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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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5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4분
도입)
루이스 베일리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매일 식사기도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옷을 입을 때는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 베일리는 아침마다 옷을 입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딱 뜨면 ‘하나님! 언젠가 이렇게 눈을 뜨는 게 이 세상에서는 끝날 텐데 그 날에는 내가 주님의 나라에서 눈 뜨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땅을 위해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옷을 입었단다. 옷을 입으면서 ‘하나님! 나 같이 이런 못난 인간에게 입을 수 있는 의복을 나에게 재산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생활할 수 있도록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추는 것처럼 하나님 오늘 하루 몸의 의복은 내가 입었으나 나의 행실의 옷을 주님의 은혜로 덧입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복입니다.’ 고백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오늘 우리의 매일의 삶이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복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기억절 :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결론: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은 채 법정에 서서 그의 모든 죄로 인하여 고소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그에게 형을 언도하는 대신 그의 더러운 옷을 제거하고 정결한 옷을 입힌 뒤에 순종하도록 이끌었다.
첫째날(일)
5월 22일 예루살렘을 향한 질투
도입)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말년에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어떤 교우가 스펄젼을 방문해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라고 물었을 때 스펄전 목사는 대답했다. “예, 너무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이 고통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계신답니다. 이것이 나의 위로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시련은 시련이고 고난은 고난이다. 고난이 다 지나고 난 후에 아무리 빛나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더라도 현재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반드시 찾아오신다. 스펄젼 목사의 고백처럼 주님은 고통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고난의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에 대한 이상이 주어지기 바로 전에, 스가랴는 유대인들에게 전할 약속의 기별을 받았다(슥 2:10~13).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기별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연합할 때에 분명 큰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유다 자손들이 회개하여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재건하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부가적용)
보통 여자들이 질투가 많다고 말하지만 사실 남자들의 질투가 더 강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질투는 누구 못지않게 가장 강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질투, 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 자체가 낯설지도 모른다. 아마도 질투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질투는 결코 부정적인 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불러내시고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신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시니라’ 당신이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시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시기와 질투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시기와 질투 이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차이는 동기에 있다. 시기는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을 말한다. 시기란 시기할 ‘시’(猜), 꺼릴 ‘기’(忌) 로서 남이 가진 행복이나 성공, 재산이나 명성에 대하여 악의적인 부러움과 더불어 반감과 그리고 악의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나에게 대한 극진한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여호와만 섬기라고 외치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애절할 정도로 계속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얘기를 계속 반복한다. 이 모두가 목숨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영감의 교훈 •
▶ 위로의 기별
“학개의 마지막 기별이 전달된 지 두 달 후에 스가랴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받았다. …지도자들에게는 마치 재건을 위하여 유대인에게 주어진 허락이 취소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고 장래가 매우 어두운 것처럼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무한하신 동정과 사랑의 계시로 지지와 위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다”(선지자와 왕, 580).
둘째날(월)
5월 23일 원고와 피고
도입)
사단이란 이름은 선지서에서는 오직 스가랴 3:1-2에만 등장한다. 사단은 성경에서 귀신으로 불리우는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다. 하늘의 법정에서 사단은 여호수아의 우편에서 서서 그를 대적한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한다. 이 환상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여호수아의 위치이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다. 서 있다 라는 단어는 제사장의 직무를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이다. 여호와의 사자의 신성과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암시했던 것이 여기서 보다 분명히 지적될 수 있다. 그는 여호와의 명칭(He)으로 말하면서 사단에게 말할 때 여호와와 구분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단은 여호와께서 개입하시자 맹렬하게 여호수아를 고소했다. 여호수아의 변호사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재판장이기도 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다. 사단의 고소의 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부정함, 곧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환상 가운데서 천사들에게 죄를 사하는 것의 상징으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제하여 버리라고 명하셨다. 이 더러운 옷은 예식과 관련된 더러움이 아니라 도덕적인 더러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행동으로 여호수아의 죄가 깨끗이 씻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의롭다 하심, 곧 재판장이 어떤 이에게 의롭다거나 그 죄를 용서한다는 선고를 묘사하는 것이다. 의롭다 함은 죄에 대한 처벌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죄사함의 행위가 오직 여호와 한분 만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구속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교훈: 사단이 우리의 죄를 들추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할지라도 죄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는 없다.
