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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아름다운 옷

5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9분

도입)
사람들이 입는 의복은 개인의 인품, 신분, 지위 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거룩한 중보자로서 직책을 맡은 제사장에게는 의복에 관한 상당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규례가 구약시대에는 주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도 거룩하여야 했기에 구별된 거룩한 옷을 입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거룩할 수 없으나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는 제사장에게는 거룩하다는 표로서 특별한 복장이 필요하였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씀 하였으니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과 직접 교제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 졌는데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의 옷, 의의 옷은 하나님은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입히신 옷이다. 구원의 옷과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구원의 기쁨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성품이 변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즐거워하는 것이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수 있는 이유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들어진 의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기억절 :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결론: 이 세상의 옷은 다 해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옷은 영원한 기쁨과 찬양과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따라서 그분이 주시는 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의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첫째날(일)
5월 15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도입)
유다의 여자들이 그 당시의 사치의 절정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 3:18~23에 열거된 장식품의 종류를 보면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을 때, 부유한 시온의 부녀들은 축적된 부(富)를 이용하여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식품들로 몸을 가꾸었음을 이상의 목록들에서 알 수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의 부인네들이 받은 밍크 옷과 사치스러운 옷 때문에 온 나라가 술렁인 적이 있었다.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얻은 돈과 재물을 사치에 쏟는 지도자들의 부인들을 질타한 적이 있다. 그런데 바로 유대의 나라도 지도자들의 부인들이 이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내면의 덕(벧전 3:3, 4)은 가꾸지 않고 오직 외모를 꾸미는 일에 빠질 수 있다. 사치스럽게 외면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내면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 마음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하지만 겉모양의 아름다움을 꾸미는 일은 그 아름다움이 지극히 짧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땅의 백성들처럼 점점 그 사치를 배워가고 있다.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사 3:18~23).

이사야서는 남방 유다의 암울한 영적 상태를 그리며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자 출애굽 세대의 후손들은 안일함에 빠졌다. 그들이 출애굽의 기적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우리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왜 우리에게 연관시켜야 하는가?”라고 질문하게 됐다는 것이다.

교훈: 유다 백성들에게 신앙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영적인 의복보다는 세상의 의복과 치장에 관심이 더 많았다.

부가적용)
유다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에만 관심이 높았다. 자신의 주변에 가난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방치한 채, 자신들의 삶에만 관심이 있었다. 오직 관심이 자신에게로만 쏟게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지나친 사치와 지나친 외모 꾸미기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며, 또한 그들의 방정하지 못한 문란한 성생활은 또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다. 유다의 백성들도 이런 세상의 유혹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큰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전쟁을 통해 남자들이 죽게 되고 남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가 되도록 하시겠다고 예언하고 있다. 너희 장정(壯丁)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戰亂)에 망할 것이며- 앞 절에서 암시되었던 상황이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전쟁에서 잃는 것은 장식품들만이 아니다. 그들의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은 과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도를 넘는 유다의 여자들의 사치와 정욕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려주고 있다. 도를 넘는 사치와 타락! 그리고 교만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되는 죄악임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란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희생이라도 하고자 하나, 그들이 해야 할 바로 그 희생, 곧 자아를 굴복시키고,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희생은 하지 않는다”(증언보감 1권, 473).

둘째날(월)
5월 16일 부정한 입술

도입)
어떤 획기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인생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 이런 것은 참으로 인생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배경으로 이사야는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되는 아주 아름답고 큰 교훈을 주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보좌를 본 그는 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을 비교하여 볼 때 자신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운지를 깨달았다. 이사야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배경으로 이사야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숯을 입에 대는 상징적인 행동은 회심의 진정성을 나타낸다. 이제 이사야는 정결케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그의 말 속에서 회심의 열매가 드러났다(사 6:8). 죄가 제거된 것을 알고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와 거룩함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전진하였다.

교훈: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고 거룩한 부르심을 입었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된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의적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고백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동안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백성들의 거짓을 비난하였던 자신의 입술을 볼 때 자신도 죄 중에 함께 거했던 죄인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질 육체가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 말할 수 있는 육체가 없음을 깨닫고 그는 이제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고 여길만한 육체가 없으며 그 어떤 사람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죄인들임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발견해야 할 참되고 진정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절망적인 모습이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하고 부족한 절망적인 모습을 볼 때서야 인간이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회개로 이끄는 근심
“성령 외에 누가 마음에 의의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며 죄를 확신하게 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거룩한 근심을 일으키며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도록 고취하겠는가?”(가려 뽑은 기별 3권, 137).

셋째날(화)
5월 17일 오래 가지 않을 옷

도입)
몇 년 전에 한국인 2세 아이가 미국 SAT(미국 대입학력고사)시험을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그래서 당연히 지원한 학교가 하버드였다. 그런데 떨어졌다. 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버드 총장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우리 아이가 떨어진 것을 납득이 가게 설명해 달라고 당당하게 보냈다. 부모님들의 생각은 SAT에 수석을 차지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다. "이 아이가 우리 학교를 나와서 인류와 미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 학생이 지금까지 봉사한 경력이나 또 그런 봉사를 하겠다는 사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점수는 부족해도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겠다는 신념이 분명하면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학교를 2학년 다니다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세운 빌게이츠도 얼마나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사는가. 정신이 있는 것이다. 함께 사는 정신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봉사하려는 남을 위해 살려는 희생과 봉사 없이 자본주의만 배우면 안된다. 모든 만물이 옷의 해어짐 같이 변할 것이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분의 의를 배워야 한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사 51:6~8).

