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과 예수님과 옷(예화 및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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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예수님과 옷
6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6분
도입)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잡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옷을 잡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우리가 매순간 주님의 피 묻은 옷자락을 붙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화려한 옷을 붙잡기를 원하고, 힘 있는 옷을 붙잡기를 원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고, 권력의 옷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옷을 붙잡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고, 치료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고, 축복의 하늘 문이 열리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옷자락이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에서 주님의 옷을 붙잡고 돌아가야 간다. 예배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스런 주님의 옷이다. 찬송도, 기도도 아름답게 흩날리는 주님의 옷자락이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의 옷자락이다.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기억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 5:28).
연구 범위: 막 5:24~34, 눅 8:43~48, 요 13:1~16, 요 19:23~24, 마 26:59~68, 마 27:27-29.
성경에 나타난 옷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옷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어떤 설명 없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기도 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종류와 형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께서 등장하는 문맥 가운데서 옷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치유를 받은 한 여인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
여 겉옷을 벗으신 예수님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옷을 찢음으로 교만한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대제사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에 의하여 조롱의 홍포를 입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짐으로 예언을 성취시킨 병사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단지 옷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상징과 의미가 넘쳐난다.
결론: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었기에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분의 벗은 몸은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낮은 지위와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우주의 왕이셨지만, 대제사장과 이방 병사들의 조롱과 모욕으로 옷 입으셔야 했습니다.
첫째날(일)
6월 12일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도입)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31절).” 주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말은 사람의 육안만으로 그 상황을 판단한 데서 나온 대답이었다. 군중은 할 수 있는 대로 예수께로 가까이 가서 그분의 몸도, 손도, 어깨도, 옷도 만져 보고자 했다. 그런 접촉들은 우연한 접촉이다. 그것들은 믿음의 접촉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부도체를 전원에 대는 것과 진배없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가. 그분의 능력이 나와서 우리를 살려 주는 일을 해 주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께로 몰려가서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 군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연한 접촉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접촉으로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34절)하였다는 보증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8).
교훈: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여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 여인의 행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첫걸음이다. 이는 그녀 자신의 인생을 건 신앙의 행동이요, 은혜를 받고자 하는 신앙적 행동이었다. 이 믿음의 행동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기적적으로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생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아 기적을 이루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을 밀고 만지던 무리처럼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참 믿음의 사람은 무척 드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병에서 뿐만이 아니라,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다. 절망을 내 던지고 소망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시간 우리 곁에,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옷이 아니라 옷 입은 이를 믿음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고 그 즉시로 그 여자의 고통과 쇠약함은 완전한 건강의 활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343).
둘째날(월)
6월 13일 “겉옷을 벗고”
도입)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끝까지 라는 단어는 완전히 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저녁 먹는 중에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여기 ‘일어나’ ‘벗고’ ‘가져다가’ 와 같은 동사들은 원어상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목전에서 보듯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들 동사 가운데 ‘벗고’에 해당하는 ‘티세미’는 벗다는 의미 외에도 목숨을 버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겉옷을 벗으셨을 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이렇게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암시가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교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은 겉옷을 벗고 우리를 섬기신다.
부가적용)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영감의 교훈 •
▶ 침묵의 웅변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셨다. 이러한 동작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쓰라린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찼다. 그들은 무언의 책망을 이해하였으며 다 같이 새로운 빛 가운데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시대의 소망, 644).
셋째날(화)
6월 14일 “옷을 찢지 말며”
도입)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다.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람하였다는데 있었다. 옷을 찢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의 표시였지만 그러나 가야바는 속으로 이제 예수를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되었다고 하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참람한 말을 했다는 말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말함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것이다.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마 26:65).
교훈: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의복이 상징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품성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히고, 메시야의 죽음을 선고했다.
부가적용)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그것은 매우 억지였고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강퍅하기 그지없는 악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가야바의 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온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가야바의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사단과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 그런데 결국 그들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쓰임을 받게 되고,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이처럼 신비롭게 진행되어간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과 갈라섬
“가야바가 그의 의복을 찢었을 때에 그의 행동은 유대 민족이 한 국가로서 그때 이후로 하나님께 대하여 그들이 서게 될 위치를 의미하였다. 한때 하나님의 은총을 받던 백성들이 저희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버림받은 백성이 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709).