부가적용)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사단은 형제들의 송사자로서 주야로 예수님 앞에 서 있다. 사단은 교묘한 능력으로 인간 품성 중 비난할 만한 특성을 들춰내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호하시는 권능을 철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죄를 범한 자들을 낙망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위하여 속죄하셨다. 우리의 중보자께서 “사단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2절)고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는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3절). 교묘하고 기만적인 권능으로써 그들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원수 앞에는 죄인들이 그같이 보인다. 원수는 유혹에 굴복한 자들에게 죄와 수치의 옷을 입힌다. 그러고는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한 빛이요, 옹호자가 되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 …내가 그의 죄를 제거하였다. 내가 그의 죄악을 덮을 것이다. 더러운 옷들은 벗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4절)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이다. 그 죄악은 죄 없고 순결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옮겨진 바 되었다. 아무 가치 없는 그 사람은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의로 옷 입고 여호와 앞에 서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옷의 얼마나 큰 변화인가. 그분께서는 모든 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베틀로 짠 의의 두루마기를 입히신다. …우리는 하늘 가족으로 입양되어,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처소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하나님께 고소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볼 때, 성결해야 할 대제사장의 의복이 더러워져 사단의 송사가 너무 합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불에 그슬린 나무와 같아서, 망해버려서 더 나무랄 것이 없는 존재로 드러나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성 안에서 생명 같은 여호와께 성결마저 무너진 모습으로 드러났기에 그것을 용서하고 회복케 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마음, 곧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성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말씀을 본다. 사단이라는 존재는 분명,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이기에, 사람의 어떠함에 대하여 이김이 있고, 그를 송사하는 검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무섭고, 예리하고, 공평한 송사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 모든 합리성을 뛰어 넘어, 아버지로서의 품성으로 여호수아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대하면서,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성의 안목에 대하여 재고해 본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길을 예비하셨음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고난의 풀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이 붙여 놓은 불꽃 속에서 거의 소멸당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건져 내기 위하여 손을 펴셨다.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겸비해지면, 인자하신 구주께서는 그들을 이교도의 잔인한 세력에 맡겨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사 42:3)”(증언보감 2권, 171).
셋째날(화)
5월 24일 여호와의 천사
도입)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늘보좌 앞에서의 모습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있고 그 앞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고 그 옆에 사단이 서서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선 것이다. 비록 땅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지라도 그 순간 그는 하늘에 섰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 우리는 땅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하지만 하늘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와 찬미, 헌신 봉사 충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신전의식,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대제사장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 앞이다. 이처럼 더럽고 불쌍한 우리는 오직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언약의 사자인 주 예수님 앞에 있을 때 그를 통해 드려진 우리의 기도는 그의 기도 속에 싸여 하나님께 열납되게 된다. 우리의 찬양 또한 그리스도의 정원에서 따온 몰약, 침향, 육계와 함께 묶여 있어야 달콤한 향내를 낼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께 갖다 드릴 수 있는 것이 오직 눈물뿐이라면 주님은 그 눈물을 자신의 눈물 단지 속에 넣어 그의 눈물(그리스도도 우신 적이 있으므로)과 한데 섞으실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께 갖다 드릴 수 있는 것이 오직 신음과 한숨 소리뿐이라면 주님은 그것도 제물로 열납해 주실 것이다. 그도 한때 마음이 상하여 그 영으로 심히 탄식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교훈: 사단은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우리를 고소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과 의를 믿는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
부가적용)
스가랴 선지자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옷은 깨끗하고 화려하게 입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는 말이다. 죄와 부패함을 말한 것이다. 또한 죄와 부패로 더러워진 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그리고 이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 벗겨지고 아름다운 옷이 입혀졌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요청, 기도대로 정한 관이 씌워졌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사죄와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우리의 변호자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의 비난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죄로 물든 옷을 입은 채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러나 우리의 대변자 예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자기의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당신께 맡기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렬히 탄원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변호하시고 갈바리의 힘 있는 논증으로 그들의 참소자를 이기신다”(선지자와 왕, 586).
