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1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첨부파일

본문

제1과 창세기 속에 나타난 예배: 두 종류의 예배자
7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7분

도입)
예배란 우리 삶의 중심, 핵심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예배는 바로 인생을 무엇으로, 또 누구로 채우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내 가장 깊은 그곳, 내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채우는가,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관한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어떤 오락이나 골프, 낚시 또는 볼링 같은 운동이나 스포츠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예배하고 있든지, 만일 학문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면 학문을 예배하는 것이다. 대권에 내 인생을 건다면 권력을 예배하는 것이다. 재산, 돈을 예배하는 사람도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서로가 서로를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자살한 것, 그 사람에게 내 인생을 걸고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종교적인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예배는 어떤 행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내 인생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 나의 즐거움이나 기쁨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기억절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17).

결론: 창세기에 등장하는 참예배자들의 제의 행위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첫째 날(일) 6월 26일
에덴동산에서의 예배

도입)
유대인들은 창세기 2:1-3절의 이 구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도 창조하셨다고 본다. 안식 곧 쉼이라는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재미있고 의미가 깊은 얘기이다. 만드신 모든 것을 쉼으로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무엇이 필요할까. 쉼이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이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인간의 안식에 관심이 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칠 일째에는 안식을 취하는 안식이다. 성경에서는 이 안식일의 안식은 안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안식일이 아니다. 절대로 안식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의 시작은 하나님의 안식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기 2장 2, 3절)” 하나님의 안식을 사람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에덴에서의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여 일주일에 하루는 의무적으로 안식을 취하기를 강권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교회를 안식교(安息敎)라는 말로 부른다. 기독교는 근본에 있어 안식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는 메시지의 중심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 곧 안식하는 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교훈: 범죄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누리며 순수한 예배를 드렸지만, 범죄 후에 그들의 관계와 예배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참 아름답고 행복했다. 에덴동산은 모든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났고 햇살처럼 맑고 밝은 곳이었다.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은 창조의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름다운 공간과 해와 달과 별, 바다와 산과 나무와 풀, 새와 동물과 바다의 물고기들…. 참으로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중 가장 빼어난 것이 있었는데 안식일의 쉼이다. 죄를 지어 타락한 뒤에 인간이 잃어버린 가장 귀한 보물이 쉼이다. 쉼을 잃어버린 인간은 가장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성과 연결시키는 버릇이 있다. 생산적이며 내게 이익이 되어야 아름답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다. 이런 경제성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 속에서는 쉼의 행복이 사라진다. 경제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만드신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걸 깨달아야 세상이 살 만한 곳임을 알게 된다. 이런 걸 아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면서 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경험한다. 여기에서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 힘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자녀가 뛰어난 업적을 이룬다면 부모는 매우 기쁠 것이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쁨은 근본적으로는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부모님께 대한 자녀의 기쁨도 부모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정에 기쁨이 넘쳐난다. 부모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쉼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 쉼이다.

둘째 날(월) 6월 27일
에덴 밖에서의 예배

도입)
가인과 아벨로 갈라지면서 예배가 갈라진다. 교회는 모든 것보다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바른 예배생활이 축복과 연결된다. 인류 최초의 인간의 아들은 가인과 아벨은 두 가지 인간형의 시작이다. 가인은 농업의 조상이고 아벨은 목축업의 조상이다. 가인이 육적 인간의 대표라면 아벨은 영적 인간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외면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기뻐 받으셨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 제사는 하나님께 향한 예배 행위이며 믿음의 자세이다. 참된 예배는 피조물이 창조주께로 향한 겸손의 자세로서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믿음에서 나온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린 것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행위이며 따라서 감사가 솟구치는 환희의 제사였다 하겠다. 또한 속죄물로 드린 제사였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흠없고 깨끗한 양을 대신 제물로 드림으로써 나의 죄를 용서받기 기원하는 행위는 훗날 하나님의 속죄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의 예표라고 하겠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죄인 의식이 없는 다만 형식적인 제사였다 하겠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3~5).

교훈: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기초를 둔 예배를, 가인의 제사는 행위로 얻는 구원에 기초를 둔 예배를 상징한다.

부가적용)
가인과 아벨이 각각 드린 제사와 그 각각에 대한 상반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이유는 단지 제물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유의 극히 일부일 수는 있으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땅의 소산도 좋은 부속제물이 될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결정적으로 제물의 가장 필수 요소인 피흘림이 없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대속시킬 희생 짐승의 피가 하나님 앞에서 요구되었는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 의식인 제사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많은 학자들은 행위와 함께 구체적인 희생 제물의 명령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제사의 기본 원리와 방법은 아예 무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땅의 소산도 드릴 수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생 제물의 피와 함께 드려야만 했었던 것이다. 한편 그의 평상시 불신앙적 삶도 제사가 열납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셋째 날(화) 6월28일
예배의 두 혈통

도입)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시고 심판을 결정하셨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깨졌다는 것을 뜻한다. 예배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진다는 것은 예배가 타락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학자들은 노아의 홍수를 "예배의 회복"차원으로 접근을 한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의 깨어진 예배 관계를 노아의 가족들을 통해서 회복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린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과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과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노아가 드린 예배는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번제이다. 노아가 드린 제물은 "정결한 짐승과 새"였다. 정결함은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제사, 예배의 조건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 말은 즉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린다고 했을 때 우리 자신이 정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창 8:20).