이미 살펴본 대로 이사야는 상당 시간을 심판에 대한 경고에 할애했으나,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약속을 항상 잊지 않았다. 이사야는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한 후에 역경의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많은 예들은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말했다.
사 51:6~8을 읽어보라. 옷은 얼마나 쉽게 빨리 해어지는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비싸고 질 좋은 옷도 해어진다.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백성들에 대한 얼마나 적절한 예인가? 우리도 신속히 사라질지 모른다. 야고보는 우리를 “안개”와 같다고 표현했다(약 4:14). 영국 웨일즈의 시인인 딜런 토머스(Dylan Thomas)는 임종을 앞둔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냥 고이 잠들지 마세요… 빛의 사멸에 분노, 분노하세요.”라고 종용했다. 우리도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머지않아 옷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의, 영원한 구원을 주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두 갈래의 선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파멸과 영원한 죽음 아니면 “옷과 같이 해어지”지 않을 영생이다(사 51:6). 아담과 하와의 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모든 인류는 결국 둘 중에 하나를 맞이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배타적이다.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우리의 선택은 어느 쪽이 될 것인가?

교훈: 이 세상은 닳아 해어지는 옷처럼 사라질 것이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의를 아는 백성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부가적용)
하버드대학교는 1638년 여름에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단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버드라는 이름은 마치 삭개오처럼 자기의 책과 재산의 절반을 대학에 기증한 청교도교회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이다. 19세기 초 신학대학·법과대학·의과대학으로 개설된 학교이다. 하버드 대학교는 청교도 목사에 의해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이다. 그래서 이 학교는 전통이 있다. 학교의 철학이 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배우기보다는 다 배울 필요가 있다. 첫째 '신학'이다.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다른 것 다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끝난다.하나님께서...“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고 하셨다. 그 다음에는 '법학'이다. '법'이 무너지면 무법천지가 된다. 미국 서부에서 얼마나 총질을 해댔는가? 심심하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도적질에 살인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법을 가르쳤다. 그 법은 십계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슨 돈 벌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법이 아니다.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법이 나가는 것이다. 시작이 하나님이라야 한다.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로가 만든 법이 아니고 공산당이 만든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학'이다. 고통과 아픔에서 구하는 의학이다. 이 세 가지 학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했다. 오바마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 민간기업에서 잠시 근무 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 된 시카고에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 등 지역의 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주목할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법을 모르니 도와줄 한계를 느끼고 하버드 법대를 들어가서 공부했다. 하버드학교에서는 꼭 면접을 본다. 학생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 때 제일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하고 인류와 미국을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할 사람인가를 판단한다.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들을 법을 알아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했다. 하버드는 이런 사람 제일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의를 알고 있습니까? 그대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진리는 단지 문자에 불과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율법은 단지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생명이 되었고, 사랑이 되었고, 의가 되었으며, 새로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가운데 언젠가 사라질 것들과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 무엇인지 가려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
▶ 율법의 영속성
“하늘에서 빛을 비추는 태양, 그대가 살고 있는 견고한 땅은 하나님의 율법이 불변이요 영원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분의 증인이다. 그것들이 비록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308).

•기도 •
주님, 저는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소서. 제 눈을 열어서 영원한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의와 진리를 알게 하소서.

넷째날(수)
5월 18일 아름다운 옷

도입)
성경에서는 우리가 입는 옷차림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특별히 제사장들의 옷은 아주 까다롭게 규정하였다. 그리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아담하고 단아하게 입도록 권고하고 있다. 아간은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전리품인 옷을 훔쳤다. 아람 왕의 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이 낫고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거짓으로 속여 옷 두벌을 받아와 나아만의 병이 게하시에게 들었다. 옷 때문에 시험을 받은 사건들이다. 예수를 믿어도 옷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힘든다. 사람들에게 의복은 항상 염려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다운 옷의 영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외모도 그리스도인 다운 영성이 있어야 한다. 팔레스타인의 백성들의 옷의 개념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은 밤낮의 기온 차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옷은 이불의 대용이었으며 그들에게 두 벌 옷을 허용하지 않았다. 성경은 의복을 준비하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의복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셨다. 지나치게 사치한 의복은 하나님의 나라에 해가 되며 사회에도 덕이 되지를 못한다. 옷에 대한 욕심은 죄를 낳는다. 아간의 죄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아간이 갖게 된 옷에 대한 욕심은 죄를 낳았고 범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마음에 갖고 싶은 욕심을 채우려고 무리하다 결국 죄를 짓는 것이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사 52:1).

