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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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교과해설에 대한 3가지 기본 원칙
1. 성경은 비록 사람이 기록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므로 모든 말씀 을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의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다.(요5:39-40)
2. 교과의 모든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생명과 관련된 핵심적인 부분과 하나님 의 품성에 비추어 볼 때에 오해되거나 이해되어야 할 부분을 중심으로 해설한 다.(눅10:26)
3. 생명 없는 글 자체에 머물기 보다는 그 글을 말씀하신 생명이신 하나님께 초점 을 맞추어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해설을 한다.(고후3:6; 요14:6)
* 교과 총론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요한 계시록 14:6-7의 말씀은 종말의 시간이라는 문맥 속에서 이해하고 있지만 예배의 기본 개념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예배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경배”와 관련된 요한계시록 14:6-7의 말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영원한 복음”인데 영원한 복음의 토대 위에서만 경배의 문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이란 우리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다. 우리들에게 매우 좋은 소식이란 생명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모두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고전15:22)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생명 이외의 모든 것은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생명 얻는 일이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자가 생명 얻는 길은 죽은 자가 이룰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눅15:24)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사단의 말에 순종할 때 이미 아담도 하나님 보시기에 죽었고 아담 안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도 그때 이미 함께 죽었다. 이미 죽어 없는 사람이기에 생명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없는 자가 무엇을 한다 할찌라도 그 사람 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그가 하는 모든 행위들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롬14:23)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는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실 수밖에 없다. 창조할 때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의 결과로 생명이 끊어지고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선택의 책임을 지셔야만 했다. 사실 이 책임지심에 대한 결정은 창조 전에 이미 각오하신 것이다. 자유의지를 주어야만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자유의지를 주셔야만 했고 자유의지에 대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랑을 위해 허락하셨고 그 부작용이 혹시 발생한다면 그 부작용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지셔야만 된다는 하나님의 입장 안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실 것을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셨다.(슥6:13; 계13:8)
인간의 선택에 대한 창조주의 책임지심의 기본전제위에서 예배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예배는 우리를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죽음에 기초해야 한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배는 그분에 관한 것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어야 하지, 음악이나 문화나 예배 형식에 관한 것이 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배한다면 그것은 생명이 이어지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표현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구속의 사랑 속에서 이해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없어진 사람을 위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에 두려우리만큼 놀라운 사랑에 전율하게 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시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셨고 창조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영원한 무(無)를 주저함 없이 선택하는 창조주의 사랑을 볼 때에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가슴 뭉쿨한 전율이 느껴진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게 된다.(빌2:5-11)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영광과 동의어는 품성인데 하나님의 대속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에 내 마음에서 감격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게 되는데 그것을 영광 돌린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에 대한 내 마음과 행동의 변화가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게 된다.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상과 벌을 주시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까지의 삶이 어떤 삶인지 드러내는 시간이 이르렀다는 말이다. 더 이상의 변화나 바꿀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지나가서 고정되어지는 시간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의 품성을 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별로 없으므로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표현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말씀을 창조주에 대한 인식과 창조주의 품성을 볼 때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으로 인해 죽은 우리들이 생명 얻는 유일한 길이 된다. (요일5:11-12)
이번 기에 예배를 연구할 때 위의 기본 사상들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핵심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제 1 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
기억절: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6-17)
깨닫기: 가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두 종류의 예배자들을 비교한다.
느끼기: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이 여기는 예배자와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예 배자의 차이점을 본다
행하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속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일을 인정하시고 그 과정을 지켜봄으로 함께 고통당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사랑 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배를 드린다.
결론 : 창세기에 등장하는 참예배자들의 제의 행위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날(일) 에덴 동산에서의 예배
창2:1-3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보여진다.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와 더불어 안식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야하고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를 보여주셨다. 명령하시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모본을 따라 안식일을 지내도록 보여주셨다. 이 모습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가까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절대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 (눅3:38)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창조주로서, 아버지로서, 생명의 공급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셔야 하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주시는 것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임을 보여주시고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예배에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행17:25)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예배였다.