넷째날(수)
6월 15일 조롱의 옷
도입)
일반적으로 사람의 옷은 신분과 자존심을 유지해 주는 수단이다. 누구보다도 존경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입으셨던 옷이 거친 군병들의 손에 의해 찢긴 채로,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신이 거의 다 노출된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는 치욕을 당하셨다. 원래 옷은 태초에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해 느끼게 되었던 벌거벗음의 수치를 가려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옷은 죄로 인해 느끼게 된 수치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거벗음은 바로 죄인이 맛보는 가장 큰 부끄러움의 하나이다. 이 수치를 우리 대신 당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옷 벗김을 당한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이며 모멸이다.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하여 옷벗김을 당하신 주님이시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 27:27~29).
교훈: 우리를 의와 영광으로 옷 입히기 위해,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부가적용)
미국 땅 인디언 부족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정의롭고 사랑이 많은 추장이 다스리는 평화스러운 인디언의 한 부족 마을에서 어느 날부터 밤마다 닭을 잃어버리는 도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이 부족의 추장은 범인이 잡히면 태형 열 대에 처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태형에 대해 알고 있는? 태형에 대한 공포로 인해 범죄 율이 낮은 국가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 에서는 아직도 공공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는 악의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나 파렴치한 행위를 한 사람을 태형에 처한다고 한다. 태형 집행에 사용하는 도구는 등나무로 만든 길이 1.2m, 두께 약 3cm 정도의 회초리인데 제자리에 서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3명이 교대로 서너 발자국 뒤쪽에서 달려 나오면서 체중을 매에 실어 힘껏 내리치는 데 이 태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세대만 맞으면 거의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리고 병원에 실려 가서도 무시무시한 태형의 공포와 고통으로 계속 헛소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밤에도 닭을 또 도둑맞았다. 그러자 추장은 도둑에게 내릴 태형을 스무 대로 올렸다. 그래도 닭은 여전히 없어지는 것이었다. 화가 난 추장은 태형 백 대를 선언 하였는데 이는 사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태형 백 대를 맞고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날 밤 범인이 잡혔다. 그러나 막상 범인을 잡게 된 추장은 곧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추장의 화난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닭을 훔친 도둑은 다름이 아니고 바로 추장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이들은 이곳저곳에서 과연 추장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 ‘추장이 부족들에게 한 약속을 과연 지킬 수 있을까? 평소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아온 부족들은 추장이 절대 어머니를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고 또 한편 에선 늘 정의롭게 부족을 이끌던 추장이었기에 추장이 정말 자기 어머니에게 태형 백 대를 내릴까 궁금해 하였다. 형장에 끌려와 아들에 대한 미안함에 조용히 흐느끼며 떨고 있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던 추장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드디어 결심을 굳힌 듯 추장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둥에 묶으라고 명령을 내렸고,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졌다. 추장은 위엄 있게 깃털로 장식된 옷을 벗고 건장한 몸매를 드러내며 채찍을 들어서 자기 곁에 서 있던 젊고 용감한 사람에게 채찍을 건네주었다. 그리곤 추장은 천천히 자기 어머니가 묶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우람한 팔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런 다음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하여 명령하였다. “태형 백 대를 때려라” 바로 이 장면처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이 죄인들을 위해 영원한 사망의 형틀에 묶여 있는 이 죄인을 위해, 사랑의 예수님께서 날 꼭 부둥켜안으시고 우리 대신 이 채찍을 맞으셨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벌레만도 못한 이 죄인을 위해 몸소 십자가 그 고난을 당하셨다. 살점이 헤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그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십자가 위 두 손과 발 모두 못 박히신 예수님! 처절한 고통 속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십자가에서 벌린 손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애들아~! 애들아~! 나는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지금 이 순간 바로 당신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 네가 없는 생명은 내겐 아무 의미가 없기에……내 생명 바쳐 너를 사랑한다…
•영감의 교훈 •
▶ 고난을 견디심
“예수께서는 성난 군중들이 당신에게 가장 악랄한 희롱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저들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서 계셨다. 그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얼굴은 언젠가는 저들이 피하여 숨기 바라는 얼굴이며 또 하나님의 도성에서 햇빛보다도 더 밝게 빛날 바로 그 얼굴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자들을 위협하지 않으셨다”(초기문집, 170).
•기도 •
주님의 가시관은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고, 조롱의 옷은 만왕의 두루마기가 되었습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비난과 모욕을 저도 견딜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6월 16일 “내 겉옷을 나누며”
도입)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면, 아랫도리를 감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십자가의 진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걸쳐지지 않은 채로 십자가에 올려 지셨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완전히 벌거벗김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기심을 당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저주받으심, 수치당하심이 완전함을 또한 보여준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예수께서 견디셨던 모욕과 수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군사들의 조롱을 받은 후, 예수께서 십자가로 인도되었을 때, 지상의 마지막 소유의 자취인 그분의 옷가지가 벗겨졌다. 구타와 거절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고, 마침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께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몫이었던 쓴 잔을 마시셨다.