넷째날(수)
5월 25일 옷을 갈아입음
도입)
옛날에 한 왕이 있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 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 번씩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가랴 3장에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본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한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5).
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벗기시고 의의 옷을 입힌 후에, 그분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신다.
부가적용)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했다.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3절에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이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한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온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했다.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인가?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한다.
•영감의 교훈 •
▶ 믿음으로 의롭게 됨
“믿는 영혼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풍성한 은혜가 마련되었으며 온 하늘과 하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셨다.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다섯째날(목)
5월 26일 “효과적인 탄원”
도입)
남자와 여자가 이생에서 축복을 얻고 또 그들이 신앙을 행사하고, 회개하고 또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최선의 노력을 행한 이후에 영생 및 성령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힘이다. 신성한 도움 또는 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주어진다. 필멸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과 또한 사람의 약함 때문에 신성한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행한 어떤 선행이나 선을 행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행하고 우리가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며 희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죄악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크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긍휼하심을 감사드리며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는 자주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 스가랴의 기별은 선행이 과연 구원에 얼마나 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 많은 상태를 깨닫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와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구속으로 신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단의 비난에 대답할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탄원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공로에 근거된 것이 아닌 그분 자신의 공로에 근거된 논증을 가지고 비난자를 침묵케 하실 수 있다.”(교회증언 5권, 472).
교훈: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은 죄를 이기기 위해 약속받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여호수아가 자신을 정결하고 순결케 하는 데 무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주권적으로 시중드는 천사에게 대제사장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라는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 더러워진 옷을 벗기는 것은 (3:4)에 언급된 옷을 입히심과 함께 용서, 용납, 그리고 특권 위치에로의 회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것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나타낸다. 이 상징은 (사 61:10)에서 인용한 듯하다. 스가랴는 그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동안,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여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고 제사장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는 자신의 열망과 기도를 표명한다. 대제사장의 관, 혹은 터어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진 정금의 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절차와 은혜를 지켜보면서 그 곁에 서 있었다.
•영감의 교훈 •
▶ 굴복하지 말라
“우리는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신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그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행할 유혹을 받을 때에는 사단을 대항하며 나는 나의 의지를 너의 지배에 굴복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라. 나는 거룩한 능력과 협력하며 은혜를 통하여 승리자가
되리라고 말하라”(가려 뽑은 기별 3권, 195).
예비일(금)
5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852~853, 선지자와 왕, 582~592 “여호수아와 천사”, 실물교훈, 169~170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교회증언 5권, 467~476 “여호수아와 천사.”
“사단이 흑암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덮어서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신다. 비록 그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에서 나무 조각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인류를 끄집어내셨다. 그는 당신의 인성으로써 사람과 연결되셨고, 당신의 신성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과 일체가 되신다. 그분의 도움은 죽어가는 영혼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놓여진다. 대적 사단은 책망을 받는다.…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돌보심의 대상인 그들을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그들의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그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히시며 하늘 책에 적힌 그들의 이름 아래 용서하였다고 기록하신다”(실물교훈, 169~17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순종에 대한 명령이 옷을 바꿔 입은 이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와 구원의 결과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왜 구원의 기초와 구원의 결과를 항상 구분해야 합니까?