그들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반사함으로 그들에게도 빛이 반사되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받아드리고 아버지의 주시는 사랑과 생명과 호흡을 감사함으로 받아드림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완벽한 예배의 모습이었다.
둘째 날(월) 에덴 밖에서의 예배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은 여자를 미혹했다. 미혹의 내용은 자신이 루스벨에서 사단이된 똑 같은 이유였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스벨의 이런 생각은 그가 창조되기 전에는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없는 존재였다. 없는 존재를 스스로 계신 여호와하나님께서 있게 하셨을 때 그의 시작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해 있기 시작할 때 부터였기 때문에 없었을 때의 자신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창조되어 눈을 떴을 때가 그의 시작이었으므로 그의 존재에 대해서 그는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었다.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은 자신에게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해답은 그를 창조하여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공유하기 위해 루스벨을 창조하셨음을 말해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드리고 안받아드리고는 전적으로 루스벨에게 달려 있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선택 역시 자유의지에 속하는 영역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선택했다. 그것은 자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였었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스스로 존재했었다고 믿으니 하나님이 그에게는 생명일 수 없었다. 그는 창조주와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므로 그는 창조주와 절대적 관계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창조주의 공급하시는 생명 없이도 스스로의 생명으로 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죽지 않고 스스로의 생명으로 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창3:4)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받아드리지 않는 선택을 하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신뢰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거짓말로 받아드리게 되자 하나님의 품성을 믿을 수 없는 품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창3:4)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받아드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자 루스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이 되었다.
사단이 된 루스벨은 아담과 그의 아내를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사단이 된 똑같은 논리로 아담의 아내에게 접근하였다.
아담과 그의 아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는 없었던 존재들이므로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드리든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존재했다고 선택할 수 있었다.
사단은 그들이 죽을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속삭였다. 사단의 말을 받아드리자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과 분리가 된 이유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부탁과 반대인 선악과를 선택하였다.
죄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임을 받아드리지 않게 되어 하나님을 떠나 죽게 된 것을 말한다.
죽는다는 것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의 말씀처럼 창조되기 전의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다. 창조되기 전에 없었기 때문에 무(無)의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의 결과물이었던 생명을 상징하는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생각에 변화가 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교만해졌고, 이기심에 사로잡혔다.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본성에 변화가 갑자기 온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기 위해 아들을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두 번째 아담 즉, 아들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첫 번째 아담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그를 창조하신 아버지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아들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영원히 무(無)가 되는 죽음을 당하실 것을 선포하셨다.(창3:15)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21)
이것은 아담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아담에게 책임을 묻지 아니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대신 그 모든 책임을 지시고 돌아가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그리고 이 예정된 대속을 담보로 아담의 생명을 유예하시고 유예되는 시간동안에 그를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 돌아와 생명의 관계속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그때부터 오늘날의 제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창3:25)
양을 잡는 예식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양이 죽는 것처럼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였다.
가인과 아벨이 부모님과 함께 예배할 때에 아담을 에덴동산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왜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는지의 이유와 다시 에덴에서 하나님과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칠 것이라는 사실을 양 잡는 예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에”(창4:3)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께 예배할 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부모님과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을 때 두 아들의 예배에는 차이가 드러났다.
가인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정성스런 농삿물로 드려야만 그것을 받으시고 생명을 주실 것을 기대하였고, 아벨은 아버지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품성은 주시는 분이시므로 우리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심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자신을 살리시는 분으로 믿고 하나님 자신의 생명 버리심을 상징하는 양을 제물로 예배하였다.
제사나 예배의 행위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예배의 대상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다른 생각이 다른 예배가 된 것이다.
관계가 끊어져서 이미 없는 자가 주는 것은 그 자신이 없는 것이므로 그가 드리는 것도 결국 없는 것이므로 받을 수가 없고, 또한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신데(행17:25) 받으라고 주니 받을 수가 없었다.