교훈: 벌거벗는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진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던 예수님은 옷을 나누는 병사들을 통해 큰 용기와 확신을 얻으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옷이 되시기 위해서 완전히 벌거벗김을 당하셨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옷을 우리가 걸치는 것이다. 아무리 완전한 옷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옷장에 넣어두기만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내어 입어야 한다. 낡지 않는 옷이다. 언제나 입고 있어야 할 옷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서13장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자”고 한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벌거벗김을 당하심이 바로 나의 수치와 죄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또한 덮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 감출 수 있는 옷임을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주는 것이다. 내가 예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내가 예수로 옷입고 있는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주고 대신 덮어주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고난을 예견하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여러 세기 전에 구주께서는 당신이 어떠한 취급을 받으실지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셨다”(시대의 소망, 746).
예비일(금)
6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치료봉사, 59~63 “믿음의 접촉”, 시대의 소망, 342~343 “믿음으로
만짐”, 728~731 “빌라도의 법정에서”, 746 “갈바리.”
“예수의 원수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가 운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만 하면 그의 신성한 능력과 행하신 이적에 관한 소문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희는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몰인정한 군사들은 예수의 옷을 취하여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짠 옷이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이 옷을 가지기로 작정하였다. 성경에는 이 일이 이루기 수백 년 전에 이 광경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즉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6, 18)”(살아남는 이들, 223~2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기를 주는 성경의 예언들을 나누어봅시다. 이러한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이유를 주고 계심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➋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을 견디셔야 했던 그리스도의 고통과 자기 부정에 대하여 다시 음미해 봅시다.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6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6분
도입)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잡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옷을 잡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우리가 매순간 주님의 피 묻은 옷자락을 붙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화려한 옷을 붙잡기를 원하고, 힘 있는 옷을 붙잡기를 원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옷은 화려하지 못했고, 권력의 옷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옷을 붙잡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고, 치료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고, 축복의 하늘 문이 열리는 신비한 능력이 나타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옷자락이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에서 주님의 옷을 붙잡고 돌아가야 간다. 예배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스런 주님의 옷이다. 찬송도, 기도도 아름답게 흩날리는 주님의 옷자락이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의 옷자락이다.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기억절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 5:28).
연구 범위: 막 5:24~34, 눅 8:43~48, 요 13:1~16, 요 19:23~24, 마 26:59~68, 마 27:27-29.
성경에 나타난 옷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옷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어떤 설명 없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맞기도 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종류와 형태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께서 등장하는 문맥 가운데서 옷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먼저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치유를 받은 한 여인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하
여 겉옷을 벗으신 예수님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옷을 찢음으로 교만한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대제사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로마 군병에 의하여 조롱의 홍포를 입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짐으로 예언을 성취시킨 병사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단지 옷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상징과 의미가 넘쳐난다.
결론: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이었기에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분의 벗은 몸은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낮은 지위와 수치를 의미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요 우주의 왕이셨지만, 대제사장과 이방 병사들의 조롱과 모욕으로 옷 입으셔야 했습니다.
첫째날(일)
6월 12일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도입)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31절).” 주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말은 사람의 육안만으로 그 상황을 판단한 데서 나온 대답이었다. 군중은 할 수 있는 대로 예수께로 가까이 가서 그분의 몸도, 손도, 어깨도, 옷도 만져 보고자 했다. 그런 접촉들은 우연한 접촉이다. 그것들은 믿음의 접촉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부도체를 전원에 대는 것과 진배없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가. 그분의 능력이 나와서 우리를 살려 주는 일을 해 주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께로 몰려가서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 군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우연한 접촉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접촉으로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34절)하였다는 보증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8).
교훈: 옷자락을 만지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여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였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 여인의 행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첫걸음이다. 이는 그녀 자신의 인생을 건 신앙의 행동이요, 은혜를 받고자 하는 신앙적 행동이었다. 이 믿음의 행동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기적적으로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생들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께 나아가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아 기적을 이루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을 밀고 만지던 무리처럼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참 믿음의 사람은 무척 드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병에서 뿐만이 아니라, 마귀의 억압에서 해방될 수 있다. 절망을 내 던지고 소망의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시간 우리 곁에,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옷이 아니라 옷 입은 이를 믿음
“그 한 번의 만짐에 그 여자의 일생의 믿음이 집중되었고 그 즉시로 그 여자의 고통과 쇠약함은 완전한 건강의 활력으로 바뀌었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343).