➋우리의 옷이 얼마나 더러운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옷이 주어졌다는 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당신의 생활에 있어서, 당신의 태도에 있어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5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4분
도입)
루이스 베일리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매일 식사기도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옷을 입을 때는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 베일리는 아침마다 옷을 입으면서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아침에 눈을 딱 뜨면 ‘하나님! 언젠가 이렇게 눈을 뜨는 게 이 세상에서는 끝날 텐데 그 날에는 내가 주님의 나라에서 눈 뜨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땅을 위해서만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옷을 입었단다. 옷을 입으면서 ‘하나님! 나 같이 이런 못난 인간에게 입을 수 있는 의복을 나에게 재산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생활할 수 있도록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감추는 것처럼 하나님 오늘 하루 몸의 의복은 내가 입었으나 나의 행실의 옷을 주님의 은혜로 덧입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복입니다.’ 고백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오늘 우리의 매일의 삶이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복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기억절 :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결론: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은 채 법정에 서서 그의 모든 죄로 인하여 고소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그에게 형을 언도하는 대신 그의 더러운 옷을 제거하고 정결한 옷을 입힌 뒤에 순종하도록 이끌었다.
첫째날(일)
5월 22일 예루살렘을 향한 질투
도입)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가 말년에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어떤 교우가 스펄젼을 방문해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라고 물었을 때 스펄전 목사는 대답했다. “예, 너무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이 고통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계신답니다. 이것이 나의 위로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물론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시련은 시련이고 고난은 고난이다. 고난이 다 지나고 난 후에 아무리 빛나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더라도 현재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고난 속에 있을 때 반드시 찾아오신다. 스펄젼 목사의 고백처럼 주님은 고통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고난의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에 대한 이상이 주어지기 바로 전에, 스가랴는 유대인들에게 전할 약속의 기별을 받았다(슥 2:10~13).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래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기별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연합할 때에 분명 큰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유다 자손들이 회개하여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재건하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셨다.
부가적용)
보통 여자들이 질투가 많다고 말하지만 사실 남자들의 질투가 더 강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질투는 누구 못지않게 가장 강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질투, 또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 자체가 낯설지도 모른다. 아마도 질투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질투는 결코 부정적인 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로 불러내시고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신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시니라’ 당신이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시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시기와 질투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시기와 질투 이 두 단어는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차이는 동기에 있다. 시기는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을 말한다. 시기란 시기할 ‘시’(猜), 꺼릴 ‘기’(忌) 로서 남이 가진 행복이나 성공, 재산이나 명성에 대하여 악의적인 부러움과 더불어 반감과 그리고 악의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나에게 대한 극진한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여호와만 섬기라고 외치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고 애절할 정도로 계속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얘기를 계속 반복한다. 이 모두가 목숨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영감의 교훈 •
▶ 위로의 기별
“학개의 마지막 기별이 전달된 지 두 달 후에 스가랴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받았다. …지도자들에게는 마치 재건을 위하여 유대인에게 주어진 허락이 취소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고 장래가 매우 어두운 것처럼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무한하신 동정과 사랑의 계시로 지지와 위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다”(선지자와 왕, 580).
둘째날(월)
5월 23일 원고와 피고
도입)
사단이란 이름은 선지서에서는 오직 스가랴 3:1-2에만 등장한다. 사단은 성경에서 귀신으로 불리우는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이다. 하늘의 법정에서 사단은 여호수아의 우편에서 서서 그를 대적한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한다. 이 환상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여호수아의 위치이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다. 서 있다 라는 단어는 제사장의 직무를 나타내는 기술적인 용어이다. 여호와의 사자의 신성과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암시했던 것이 여기서 보다 분명히 지적될 수 있다. 그는 여호와의 명칭(He)으로 말하면서 사단에게 말할 때 여호와와 구분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단은 여호와께서 개입하시자 맹렬하게 여호수아를 고소했다. 여호수아의 변호사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재판장이기도 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다. 사단의 고소의 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부정함, 곧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환상 가운데서 천사들에게 죄를 사하는 것의 상징으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제하여 버리라고 명하셨다. 이 더러운 옷은 예식과 관련된 더러움이 아니라 도덕적인 더러움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 행동으로 여호수아의 죄가 깨끗이 씻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의롭다 하심, 곧 재판장이 어떤 이에게 의롭다거나 그 죄를 용서한다는 선고를 묘사하는 것이다. 의롭다 함은 죄에 대한 처벌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죄사함의 행위가 오직 여호와 한분 만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구속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교훈: 사단이 우리의 죄를 들추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할지라도 죄를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는 없다.
