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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그리스도로 옷 입음

6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도입)
세상에는 여러 가지 옷이 있다. 성경에서 옷은 그 사람, 신분, 인격을 뜻한다. 영적으로는 어둠의 옷과 빛의 옷으로 구분된다. 어둠의 옷은 밤의 옷이요, 방탕, 음란, 호색, 다툼의 옷이다. 빛의 옷은 낮의 옷, 생명의 옷, 그리스도의 옷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젊은 날에 어둠의 옷을 입었다. 그는 10대에 사생아를 낳았고 20대에는 입신양명의 길을 찾아 로마 거리를 누볐다. 한 때는 이단 신앙에 빠져들어 헛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방탕의 길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될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며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거둔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참여하러 가는 도중에 사건이 일어났다. 여행길에 지쳐 한 수도원의 정원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담장 밖에서 “책을 들고 열어라, 책을 들고 열어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의자에 성경책이 놓여 있었다. 성경을 펼치니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이 말씀이 그의 영혼을 통째로 변화시켰다.  

기억절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연구 범위: 갈 3:26~29, 롬 6:1~6, 골 3:1~10, 엡 4:22~24, 고전 15:49~55, 고후 5:1~4.

결론: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여기심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이 아닌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갈 때, 매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영광스러운 불멸의 새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첫째날(일)
6월 19일 약속의 후사들

도입)
우리가 반드시 인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율법으로 절대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신의 죄가 선행으로 지워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치 유성팬으로 낙서된 벽을 비눗물로 닦으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율법 앞에서는 다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율법 앞에서 칭찬받을 사람이 없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다. 쉽게 생각하면 법원에서 칭찬받은 이가 없는 것을 보면 된다. 법원은 죄인에게 벌을 주고 정의를 세우는 곳이다. 법원 앞에서 서는 사람은 절대로 칭찬을 받지 않는다. 국가가 세운 법으로 정죄를 받을 뿐이다. 우리가 율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다 청산되고 저주가 떠나가며 질병이 고쳐지므로 우리가 의지 할 것은 바로 예수님의 공로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께 굴복하고, 그분을 통하여 새롭게 되며, 거듭나고, 회복된다. 낡은 방법과 습관과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현재 무엇을 입고 있는지 거울 속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교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분과 연합하여 새로운 삶과 세계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살아간다.

부가적용)
복음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는 다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 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는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창조, 즉 내가 그리스도 자신을 옷 입는 일이란 말하자면, 그분의 무죄함, 의, 지혜, 능력, 거룩함, 구원, 생명, 그리고 성령을 옷 입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옷이다. 그리고 죄의 옷이다. 이것은 우리는 모두 죄에 복종하고 팔려 있었다는 말이다.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는 열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어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라 시인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이다. 다른 길이 없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장 1절에서 2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헛되이 받지 말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감사함으로 받아드려 우리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온 입은 자란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다르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 신분, 새 성품, 새 인격, 그리고 새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둘째날(월)
6월 20일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도입)
영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으시고 거두시는 법칙은 물질계와 마찬가지로 정확무오하다. 만일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적인 것을 거두게 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마음이란 아주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무슨 일에 고정되어 있으며, 무슨 일에 항상 점령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자신이 육신적인지 영적인지가 보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그 방향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당신은 무엇을 마음에 품고 있는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교훈: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써 육신의 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품성과 사랑을 반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증오하는 일이 우리 안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약한 정욕, 부정한 것,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담으로부터의 유전에 의하여 우리는 이 옷을 얻었다. 즉, 이 부패하고 죄된 본성을 얻었다. 바울은 이것을 '옛사람'이라고 부른다. 옛사람은 이 모든 활동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아담의 아들들로부터 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 이것은 옷을 갈아 입거나 율법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새 빛과 불꽃이 떠오르게 된다. 새롭고 경건한 정서가 생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고 소망을 가진다. 그리고 새로운 의지가 일어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참되게, 그리고 복음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옷입는다는 말이다.