교훈: 홍수 이후에 노아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부가적용)
죄악이 관영한 노아시대에 믿음으로 택하신 한사람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방주로 들어갔다. 방주(ark=모세의 갈상자)에 들어갔던 노아의 식구들은 다 살았다. 법궤도 ark로 성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방주는 커서 주체하기 힘든 거대한 배와 같았다. 그것은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불편했으나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면서 물 위에 떠돌아다니기에는 적합한 배였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구원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 없이 그 일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방주에 관해 매우 자세한 지시를 내리셨고, 노아에게 그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서 목숨을 보존할 것을 약속하셨다.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는 홍수 중에 저희를 보호하여 주신 인자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고 곧 제단을 쌓고 각종 정결한 짐승과 새들을 취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려 크신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내고, 기이하게 저희를 보존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하였다.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향연처럼 올라갔다. 그분은 그 제물을 받으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셨다. 이 땅에 살게 될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한 교훈이 여기 가르쳐졌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실 때마다 모든 사람이 첫째로 할 일은 하나님께 감사와 겸손히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넷째 날(수) 6월 29일
아브라함의 믿음

도입)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세겜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렸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은 천지창조의 역사가 있으며 12장부터 아브라함을 부를 때 선민의 시작이며 단을 쌓을 때부터 예배 생활을 시작했다. 애굽에서 다시 벨엘로 와서 단을 쌓았으며 롯과 분가해서 마무리 상수리수풀에서 단을 쌓아 가는 곳마다 예배했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의 사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는 성찬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은 십의 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에도 순종했다. 믿음이 좋았으므로 행위가 뒤따랐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교훈: 아브라함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의 시조로 구별되었고, 시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부가적용)
쟝 칼뱅(J Calvin)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어디든지 다녔다"라고 말하였듯이,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더불어 삶의 자리를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 12장 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 나타나신 곳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제단,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족장시대의 예배에 있어서의 특징을 보면 먼저는 인간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있었고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으며 또한 가족 중심적인 제사이며 예배였다.

다섯째 날(목) 6월 30일
하나님의 집 벧엘

도입)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28:10-13) 사닥다리는 사실 계단으로 된 길을 가리키고 있다. 야곱은 "루스"라는 땅에 있었다. 그는 이삭이 주려는 축복을 사기적인 수법으로 그 형 에서에게로부터 빼앗아 받고나서 에서의 보복적인 죽임이 두려워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는 꿈에 사닥다리를 보았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다. 성경에는 이 대목 외에는 사닥다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닥다리는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장래를 암시한다. 이스라엘은 고토(古土)로 돌아올 것이다.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림처럼 보여준 인물이다. 그들은 그 땅에서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옛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사닥다리가 상징해 주는 주인공이다. 주님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내려오시는 사닥다리가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2000여 년 전에 세상에 계셨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교훈: 야곱은 도망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분의 은혜를 구하였다.

부가적용)
브엘세바에서 자신의 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야곱이 혈혈단신 떠난다. 그러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지내게 된다. 벧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렸던 장소 이다. 야곱은 그저 잠자기 위해서 그곳에 누웠다. 이때 야곱은 천국을 보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천사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그래서 아침에 그곳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게 된다. 처절하게 실패를 하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멀리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거나 그 임재를 느낀 적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맺어 주셨다.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삶에서 오히려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실패 하고 도망치는 야곱에게 14절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으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해 주신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과거가 없어  지거나 나아지는 일이 생기면 좋겠는데 그러한 일은 벌어 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옭아 맬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창피하고, 괴롭고, 어려운 과거에 집중하지 않고 우리에게 나은 미래를 약속해 주신다. 새 출발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창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로 인해 이들이 복을 받는다. 나음을 얻는다.  이러한 미래가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도 체험한다. 혼자인줄 알았는데, 그저 나 혼자 이 땅에 뚝 떨어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야곱은 그곳에서 예배를 한다. 하나님을 찾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찾는 삶이 되면 우리는 이미 복을 누리는 삶이 된 것이다.

예비일(금) 7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47~51 “창조”, 60~62 “유혹과 타락”, 71~74 “가인과 아벨이 시험을 받음”, 105~107 “홍수 후”, 148~153 “믿음의 시험”, 197~203 “씨름하던 밤.”

“이 맹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보증에 대한 감사로 그의 마음에서 넘쳐 나온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시인해야 한다고 느꼈으며 또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의 특별한 표에 보답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모든 축복은 우리에게 모든 긍휼을 베푸신 분에게 보답하기를 요구한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지난 생애를 회고하며
… 하나님의 귀중한 구원을 감사함으로 회상하여야 한다. 그는 그 모두를 하늘 천사들의 돌봄의 증거로 인식하여야 한다. 이 헤아릴 수 없는 축복들을 고려하여 그는 종종 겸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1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는 일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모든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를 더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⑴ 우리는 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까? ⑵ 그분은 경배받기에 합당한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⑶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됩니까?

※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합리적 확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생활이며 그 모든 근원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삶이다. 그것이 예배이다.

➋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세상에 증거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번 과에서 공부한 예배의 요소 가운데 특별히 전도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는 무엇입니까?

※ 우리가 올바르게 예배하면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그날에 공주예배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배에 대하여 배우면서 사람들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 있으며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하는 사람이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전도할 확신이 생길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