부가적용)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사단은 형제들의 송사자로서 주야로 예수님 앞에 서 있다. 사단은 교묘한 능력으로 인간 품성 중 비난할 만한 특성을 들춰내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호하시는 권능을 철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죄를 범한 자들을 낙망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위하여 속죄하셨다. 우리의 중보자께서 “사단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2절)고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들을 수 있는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3절). 교묘하고 기만적인 권능으로써 그들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 원수 앞에는 죄인들이 그같이 보인다. 원수는 유혹에 굴복한 자들에게 죄와 수치의 옷을 입힌다. 그러고는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한 빛이요, 옹호자가 되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 …내가 그의 죄를 제거하였다. 내가 그의 죄악을 덮을 것이다. 더러운 옷들은 벗김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4절)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이다. 그 죄악은 죄 없고 순결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옮겨진 바 되었다. 아무 가치 없는 그 사람은 모든 불의에서 깨끗함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부여한 의로 옷 입고 여호와 앞에 서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옷의 얼마나 큰 변화인가. 그분께서는 모든 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베틀로 짠 의의 두루마기를 입히신다. …우리는 하늘 가족으로 입양되어,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처소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하나님께 고소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 볼 때, 성결해야 할 대제사장의 의복이 더러워져 사단의 송사가 너무 합당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불에 그슬린 나무와 같아서, 망해버려서 더 나무랄 것이 없는 존재로 드러나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성 안에서 생명 같은 여호와께 성결마저 무너진 모습으로 드러났기에 그것을 용서하고 회복케 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마음, 곧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성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말씀을 본다. 사단이라는 존재는 분명,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이기에, 사람의 어떠함에 대하여 이김이 있고, 그를 송사하는 검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무섭고, 예리하고, 공평한 송사자일 수밖에 없지만, 그 모든 합리성을 뛰어 넘어, 아버지로서의 품성으로 여호수아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대하면서,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성의 안목에 대하여 재고해 본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길을 예비하셨음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고난의 풀무 속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이 붙여 놓은 불꽃 속에서 거의 소멸당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건져 내기 위하여 손을 펴셨다. 당신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겸비해지면, 인자하신 구주께서는 그들을 이교도의 잔인한 세력에 맡겨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사 42:3)”(증언보감 2권, 171).
셋째날(화)
5월 24일 여호와의 천사
도입)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늘보좌 앞에서의 모습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있고 그 앞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고 그 옆에 사단이 서서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선 것이다. 비록 땅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지라도 그 순간 그는 하늘에 섰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 우리는 땅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하지만 하늘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와 찬미, 헌신 봉사 충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신전의식,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대제사장이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 앞이다. 이처럼 더럽고 불쌍한 우리는 오직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언약의 사자인 주 예수님 앞에 있을 때 그를 통해 드려진 우리의 기도는 그의 기도 속에 싸여 하나님께 열납되게 된다. 우리의 찬양 또한 그리스도의 정원에서 따온 몰약, 침향, 육계와 함께 묶여 있어야 달콤한 향내를 낼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께 갖다 드릴 수 있는 것이 오직 눈물뿐이라면 주님은 그 눈물을 자신의 눈물 단지 속에 넣어 그의 눈물(그리스도도 우신 적이 있으므로)과 한데 섞으실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께 갖다 드릴 수 있는 것이 오직 신음과 한숨 소리뿐이라면 주님은 그것도 제물로 열납해 주실 것이다. 그도 한때 마음이 상하여 그 영으로 심히 탄식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교훈: 사단은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우리를 고소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과 의를 믿는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
부가적용)
스가랴 선지자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옷은 깨끗하고 화려하게 입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는 말이다. 죄와 부패함을 말한 것이다. 또한 죄와 부패로 더러워진 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그리고 이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 벗겨지고 아름다운 옷이 입혀졌다. 그리고 스가랴 선지자의 요청, 기도대로 정한 관이 씌워졌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사죄와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우리의 변호자 예수 그리스도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의 비난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죄로 물든 옷을 입은 채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러나 우리의 대변자 예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자기의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당신께 맡기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렬히 탄원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변호하시고 갈바리의 힘 있는 논증으로 그들의 참소자를 이기신다”(선지자와 왕, 586).