아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시라면 주시는 분이셔야만 된다고 생각했고 비록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로 죽음이 왔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창조주께서 사랑으로 책임지실 것을 믿었으므로 양처럼 이렇게 창조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돌아가실 것을 믿었다.
예배는 예배하는 자의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창조주의 대속에 대한 행위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창조주께서 내 행위에 대해 책임지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분임을 인식하는 것을 예배라 한다.
셋째 날(화) 예배의 두 혈통
하나님을 떠나자 사람들은 사단의 본성대로 살게 되었다. 일부다처제가 시작되었고 각종 폭력과 무기들이 난무하였다.(창4:16-22) 그 와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창4:25-26)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서로 섞여 살게 될 때에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감화가 점점 커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창6:1-4)
그들의 선택이 점점 대담해져갔고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대담하게 거절하였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진다 할찌라도 그들의 선택들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보시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후의 120년의 시간을 더 허락하셨다. 결국 120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노아의 전도가 있었어도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은 책임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선택에 대해서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인정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동안 궁창을 만들어 창조하신 존재들의 삶을 위해 물을 위와 아래로 막아 오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받아드리지 않는 공식적인 모든 결정을 하였으므로 더 이상 강제하실 수 없는 사랑의 본질에 따라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셨다. 그것은 위와 아래의 물이 원래 합쳐져 있었던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수가 위에서도 내렸지만 아래에서도 솟아올랐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심판하시기 위해 물을 쏟아 부으신 것이 아니라 원래 지구의 상태를 변형시켜 위아래의 물을 붙드시고 계셨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의 선택에 대해서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시는 사랑대로 강제하지 못하는 사랑대로 눈물 속에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참으심의 상황이었다.
물이 마른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창조주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감사하였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확신 속에서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 그대로를 예배를 통해 믿고 있음을 드러냈다.
넷째 날(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의 일을 통해서 그가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를 온 세상에 드러내도록 요청되는 시험을 받았다. (창22장)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께서 수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것처럼 시작하고 있다.(약1:13) 사단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 우주에 드러나 보이길 원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었는데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인 가장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 할 때에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이삭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었다.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품성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대 논쟁에서 무엇인가 피치 못할 입장 속에 들어가셨음을 인식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품성을 믿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이방신처럼 아들을 받으시는 분으로서 믿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이삭을 찌르기 위해 칼을 드는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라고 믿었고 하나님께서 피치 못할 상황에서 이삭을 죽음 속에 두신다 할찌라도 반드시 다시 생명을 주셔서 살아날 것을 믿었다. 이런 아브라함의 내면의 믿음은 우주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고 사단의 시험으로 인해 시작된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내면의 믿음이 드러났으므로 이삭을 죽는데 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준비하시고 그것을 예표 하는 수양을 보이게 하셔서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예배는 아브라함을 살리시기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품성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두려우리만큼 놀랍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인한 감사였다.
다섯째 날(목) 하나님의 집 벧엘
도망 중에 만난 하나님을 통해 야곱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보증의 말씀이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는 두려움과 함께 서원을 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죄책감의 표현이었고 그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야곱은 하나님을 믿을 것과 십일조를 드릴 것을 서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가 믿고 있었던 하나님의 품성은 사람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반응이 다르게 처리하는 품성이었다.
즉 잘한 사람은 상을 주시만 잘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가 죄책감에 휩싸이게 되었고 자신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언제나 함께 하시고 평안히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받아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벌주실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게 몰려왔다. 그래서 서원했다. 서원은 믿음의 행위처럼 보이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하지 못함으로 상대적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내가 이렇게 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실 원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은 상대적 개념 속에서 우리와 관계된 분이 아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절대적 관계 속에서 우리를 대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요청하기도 전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하나님을 떠나고 순종치 아니할찌라도 하나님은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절대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사랑과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요12:47)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한 채 두려움 속에서 예배하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은 그대로 인정하시고 그의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품성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을 절대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품성을 확신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신다.(창48:3-4, 15-16)
예비일 (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는 일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모든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더 깊이 명상해 봅시다.
같은 글이 개인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01hyung 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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