•영감의 교훈 •
▶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순결케 한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참된 순종을 보이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생애 가운데서 역사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와 산 연합을 이루는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4).

셋째날(화)
6월 21일 벗고, 입음

도입)
침례는 장례식이다. 죄의 영향을 받고 죄로 물든 우리의 삶이 죽는 것이다. 이것은 벗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는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침례라는 이 한 의식 속에 벗고 입음에 대한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갚아야 할 죄의 모든 죄값을 벗고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새로운 인생,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옷입은 새로운 개념이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교훈: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법적 지위의 변화 뿐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품성과 도덕성의 변화까지 의미한다.

부가적용)
어두움의 옷을 벗는 것과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무엇인가? 어두움의 일이란 롬 13:13∼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육신의 소욕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범죄할 때 들어오는 사단의 성품이다. 그것에 얽매이고 그것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일어난다는 것은 곧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벗어나서는 그대로 살수 없다. 입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의 성품을 배우고 닮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성품을 가져야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지금은 어두울 때이다. 어둠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새 옷 입고 일어나라. 이 생명이 그 안에 있다.

•영감의 교훈 •
▶ 안으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함
“우리는 면밀히 자기를 반성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과연 나는 마음이 건전한가, 그렇지 않으면 부패했는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는가, 혹은 외양으로는 새 옷을 입었으나 아직도 육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83).

넷째날(수)
6월 22일 홀연히

도입)
깨어있는 삶의 실제 모습은 우리의 생애의 열매이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은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겸비한 삶이다. 롬 13: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는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지속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깨어있는 삶, 성령 충만한 삶,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겸비한 삶의 비결은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분명 새 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골 3:10)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잘못과 투쟁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증거하고 있다.

교훈: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개념은 법적 변화, 품성의 변화 뿐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육체적 변화까지 포함하고 있다.

부가적용)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새 사람으로 옷 입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식별하는 방편인데, 우리는 옷 입는 것처럼 새 성품을 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침례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가 입은 옷으로 식별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자기의 전 생애와 성품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식별된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말하기를 주 예수로 옷 입되, 회심 때만이 아니라 날마다 옷 입으라고 하였다. 내가 매일 옷을 입고 남에게 보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매일 주 예수로 옷 입어야 한다. 그리하여 육신을 따라 정욕을 행하지 말고 주님의 형상과 그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폭력전과자가 서울대 강사가 돼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심각한 알콜중독으로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모든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러다 감옥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해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 한 사람이 새 사람이 되니까 어머니가 임종하면서 주님을 영접했고 형제들이 믿게 되었다. 세째 형은 불교학교의 학생회장까지 한 사람인데 예수 믿고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런 분이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 그리고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를 서울대 대학원에서까지 강의를 하게 됐다. 놀랍지 않은가?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한다. 옆에서 손을 내밀고 계시는 예수님이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는 팔짱만 끼면서 그를 외면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육신도 변화됨
“하나님의 나라는 썩지 아니하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현재의 상태로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불멸(不滅)을 주신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오직 그들만이 상속자들이 될 수 있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그들을 부르신다”(각 시대의 대쟁투, 323).

다섯째날(목)
6월 23일 하늘에 있는 우리의 처소

도입)
실존철학자들은 인간 삶의 비극과 딜레마와 부조리를 이렇게 짚었다. 그들은 인간의 숙명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삶을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범위는 바로 여기까지이다. 사람들은 그 다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그래서 대개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열광주의에 치우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대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묘사한다.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뜻이다. 장막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한 집에서 이사를 나가서 하나님이 지으신 완전한 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이사를 다니는 것처럼 묘사되는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어떤 사실이라기보다는 비유이다. 어떤 진리를 비유로 설명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바울도 죽음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흡사 전셋집에서 자기 집을 마련해서 이사를 가듯이 장막집을 벗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는 전혀 새로운 영적 시각으로 죽음의 문제를 뚫고 나간다. 바울에게는 ‘하늘의 집’이 기다리고 있다. 그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집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호화 별장이라도 마련하셨다는 말인가? 간혹 휴가철을 맞아 쉬러가는 펜션이 준비되었다는 것인가? 바울이 말하는 이 하늘의 집은 그런 건물이 아니라 오히려 옷과 비슷하다. 하늘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썩게 될 옷을 벗어놓고 썩지 않을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비슷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을 어디 있느냐?’라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고전 15:53-55)