넷째날(수)
5월 25일 옷을 갈아입음
도입)
옛날에 한 왕이 있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 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 번씩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가랴 3장에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모습을 본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한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슥 3:5).
교훈: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벗기시고 의의 옷을 입힌 후에, 그분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신다.
부가적용)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했다.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3절에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이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한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온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했다.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인가?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 그렇지 않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한다.
•영감의 교훈 •
▶ 믿음으로 의롭게 됨
“믿는 영혼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풍성한 은혜가 마련되었으며 온 하늘과 하늘의 무한한 자원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셨다. 우리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우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히시므로 우리들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며 의인들처럼 취급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94).
다섯째날(목)
5월 26일 “효과적인 탄원”
도입)
남자와 여자가 이생에서 축복을 얻고 또 그들이 신앙을 행사하고, 회개하고 또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최선의 노력을 행한 이후에 영생 및 성령을 얻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힘이다. 신성한 도움 또는 힘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통하여 주어진다. 필멸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과 또한 사람의 약함 때문에 신성한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행한 어떤 선행이나 선을 행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행하고 우리가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며 희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죄악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주홍 같이 붉은 죄가 크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긍휼하심을 감사드리며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는 자주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 스가랴의 기별은 선행이 과연 구원에 얼마나 또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 많은 상태를 깨닫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와 우리의 거룩함과 우리의 구속으로 신뢰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단의 비난에 대답할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탄원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공로에 근거된 것이 아닌 그분 자신의 공로에 근거된 논증을 가지고 비난자를 침묵케 하실 수 있다.”(교회증언 5권, 472).
교훈: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들은 죄를 이기기 위해 약속받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여호수아가 자신을 정결하고 순결케 하는 데 무력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주권적으로 시중드는 천사에게 대제사장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사역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이라는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나타난다. 더러워진 옷을 벗기는 것은 (3:4)에 언급된 옷을 입히심과 함께 용서, 용납, 그리고 특권 위치에로의 회복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 것은 제사장직의 회복을 나타낸다. 이 상징은 (사 61:10)에서 인용한 듯하다. 스가랴는 그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동안,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여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고 제사장의 옷을 입히시기를 원하는 자신의 열망과 기도를 표명한다. 대제사장의 관, 혹은 터어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이 새겨진 정금의 패가 부착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절차와 은혜를 지켜보면서 그 곁에 서 있었다.
•영감의 교훈 •
▶ 굴복하지 말라
“우리는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신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그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행할 유혹을 받을 때에는 사단을 대항하며 나는 나의 의지를 너의 지배에 굴복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라. 나는 거룩한 능력과 협력하며 은혜를 통하여 승리자가
되리라고 말하라”(가려 뽑은 기별 3권, 195).
예비일(금)
5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재림교회 성경주석 8권, 852~853, 선지자와 왕, 582~592 “여호수아와 천사”, 실물교훈, 169~170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교회증언 5권, 467~476 “여호수아와 천사.”
“사단이 흑암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덮어서 그들을 멸망시키고자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신다. 비록 그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에서 나무 조각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인류를 끄집어내셨다. 그는 당신의 인성으로써 사람과 연결되셨고, 당신의 신성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과 일체가 되신다. 그분의 도움은 죽어가는 영혼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놓여진다. 대적 사단은 책망을 받는다.…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결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돌보심의 대상인 그들을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그분에게는 그들의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는 그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당신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히시며 하늘 책에 적힌 그들의 이름 아래 용서하였다고 기록하신다”(실물교훈, 169~17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순종에 대한 명령이 옷을 바꿔 입은 이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기초와 구원의 결과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왜 구원의 기초와 구원의 결과를 항상 구분해야 합니까?
➋우리의 옷이 얼마나 더러운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옷이 주어졌다는 복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당신의 생활에 있어서, 당신의 태도에 있어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보는 방법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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