둘째날(월)
6월 13일 “겉옷을 벗고”
도입)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신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끝까지 라는 단어는 완전히 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저녁 먹는 중에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여기 ‘일어나’ ‘벗고’ ‘가져다가’ 와 같은 동사들은 원어상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목전에서 보듯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들 동사 가운데 ‘벗고’에 해당하는 ‘티세미’는 벗다는 의미 외에도 목숨을 버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겉옷을 벗으셨을 뿐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이렇게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암시가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교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은 겉옷을 벗고 우리를 섬기신다.
부가적용)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영감의 교훈 •
▶ 침묵의 웅변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셨다. 이러한 동작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였다. 쓰라린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저희 마음에 가득 찼다. 그들은 무언의 책망을 이해하였으며 다 같이 새로운 빛 가운데서 자신들을 바라보았다”(시대의 소망, 644).
셋째날(화)
6월 14일 “옷을 찢지 말며”
도입)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었다. 가야바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참람하였다는데 있었다. 옷을 찢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의 표시였지만 그러나 가야바는 속으로 이제 예수를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되었다고 하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참람한 말을 했다는 말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말함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컬었다는 것이다.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마 26:65).
교훈: 가야바는 대제사장의 의복이 상징하는 것과 반대로 하나님의 품성의 온전함에 손상을 입히고, 메시야의 죽음을 선고했다.
부가적용)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합리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그것은 매우 억지였고 정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강퍅하기 그지없는 악한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 가야바의 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온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52절) 가야바의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도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사단과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 그런데 결국 그들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쓰임을 받게 되고,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이처럼 신비롭게 진행되어간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과 갈라섬
“가야바가 그의 의복을 찢었을 때에 그의 행동은 유대 민족이 한 국가로서 그때 이후로 하나님께 대하여 그들이 서게 될 위치를 의미하였다. 한때 하나님의 은총을 받던 백성들이 저희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여호와의 버림받은 백성이 되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709).
넷째날(수)
6월 15일 조롱의 옷
도입)
일반적으로 사람의 옷은 신분과 자존심을 유지해 주는 수단이다. 누구보다도 존경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입으셨던 옷이 거친 군병들의 손에 의해 찢긴 채로,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신이 거의 다 노출된 상태로 십자가에 달리는 치욕을 당하셨다. 원래 옷은 태초에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해 느끼게 되었던 벌거벗음의 수치를 가려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옷은 죄로 인해 느끼게 된 수치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거벗음은 바로 죄인이 맛보는 가장 큰 부끄러움의 하나이다. 이 수치를 우리 대신 당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옷 벗김을 당한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다.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이며 모멸이다.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하여 옷벗김을 당하신 주님이시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 27:27~29).
교훈: 우리를 의와 영광으로 옷 입히기 위해,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부가적용)
미국 땅 인디언 부족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정의롭고 사랑이 많은 추장이 다스리는 평화스러운 인디언의 한 부족 마을에서 어느 날부터 밤마다 닭을 잃어버리는 도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이 부족의 추장은 범인이 잡히면 태형 열 대에 처할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태형에 대해 알고 있는? 태형에 대한 공포로 인해 범죄 율이 낮은 국가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 에서는 아직도 공공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는 악의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나 파렴치한 행위를 한 사람을 태형에 처한다고 한다. 태형 집행에 사용하는 도구는 등나무로 만든 길이 1.2m, 두께 약 3cm 정도의 회초리인데 제자리에 서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3명이 교대로 서너 발자국 뒤쪽에서 달려 나오면서 체중을 매에 실어 힘껏 내리치는 데 이 태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세대만 맞으면 거의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간다. 그리고 병원에 실려 가서도 무시무시한 태형의 공포와 고통으로 계속 헛소리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밤에도 닭을 또 도둑맞았다. 그러자 추장은 도둑에게 내릴 태형을 스무 대로 올렸다. 그래도 닭은 여전히 없어지는 것이었다. 화가 난 추장은 태형 백 대를 선언 하였는데 이는 사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태형 백 대를 맞고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날 밤 범인이 잡혔다. 그러나 막상 범인을 잡게 된 추장은 곧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추장의 화난 엄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닭을 훔친 도둑은 다름이 아니고 바로 추장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고, 이들은 이곳저곳에서 과연 추장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다. ‘추장이 부족들에게 한 약속을 과연 지킬 수 있을까? 평소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아온 부족들은 추장이 절대 어머니를 처벌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고 또 한편 에선 늘 정의롭게 부족을 이끌던 추장이었기에 추장이 정말 자기 어머니에게 태형 백 대를 내릴까 궁금해 하였다. 