고대의 어떤 기록에서는 ‘옷을 입다’는 말이 ‘집 안에 있다’는 의미와 유사하게 사용되었다. 옷이든 집이든 우리를 보호하고 덮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바울의 시대에 천민 계층이 입는 겉옷의 이름은 “작은 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바울은 두 기본적인 개념을 대조하기 위하여 여러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일시적인 땅의 장막과 영원한 하늘의 처소, 벌거벗음과 옷 입음, 죽음과 삶, 영멸과 영생. 결국 이 모든 비유들은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불멸의 몸을 입는다는 소망이다. 다시 말해 고후 5:1~4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영생의 약속에 대한 다른 표현 방식이다.

교훈: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소망 중에 하나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유한한 몸이 불멸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가적용)
바울은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한다고 했다. 집을 덧입는다는 말은 시(詩)적인 표현이다. “덧입는다.”는 말을 잘 새겨야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의 장막을 벗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신앙이 헬라 철학과 구별된다. 헬라 철학은 죽음을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몸과 영은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하나이다. 우리의 몸은 죽어도 역시 우리의 몸이다. 물론 우리의 몸은 썩을 것이다. 그러나 썩는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썩는다는 것을 무조건 이상한 것으로 볼지 모르지만, 그것은 변화일 뿐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 간혹 인간의 몸을 무시하는 사조가 등장하곤 했지만 그런 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정한 영지주의적 가현설도 역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여지없이 제거되었다. 바울은 지금 비록 몸이 어려운 상태에 있었지만 이 장막집을 억지로 벗어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현재의 몸까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이며,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그 리얼리티가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장막을 벗어버리려는 게 아니라 갈아입는다고, 덧입는다고 했다. 둘째, 죽음은 생명에게 삼키게 된다. 바울은 옷을 덧입는다는 비유를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어 설명한다. 현재 우리의 몸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지상의 장막집이다. 그러나 하늘의 집으로 갈아입으면 이 죽음까지 생명 사건 안으로 포함된다.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면 그 죽음은 극복된다. 큰 생명 사건 안에 죽음이 들어가면 그 죽음도 역시 생명의 일부가 될 것이다. 비록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새 옷을 그 위에 덧입으면 그 사람의 모양새는 새 옷으로 나타나듯이 죽음이 생명에게 삼키게 되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생명이 우리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영감의 교훈 •
▶ 영원한 처소
“거기에는 지상의 나그네들이 거할 본향이 있다. 거기에는 영광의 면류관과 승리의 종려나무와 함께 의인들이 입을 두루마기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곤고하게 하였던 모든 것들이 오는 세상에서는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그때에는 석연하여질 것이다. 은혜의 오묘가 우리 앞에 공개될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542).

예비일(금)
6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665 “대쟁투의 종막.”

“모든 사람이 다 감사와 찬송의 두루마기, 곧 그리스도 의의 옷을 입고, 행복하고 연합된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것이다. 자연 만물은 그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끊임없는 찬사와 예찬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세상은 하늘의 빛을 무한히 받게 될 것이다. 즐거운 세월이 흘러 갈 것이다. 달빛은 태양빛과 같이 될 것이요, 태양빛은 지금보다 일곱 배나 더 환하여질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실 때에, 이 광경을 보고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기쁨의 함성을 발할 것이다”(엘렌 G. 화잇, 마이 라이프 투데이, 34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진리를 아는 유일한 길이며 인류의 희망으로 생각합니다. 왜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죽음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데, 과학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희망을 주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 안에서만 희망을 찾아야 합니까?
➋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에 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대의 행실, 습관, 사상, 타인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로 기울어지는 선천적 또는 후천적 기질과 투쟁할지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바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의식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제시된 성경의 이상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로서 서로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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