구약 성경에서 비관적인 미래에 대한 경고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이점을 지적하며 “어느 누가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겠는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원하는 부분만 읽어서 생기는 오해이다. 경고의 기별에는 언제나 심판을 피할 길이 제시된다. 반역과 불순종은 분명 멸망을 가져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그렇게 되지 말도록 호소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한다면, 구원과 의와 평안의 길이 열린다.
사 52장을 읽어보라. 백성들이 입어야 하는 “아름다운 옷”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백성들을 회개와 순종과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옷”은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자들이 입게 될 의의 옷이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분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사야 52장의 끝과 53장의 시작은 흥미롭게 맞물려 있다. 이사야는 52장에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초청한 다음, 53장에서 인류로 하여금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한 바로 그 사건 즉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만이 죄로 인한 멸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3).
이 말씀에서 구원은 사거나 획득할 수 없는 선물임이 암시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옷같이 낡아 없어질 가치 없는 세상의 사물을 얻기 위하여 영혼을 팔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의 방편을 사거나 얻지 못하는 처지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놀라운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교훈: 낡아 없어질 세상의 옷에 집착하여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마련한 아름다운 의의 옷을 입으라고 초청하신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 남은 백성들의 모습에서 참된 영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소박하고 겸손하게 사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눈은 영광의 눈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눈은 죄를 참지 못하신다. 유다 백성들의 죄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인간이 지닌 양심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색이 그들 마음의 본성과 행위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다의 그러한 패역함에는 지도자들의 어리석은 판단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아이와 힘없는 부녀들처럼 무지하고 무능한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을 어리석은 길로 유혹하고 인도했다(12절). 그들의 죄는 오늘날 지도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부정부패 그 자체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권력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권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섬김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영광을 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으로 그들을 살피시며 심판의 때에 내리치실 칼을 갈고 계셨다. 죄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여 회개할 줄 아는 영적인 민감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라다. 유대의 백성들이 죄에 오염된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이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구원이 헛되지 않도록 크신 구원을 기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의의 옷
“만일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심령과 연합되었다면, 우리는 그분의 의로 옷 입기를 지극히 열망하게 될 것이다. 주의를 끌거나 논쟁을 일으킬 만한 것은 아무것도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130).

다섯째날(목)
5월 19일 구원의 옷

도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셨는데, 이것은 입혀주신 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하시는 의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불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때에 아담이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은 창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신 것처럼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아담의 허물을 가려주기 위하여 한 마리의 짐승이 죽었다. 여기서 흠 없는 어린 양이 대신하여 죽고, 구원하여 주시는 구속의 원리를 제시해 주신 것이다. 스가랴3:4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다. 옛날에 옷이란 신분을 나타내주었다. 이제는 종의 누더기를 벗기고, 아들의 옷을 내어다 입혀주셨다. 탕자의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혀주셨다. 그것은 아들로 받아준다는 말이다. 우리는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다. 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 들어가는데, 아름다운 예복을 입혀준다.  천국에 들어갈 때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하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을 입혀주시고 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준비하신 섭리는 완전하며 모든 믿는 영혼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를 입혀 주신다. 하늘의 베틀로 짠 값지고 흠 없는 두루마기는 회개하고 믿는 죄인을 위하여 준비되었으며 그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사 61:10) 실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394).
“사모(紗帽)를 쓰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제사장의 일을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구원의 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 역할을 하리라는 새 언약에 관한 예언이다. 그들의 역할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 또는 예수님과는 같은 중보자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사모는 화관(花冠)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교훈: 믿음으로 구원의 옷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과 봉사자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부가적용)
이사야 62:3-4에는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라고 하셨다. ‘헵시바’라는 말은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이고, “쁄라”라는 말은 “결혼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옷을 입고 나오는 우리를 신부와 같이 여겨주신다고 하셨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받아주시고 있다. 사62:5에서 “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라고 하셨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성숙한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는 예수님이 심겨졌다. 의롭게 살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느헤미야8:10에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고 하셨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이름을 높이고 찬송해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주시고, 의의 겉옷을 덧 입혀주셨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를 기쁘게 영접하시고 사랑해주셨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완전하게 준비되었음
“잔치 곧 하늘 잔치를 준비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지 않으신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실물교훈, 317).

예비일(금)
5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실물교훈, 206, 210 “탕자”, 선지자와 왕, 668 “하나님의 율법을 배움”, 시대의 소망, 754 “갈바리”, 각 시대의 대쟁투, 460 “안식일 회복 운동.”

“흰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이것은 정말로 하늘의 직물로 짠 옷이며, 자발적인 순종의 삶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살 수 있는 것이다”(교회증언 4권, 8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바른 예배 형식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배 자체가 문제입니까? 아니면 예배자들의 삶이 문제입니까?
➋“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의 약속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➌델모어 슈왈츠 (Delmore Schwartz)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밤사이 내린 폭설로 도시 곳곳에 아름다운 설상(雪像)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온 도시가 얼어붙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일을 멈추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주는 듯한 설상(雪像)을 응시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 날 밤 내린 비 때문에 다음날 모든 설상(雪像)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자 주인공은 열차에 뛰어들어 죽습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우리가 이 땅에 거는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세상으로부터 실망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으로부터 배운 교훈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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