형장에 끌려와 아들에 대한 미안함에 조용히 흐느끼며 떨고 있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던 추장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드디어 결심을 굳힌 듯 추장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둥에 묶으라고 명령을 내렸고, 사람들은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졌다. 추장은 위엄 있게 깃털로 장식된 옷을 벗고 건장한 몸매를 드러내며 채찍을 들어서 자기 곁에 서 있던 젊고 용감한 사람에게 채찍을 건네주었다. 그리곤 추장은 천천히 자기 어머니가 묶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우람한 팔로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런 다음 채찍을 들고 서 있는 젊은이를 향하여 명령하였다. “태형 백 대를 때려라” 바로 이 장면처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이 죄인들을 위해 영원한 사망의 형틀에 묶여 있는 이 죄인을 위해, 사랑의 예수님께서 날 꼭 부둥켜안으시고 우리 대신 이 채찍을 맞으셨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벌레만도 못한 이 죄인을 위해 몸소 십자가 그 고난을 당하셨다. 살점이 헤어지고 뼈가 드러나는 그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십자가 위 두 손과 발 모두 못 박히신 예수님! 처절한 고통 속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십자가에서 벌린 손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애들아~! 애들아~! 나는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지금 이 순간 바로 당신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이 만큼 사랑한다. 네가 없는 생명은 내겐 아무 의미가 없기에……내 생명 바쳐 너를 사랑한다…
•영감의 교훈 •
▶ 고난을 견디심
“예수께서는 성난 군중들이 당신에게 가장 악랄한 희롱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저들 앞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서 계셨다. 그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얼굴은 언젠가는 저들이 피하여 숨기 바라는 얼굴이며 또 하나님의 도성에서 햇빛보다도 더 밝게 빛날 바로 그 얼굴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자들을 위협하지 않으셨다”(초기문집, 170).
•기도 •
주님의 가시관은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고, 조롱의 옷은 만왕의 두루마기가 되었습니다. 애매하게 당하는 비난과 모욕을 저도 견딜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다섯째날(목)
6월 16일 “내 겉옷을 나누며”
도입)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을 암시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보면, 아랫도리를 감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십자가의 진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걸쳐지지 않은 채로 십자가에 올려 지셨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완전히 벌거벗김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완전히 벌거벗기심을 당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저주받으심, 수치당하심이 완전함을 또한 보여준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 22:18).
예수께서 견디셨던 모욕과 수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군사들의 조롱을 받은 후, 예수께서 십자가로 인도되었을 때, 지상의 마지막 소유의 자취인 그분의 옷가지가 벗겨졌다. 구타와 거절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고, 마침내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께서는 창세로부터 그의 몫이었던 쓴 잔을 마시셨다.
교훈: 벌거벗는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진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던 예수님은 옷을 나누는 병사들을 통해 큰 용기와 확신을 얻으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옷이 되시기 위해서 완전히 벌거벗김을 당하셨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옷을 우리가 걸치는 것이다. 아무리 완전한 옷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옷장에 넣어두기만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내어 입어야 한다. 낡지 않는 옷이다. 언제나 입고 있어야 할 옷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서13장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자”고 한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 있는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벌거벗김을 당하심이 바로 나의 수치와 죄를 위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또한 덮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 감출 수 있는 옷임을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덮어주는 것이다. 내가 예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내가 예수로 옷입고 있는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주고 대신 덮어주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고난을 예견하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예언은 성취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여러 세기 전에 구주께서는 당신이 어떠한 취급을 받으실지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셨다”(시대의 소망, 746).
예비일(금)
6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치료봉사, 59~63 “믿음의 접촉”, 시대의 소망, 342~343 “믿음으로
만짐”, 728~731 “빌라도의 법정에서”, 746 “갈바리.”
“예수의 원수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가 운명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만 하면 그의 신성한 능력과 행하신 이적에 관한 소문을 영원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저희는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몰인정한 군사들은 예수의 옷을 취하여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예수의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통으로 짠 옷이었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 이 옷을 가지기로 작정하였다. 성경에는 이 일이 이루기 수백 년 전에 이 광경에 대하여 기록되었다. 즉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6, 18)”(살아남는 이들, 223~2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용기를 주는 성경의 예언들을 나누어봅시다. 이러한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이유를 주고 계심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➋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을 견디셔야 했던 그리스도의 고통과 자기 부정에 대하여 다시 음미해 봅시다.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아를 희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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